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의 마지막 회의, EU 정상들 기립박수로 '환송'

● WORLD 2021. 10. 23. 06:0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메르켈 없는 정상회의는 에펠탑 없는 파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2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이틀째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다른 정상들과 대화하고 있다.

 

퇴임을 앞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2일 마지막으로 참석하는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다른 회원국 정상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AFP 통신 등에 따르면 전날부터 이틀 일정으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의 둘째 날 회의에서 다른 26개 회원국 정상들은 본격적인 현안 논의에 앞서 환송 행사를 열고 기립박수로 메르켈 총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이날 회의는 지난 16년간 EU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역할을 했던 메르켈 총리가 마지막으로 참석하는 EU 정상회의였다.

 

EU 정상회의서 정겹게 담소하는 메르켈·마크롱=유럽연합(EU) 정상회의 둘째 날인 22일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의회에서 앙겔라 메르켈(왼쪽)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오른쪽) 프랑스 대통령이 다정히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담소하고 있다. EU 정상들은 이틀 일정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와 에너지 가격 급등, 이민 문제 등을 논의한 뒤 이날 회의를 마쳤다.

 

메르켈 총리가 재임 기간 참석한 EU 정상회의는 107회다. 그는 이를 통해 유로존 재정 위기, 난민 위기,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경제 회복 기금 설치 등 최근 유럽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논의하며 회원국들과 대응을 조율했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메르켈 총리를 위한 비공개 헌사에서 "당신은 하나의 기념물"이라면서 메르켈 총리 없는 EU 정상회의는 "바티칸 없는 로마 혹은 에펠탑 없는 파리와 같다"라고 말했다고 한 관리가 전했다.

 

다른 회원국 정상들도 메르켈 총리를 향해 찬사를 보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2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이틀째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 도착하고 있다.

 

알렉산더르 더크로 벨기에 총리는 메르켈 총리는 "지난 16년간 어려운 시기에 우리 27개국 모두가 인류애를 갖고 옳은 결정을 내리도록 도우면서 유럽에 그의 흔적을 남겼다"라고 말했다.

 

자비에 베텔 룩셈부르크 총리도 메르켈 총리는 "타협 제조기"라면서 여러 차례 있었던 회원국 간 마라톤협상에서 그는 늘 "우리를 단합시키기 위한 무엇인가를 찾아냈다. 유럽은 그가 그리울 것"이라고 밝혔다.

 

메르켈 총리는 이번 EU 정상회의에서도 EU의 조약·결정보다 폴란드 헌법이 더 앞선다고 한 폴란드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EU 내 갈등과 관련, 타협과 대화를 강조했다.

 

EU 회원국 정상들은 전날에는 사회적 거리를 둔 채 모두 모여 단체 사진을 찍기도 했다.

 

21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회원국 정상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메르켈이 ‘무티’(Mutti)라 불리기까지

 

동독 여성 과학자 출신이라는 약점이

인내하고 기다려 중재와 합의 끌어내는 장점으로

근거리 관찰과 폭넓은 인터뷰로 조명한 메르켈 정치역정

 

메르켈 리더십

합의에 이르는 힘

케이티 마튼 지음, 윤철희 옮김 l 모비딕북스

 

“나는 서독에서 살았다면 교사가 됐을 가능성이 커요.” 루터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여성이 아니었다면, 과학자가 아니었다면, 동서독이 통일되지 않았다면, 무엇보다 동독 출신이 아니었다면, ‘무티’(Mutti·엄마)는 없었을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이 없었다면, 세계는 지금과 다를지 모른다. 최소한, 유럽은 지금의 유럽이 아니었을 것이다. 2005년 11월부터 2021년 9월까지 16년간 4차례에 걸쳐 독일 총리를 지낸 앙겔라 메르켈의 정치 인생을 담은 <메르켈 리더십>은 그의 리더십을 알기 쉽게 정리해놓은 ‘실용서’가 아니다. 메르켈이 동독에서 성장한 여성으로서, 루터교 목사인 아버지에게 영향받은 기독교적 신념과 과학자 활동을 하며 체득한 합리성을 함께 지닌 정치인으로서, 리더십을 형성하고 세계 정치를 이끄는 역정을 그린 대하드라마라 해야 할 것이다. 메르켈이 어떻게 메르켈이 되었는가를 깊고 넓게 살피는 과정은, 메르켈의 정치 인생이 그 자체로 세계사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통일 이후 독일을 중심으로 현대 정치사를 들여다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카메라 앞에 설 때 팔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다가 양손을 모으는 자세를 취하기로 했다. 그 이후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양손을 마름모 모양으로 모았다. 이를 두고 ‘메르켈 마름모’(Die Merkel-Raute) 또는 메르켈의 다이아몬드라고 사람들은 불렀다. 이 손 모양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카메라 앞에 설 때 팔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다가 양손을 모으는 자세를 취하기로 했다. 그 이후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양손을 마름모 모양으로 모았다. 이를 두고 ‘메르켈 마름모’(Die Merkel-Raute) 또는 메르켈의 다이아몬드라고 사람들은 불렀다. 이 손 모양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조심성, 통제 의지, 자제력, 인내심, 기다림…. 말하기보다 듣기를 즐기고, 표정을 감추며 정치적 수사를 극도로 자제하는 담백하지만 까다로운 인물. 냉철한 이성과 무욕의 겸손함은 그의 정치 인생을 관통하며 민주주의란 어떻게 가능한가를 역설한다. 그가 동독에서 자라났기 때문일 것이다. 메르켈의 아버지는 동베를린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 여기는 사회로 이주한 목사의 딸은 소수자였다. 메르켈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는 감옥 같은 곳에 안착할 수 없었다. 1985년은 메르켈에게 중요한 해다. 당시 서독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는 종전 40돌 기념식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는 편협하지 않은 시선으로 진실을 바라봐야 합니다. 더 솔직해질수록, 그 결과를 더 자유로이 직면할 수 있습니다. (…) 역사에 길이 기록될 집단 학살로 독일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유대인 600만명을 기억하십시오.” 나치에 희생당한 공산주의자들만 주입식으로 배운 메르켈은 충격 속에 눈을 떴다. 메르켈 리더십 중심에 ‘쇼아’(Shoah, 히브리어로 절멸)가 자리잡게 된 사건이다. 독일은 유대인에게 영원히 빚졌다는 메르켈의 확신은, 홀로코스트를 유대인의 언어로 인식하게 했다.

 

독일인들은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을 28년 만에 무너뜨렸다. 이미 동독인들의 대탈출과 시위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동독에 자유의 바람이 부는 가운데, 메르켈은 1989년 12월 동독 신생정당 ‘민주적 각성’(DA)에 입당하는데, 당수 안드레아스 아펠트는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웬만해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무척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서른다섯살로 보이지 않았고 펑퍼짐한 코듀로이 치마에 샌들을 신고 독일 남자들 같은 단발머리를 한 채 당사 한쪽에서 사무용 컴퓨터를 조립하는 메르켈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게 당 대변인으로 선임된, 과학자의 성실성과 뒤로 물러나 기다릴 줄 아는 신중한 성품을 지닌 그에게는 이보다 더 큰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1990년 10월 통일 직후 기독민주연합(CDU) 소속 헬무트 콜 총리는 동독 출신 여성을 내각에 포함시킬 정치적 이유가 충분했다. 마침 ‘민주적 각성’은 기독민주연합과 합당한 터였고, 동독 출신 남성 정치인들은 과거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 행각이 발각되며 줄줄이 나가떨어졌다. 메르켈은 콜의 지명을 받아 최연소 여성 장관으로 입각한다.

콜이 ‘동독 출신의 메트헨(Mädchen·아가씨)’으로 부르던 메르켈은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환경장관으로 교토의정서 체결에 주요한 역할을 해내고, 정치적 부모와 다름없는 콜 총리의 부정부패를 해당 행위로 규정한다. 그렇게 메르켈은 2000년, 콜 총리의 ‘메트헨’으로 독일 정치의 중심에 발을 내디딘 지 10년 만에 당 대표를 차지한다. 보수적인 남성들로 가득한 당을 장악해야 할 과제 앞에서 메르켈은 성실하고 겸손한 태도로 그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해나가 5년 뒤엔 총리에 오른다. 이 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메르켈과 미국, 러시아, 유럽 지도자들과의 관계다.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과 유일하게 맞상대할 수 있었던 메르켈의 활약상은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메르켈이 없었다면, 푸틴의 각종 도발은 3차 대전의 참화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버락 오바마 당선 이후 관계를 맺어가는 메르켈의 모습은 노련함이 어디에서 기원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도널드 트럼프마저 어렵사리 길들이는 장면에서는 정치인의 책임감이란 무엇인지 절절히 느낄 수 있다.

 

<메르켈 리더십>이 쉽고 재밌게 읽히는 것은, 저자 케이티 마튼의 힘이다. 헝가리 출신으로 미국 <에이비시>(ABC) 서독 특파원을 지낸 저자는 4년간 메르켈의 집무실을 드나들 자격을 얻었고, 헨리 키신저, 조지프 스티글리츠, 요아힘 가우크, 폴커 슐뢴도르프 등 거물들을 비롯해 100명이 넘는 이들을 인터뷰했다. 메르켈에 대한 상찬만 가득한 책이 아니다. 중동 난민을 대거 받아들이기로 한 메르켈의 결정은 위대했지만, 그의 장점은 또한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음을 명확히 지적한다. 메르켈의 합리적 태도는, 난민 유입에 따른 옛 동독 지역 주민들의 불안감과 박탈감, 불만을 충분히 감싸안지 못했다는 것이다. 메르켈의 낙관주의와 과도한 실용적 관점은 독일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발호하는 위기를 막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앞으로 메르켈이 없는 독일은, 유럽은, 세계는 어디로 갈 것인가. 2019년 12월 메르켈은 처음으로 아우슈비츠를 찾아 연설했다. “우리는 믿음과 출신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편견을 조장하고 분노를 선동하는 이들에 맞서야 합니다. (…) 이것은 협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김진철 기자

레이건~부시 공화당 정부에서 고위직

이라크전쟁 지휘…나중에 “오점” 후회

대북 외교적 해법 강조한 협상파

퇴임 뒤 오바마·바이든 등 민주당지지

 

2001년 12월16일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국무장관 후보자로 콜린 파월(왼쪽) 장군을 소개하면서 함께 웃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국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으로, 이라크 침공에 깊이 관여했던 콜린 파월이 84살로 삶을 마감했다.

 

파월 전 장관의 가족은 18일(현지시각) 페이스북을 통해 “전 국무장관이자 합참의장인 콜린 파월 장군이 코로나19로 인한 합병증으로 오늘 아침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파월 가족은 “우리는 놀랍고 사랑스런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위대한 미국인을 잃었다”고 말했다. 가족은 파월 전 장관이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완전히 마친 상태였다고 덧붙였다.

 

자메이카 이민 2세인 파월 전 장관은 1937년 뉴욕 할렘에서 태어난 뒤 뉴욕시립대를 다닐 때 학생군사교육단(ROTC)에 참여했다. 대학 졸업 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다가 헬기 추락 등으로 두 차례 부상을 당했다. 그 밖에 1989년 파나마 작전 등 여러 군사 작전에서 활동했다.

 

파월 전 장관은 1987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고,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는 1989년 흑인 최초로 미 합참의장에 올랐다. 그는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응해 시작된 걸프전쟁에서 사담 후세인 축출에 성공하면서 대통령 후보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미국인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는 1992년, 1996년, 2000년 대선 때마다 대선 후보로 거명됐지만 출마를 고사했다. 이어 조지 W. 부시 행정부인 2001년 미 역사상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에 올랐다.

 

파월 전 장관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시작한 이라크 전쟁을 최고 외교사령탑으로서 지휘했다. 특히 이라크 전쟁을 두고 그는 2003년 유엔 연설에서 ‘이라크가 대량파괴무기를 숨기고 있다’며 전쟁을 정당화했으나, 이후 미 정부는 이라크에 대량파괴무기는 찾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파월 전 장관은 국무장관에서 2005년 퇴임한 뒤 2003년의 유엔 연설을 자신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오명”이라고 말했다.

 

파월 전 장관은 북한에 대해서는 외교적 해법을 강조하는 협상파였다. 그는 2001년 국무장관에 기용되자마자 ‘전임 빌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밝혀 부시 행정부 내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네오콘이 득세하던 때였다.

 

파월 전 장관은 공화당 정부에서 요직을 지냈으나, 이후에는 대선 때마다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조 바이든 등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의장국 브루나이 "비정치적 대표 초청" 발표

유엔 등 국제사회의 군정 인정 여부 등도 영향줄 듯

 

    지난 6월 모스크바 국제안보 콘퍼런스에 참석한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군 총사령관 [EPA 연합뉴스]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이달 말 열리는 정상회의에 미얀마 군사정부 지도자를 참석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16일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아세안 의장국인 브루나이는 이날 이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아세안 정상회의는 오는 26~28일 열린다.

 

아세안은 전날 화상으로 외교장관 회의를 열고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군 총사령관의 정상회의 참석 허용 여부를 논의했다.

 

브루나이는 "전날 회의에서 미얀마의 정치적 대표를 참석시키는 문제에 대해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아세안은 미얀마 군사정부 지도자의 정상회의 참석을 불허하는 대신 미얀마의 비정치적 대표를 회의에 초청할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일부 회원국은 지난 4월 24일 특별 정상회의에서 나온 합의사항을 미얀마 군정이 지키지 않은 점을 문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세안은 당시 회의에서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로 촉발된 유혈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즉각적인 폭력 중단, 특사 파견 등 5개 사항에 관한 합의를 채택했다.

 

당시 회의에는 흘라잉 총사령관도 참석했다.

 

 4월24일 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한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맨 오른쪽) [인도네시아 대통령실/AP 연합뉴스]

 

그러나 이후에도 군경에 의한 시민 학살 등 유혈 참사가 끊이지 않았고, 아세안은 미얀마 사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국제사회에서 받아왔다.

 

지난주 열린 아세안 외교장관 화상회의에서도 군정이 합의 사항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아세안의 이번 결정은 유엔(UN) 등 국제사회의 미얀마 군정 인정 여부 등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8일 아세안 외교장관들과 화상 회의를 가지려다 하루 전 취소하기도 했다.

 

당시 로이터통신은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결정은 해당 회의에 군정 외교장관이 참여하려 한 것과 관련있다고 보도했다. 군정 외교장관이 참여한 가운데 유엔 총장이 회의를 진행할 경우, 자칫 군정을 인정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군정은 문민정부 당시 임명된 초 모 툰 현 주유엔 대사가 쿠데타 이후 군부를 비판하자 그를 해임하고 군부 인사를 후임 대사로 지명한 상태다. 하지만 유엔은 이를 승인하지 않고 있다.

 

미얀마 군부는 지난해 11월 치른 총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면서 지난 2월 1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후 이를 규탄하는 시민들과 및 반군부 인사들을 무력으로 탄압해왔다.

 

미얀마 인권단체인 정치범지원연합(AAPP)에 따르면 전날 기준으로 군부 쿠데타 발생 이후 민간인 1천178명이 군경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됐다.

 

아세안 "정상회의 제외" 카드에 미얀마 군정 '평화 합의' 따를까

 4월 합의 후 군경 무력진압 계속 '유혈사태 중단·대화 노력' 압박

"군정 배후 중국 · 러시아 때문에 실효성 없을 듯" 지적도

 

     지난 3월 27일 '미얀마군의 날' 열병식에 참석한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 [로이터=연합뉴스]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이 미얀마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유혈진압을 중단하지 않고 있는 미얀마 군사정부에 대해 '정상회의 참석 배제'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세안 의장국인 브루나이는 오는 26~28일 열릴 예정인 정상회의에 미얀마 군정의 지도자인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을 참석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16일 발표했다.

 

대신 미얀마의 비정치적 대표를 회의에 초청하기로 했다.

 

이는 지난 2월 쿠데타로 촉발된 유혈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지난 4월 아세안 특별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합의를 지키지 않은 미얀마 군정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의미로 풀이된다.

 

가급적 회원국을 압박하거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아세안의 관례를 감안하면 이번 발표는 이례적이다.

 

아세안이 이처럼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미얀마 군정을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군부 쿠데타로 촉발된 유혈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에 적극 참여하라는 압박성 조치로 보인다.

 

미얀마 군부는 지난해 11월 치른 총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면서 지난 2월 1일 쿠데타를 일으킨 뒤 이를 규탄하는 시민들과 반대 세력을 무력을 동원해 마구 탄압해왔다.

 

이에 아세안 10개 회원국 대표들은 지난 4월 24일 특별정상회의에서 미얀마 사태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즉각적인 폭력 중단 등 5개 조항에 합의했다.

 

아세안 의장 성명 형태로 발표된 합의문은 ▲ 미얀마의 즉각적 폭력중단과 모든 당사자의 자제 ▲ 국민을 위한 평화적 해결책을 찾기 위한 건설적 대화 ▲ 아세안 의장과 사무총장이 특사로서 대화 중재 ▲ 인도적 지원 제공 ▲ 특사와 대표단의 미얀마 방문 등 5개 사항을 담고 있다.

 

당시 합의에는 미얀마를 대표해 흘라잉 총사령관도 참여했다.

 

그러나 미얀마 군정은 이같은 합의에도 불구하고 반대 세력에 대한 유혈 진압을 멈추지 않았다.

 

미얀마 인권단체인 정치범지원연합(AAPP)에 따르면 전날 기준으로 군부 쿠데타 발생 이후 민간인 1천178명이 군경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됐다.

 

뿐만 아니라 미얀마 군정은 아세안의 대화를 통한 중재 노력도 거부하고 있다.

 

아세안 특사로 임명된 에리완 유소프 브루나이 제2외교장관이 미얀마 방문시 가택 연금중인 아웅산 수치 고문을 만나게 해달라고 줄곧 요청해왔지만 군정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에 아세안 회원국들 사이에서는 합의 사항을 지키지 않는 미얀마 군정에 대한 불만이 확산하고 있다.

 

앞서 지난주 화상회의에서도 회원국 외교장관들은 군정이 합의 사항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며 강하게 성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아세안의 결정에 따라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미얀마 군정은 국제사회에서 합법성을 인정받으려는 계획에도 큰 차질이 빚어질 전망이다.

 

또 미국을 비롯해 유엔과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가 미얀마 군정을 상대로 외화자산 동결 및 각종 경제 제재조치 등을 내세워 유혈사태 중단 및 민주화를 더욱 거세게 요구하고 나설지도 관심거리다.

 

그러나 아세안 등 국제사회의 압박은 미얀마 군정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중국과 러시아로 인해 그다지 실효성이 없을거라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군정을 규탄하면서 각종 제재를 가하는 것과는 달리 중국과 러시아는 사실상 군부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중국은 미얀마 군부의 집권과 관련해 쿠데타라고 표현하지 않고 "내정"이라는 입장을 취하면서 러시아와 함께 군부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를 막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얀마의 가장 큰 무기 공급원이기도 하다.

 

한국 등 8개국·EU "미얀마사태 해결할 아세안특사 지지" 공동성명

미얀마 군부, 수치 면담 요구한 특사 입국거부…정부 "국제사회와 지속 협력"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고문 [양곤 EPA=연합뉴스]

 

한국을 비롯한 8개국과 유럽연합(EU)이 15일 미얀마 사태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의장 특사 역할을 지지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고 외교부가 밝혔다.

 

공동성명은 미얀마의 심각한 상황과 국민 희생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에리완 유소프 아세안 특사의 미얀마 방문을 환영하고 방문 목적과 노력을 지지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면서 미얀마 군부가 폭력을 중단하고 부당하게 구금된 사람들을 즉각 석방하는 등 종전 합의사항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 미얀마 사태 해결을 위한 아세안의 노력에 대한 강한 지지도 재확인했다.

 

공동성명에는 한국과 미국, 호주,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노르웨이, 동티모르 및 유럽연합(EU)이 참여했다.

 

이와 별도로 우리 정부는 미얀마 사태의 해결에 기여하기 위해 국제사회와 지속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아세안은 지난 4월 미얀마 사태 해결을 위해 미얀마 군부와 즉각적인 폭력 중단과 아세안 특사 방문 지원 등 5개 조항에 합의했으며, 8월 에리완 브루나이 제2외교장관을 미얀마 특사로 임명했다.

 

이후 에리완 특사는 미얀마를 찾아 아웅산 수치 국가 고문 등을 만나겠다는 의사를 피력해왔지만, 미얀마 군부는 합의를 깨고 이를 거부하고 있다.

“용의자, 이슬람 개종 뒤 극단적으로 변해”

 

 30대 남성의 활과 화살 공격으로 5명이 숨진 노르웨이의 남부 도시 콩스베르크 광장에 14일 희생자를 추모하는 꽃과 촛불이 놓여 있다. 콩스베르크/NTB via AP 연합뉴스

 

노르웨이의 작은 도시에서 30대 남성이 행인들에게 활을 쏴 다섯 명이 숨진 사건에 대해 경찰이 테러로 의심되는 점이 있다고 밝혔다.

 

노르웨이 경찰은 사건 발생 하루 뒤인 14일(현지 시각) 용의자가 덴마크 출신 에스펜 안데르센 브라텐(37)이라며 “이번 사건이 현재까지는 테러 행위로 보인다”고 발표했다고 <데페아>(DPA) 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경찰은 브라텐이 최근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극단적인 사람이 된 정황이 있다고도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브라텐이 모든 진술을 했고 이번 사건을 저지른 동기도 밝혔지만, 아직 공개할 상황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브라텐의 변호인은 정신과 의사가 브라텐이 정신적으로 범죄를 책임질 만한 상황인지 좀 더 정밀하게 검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 13일 저녁 브라텐은 노르웨이 남부도시 콩스베르크에서 행인들에게 활을 쏴서 최소 5명을 숨지게 하고 2명을 다치게 한 뒤 붙잡혔다. 경찰은 13일 저녁 6시 13분 브라텐이 시내에서 사람에게 활을 쏘고 있다는 신고를 처음 받았다. 경찰은 5분 뒤 현장에 도착했으나, 브라텐은 경찰에게 활을 쏘며 도망치려고 했다. 경찰은 경고사격으로 맞서 30분 뒤 브라텐을 체포했다. 이번 사건 희생자는 모두 50대~70대로 네 명은 여성이고 한 명은 남성이었다.

 

경찰은 브라텐이 콩스베르크에 사는 주민이라며 이번 사건이 단독 범행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는 노르웨이 현지 방송에서 브라텐이 범행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또 그가 전에 여러 번 노르웨이 의료기관에서 진료받은 적이 있다면서도 그것이 정신건강 문제 때문이었는지에 대해선 분명히 하지 않았다. 브라텐의 어린시절 친구라는 사람은 온라인 매체 인터뷰에서 2017년 경찰에 브라텐이 위험하다고 신고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활과 화살은 노르웨이에서 스포츠로 인정되기 때문에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다. 사건 직후 노르웨이에선 조기가 게양됐으며, 콩스베르크의 광장에는 숨진 이들을 애도하는 꽃과 기념물들이 놓였다.

 

이번 사건은 2011년 극우주의자 안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가 차량 폭탄 테러와 총기 난사로 노동당 주최 여름캠프에 참석한 10대들을 포함해 77명을 숨지게 한 뒤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최악의 유혈 테러공격이다. 박병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