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장수
 퇴임 이후 더 빛난 대통령으로 기록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02년 12월 노벨평화상 상패를 들어 보이고 있다. AP 연합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각) 100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카터는 2023년 2월 이후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돌봄을 받아온 고향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고 그의 가족이 밝혔다. 아들 칩 카터는 “아버지는 나뿐 아니라 평화, 인권, 사심 없는 사랑을 믿는 사람들 모두의 영웅이었다”고 성명을 통해 밝혔다.

카터는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장수했다. 정치적으로는 4년 단임(1977~1981년)에 그치면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불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악관을 나온 이후 중동과 한반도 등의 평화 문제에 적극 나섰다. 자원봉사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세계 평화를 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고 퇴임 이후가 더 빛난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카터는 1924년 조지아주의 시골 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 졸업 뒤 당시 개발이 본격화된 핵잠수함 분야에 배치돼 촉망 받는 장교였다. 그러나 1953년 땅콩 농장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군복을 벗고 가업을 물려받았다.

카터는 1960년대에 들어 조지아주 등 남부를 중심으로 흑인들의 권리를 위한 민권운동의 바람이 부는 가운데 흑백 통합을 주장하며 1962년에 조지아주 상원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에 입문했다. 1970년에는 조지아 주지사로 당선됐다. 이어 전국적 지명도가 높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당 후보로 대권에 도전해 1976년 선거에서 승리해 제39대 미국 대통령이 됐다.

선거 상대인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그늘에서 못 벗어난 것도 그의 승리에 기여했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부통령이었던 포드는 닉슨이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사임하자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는데, 이후 닉슨을 사면해준 게 여론의 반발을 불렀다.

카터는 재임기에 높은 물가와 이를 잡기 위한 고금리 정책 등의 탓에 인기가 높은 대통령이 아니었다. 특히 대선이 있던 해인 1980년에 발생한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 구출 실패 사건이 결정적으로 재선 행보의 발목을 잡았다. 이란 학생들은 1979년 11월에 미국대사관에서 직원들과 그 가족 등 90명을 인질로 잡았는데, 1980년 4월에 이들을 구출하려는 ‘독수리 발톱 작전’ 과정에서 헬리콥터와 수송기가 충돌해 미군 특공대원 8명이 숨졌다.

카터는 같은 해 11월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했다. 외교에서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카터는 재임 때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을 이유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는 등 박정희 정권과 대립하기도 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1차 북핵 위기 때인 1994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있다.
 

카터는 퇴임 뒤 아내 로잘린과 함께 ‘사랑의 집 짓기’ 운동에 참여하는 등 봉사와 평화 정착 활동에 나섰다.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한 1994년에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그와 김 주석은 미국이 제재 추진을 중단하면 북한도 핵개발을 동결한다는 합의를 했고, 전쟁 발발 가능성까지 거론될 정도이던 한반도 긴장이 완화됐다. 이는 그해 10월 북·미가 제네바합의에 이르는 데도 기여했다. 또 카터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2개 국가 해법’ 실현을 위해 나서는 등 중동 평화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카터는 재임 때인 197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 협정(캠프데이비드협정)을 중재하고 퇴임 뒤에도 세계 곳곳의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카터는 말년에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을 걱정하기도 했다. 10월1일에 만 100살이 된 그는 8월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투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손자를 통해 밝혔다. 그는 생일 직후 사전투표를 했지만 해리스는 낙선했다.

카터의 동향인으로 그와 77년간 결혼 생활을 한 아내 로잘린은 지난해 11월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집에서 먼저 세상을 떠났다.   <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

‘별세’ 지미 카터 전 대통령…냉전 승리와 미국 혁신 기반 만들어

퇴임 뒤 빛을 발한 전직 대통령 롤 모델
‘유약해 보였으나 가장 강한 대통령’
진보적 가치와 독실한 기독교 신념이 대중에 호소
퇴임 뒤에는 평화봉사로 존경받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21년 7월10일 결혼 75돌 축하연에서 아내 로잘린의 발언을 듣고 있다. AP 연합
 

‘재임 때보다는 퇴임 뒤에 빛을 발한 대통령’

29일 100살을 일기로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흔히 퇴임 대통령의 ‘롤 모델’로 평가받는다. 그가 퇴임 뒤 펼친 분쟁 해소를 위한 평화 활동 및 지역 봉사 때문만은 아니다. 혹평을 받았던 재임 시절의 정책도 시간이 갈수록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1977년부터 81년까지 카터의 재임 동안 경제불황, 석유 위기,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사태 등으로 미국의 위상과 지위는 바닥을 쳤다. 이런 ‘미국의 위기’시기에 카터는 인권 외교와 도덕 정치만을 앞세운 ‘유약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정책과 대응은 미국을 혁신하고, 소련 붕괴의 씨를 뿌려 냉전에서 미국을 승자로 만든 기반을 조성했다는 평가를 뒤늦게 받고 있다. 이는 퇴임 뒤 그가 펼친 헌신적인 평화 및 봉사 활동과 맞물려, 가장 성공적인 전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조지아 플레인즈의 땅콩 농장 집안에서 1924년에 태어난 카터는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복음교단인 남침례교의 독실한 신자로 성장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잠수함 장교로 근무했다. 부친이 숨지자 퇴역해 가업을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빚과 형제 사이의 재산분할로 카터는 거의 물려받은 것이 없었지만 땅콩 농장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고향에서 땅콩 농장을 경영하던 1950~60년대, 미국 남부에는 민권운동이 몰아쳤다. 보수적인 고향 분위기에도 그의 양심적인 기독교 신앙은 흑백분리 반대와 민권운동 찬성으로 그를 이끌었고, 이는 그가 정계로 나가는 동기가 됐다.

1979년 3월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따라 맺은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 평화조약 체결식 때 미국 백악관에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당시 대통령(왼쪽부터)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악수를 하고 있다. 카터 센터
 

그는 1963년 조지아 주의회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데 이어, 1970년에는 주지사로도 선출됐다. 카터는 민주당 주지사 후보 경선에서 소수인종을 위한 ‘어퍼머티브 액션’(배려 정책)에 기반한 흑백분리 반대를 내걸고, 현직 주지사를 물리쳤다. 그가 주지사로 재직하던 1970년대 전반은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전 후유증으로 정치권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실망이 절정에 오를 때였다.

무명의 시골 주지사였던 카터는 1975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자 출사표를 던지며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그는 참신했고 신뢰할 수 있는 경력이 있었고 그가 내세운 ‘인권과 도덕’은 좌우를 넘어 호소력을 발휘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 해군 장교, 땅콩 농장 경영주, 민권운동 정치인이란 경력을 가진 카터는 도덕성이 실추한 기존 정치권을 질타하는 ‘도덕과 인권’ 가치를 내세워, 진보와 보수 양 진영 유권자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진보적인 가치를 설파하는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 카터는 기독교 우파 세력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아냈다. 이에 힘입어 카터는 닉슨 사임 뒤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를 간발의 차로 누르고 1976년 당선됐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15년 8월 애틀랜타주 조지아에 있는 카터센터에서 자신의 암 투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카터 센터
 

취임 뒤 그는 대외정책에서 인권 외교 및 분쟁 해소를 내세웠다. 친미 동맹국들의 인권탄압에도 강경하게 대처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당시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압력을 가했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주한미군 철수 공약까지 내걸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미 군부 내의 강경한 반대로 백지화됐으나, 카터의 압박은 유신체제 붕괴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중동에서 최대 친미 동맹국이었던 이란의 팔레비 국왕 체제에도 압력을 가해, 반정부 세력이 활성화됐다. 이는 1979년 팔레비 왕조를 타도한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과격파 학생들이 테헤란에 있는 주 이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해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삼는 사태로 이어져 카터의 재선을 무산시킨 부메랑이 되기도 했다.

1994년 6월17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김일성(오른쪽) 북한 주석이 대동강 유람선 위에서 두번째 회담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재임 시절 카터는 대외정책에서 굴직한 치적들을 남겼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역사적인 평화조약인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중재했고,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인 파나마 운하를 반환했으며,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2(SALT2)를 타결지었다. 하지만, 오일쇼크에 이은 스태그플레이션이 지속되다가 임기 후반기에 들어서는 1979년 이란이슬람혁명으로 2차 오일쇼크가 엄습했다.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위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이 겹치며 지지율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특히,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위기와 구출작전의 실패는 재선을 앞둔 카터에게 치명적 타격이 됐다.

1980년 대선에서 카터는 강한 미국을 주장한 공화당의 보수파 로널드 레이건에게 대부분의 주에서 패배해, 압도적인 선거인단 표차로 참패했다. 공화당과 보수파들은 인권과 도덕이라는 이상주의만 내세운 카터가 소련 등 경쟁국에 무른 대응을 해서 미국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고 공격했고, 이런 평가는 공식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그의 국내외 정책은 미국을 혁신하고 냉전에서 승리하게 한 원동력으로 재평가받는다.

우선, 그는 소련의 인권문제와 관련해,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의 반체제 세력을 후원하는 정책을 강력히 밀어붙여 1980년대 후반 소련 및 사회주의권 붕괴의 씨앗을 뿌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맞서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을 주도하고, 소련을 아프간 수렁에 빠뜨린 무자헤딘 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보수파 및 군비확산론자들이 반대하던 전략무기제한협상2를 타결해, 방만한 미 국방비를 줄이면서도 군비 현대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는 미국이 1980년대 레이건 시절 소련을 압도하는 군사력 우위를 구축하는 바탕이 됐다.

1960년대부터 미국 대통령과 대외정책을 지켜보며 중앙정보국장 및 국방장관을 역임한 공화당 계열의 로버트 게이츠는 가장 유약하다고 평가받은 카터가 사실은 소련 붕괴의 씨앗을 뿌린 가장 강경한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카터 행정부의 선전과 비밀공작이 궁극적으로 소련 붕괴를 가져온 체제 균열을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또, 게이츠는 카터 시절에 린든 존슨 행정부 시절부터 추진해온 국방 현대화와 전략무기 세대교체가 본격적 결실을 맺었다고 강조했다. 오일 쇼크에 대처하기 위한 연비 효율화 및 대체에너지 개발 등도 카터 때 시작됐다. 이 모든 정책은 소련을 압도하는 미국의 경쟁력으로 나타났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유례없는 참패로 재선에 실패한 카터는 대중들에게 잊혔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정력적인 사회활동으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그는 1982년 카터센터를 세워 인권 신장에 나섰고, 세계 각국을 돌면서 평화협상, 선거감시, 질병퇴치 등의 활동을 이끌었다. 특히, 현재 활발한 국제적인 선거감시 활동도 그에 힘입었다.

1994년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폭격을 을러대던 1차 한반도 북핵위기 때 대담하게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통해 북-미 협상과 남북정상회담을 중재한 것도 퇴임 뒤 그의 대표적인 평화협상 행보로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 인권 보장을 주장하고 이스라엘의 평화협상 파기를 일관되게 비난해, 미국 보수파들의 공적이 됐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2002년 그는 이런 활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노숙인들과 무주택자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은 그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80살이 넘은 그가 망치를 잡고 집을 짓는 모습은 전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줬다. 그는 집짓기 노동으로 몇번이나 낙상해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 한겨레 정의길 기자 >

 

노바스코샤 핼리팩스 스탠필드 국제공항 착륙 여객기 랜딩기어 이상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멈춰 선 캐나다 PAL항공 여객기 [핼리팩스 AP=연합]
 

캐나다에서도 랜딩기어 이상으로 여객기가 착륙 도중 위험한 상황을 맞았으나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AP통신과 CNN 방송이 2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캐나다 뉴펀들랜드 세인트존스에서 73명의 승객을 태우고 출발한 PAL 항공 AC2259편 여객기가 전날 밤 9시30분께 노바스코샤 핼리팩스 스탠필드 국제공항에 착륙하던 중 랜딩기어 이상으로 추정되는 기체 결함으로 기체에서 불꽃이 발생하는 위험한 상황을 맞았다.

사고기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멈춰 섰으며 73명의 승객과 승무원은 곧바로 버스를 이용해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이번 사고로 인한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PAL 항공 제휴사인 에어 캐나다는 사고 기종이 쌍발기인 드 해빌랜드 DHC-8-402(봉바르디에 Q400)이며 착륙 도중 랜딩기어에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스탠필드 국제공항은 사고 직후 일시적으로 항공기 이착륙을 중단시켰으나 90여분 만에 1개 활주로의 운영을 재개했다.

캐나다 교통안전위원회(TSB)는 이번 사건을 조사할 예정이다.

사고기 승객인 니키 발렌타인은 착륙 도중 비행기가 상당히 흔들렸다면서 기체 왼쪽에서 불이 났으며 창문으로 연기가 들어왔다고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 연합 김계환 기자 > 

여객기 착륙 시도하려 할 때 러시아 방공망 가동 중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각) 모스크바에서 화상으로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사흘 전 38명이 숨진 아제르바이잔 항공기 추락 사고와 관련해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에게 사과했다. 사고 여객기가 러시아의 방공망에 걸려 격추됐다는 의혹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러시아 관영 타스 통신은 푸틴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각) 알리예프 대통령에게 전화로 러시아 영공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고’에 대해 사과했다고 보도했다. 푸틴 대통령은 또 희생자 가족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고, 피해자들의 빠른 쾌유를 기원했다. 크렘린궁은 양국 정상의 통화 내용과 관련해 “푸틴 대통령이 알리예프 대통령에게 사고 여객기가 추락하기 전 그로즈니에 착륙을 시도하려 할 때 러시아 방공망이 가동 중이었다고 설명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보도했다.

전날 아제르바이잔 항공은 여객기 추락 사고에 대한 예비조사 결과 “외부로부터 물리적·기술적 방해”가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같은 날 러시아 항공당국도 여객기의 목적지였던 그로즈니 쪽에서 우크라이나의 드론공격에 대한 ‘대응 조처’가 있었다고 시인했다. 사실상 여객기가 러시아의 방공망에 걸려 격추된 것으로 결론이 좁혀진 셈이다.

25일(현지시각) 카자흐스탄 악타우 근처 해변에 추락한 아제르바이잔 항공 J2 8243편 여객기(엠브라에르 ERJ-190AR)의 동체 잔해가 널브러져 있다. 악타우/EPA 연합
 

이와 관련, 26일 월스트리트저널은 사고 원인 조사에 정통한 익명의 소식통들을 인용해 러시아가 사고 여객기를 자국 영공에서 이탈시키고 위성항법장치(GPS)를 교란했다고 전한 바 있다. 그러면서 아제르바이잔 여객기가 러시아 대공 미사일 또는 그 파편에 맞아 추락했다는 예비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항공 전문가들은 사고 직후부터 아제르바이잔 여객기 꼬리 쪽 기체 표면에 생긴 구멍의 모양으로 볼 때 여객기가 미사일 방어 시스템에 걸렸을 가능성을 제기해왔다. 로이터통신도 앞서 아제르바이잔 당국의 초기 조사 결과에 정통한 4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러시아 방공 시스템이 카자흐스탄에서 추락한 아제르바이잔 항공 여객기를 격추했”으나 고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25일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러시아 그로즈니를 향해 북서 방향으로 비행하던 여객기는 애초 목적지의 반대 방향인 카스피해를 건너 카자흐스탄의 해변 도시 악타우 인근에서 비상착륙을 시도하다가 추락했다. 사고가 난 지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에 맞서기 위해 방공 시스템을 가동해온 곳으로 알려져 있어 관심이 쏠렸다. 특히 러시아 국방부가 전날 밤까지 우크라이나 드론 59대를 격추했다고 밝힌 데다, 여객기 추락이 발생하기 3시간 전에도 우크라이나 드론 1대가 그로즈니 서쪽 블라디캅카스 상공에서 격추돼 러시아 격추설에 무게가 실렸다. 미국 쪽에서도 “러시아 방공망이 여객기를 공격했다는 징후”들이 있다고 봤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 쪽은 이날 여객기의 목적지였던 그로즈니 쪽 상황이 굉장히 복잡했다고 설명했다. 27일 타스통신에 따르면 드미트리 야드로프 러시아 항공운송국장은 “(여객기 사고가 나던) 그날 그로즈니 공항 지역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우크라이나 전투 드론들이 그로즈니와 블라디캅카스 도시의 민간 인프라에 테러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며 “(러시아의) 대응 조치가 취해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항공기는 이 지역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야드로브는 추락한 아제르바이잔 여객기 조종사가 두 차례에 걸쳐 그로즈니에 착륙하려고 하다가 악타우로 목적지를 바꿨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러시아 항공 당국은 사고 여객기가 비행 중 새와 충돌로 인해 비상 상황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으나, 입장을 바꾼 셈이다.

사고 당시 여객기에는 67명이 타고 있었으며 38명이 숨졌다. 생존자 29명 중 일부가 큰 폭발음을 들었으며 이후 여객기가 추락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추락한 여객기에 타고 있던 승객 수브혼쿨 라키모프는 로이터 통신에 비행 중 적어도 한 차례 이상의 굉음을 들었다며 “비행기가 부서지는 줄 알았다”고 전했다. 그는 꽝하는 굉음이 난 뒤 “어떤 형태로든 비행기가 손상을 입었음이 분명했다”며 “마치 비행기가 취한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또 다른 승객도 큰 마찰음을 들었다면서 소리가 두 차례 났다고 말했다.                 < 한겨레  전정윤  김지은 기자  >

잇단 승전에 자신감…이란 역내 대리세력 완전파괴 작심

"후티는 난제"…하마스·헤즈볼라와 달리 1천600㎞ 거리

후티 "확전엔 확전"…이스라엘에 미사일 쏴 '보복 악순환'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빈사상태에 빠뜨리고 아사드 시리아 정권의 군사자산을 초토화한 뒤 여세를 몰아 예멘 반군 후티를 겨냥하는 네타냐후 [EPA 연합 자료사진]

 

이스라엘이 26일(현지시간) 친이란 예멘 반군 후티의 주요시설을 타격한 것은 이른바 '저항의 축'에 대한 압박을 한층 더 강화하는 차원으로 풀이된다.

친이란 세력인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무력화한 데 이어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무너진 시리아에서 영향력 확대 기회를 엿보는 이스라엘이 이제 후티까지 겨냥하며 이란 대리세력 일소를 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공격과 관련해 "이제 대담해진 이스라엘이 후티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조직의 와해로 하마스와 헤즈볼라가 공격 능력을 사실상 상실하고 아사드 정권까지 축출된 가운데 이스라엘이 눈엣가시와 같은 후티를 제압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후티는 지난해 10월 가자지구 전쟁 이후 하마스 지원을 명목으로 홍해 등에서 도발 행위를 이어왔다.

최근 일주일 동안에는 거의 매일 밤 탄도미사일과 드론을 발사하며 이스라엘을 위협했다.

지난 21일에는 후티가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쏜 미사일로 주민 16명이 다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와 맞물려 후티를 향한 이스라엘의 경고 메시지는 더욱 강경해졌다.

이스라엘 카츠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은 23일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수장 이스마일 하니예와 헤즈볼라 수장 하산 나스랄라를 살해한 것처럼 "후티를 강하게 공격할 것이고 그들의 지도부를 참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나 공항 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EPA=연합]
 

이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25일 "후티는 하마스와 헤즈볼라, 아사드 정권과 다른 세력들이 배운 것을 배우게 될 것"이라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중동 전역이 이 교훈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날 "우리는 이란의 '악의 축' 테러리스트의 팔을 잘라내기로 결심했다"며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도 했다.

당국자들은 WSJ에 이번 이스라엘의 공격은 자국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마지막 친이란 단체'를 억제하기 위한 의도를 가졌다고 설명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후티를 겨냥한 이스라엘의 작전에는 일부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고 관측한다.

이스라엘과 인접한 가자지구나 레바논과는 달리 예멘은 1천600km 이상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하마스·헤즈볼라와의 전쟁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후티가 그간 이스라엘 정보당국이 집중해 분석하지는 않았던 비교적 '새로운 적'이라는 점도 도전적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짚었다.

후티는 이스라엘에 보복을 다짐하며 강력 응수를 예고했다.

후티는 이날 자신들이 운영하는 알마시라 TV를 통해 "확전(escalation)에는 확전으로" 대응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후티는 이스라엘을 겨냥해 또 미사일을 날렸다.

이스라엘군은 27일 성명을 통해 예멘에서 발사된 미사일 한 발을 이스라엘 국경 밖에서 격추했다고 밝혔다.

국제사회는 격화하는 이스라엘과 후티의 충돌을 크게 우려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대변인을 통해 밝힌 입장에서 이스라엘과 후티의 긴장 고조를 규탄한다며 모든 당사국은 군사적 행동을 중단하고 자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울러 항구와 공항을 공습하는 것은 인도주의적 활동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한다며 국제법은 항상 존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스라엘군은 이날 예멘 수도 사나의 공항과 발전시설, 호데이다와 살리프·라스카나티브 등 서부 해안의 군사 기반 시설 등을 전투기로 폭격했다.

후티가 운영하는 사바 통신은 이번 공습으로 사나공항에서 3명, 호데이다 지역에서 3명 등 모두 6명이 숨지고 40명이 다쳤다고 보도했다.

특히 공습 당시 사나공항에선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유엔 전용기 탑승을 준비 중이었다.  < 연합 서혜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