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에 펼쳐진 민주주의 위기와 기회
2024년은 인류가 당분간 직면할 정치적 긴장, 사회적 갈등, 환경적 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해였다. 위기는 인류에게 도전과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다만 위기와 기회는 접점에서 만날 뿐 동시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2025년은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올해 지구촌 안보 위기의 중심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있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전쟁은 장기전 양상을 띠고 있다. 물론 오는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의 외교 정책 변화에 따라 이 전쟁의 향방이 크게 달라질 가능성은 있다.
트럼프는 과거 집권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협력 관계를 중시한 바 있다. 취임 후 외교적 협상을 통해 전쟁 종식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지만,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을 위험도 있다. 이는 서방 동맹국들과의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위기는 유럽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유럽 역시 복잡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트럼프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불신을 지속적으로 드러내 온 만큼, 방위비 부담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국방비 증액이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유럽은 미국이라는 우산 없이 독자적인 안보 노선을 모색할 수도 있다. 다만 현재 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불안정과 재정적 제약으로 단기적 성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변화 예고하는 중동
트럼프의 재집권은 중동 정세에도 중대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트럼프와의 강력한 관계를 바탕으로 더욱 공격적인 외교 및 군사 정책을 펼칠 가능성이 크다. 가자지구와 레바논을 넘어 시리아와 예멘까지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 확대될 여지가 충분하다.
현재 중동 정세는 이스라엘과 이란이 전 지역에서 대치하며 긴장을 고조시키는 형국이다. 이스라엘이 군사 활동을 벌이는 지역은 이란에 곧 최전선이 되고 있다. 하마스, 헤즈볼라, 시리아 알아사드 정권, 후티 반군 등 이란의 우방 세력은 올해 잇따라 위기를 맞았다.
이 와중에 트럼프의 취임은 알리 하메네이 체제에 악몽과도 같은 시나리오를 예고하며 이란이 더욱 고립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이란이 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이스라엘의 폭력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의 개방정책은 시의적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페제시키안 대통령이 이끄는 온건 개혁파 정권은 최근 메타의 메신저 왓츠앱과 구글의 앱 마켓 구글플레이 사용 금지를 해제하며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여성 복장 규제를 담은 히잡 의무법 시행을 보류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연이은 개방정책은 페제시키안 정권의 개혁성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누그러뜨리며 국제여론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외교정책에서도 이란의 고립을 탈피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미국과의 전통적인 동맹 관계에 약간 거리를 두고 있다. 이스라엘의 무분별한 전선 확대는 무슬림 세계의 두 패권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대화를 시도할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대만 문제는 2025년에도 국제 정세의 주요 화두로 남을 전망이다. 중국은 대만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지속할 가능성이 크고, 이에 맞서 미국과 동맹국들은 군사적 억제력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립은 동아시아 안보 환경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며, 지역적 갈등이 전 세계로 확산될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
극우 세력의 부상
정치적 양극화는 올해에도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20세기 초 극좌 세력의 부상이 정치 지형을 흔들었던 것처럼, 현재는 극우 세력의 부상이 새로운 도전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과거에는 계급 간 불평등 해소를 목표로 한 국제 연대가 정치 변화를 이끌었다면, 지금은 국가라는 무한 권력 기구를 중심으로 한 배타적 고립주의가 정치적 혼란을 심화시키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다수 국가에서 극우 세력이 집권하거나 세력을 확장하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극우 지향의 대통령 탄생이 더 가까워졌고, 영국에서는 극우 성향의 개혁당이 기존 보수당을 압도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극우 세력의 부상은 민족주의의 강화와 외국인 배척으로 이어지며, 국제적 연대와 협력을 약화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기후변화와 신종 감염병의 위협은 더 이상 미래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세대가 직면한 당면 과제로 떠올랐다. 2024년에도 대규모 자연재해가 잇따라 발생하며, 환경, 보건 문제가 인류 생존과 직결된 과제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이런 환경 위기 상황에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은 우려를 증폭시키기에 충분하다.
트럼프 당선인은 과거 대통령 재임 시절, 파리협약을 탈퇴했고, 탄소배출의 위험성에 대해 거짓 정보라고 몰아세웠으며, 코로나 위기 속에서 백신의 필요성을 음모론으로 치부했다. 환경문제에 소극적 대응을 넘어 적극적 방해의 길을 가는 사람이 유례없이 거대한 힘을 가진 나라의 대통령으로 복귀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가 보여준 힘
2025년을 앞둔 인류는 과연 이러한 위기들을 극복해 낼 수 있을까? 어떻게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을까? 암울한 2024년을 보내면서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보여준 힘과 잠재성이다. 상상을 초월한 악의 음모를 저지한 것은 다름이 아닌 조직된 시민의 힘이었다.
프랑스의 한국 정치 전문가 장 이브 콜랭(Jean-Yves Colin)은 "한국의 민주주의는 외세나 엘리트가 아닌 시민들의 저항을 통해 아래로부터 쟁취된 민주주의다"라고 말했다. 그러한 민주주의가 정치적 혼란에 익숙한 한국 국민들이 위기 때마다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힘으로 작용했다.
2024년에서 2025년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겨울은 어쩌면 세계가 겪는 민주주의 위기의 시험대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장 이브 콜랭은 지금의 한국이 겪는 위기는 1980년대 위기와는 비교할 수 없다면서 힘주어 말한다.
"현 사태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이자 잠재적 체제 위기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의 강인함과 위기 극복 능력을 입증하고 있기도 하다." < 오마이 임상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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