추웠다. 2012년 12월19일. ‘대선 한파’였다. 바람까지 쌩쌩 불었다. 그러나 ‘투표 바람’이 더 강했다. 투표소마다 사람들이 줄지어 섰다. 김무성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은 당원들에게 긴급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비상입니다. 투표율이 심상치 않게 높습니다. TV 방송에서도 예전과 달리 투표 독려 방송을 강하게 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지지층을 투표케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비상한 각오로 임해주십시오.” 투표율이 높은 걸 걱정하는 한심한 보수였다. 오후의 긴 줄에는 중·장년층이 많았다. 트위터에는 “투표율이 77% 넘으면 말춤은 (약속대로) 문재인이 추고, 당선은 박근혜가 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떠돌았다. 최종 투표율 75.8%. 예상을 뛰어넘는 수치였다. 승자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였다. ‘투표율이 높으면 야당에 유리하다’는 속설은 깨졌다.
50대 투표율 89.9%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두 가지 요인이 꼽힌다. 첫째는 인구 구성의 변화다. 10년 전 유권자 절반(48.3%)을 차지하던 30대 이하 비중은 38.2%로 줄었다. 반면 3분의 1 수준(29.3%)이던 50대 이상 유권자는 40%로 늘었다. ‘고령층 다수 사회’가 된 것이다. 특히 50대는 가장 많이 늘었고(325만 명 증가) 가장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했다. 방송 3사 출구조사에서 50대의 예상 투표율은 89.9%에 달한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정말로 예상할 수 없는 수치”라고 말했다. 이들의 62.5%가 박 후보를 지지했다. 2030세대의 투표율도 10년 전보다 5~8%포인트 높아졌지만, 박 후보 지지세가 강한 고령층의 결집이 더 셌다. 둘째 요인은 수도권의 변화다. 수도권 유권자는 전체의 절반이다. 대체로 야당 우위 지역이다. 그러나 경기·인천에서는 박 후보가 이겼다. 서울의 투표 결과(박근혜 48.2%, 문재인 51.4%)도 사실상 박 후보의 승리로 평가된다. 또다시 의문은 남는다. 50대는 왜 투표장에 몰려갔나? 수도권은 왜 여당 후보를 선택했나?
50대의 불안
2002년 대선은 세대 투표 현상이 처음 나타난 선거였다. 2030세대는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5060세대는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를 지지했다. 캐스팅보트는 40대가 쥐었다. 당시 출구조사를 보면 40대에서는 노무현 48.1%, 이회창 47.9%로 비슷했다. 40대가 보수를 더 지지하리란 예상을 뒤엎은 결과였다. ‘40대가 노무현을 당선시켰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이들이 지금의 50대다. 나이가들며 보수화한 것일까?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2010년 지방선거와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들은 보수 55, 진보 45 정도로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4월 총선 때부터 보수 쏠림 현상이 나타났다. ‘연령 효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들을 관통하는 열쇳말로 ‘불안’을 꼽았다.
50대는 불안했다. 은퇴를 했거나 곧 해야 하는 세대다. 자식은 취업이나 결혼 전후의 나이다. 부모를 모시는 경우도 많다. 노후가 불안했다. 이런 문제를 믿고 맡기기에 민주당은 불안해 보였다. 한귀영위원은 “누구를 더 지지하느냐보다는 누가 더 불안하지 않은가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박근혜는 믿음직하다. 약속을 지키려고 늘 애썼고 훈련이 잘됐다고 생각한다. 문재인은 사람도 좋고 깨끗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당이 너무 싫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청와대와 민주당이) 힘을 합쳐 일을 처리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서행준·58·제주)
산전수전 겪어온 50대에게 ‘현실성’은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50대는 자신과 자식 세대의 존재적 불안을 느끼고 있다. 이들은 사회생활을 할 만큼 한 사람들이라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같은 (야권의) 담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현실 가능성에 의문을 품은 것 같다. 결국 박 후보가 꺼내든 경제위기론, 성장론에 귀를 기울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윤희웅 실장은 “2030세대의 분노의 결집도 컸지만, 50대의 위기감의 결집이 강했다. 젊은세대가 지지하는 정권이 들어설 경우 자신들은 사회·경제적 정책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소외 의식이 작용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트위터 등 뉴미디어로 흡수할 수 있는 유권자는 2002년 대선 이후 ‘뉴커머’(newcomer)로, 연령대가 높아야 40대 중반까지다. 50대 이상 유권자는 많아졌는데, 이들은 ‘바람’으로 쉽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박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거부감
“안보가 중요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다 잘못했지만, 그것만큼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노무현은 우리나라도 힘든데 북한에 너무 많이 지원했다. 문재인도 북한을 돕겠다고 해서 싫었다. 세계적으로 경제가 불황이니까 성장은 크게 기대 안 한다. 더 나빠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라가 안정되는 게 어디냐.”(김경아·55·여)
안보 이슈는 50대의 불안감을 높이며 결집의 불쏘시개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50대에게는 경제 분야와 북한 문제를 포함한 안보 분야가 굉장히 중요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을 보며 실체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석연치 않게 받아들여 위기감이 높아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정희 효과’를 거론하기도 한다. 대선 토론회를 보며 젊은이들은 속 시원했을지 몰라도, 50대 이상 세대는 불안감을 느꼈다는 지적이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의 “박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는 발언에서 거부감을, “남쪽 정부”라는 표현에서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최병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은 페이스북에 “50대의 최대 관심사인 민생, 경제 문제에 대해 박근혜가 더 어필했다. 이들은 민주당과 문재인을 이념 세력으로 수용했다. 이정희 효과도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민주당의 50대 전략은 없거나 패착이었다. 박 후보가 이들에게 ‘신뢰와 약속’ ‘안정적 변화’ 이미지로 다가간 반면, 민주당은 이들의 불안감을 달래줄 정책도 정치도 작동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386세대 일부가 50대 초반으로 편입된 점을 강조하며 50대 득표율에서 ‘선방’할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민주당은 열린우리당 분당 이후 생활 공간에 밀착돼 목소리를 낼 조직을 갖지 못했다. 지방 조직은 다 잘려나가고 상층의 리더십 교체만 이뤄졌다. 새누리당은 뿌리 조직이 살아 있다. 동네마다 당원들이 일상적으로 떠들어준다. 트위터 등 뉴미디어로 흡수할 수 있는 유권자는 2002년 대선 이후 ‘뉴커머’(newcomer)로, 연령대가 높아야 40대 중반까지다. 50대 이상 유권자는 많아졌는데, 이들은 ‘바람’으로 쉽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치는 개인이 하는 게 아니라 세력이 하는 것임을 안다. 50대들은 지난 5년 동안 새누리당 조직의 목소리를 들었고, 민주당의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삶이 고단하고 바쁜 50대는 정책의 내용 차이보다는, 믿고 신뢰할 정치세력에 대한 기대가 더 컸을 것”이라며 “박 후보가 계속 문 후보의 정책에 대해 ‘미 투’(me, too) 전략을 펴는 상황에서, 불안해 보이고 설명도 안 해주는 민주당보다는 좀더 안정적인 세력에게 맡기는 편이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SNS 착시 현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착시 현상’이 이들의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요인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는 페이스북에서 “올해 총선과 대선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과 SNS에서 진보 성향 유권자들의 다소 과격한 표현 방식이 보수·중도 성향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위축되게 만들고, 그래서 그들의 의견이 실제보다 소수의 의견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이 있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도권은 갈수록 실용 정서가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박 후보는 하우스푸어 대책 등 중산층을 상대로 ‘욕망의 정치’를 재활용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런 새로운 욕구에 대한 고민 없이 바람에만 의존하려했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
달라진 수도권
수도권은 선거 때 ‘바람’이 부는 지역이다. 서울이 특히 그렇다. 이슈에 민감하고, 변화에 대한 수용성이 다른 지역보다 높은 곳으로 평가된다. 문 후보 캠프는 수도권에서 5%포인트 이상 격차를 벌려야 이긴다고 봤다. 4월 총선 때의 ‘여촌야도’ 현상이 어느 정도 되풀이될 것이라는 예상은 많았다. 고령층이 많은 지방에서는 박 후보를 따라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 후보는 영남과 충청·강원 등지에서 밀리는 표를 수도권에서 만회하기는커녕, 오히려 졌다. 서울에서 근소한 차이(3.2%포인트)로 앞선 것도 사실상 패배로 평가된다. 인천에서는 51.5% 대 48%, 경기에서는 50.4% 대 49.2%로 오히려 박 후보에 밀렸다. 문 후보는 부산·경남에서 39.9%라는 의미 있는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빛이 바랬다. 수도권 패배는 ‘중도’ 장악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민주당이 수도권에서는 관성처럼 이길 줄 알고 소홀히 한 것 같다. 수도권을 겨냥한 정책이 다가오는 게없었다.”(한 서울시민·50대·공무원)
수도권 유권자들은 ‘정치 혁신’보다는 ‘민생정치’에 더 무게를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도시 아파트가 많은 수도권에서는 상대적으로 ‘하우스푸어’ 같은 부동산정책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김민배 인천발전연구원장은 “유권자 상당수는 경제적 곤란함이 경제민주화보다 더 절박한 문제다. 민주당은 하우스푸어같이 유권자들의 피부에 와닿는 정책에 대해 아무대답도 내놓지 못했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 분석에 따르면, 하우스푸어는 전국 57만 가구로 추정되는데, 이 가운데 수도권에 33만9천 가구가 쏠려 있다. 윤희웅 실장은 “수도권은 갈수록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실용 정서가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박 후보는 하우스푸어 대책 등 중산층을 상대로 ‘욕망의 정치’를 재활용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런 새로운 욕구에 대한 고민 없이 바람에만 의존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수도권 유권자들의 변화 조짐은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바 있다. 많은 조사에서 인천·경기 지역은 근소하나마 박 후보를 더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한귀영 위원은 “인천·경기 여론조사에서 2%포인트 정도 박 후보가 우세한 게 일관된 흐름이었다. 민주당 처지에서는 이상하고 위험한 조짐이었는데, 민주당이 이 지역의 표심을 너무 안이하게 판단했다”고 말했다.
다투는 사이, 박 ‘민생이 바로 정치 혁신’
수도권 유권자들은 민주당이 내건 정치 혁신의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 전 후보와의 후보 단일화 과정이 껄끄러웠던데다, 민주당의 정치 혁신 ‘행동’은 잘 보이지 않고 정치적 메시지만 난무한 것에 등을 돌렸다는 얘기다. 12월21일치 <한겨레> 대담에서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중도층은 새정치가 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했을 것이다. 새정치공동선언을 내놨지만, ‘새 정치가 되면 뭐가 달라지겠구나’ 하는 느낌을 주기에는 부족했다. 민주당이 한 얘기는 박 후보도 할 수 있는 얘기였다”고 말했다. 정치평론가 박상병씨는 SBS 라디오 <서두원의 시사초점>에서 “야권은 쫓는 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기득권 내려놓기라는 승부수를 던질 것으로 기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문 후보가 나름 노력은 했지만 정말로 어떤 기득권을 내려놓는가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침묵했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박 후보는 민생 이미지를 꾸준히 심었다. 박 후보는 ‘70% 중산층 복원’ ‘민생 대통령’을 외쳤다. 신진욱 중앙대교수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문재인과 안철수가 서로 다투는 사이에 ‘민생이 바로 정치 혁신’이라고 치고 나간 건 바로 박근혜였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