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뉴욕 항공 ‘알짜노선’

● WORLD 2014. 9. 11. 17:34 Posted by SisaHan
탑승객 많아‥ 서울~도쿄·제주 노선도 세계상위

항공사들이 결성한 민간 기구인 국제항공운송협회(IATA)가 최근 지난해 ‘세계 항공교통 통계’(World Air Transport Statistics)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항공편 탑승객은 31억 명에 달해 2012년에 비해 5.1% 증가했다.
 
작년에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한 국제선은 홍콩과 대만 타이베이를 오가는 구간이었다. 약 487만7천 명이 항공기를 타고 두 도시를 왕래했다. 그 뒤를 영국 런던-아일랜드 더블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싱가포르 노선이 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수도를 연결하는 서울-도쿄 노선은 4위를 차지했다. 탑승객 수는 2012년에 견줘 9.8% 감소한 약 327만2천 명이었다. 5위는 대서양을 사이에 둔 경제 중심지인 런던과 미국 뉴욕을 잇는 노선이었다. 이외에도 런던-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런던-이탈리아 밀라노, 도쿄-미국 호놀룰루, 뉴욕-캐나다 토론토, 뉴욕-프랑스 파리가 10위 안에 들었다. 뉴욕-파리 구간은 16.9%라는 큰 폭의 성장세를 보였다. 이 조사를 통해 런던과 뉴욕은 국제선의 교류가 매우 활발한 도시임이 밝혀졌다. 런던과 뉴욕을 관문으로 삼아 유럽과 북미의 각지로 이동하는 사람도 많을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선의 이용자가 많은 순위에서는 서울-제주가 1위에 올랐다. 탑승객 수는 서울시 인구에 조금 못 미치는 958만 명이었다. 2위와 3위는 일본의 도쿄-삿포로와 도쿄-후쿠오카였다. 각각 917만 명, 834만 명이 이용했다. 
한편 미국 델타항공은 가장 많은 여객을 수송한 항공사로 꼽혔다. 항공사 순위에서는 3위를 차지한 중국 남방항공을 제외하면 5위 내에 미국 항공사가 포진했다.


연쇄 폭발 당시의 후쿠시마 원전

복잡함 인간능력 뛰어넘어… 사고 땐 인간과 자연에 파멸적

후쿠시마 원전 노기술자 고백
상상 초월의 위험성 깨우쳐

사고유형 복잡 매뉴얼 불가
원인규명 없는 재가동 경고 

“나이 일흔을 넘긴 내가 앞으로 또 책을 쓸 순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유언이라 생각하고 썼다.” 2011년 3.11 방사능 유출 사고로 커다란 재앙을 몰고 온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 등에서 35년 동안 원전 설계·건설·관리를 담당해온 원전 기술자 오구라 시로 씨(73)가 지난 7월 펴낸 책 <전 원전 기술자가 알리고 싶은 진정한 두려움>이 일본 사회를 깨우고 있다. <도쿄신문>은 1일 “원전 사고가 점점 잊혀지는 상황 속에서 원전 기술자만이 알 수 있는 원전의 위험과 안전의 한계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적고 있다”며 이 책을 자세히 소개했다.
 
오구라가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평생 원전 현장을 지켜왔다는 엔지니어로서의 자부심이 후쿠시마 참사로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죄책감이었다. 그는 책 서문에서 “오랜 시간 원전의 건설과 보수, 점검 업무를 담당했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을 기록해 속죄의 마음을 담으려 했다”고 적고 있다.
오구라가 주목하는 원전과 관련한 가장 큰 두려움은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스템의 ‘복잡함’이다. 그는 “원전의 설계와 부품 제조는 수많은 기업과 기업 내 여러 부문의 분업에 의해 이뤄진다. 그래서 원전 전체를 혼자서 이해하는 기술자는 세계에 단 한 명도 없다”고 지적했다.
 
오구라는 1968년 일본원자력사업(이후 도시바에 합병)에 입사한 뒤 후쿠시마 제1원전 설계 등의 업무를 13년 동안 담당했다. 이후 1980년대 초 니가타현의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 1호기 건설 현장에 배속됐다. 그는 “이때 원전의 복잡함이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밝혔다. 복잡한 기계일수록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의 유형이 무수히 많아지고, 모든 사고에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오구라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처럼 전원 계통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사고 등이 발생할 경우 대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전이 일으킬 수 있는 사고에 인간이 완전하게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이 원전의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원전에선 한번 사고가 나면 생명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방사능 물질이 유출돼 인간과 자연계에 파멸적인 해를 끼치게 된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후쿠시마에서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 지 3년 만에 원전 재가동을 서두르고 있는 국가와 전력회사다. 그는 “왜 이 사고가 일어났는지 아무도 이유를 확실히 밝히지 않고 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기소되지도 않는다. 정부와 도쿄도는 사고가 없었다는 듯 2020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하고, 전력회사는 원전 재가동을 신청하며, 원전 제조사들은 해외 수출을 진행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 도쿄=길윤형 특파원 >


평범 거부하고 이색장면 찍으려다 비명횡사 잇따라

2013년 말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셀피’(우리말에선 셀카)를 선정했다.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스마트폰의 셀카용 카메라는 해상도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 화웨이는 지난달 800만 화소의 전면 카메라를 채택한 스마트폰을 출시했다. ‘얼짱 각도’에 만족하지 않는 이들은 ‘셀카봉’을 이용해 셀카를 찍고 있다. 다양한 각도의 셀카를 가능하게 하는 막대인 셀카봉은 젊은층의 여행 필수품이다.
 
최근 사회관계망에서는 ‘극한의 셀카’가 인기리에 공유되고 있다. 절벽 끝이나 고층빌딩에 아슬아슬 매달린 사진은 평범한 수준이다. 전투기 조종석이나 스카이다이빙 도중의 셀카에 이어 지난해 12월24일 지구를 배경으로 한 ‘우주 셀카’ 등장으로 ‘셀카 올림픽’의 순위 다툼이 종결됐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비행사 마이크 홉킨스가 우주유영 도중 셀카를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 것이다.
 
비명횡사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 8일 유라시아대륙 서쪽 끝인 포르투갈 호카곶 절벽에서 폴란드인 부부가 셀카를 찍으려다 추락해 숨졌다. 지난 7월에는 멕시코시의 오스카르 아길라르(21)가 장전된 줄 모른 채 권총 방아쇠를 당기는 셀카를 찍다 사망했다. 4월에 러시아 소녀 크세니야 이그나티예바(17)는 철교 위에서 셀카를 찍으려다 감전사했다. 6월에 미국 여성 코트니 샌퍼드(32)는 고속도로 운전 도중 셀카를 찍다가 트럭을 들이받고 사망했다. 같은 달 이탈리아 소녀 이사벨라 프라키올라(16)는 해안 절벽에서 셀카를 찍다 18미터 아래로 떨어졌다. 4월엔 필리핀 파시그시 14살 여학생이 학교 계단통에서 셀카를 찍다 추락사했다.
 
팝아트의 창시자 앤디 워홀은 “미래에는 누구나 15분간은 유명해질 수 있다”고, 사회관계망 시대를 예견한 듯한 말을 남겼다. 극한의 셀카는 워홀의 예언을 실현하는 도구로 여겨진다. 하지만 멋진 셀카 뒤에 숱한 사고사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 구본권 기자 >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희생자 가족 모임 5월광장 할머니회를 26년째 이끌고 있는 에스텔라 카를로토(오른쪽) 회장이 실종됐던 손자의 신원과 소재를 확인한 뒤 기자회견을 하던 중 다른 회원 할머니와 서로 기대어 기뻐하고 있다.

아르헨 군사정권, 민주인사 학살-자녀 강탈 만행

“손주를 안아보기 전에는 죽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 애는 자기 사촌들처럼 예술가, 음악가가 됐대요. 내 딸 라우라가 하늘에서 웃고 있을 거예요.”
하얗게 센 머리, 주름 진 얼굴의 할머니 투사 에스텔라 카를로토(84)가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에 빼앗긴 손자를 36년 만에 되찾게 됐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그는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호르헤 비델라 군사정권에 가족을 잃은 피해자 단체인 ‘5월 광장 할머니회’ 회장으로 민주화·인권 운동의 상징적 존재다.
카를로토의 딸 라우라는 역사를 전공하던 대학생으로 학내 좌파 페론주의 정치운동 단체에서 활동했다가 1977년 비밀 수용소로 끌려간 뒤 살해됐다. 카를로토는 뒤늦게 딸이 끌려갈 당시에 임신 석달째였으며 처형 두달 전에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아이의 행방은 묘연했다.
 
당시 군사정권은 게릴라단체를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대학생, 노동조합 간부, 좌파 활동가 등 반독재 인사를 대거 잡아들여 고문·살해를 저질렀다. 민주화를 부르짖던 이들은 납치되듯 끌려간 뒤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사라진 것은 성인들만이 아니었다. 반정부 운동을 하던 여성들의 어린 자녀들도 함께 실종자가 됐다. 젊은 운동가들이 구금 중 아이를 낳거나 10살 미만의 어린 자녀들과 함께 수감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들이 살해된 뒤 아이들마저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시 군사정권은 희생자들의 어린 자녀들을 빼돌려 주로 군인·경찰 가정에 강제 입양시켜, 가족과의 연결고리를 아예 끊어버렸다. 차세대 반정부 세력의 불씨를 원천 차단한다는 목적 아래 국가가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였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군부 독재에 희생된 실종자는 민주화 이후 정부 위원회가 공식 인정한 것만 1만3000여명이고, 3만명 이상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게다가 희생자의 실종된 아이들도 5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어머니이자 할머니로서 카를로토의 기나긴 싸움은 딸의 처참한 죽음을 확인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얼굴과 복부에 총상을 입은 딸의 주검을 1978년 넘겨받은 직후 초등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비슷한 처지의 여성 12명이 만든 ‘실종 손주를 찾는 아르헨티나 할머니회’ 모임에 가입했다. 이 단체는 1980년에 ‘5월 광장 할머니회’로 이름을 바꿨다. 1977년 5월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징인 5월 광장에서 아기 천기저귀를 스카프처럼 머리에 두르고 “내 아이를 산 채로 돌려달라”고 외치던 실종자 어머니 단체 ‘5월 광장 어머니회’와 함께 해온 이력 때문이다. 독재자였던 호르헤 비델라는 2012년에 집권 당시 카를로토의 손자 등 반체제 인사의 아이들을 납치한 혐의에 대해 징역 50년형을 추가로 선고받고 지난해 숨졌다. 카를로토의 손자는 가족을 되찾게 된 114번째 실종 아이다. 못찾은 400여명은 성인이 됐겠지만 어딘가에서 뿌리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크리스티나 키르히너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투사 할머니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축하인사하고 트위트를 올렸다. “오늘, 아르헨티나는 어제보다 좀더 정의로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 정세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