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가 숨진 지 24년 만에 <뉴욕 타임스>가 지면에 실은 김 할머니 부음 기사.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서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1924~1997)의 부음 기사가 미국 유력지 <뉴욕 타임스>에 실렸다.
<뉴욕 타임스>는 25일(현지시각) 부음 지면의 절반에 걸쳐 ‘간과된 사람들’(Overlooked)이라는 연재의 하나로 김 할머니의 삶과 증언의 의미를 소개했다. 이 연재는 이 매체가 1851년 이래 보도하지 않은 주목할 만한 인물들의 부음을 다루는 것으로, 김 할머니 기사는 지난 21일 온라인에 공개된 데 이어 이날 지면에 실렸다. 김 할머니가 1997년 12월 폐 질환으로 숨진 지 24년 만의 일이었다. 이 매체는 2018년 3월에는 이 연재에 유관순 열사를 소개했었다.
서울 주재 특파원인 최상훈 기자가 작성한 이 기사는 김 할머니가 1991년 8월14일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로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하던 장면부터 시작한다. 김 할머니의 강력한 증언이 일본의 많은 정치인들이 지금까지도 부정하고 있는 역사를 현실로 바라보게 해줬다고 짚었다. 김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 이후 북한,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등 다른 나라의 위안부 피해자들도 역사의 전면에 나서 자신의 피해를 호소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외면 받아온 ‘전시하 여성의 인권’이라는 문제가 인류가 함께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인권 현안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 기사는 일본군 위안소 운영을 반인류 범죄로 규정한 1998년 유엔 보고서를 작성한 게이 맥두걸 전 유엔 특별보고관이 올해 한 콘퍼런스에서 “내가 보고서에 쓴 어떤 것도 김 할머니의 30년 전 직접 증언이 미친 영향력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고 평가한 사실도 담았다. 역사학자인 알렉시스 더든 미 코네티컷대 교수도 “김 할머니는 20세기의 가장 용감한 인물 중 하나”라며 김 할머니의 초기 증언이 학자들의 연구를 촉진시켰다고 말했다.
1924년 10월 중국 지린 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양부의 손에 끌려 베이징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위안부로 고초를 겪다가 조선인 남성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기사는 남편과 자식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낸 뒤 궂은 일을 하며 살다가 1991년 일본 정부가 위안부 동원을 부인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공개 증언을 결심했다는 점도 소개했다.
김 할머니의 증언 이후 1992년부터 위안부 피해자들이 중심이 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시작했다. 또 1993년에는 고노 요헤이 일본 관방장관이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개입과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가 나왔다. 한국 정부 역시 김 할머니의 첫 회견 날짜인 8월14일을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정해 2018년부터 기념하고 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전두환(90)씨와 함께 12·12 군사쿠데타를 주도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13대)이 26일 숨졌다. 향년 89.
기관지 질환과 소뇌 위축증 등으로 10여년간 투병 생활을 이어온 노씨는 이날 오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하며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됐고, 병원 도착 1시간 뒤인 오후 1시46분 생을 마감했다. 공교롭게도 노씨가 세상을 떠난 이날은 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잡는 계기가 된 10·26 42주년이 되는 날이다.
1932년 12월4일 경북 달성군(현 대구)에서 태어난 노씨는 경북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55년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씨와 함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해 세력을 키우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자 그해 12월12일 전씨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잡았다. 이후 2인자로 군림하며 보안사령관, 체육부·내무부 장관, 12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를 지냈다. 1987년 6월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하는 민주항쟁이 계속되자, 민정당 대선 후보로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양김 분열 속에 치러진 그해 12월 대선에서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2·12 군사쿠데타를 주도하고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관여하면서 ‘전두환의 후계자’로 대통령에 오른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차갑다. 다만 대통령 재임 시절 추진한 북방외교 및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5공 청문회 개최 등은 비교적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대통령 퇴임 뒤인 1995년 11월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된 노씨는 전씨와 함께 재판에 넘겨졌고,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내란죄 등으로 징역 17년, 추징금 2688억원이 확정됐다. 그해 12월 퇴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처로 복권됐다. 노씨는 전씨와 달리 2013년 추징금 전액을 납부했다. 아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은 병상에 누운 노씨를 대신해 2019년부터 올해까지 다섯 차례 광주를 찾아 5·18 유혈 진압에 사과하고 5·18 민주묘역을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옥숙씨와 딸 소영, 아들 재헌씨가 있다. 빈소는 27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이승준 기자
노태우, 응급실에서 임종…서울대병원장 “다계통 위축증 등 투병”
서울대학교병원은 26일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인에 대해 “장기간 와상 상태에 동반된 폐색전증 혹은 패혈증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27일 오전 10시에 마련될 예정이다.
김연수 서울대학교병원장은 이날 저녁 6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의학연구혁신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 전 대통령이 다계통 위축증으로 투병하며 반복적인 폐렴, 봉와직염 등으로 수차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으며 심부정맥혈전증으로 치료를 지속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김 병원장은 “최근에는 와상 상태로 서울대병원 재택의료팀 돌봄 아래 자택에서 지냈다”고 설명했다.
김 병원장은 “노 전 대통령이 하루 전부터 저산소증, 저혈압을 보여 이날 낮 12시45분께 응급실을 방문해 치료했으나 상태가 악화해 오후 1시46분에 서거했다”고 말했다. 노씨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 통증에는 반응했으나 의식이 또렷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가족 중 1명이 노씨의 임종을 지켰다.
노씨 사망 소식이 알려진 뒤 빈소가 미처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도 서울대병원은 취재진들로 붐볐다. 빈소는 27일 오전 10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층에 차려질 예정이다. 2015년 11월 세상을 떠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가장 큰 1호실에 빈소가 마련됐다. 하지만 현재 1호실에 다른 고인의 빈소가 마련돼 있어 노씨의 빈소는 다른 호실에 마련될 예정이다. 딸 노소영 아트센트 나비 관장 등 유족은 이날 오후 장례식장을 찾아 병원과 장례 절차를 논의했다.
한편, 노씨와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로 막역한 친구 사이였던 전두환(90)씨는 건강상의 이유로 조문을 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전씨 측근인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26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망 사실을 이순자 여사를 통해 전 전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 전 전 대통령께서 그 말씀을 전해 듣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고 전했다. 민 전 비서관은 이어 “눈물만 지으시고는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전씨의 빈소 방문 계획을 묻는 말에 “못 가실 것 같다. 거동도 불편하시다. 빈소에 사람들도 많은 것 아닌가. 가서 앉아 계실 수도 없다”고 했다. 이주빈 김윤주 박지영 기자
노태우 유언 “제 과오들에 깊은 용서 바란다”
유족 “장지는 정부와 파주 통일동산 협의중”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7월7일 민족 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 선언(7·7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26일 숨진 노태우 전 대통령 유족들이 노씨가 사망하기 전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고 밝혔다.
노씨 유족들은 이날 저녁 성명을 내어 “많은 분들의 애도와 조의에 감사드리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평소에 남기신 말씀을 전해드린다”며 노씨 유언을 공개했다. 이들은 노씨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또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어 유족들은 노씨가 “자신의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했다고 밝혔다. 유족들은 노씨가 국법에 따라 최대한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기 바랐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장례 절차는 정부와 협의 중이다. 장지는 이런 뜻을 받들어 (대통령) 재임 시 조성한 통일동산이 있는 파주로 모시는 것을 협의 중”이라고 했다. 이주빈 기자
허탈한 5·18단체들 “노태우씨 끝까지 죄인으로 기록될 것”
노씨, 5·18 자위권 발동 건의 회의 동석
보안사령관 취임 이후 유족 분열 유도
노씨 가족, 광주 6차례 방문해 사죄 표명
광주시민 “5·18 왜곡한 회고록 수정 먼저”
노태우 전 대통령(왼쪽)이 전두환씨 등과 함께 1995년 12·12 군사반란, 내란 등의 혐의로 1심 법정에 선 모습.
2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광주 5·18단체와 시민사회는 “광주학살의 진상을 끝내 말하지 않고 떠났다”며 허탈하다는 반응을 내놨다.
5·18 유족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와 5·18기념재단은 이날 오후 성명을 내어 “노태우는 죽더라도 5·18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죄와 고백, 5·18을 왜곡한 회고록을 교정하지 않은 노씨는 끝까지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재만 광주시민단체협의회 상임대표는 “노씨는 5·18 진상규명에 비협조적이었고 공개적인 정식 사죄가 없었다. 전두환씨 등 나머지 신군부 세력들은 세상을 떠나기 전 진정성 있게 사죄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씨와 전씨 등 직접조사를 추진했던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는 당황스럽다는 분위기다. 조사위는 성명에서 “고인은 지난 41년간 피해자와 국민 앞에 진실을 밝히고 사죄할 기회가 있었지만 아무런 언급없이 떠났다. 나머지 핵심인물 35명 등은 지속적이고 엄정하게 조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노씨와 광주의 악연은 5·18 당시부터 시작됐다. 1980년 5월21일 새벽 발포를 의미하는 계엄군의 자위권(자기보호) 발동이 결정됐던 회의 자리에 노씨는 전씨 등과 함께 참석했다. 1980년 8월 전씨 뒤를 이어 보안사령관에 취임한 노씨는 희생자 유족 사찰과 분열유도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노씨는 생전 광주학살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는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를 듣고 시민들이 저항했다”며 책임을 시민들에게 돌렸다. 5·18단체는 회고록 정정을 촉구했지만 노씨 쪽은 반응이 없었다.
노씨 가족은 그동안 여러차례 광주를 방문해 사죄의 뜻을 밝혔지만 광주 시민사회는 회고록 등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8년 2월25일 부인 김옥숙씨가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을 찾아 이한열 열사 묘를 참배한 이후 2019년 8월 장남 재헌씨가 31년 만에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해 노씨 대신 사죄했다. 재헌씨는 같은 해 12월, 지난해 5월, 올해 4월과 5월 광주를 찾았다. 딸 소영씨도 2019년 12월 전남대병원 어린이병원에 1천만원을 기부하며 광주와 인연을 이어갔다.
일각에서는 ‘반성 않는 전두환에 비하면 낫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노씨의 국립묘지 안장을 위한 행보’라는 시선을 받았다. 김용희 기자
전두환, 노태우 사망에 말 없이 ‘눈물’ …빈소 방문은 어려울 듯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에 전두환(90)씨가 눈물을 보였다.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로 막역한 친구사이였던 두 사람은 12·12 군사쿠데타를 함께 주도했다.
전두환씨 측근인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26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망 사실을 이순자 여사를 통해 전 전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 전 전 대통령께서 그 말씀을 전해 듣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고 전했다. 민 전 비서관은 이어 “눈물만 지으시고는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전씨의 빈소 방문 계획을 묻는 질문에 “못 가실 것 같다. 거동도 불편하시다. 빈소에 사람들도 많은 것 아닌가. 가서 앉아 계실 수도 없다”고 했다.
전·노 두 사람은 친구 사이였지만 한편으로는 애증의 관계이기도 했다. 노씨는 전두환 정권에서 제2정무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대한체육회장 등을 지내고, 1985년 2·12 총선에서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에 임명되는 등 2인자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노씨가 대통령이 된 뒤 ‘5공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 관계는 멀어졌다. 두 사람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비자금 사건 등으로 나란히 구속돼 법정에서 손을 잡은 모습이 포착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경욱 기자
전두환 친구에서 후계자까지…‘2인자’ 노태우의 일생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씨가 26일 사망했다. 기관지 질환과 소뇌 위축증 탓에 대외 활동을 삼가며 투병 생활을 이어간 지 10여년 만이다. 향년 89. 노태우씨는 전두환씨와 함께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주도했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에 관여하면서 신군부의 핵심으로 급부상했고 전씨의 후계자로서 대통령까지 올랐다.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시절 ‘6·29 선언’과 대통령 재임 시절 북방·통일정책, 5공 청문회 개최 등은 긍정 평가할 부분이 있지만, 군사반란과 민중학살의 주범이기도 하다. 퇴임 뒤 비자금으로 옥살이를 하고 서훈도 박탈되는 등 말로는 편치 않았다.
전두환 잇는 ‘2인자’로 승승장구
노태우씨는 1932년 12월4일 팔공산 근처인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현 대구시 동구 신용동)에서 노병수와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통사고로 면서기였던 아버지를 일찍 잃은 노씨는 숙부(노병상) 밑에서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구 공산국민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를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11기)에 진학해 그곳에서 동기인 전두환, 정호용을 만났다. 1955년 2월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미국에 유학해 특수전학교 대인심리전 과정을 마친 뒤 귀국해 육사 11기가 주축인 ‘하나회’에 가입했다. 이후 군사정보대 영어번역 장교, 방첩부대 정보장교, 방첩부 방첩과장을 거쳤고, 육군본부에서 정보과장과 방첩과장으로 민심과 정치 동향을 수집했다. 이어 수도사단 대대장, 보병 연대장, 공수특전여단장,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다.
서울에 인접한 고양에 위치한 육군 9사단장이던 그는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자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과 함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 없이 체포하고, 무단으로 군을 서울로 진입시키는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다.
12·12 쿠데타 이튿날 9사단장에서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된 노씨는 1980년 5월17일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군부의 정치 개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그해 8월 전씨가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되자 노씨는 국군보안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듬해 7월 육군 대장으로 전역하고 민주정의당에 입당했다. 이어 제2정무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대한체육회장 등을 역임하고, 1985년 2·12 총선에서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민정당 대표에 임명되는 등 5공화국의 ‘2인자’로 승승장구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후 3당 합당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6·29 선언’ 뒤 대통령 당선…‘북방외교’ 성과
1987년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에 반발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6월 항쟁’으로 국민적 저항이 분출하자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씨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등 8개 항목으로 구성된 ‘6·29 선언’을 발표했다. 6·29 선언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확대를 가져왔지만, 국민 저항으로 정권 유지조차 힘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대증 요법’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씨는 신군부 세력 ‘2인자’의 이미지를 씻고, 전씨와 차별화하면서 대통령 후보로서 위상을 과시하는 효과를 노렸으나, 이마저도 전두환의 ‘후계자 관리 각본’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씨는 1987년 12월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에 “보통사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출마해 36.6%의 득표율로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평화민주당 후보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분열하면서 어부지리로 얻은 승리였다.
그러나 노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해인 1988년 치러진 4·26 총선에서 집권 민정당이 참패해 헌정사상 첫 ‘여소야대’ 국면이 조성됐고, ‘5공 청산’을 바라는 국민적 요구가 분출하자 여야는 그해 11월 5공 청문회 개최에 합의한다. 전두환씨는 당시 국회에 나와 “어떤 단죄도 달게 받아야 할 처지임을 깊이 깨우친다”며 사회에 재산을 헌납하겠다고 발표하고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를 통해 신군부의 광주학살 만행과 일해재단 비자금 모금, 언론통폐합 등 ‘5공 비리’가 상당 부분 드러나긴 했지만, 5·18 당시 발포책임자를 밝혀내지 못하는 등 한계도 뚜렷했다. 노씨는 1989년 12월31일 전씨의 국회 답변을 끝으로 ‘5공 청산 종결’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뒤, 1990년 1월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과의 ‘3당 합당’을 이끌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해 정치적 위기를 모면했다.
노씨는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수교하는 ‘북방정책’에 집중했다. 1989년 2월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최초로 헝가리와 국교를 튼 뒤, 같은 해 폴란드(11월), 유고슬라비아(12월) 등 동구권과 수교를 넓혔다. 이어 1990년 9월에는 소련과, 1992년 8월에는 중국과 각각 수교를 맺었다. 이런 활발한 북방정책은 1980년대 중반기 이후 진행된 소련의 개혁·개방과 동구권의 몰락, 미국의 세계전략 등 ‘외부환경’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그 자체로 상당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노씨는 △1988년 7·7 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1989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및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 등 통일정책에서도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북방·통일정책은 소련 등 북한의 우방과 수교를 통해 북한을 고립시키고 남북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는 게 중평이다. 노씨는 북방정책을 쓰면서도 남북교류를 주장하는 민간교류단체들을 이적·용공단체로 탄압했다. 국민 의견을 배제하고 ‘6공화국 황태자’로 불린 측근 박철언씨에게 의존한 비밀외교였다는 점도 비판받는다.
노씨는 수도권 5개 새도시(분당·일산·평촌·중동·산본)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서해안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KTX), 영종도 신국제공항을 기공하는 등 기반시설 구축에도 박차를 가했다. 전국민 의료보험도 1989년부터 실시됐다. 그러나 노씨가 집권한 6공화국에선 부동산 가격과 물가가 폭등하고 정경유착이 심화됐으며, 수서·한보 등 대형 비리 사건들도 많았다. 수동적이고 자기중심 없는 행동으로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노씨는 자신의 후계자로 박철언씨를 염두에 뒀으나, 통일민주당 출신 민주계를 이끄는 김영삼의 반발과 저항에 갈등을 빚다가 1992년 9월 민자당을 탈당했다. 노씨는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에게 3천억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퇴임 뒤 비자금, 군사반란 혐의로 단죄…오랜 투병 끝 사망
1992년 김영삼 대통령 당선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노씨는 퇴임 2년8개월 만인 1995년 10월19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은행 잔고조회표를 흔들면서 촉발한 ‘노태우 비자금’으로 완전히 몰락한다. 당시 신한은행 이사가 서소문지점장 재직 때 300억원이 입금된 차명계좌를 개설한 사실이 있다고 증언하고, 노씨의 경호실장이었던 이현우씨가 검찰에 자진 출석해 “재임 중 조성해 사용하다 남은 통치자금”이라고 실토하면서 노씨를 향한 국민적 비난이 빗발쳤다. 파장이 커지자 노씨는 그해 10월27일 “재임 중 약 5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비자금 실체를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검찰은 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노씨를 소환조사하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 36명을 불러 조사했다.
노씨는 그해 11월16일 뇌물수수 혐의로 헌정사상 처음 구속되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이어 12월3일엔 전두환씨가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 주도 혐의로 구속됐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따른 신군부 세력 단죄였다. 대법원은 뇌물 수수, 군사반란 혐의 등을 유죄로 인정해 노씨에게 1997년 4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원을 확정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를 두달 남겨둔 그해 12월22일 “국민 대화합의 전기를 마련하겠다”며 노씨와 전씨를 특별사면했다. 그해 12월18일 대선에서 15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씨와 전씨 사면에 동의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6년 3월 참여정부는 12·12 군사반란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관련자 176명의 서훈과 훈장을 모두 박탈했는데, 노씨는 이때 보국훈장 국선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청조근정훈장 등 각종 서훈을 박탈당했다.
구순이 가까운 나이에 파란만장한 삶을 끝마친 노씨는 천식 등 지병이 악화돼 최근까지 10년 이상 대외 노출을 삼가며 투병 생활을 했다. 2011년에는 기관지에서 한방 침이 발견되기도 했고, 올해 4월9일에는 호흡곤란을 겪어 119구급대가 출동하기도 했다. 노현웅 기자
‘내란죄’ 노태우, 현충원 안장되나…국민 정서가 관건
내란죄 특별사면 실효 논란 .. 국가장 여부도 ‘정무적 판단’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한 26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 내 전시관에 노 전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1996년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한 모습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26일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국립현충원에 묻힐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관련 법률에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국립묘지법상 전직 대통령은 국립현충원 안장 대상자이지만 노태우씨는 1997년 내란과 군사 반란 등의 죄명으로 대법원에서 17년형을 선고받았다.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는 내란죄를 지은 사람은 국립묘지 안장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노씨는 복역 중 1997년 1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고 특별사면 대상자의 국립현충원 안장자격에 대해서는 별도 규정이 없다. 이 때문에 노씨와 전두환씨가 고령이 되자 이들이 숨진 뒤 국립현충원에 묻힐 수 있느냐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립현충원 담당 부서인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26일 노씨의 국립현충원 안장과 관련해 “내란죄 유죄 선고 뒤 사면을 받았지만 내란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립묘지법상으로 안장 대상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앞서 2019년 1월 보훈처는 전두환씨 경우에도 “내란죄 사면 복권자는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보훈처의 이런 입장은 국립묘지 관장부서의 행정해석이란 한계가 있다. 앞서 ‘5공 비리’ 수사로 뇌물죄가 확정됐던 안현태 전 경호실장은 사면·복권됐다는 이유로 5·18 단체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2011년 국립묘지에 묻혔다. 당시 안씨 쪽은 “형 선고의 효력으로 인하여 상실되거나 정지된 자격을 회복한다”는 사면법의 내용을 근거로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잃었더라도 사면·복권으로 그 자격을 다시 얻었다고 주장했고, 이명박 정부 보훈처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법 규정의 모호성과 규정 간 충돌로 결국 노씨의 국립현충원 매장을 결정할 잣대는 국민 정서와 이를 고려한 정부의 정무적 판단이다. 국가장 여부도 마찬가지다. 국가장법에서는 △전·현직 대통령 △대통령 당선인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에 한해 국가장을 치를 수 있다고 규정하지만 예우가 박탈된 전직 대통령의 국가장 여부에 관한 명확한 규정은 없다.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날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노씨 장례와 국립묘지 안장과 관련해 “국민들의 수용성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한 정무적 판단이 필요할 수 있다.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절차가 필요하다. 내부 절차에 따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윤영덕·조오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5월 학살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역사적 단죄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노태우씨가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장 예우를, 국립묘지에 안장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5월 단체는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로 처벌까지 받은 사람이 국립묘지에 안장되면 후세 가치관의 혼란을 줄 수 있다”며 반대했다. 권혁철 김양진 기자
‘뻔뻔하다’는 말이 요즘처럼 자주 입가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나 싶다. 세상사 곳곳에서 뻔뻔한 사람과 뻔뻔한 일들을 보고 느끼며 살고 있지만, 요사이 특히 갈등이 심해지고 격렬해진 정치판의 인간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탄식이 잇달아 나온다.
‘뻔뻔하다’의 사전적 풀이는 “부끄러워할 만한 일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염치없이 태연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염치’란 “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그리고 ‘체면’은 “남을 대하는 도리”이다. 얼굴 가죽이 두꺼워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는 ‘후안무치’(厚顔無恥)도 같은 말이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거나 “철면피한 사람”이라는 말들 역시 표현의 차이일 뿐, 뻔뻔과 다를 바가 없다.
애완견을 기르는 이들은 강아지도 잘잘못을 아는 염치가 있음을 안다. 그런데 인간이 후안무치라면, 개만도 못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온갖 거짓과 허풍으로 지구촌에 ‘뻔뻔한 것도 처세술이고 무기’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던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은 여전히 입심이 펄펄하다. 일본 정치를 주무르며 “일본군 위안부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일본판 대표적 뻔뻔 인물 아베 전 총리.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대통령도 그들에 못지않은 뻔뻔함을 뽐낸다. 자신의 비리를 수사하겠다는 연방경찰과 대법관을 “쓰레기”라고 비난하고 여성 국회의원에게 “강간하기엔 너무 못생겼다“고 막말을 뱉어낸 인물. 그는 코로나19 대응 잘못으로 60만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낸데다 경제마저 망친 원흉으로 탄핵요구가 130번이나 나왔지만, ”펜으로도, 판사 결정으로도 나를 끌어내릴 수 없다“고 버텨 선량한 브라질인들을 울분케 한다.
한국은 다른가? ‘K문화’의 열풍이 무색한 최고반열의 뻔뻔인사들이 뒤질세라 설쳐댄다.
상관인 참모총장에게 총을 겨눠 반역하고 수하 무리들을 동원해 정권을 찬탈한 쿠데타 주역 전두환은 저항하는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은 학살자로 역사에 이름을 올린 자다. 그가 법의 심판과 국민적 단죄를 받긴 했지만, 40여년 지난 지금껏 단 한 번도 사죄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재산 29만원’등의 뻔뻔한 단어만 맴돌 뿐이다.
그런 뻔뻔한 자를 칭송하는 ‘더 뻔뻔한 자’가 나와 다시 국민적 분노를 돋우고 있다. “전두환이 5.18과 쿠데타를 빼고는 정치를 잘했다”고 추켜세운 망발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온 전 검찰총장이다. 현직을 그만 두자마자 정치판에 뛰어들어 검찰과 정치 모두에 오물을 덧씌우고도 그의 뻔뻔한 언행의 행로는 그칠 줄을 모른다. “배울 점이 있다는 취지였다“며 해명이랍시고 궤변을 늘어놓는 그의 수준이하 본질과 감출 수 없는 본색은 ‘뻔뻔 일지’에 추가될 때마다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 곤혹스럽다.
그는 수많은 가족비리와 의혹의 증거에도 ”음해”라고 강변한다. 검찰총장 재임 중 대통령 인사권을 무시하고, 항명을 일삼은 언행을 국민들이 똑똑히 보았는데도 “정권에 맞섰다”고 호도한다, 검찰권을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증거들, 법무부의 징계가 부족할 지경이었다는 법원의 판결에도 황당하다고 되레 발끈했다. 손바닥 ‘왕’자 소란과 주변 주술인들 증언에도 “옆집 할머니” 운운 우겨댔다. 오히려 다른 대통령 후보들의 ‘눈에 티’를 맹공하는 그에겐 자신의 눈 속 ‘들보’가 뻔뻔의 훈장인 것인지, 단 한 번도 잘못이나 사과를 입에 올린 적이 없으니 참 뻔뻔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하나님의 추궁에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열매를 주어서 먹었노라고 ‘여자를 주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다. 하와도 마찬가지,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들러댄다. 자기들 잘못은 없다는 뻔뻔의 원조다. 에덴에서 쫓겨난 그들의 원죄는 아들 가인에게로 흘러 동생을 쳐죽이는 살인죄로 발전한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문책에 그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죄에 무감각한 채 도리어 왜 나를 지목하느냐는 뻔뻔함의 전형을 드러낸다.
그렇게 ‘뻔뻔’의 역사는 인류사와 함께 해왔다. 그리고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뻔뻔한 자들은 항상 죄와 악의 편이요, 거짓과 어둠과 불의의 세력이며, ‘트러블 메이커’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빛과 진실, 양심과 선과 정의를 미워하고 두려워하여, 뻔뻔의 두꺼운 장막 뒤에 숨어 내로남불-아전인수의 변명과 궤변을 찾는 공통점이 있다. 선을 악으로 이기려다 보니 본질 흐리기, 물타기, 되치기 등 온갖 사악한 수법을 동원하고, 갈등과 이간질, 분열과 다툼을 조장하는 완력의 발버둥을 친다. 친일 매국노들, 쿠데타 독재일파, 국정농단 세력이 그랬다. 인류 역사상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만 보아도 거의가 뻔뻔한 인물들이었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랬고, 일제의 도조 히데끼를 비롯한 전범들, 6.25를 일으킨 김일성이나 배후의 스탈린 같은 인물들….
뻔뻔한 자들의 실체를 모르면 불행과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정체를 알고도 방관하거나 환호하면 평화와 정의를 거스른 역사의 죄인들이 된다. 그들을 옹호하며 즐기는 세력의 교활한 속셈 또한 알아내고 경계하지 않으면 큰 낭패와 곤욕을 치르게 된다. < 김종천 편집인 >
포스트 코로나 시대 변화된 상황 속에서 한인교회와 목회의 새로운 방향을 고민하고 모색하는 목회자 컨퍼런스가 본 한인교회(담임 고영민 목사) 주최로 지난 10월17일 주일 오후 7시부터 온라인 화상모임으로 열렸다.
온타리오 한인교회협의회(회장 이요환 소금과 빛 염광교회 담임목사)가 후원하고 한국 포항제일교회 박영호 담임목사(시카고대학 박사, 전 한일장신대 교수)와 목회데이터연구소 지용근 대표(지앤캠 리서치 대표)를 강사로 열린 이날 컨퍼런스에는 온타리오 각지는 물론 캐나다 동-서부 전국에서 40여명의 한인 목회자가 참여해 3시간 가량 심도있게 진행됐다.
모임은 고영민 목사의 사회로 이요환 목사가 개회인사와 시작기도를 하고 박영호 목사가 ‘포스트 코로나시대의 교회론’제목의 강의를 한 뒤 최재만 목사(한우리교회 담임)의 논찬이 있었다. 이어 지용근 대표의 ‘코로나 이후 목회방향’강의와 노희송 목사(큰빛교회 담임)의 논찬, 그리고 질의응답을 가진 뒤 송민호 목사(토론토 영락교회 담임)가 격려인사를 한 후 마무리 기도로 마쳤다.
이날 박영호 목사는 코로나 팬데믹을 전후한 경제 사회적 변화 속에 달라진 인류의 삶과 가치관 및 탈종교화 추세 등에 직면해있는 교회의 현실을 분석하고, 급변하는 패러다임에 어떻게 적응해 나갈 것인지를 제언하는 주제를 다뤘다. 지용근 대표는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통계분석 자료를 제시하며 교회와 목회가 처한 상황과 미래를 조망하면서 활로를 찾아야 할 과제와 도전을 주었다.
논찬과 질의응답에서는 이민교회의 특성과 디지털 및 노령화 시대 교회와 목회의 방향, 신앙성숙을 위한 방법론 등이 논의됐다.
행사를 주관하고 진행한 고영민 목사는 이번 컨퍼런스에 대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 목회를 고민하는 데 귀한 조언과 화두를 던져주었다고 본다”고 자평했다. 고 목사는 이어 “앞으로의 목회방향을 공동으로 모색해 나가는 또 다른 시작이었으면 좋겠다”면서 “선교적 목회, 소그룹, 제자훈련 등 중요한 목회적 이슈들을 나누는 지속적인 모임이나 포럼으로 발전시켜 캐나다 전체의 이민목회 생태계를 건강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하며, 구체화에 노력하겠다”고 밝히고 한인 목회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교회론’ 주제 박영호 목사 강의 요지
"성장문화 선도한 교회, 이젠 그 역풍 직면... 겸손해져야"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바벨론 포로시대는 수십 년을 견뎌야 하는 상상하기 힘든 시기였는데, 예레미아 29장 7절 말씀은 그들의 탁월한 현실적응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언제일지 모르는 고난이지만 삶에 최선을 다하며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역사였고, 모른 채 따라가다 보니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알게 되는,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옥에서 나와 깨달은 것 같은 압축적인 성경의 예시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포로상황에서도 하루 3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습성을 견지한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교회의 여러 현실을 보자. 한국 뿐 아닌 세계교회 모두 구심력이 약화됐다. 온라인이 일상화되면서 예배를 꼭 교회에서, 그 시간에 드려야 하나, 목사만 설교해야 하나 등 교회의 거버넌스에 문제가 생겼다. 개신교는 그 부분에 탁월하다고 믿었는데, 코로나 상황 속에 가톨릭보다 못한 상황으로 침몰한 것이다.
경제성장 신화의 첨병으로 자본주의적 인간형의 사고와 문화를 만드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교회였다. 성장신화와 ‘복 받음’의 혜택을 누려오다 극심화된 상황에서 코로나가 닥쳤고, 방역에서 최우선 가치가 경제 지키기, 곧 돈이다 보니 이제 교회는 그 뒷전으로 밀려나는 상황으로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 그렇잖아도 전세계적 탈종교화에서 한국은 가장 속도가 빠른 곳이다. 거기에 코로나 방역에서 가장 앞선 한국, 코로나 걱정도 세계 최고인 한국인들의 비난 문화에서 교회가 방호막이 되어주기는 커녕 일부 교회의 감염문제로 오히려 비난이 교회에 쏟아지며 당황하게 되었다.
전세계적으로 이젠 ESG(Environment 환경, Social 사회, Governance 지배구조) 지속가능한 투명 경영문제가 기업 뿐 아니라 각 부분으로 확산되면서, 교회에도 신학적 충돌과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요구되는 시대에 와 있다.
또한 다음세대는 청소년이 아니라,노년이라는 시대가 오고있다. 고령화 사회 속에 이민사회의 경우 언어와 문화적 고충, 디지털 문화 열등감 등의 고민에 싸인 노년세대를 잘 품고 가야하는 것도 교회의 과제인데, 은퇴 후 30~40년 사는 노년세대에 대한 연구가 너무 부족하다.
1인 가구의 증가현상도 있다. 요즘엔 가족을 강조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코로나 이후에는 인간론적 담론, 기본적인 인간의 본성과 생태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대처해야 하는데, 보수적 교회일수록 예수 말고는 달라질 게 뭐냐는 문화적 충격에 직면한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성장과정에 서구문화를 바탕으로 가장 앞서있던 교회가 이제는 가장 뒤진 집단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최근 한국의 문화콘텐츠가 세계를 휩쓸면서 이민교회가 이를 잘 활용하면 젊은이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높이고 교회로 인도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현대 경제번영의 시대에 종교의 역할은 ‘떡’으로 만이 아닌 뭔가 공감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인데, 성경적 코이노니아가 바로 중요한 본질적 지혜가 되진 않을지. 코로나 격리로 인해 커진 만남의 그리움을 실천하는, 마스크 벗고 율법적이 아닌 진짜 친밀하고 신실한 소그룹 모임을 갖는다면 바로 모세의 친족개념이 아닐까.
한국교회는 또한 너무 추상적이고 아이디얼 하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구름잡듯 하는 이상적 교회를 말들 해 듣기에는 그럴싸하나, 학자나 지식인이 비판하기는 쉬워도 추상적인 담론에 그칠 뿐이다. 그래서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건물이 교회가 아니다
라고할 때 출발점은 겸손한 교회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킨다며 교만해지고 갈등이 커지는 만큼 내 눈의 들보를 보는 태도로 겸손해져야 함이 중요하다.
우리는 각자의 현실에 맞게 서로 영감을 주면서 방법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본다.
[논찬] 최재만 목사
포스트 코로나 시대 목회의 실제를 함께 고민할 다양하고 방대한 실천적 제안을 해주어 감사하다. 아쉬운 점은 한국과 북미교회의 현실이 다르다는 점에서 이민교회가 직면하는 색다른 문제들을 좀더 다뤄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 개개인의 밀접한 친밀도로 성장한다는 목표를 세운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 실제적인 연합의 방법은 뭘까 고민되는 데, 각자의 삶과 상황에 맞게 찾아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바벨론포로 된 유대인들 공동체,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고난 중에도 예배의 관습을 이어감으로서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는 말씀인가.
‘코로나 이후의 목회방향-한국교회 변화와 추적’ 주제 지용근 대표 강의요지
"온라인 예배 새 포맷 필요...소그룹 활동 강화도 활로"
한국은 출산율이 최저수준이다. 지난해 30만명 아래 27만명, 올해는 24만명으로 예상된다, 반면 고령화는 빠르게 진척돼 2045년 65세 이상이 37%, 2067년에는 국민 반이 될 것이다. 30년 뒤 2050년 경제활동 가능인구가 51%로 줄어들어 젊은이 한명이 노인 한 명을 먹여살려여 한다. 개신교도 고령화로 60대 이상이 23%인데 10년 후에는 34%로 증가가 예상된다. 따라서 교회의 노년층 사역이 중요해지고 있다.
코로나 블루로 20~30대의 우울증 위험군이 지난 한해 사이 18%에서 23%로 늘었다. 자살률은 OECD 1위로 연간 1만3천여 명에 달하며, 20대가 가장 많다. 소득 양극화로 하위 20%의 순자산에 비해 상위 20%의 순자산은 167배나 된다. 이런 가운데 탈종교화가 심화돼 무종교가 60%에 달한다.
코로나 이후 교회의 사역은 20~30% 수준으로 줄었고 주일학교는 42.2%가 감소해 가장 심각하다 .장년은 30%, 헌금 25%, 구제 봉사는 37.2%가 줄었다. 신앙도 약해졌다는 응답이 30%나 된다. 코로나 이후 신앙도 양극화가 심화됐다. 특히 온라인 예배자의 신앙약화가 두드러진다.
코로나 이후 3명중 2명, 66%는 온라인으로 주일예배를 대체할 수 있다고 했고, 그 중에 51%는 타교회의 온라인 예배를 들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가나안’성도의 온라인 참여율은 지난해 21%에서 올해는 36%로 늘어난 점이 눈에 띈다. 온라인 예배 만족도는 83%로 높은 편이다. 현장예배는 89%, 가정의 방송예배는 66%가 만족스럽다고 했고, 예배를 드리며 찬양을 함께 하는 경우는 58%, 가만히 듣는 경우는 42%였다. 온라인 예배자를 위한 별도의 포맷을 개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종식 후 현장예배에는 78%가 참석할 것이라고 답했고, 5%는 온라인을 계속하며, 15%는 현장과 온라인을 병행하겠다고 말했다.
목회자들은 코로나 이후 교인이 감소할 것이다 57%, 변함 없을 것이다 25%, 증가할 것이다 16%등으로 예상했다. 그에따라 목회중점은 주일 현장예배를 강화하겠다 45%, 공동체성을 강화하겠다 29%, 온라인 강화 13%, 온라인 시스템 구축과 콘텐츠 개발 38% 등으로 답변했다. 또 주일예배를 계속 중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52%가 현장과 함께 하겠다고 답했고, 현장예배만 드릴 것이라고 한 비율은 41%였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온라인을 끊으면 30%가 교회에 가지않겠다고 말한 점이다.
교회학교 감소 속도는 일반 학령인구 감소보다 6배나 빠르다. 이는 부모 자신과 청소년 모두 신앙생활이 소홀해졌다고 답한 경우가 53%에 이른 것에서도 볼 수 있다.특이한 것은 코로나 이후 부잣집 아이들의 신앙이 좋아졌다는 사실이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청소년의 대부분은 예배 전 72%, 후 85%가 유튜브로 음악과 게임, 오락 드라마 등을 본다고 했다. 그에 맞는 대책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유튜브 선호가 강해서 10~20년 후에는 온라인을 하지않는 교회는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부모가 자녀들이 신앙을 잘 이어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는 19%였고, 비슷할 것 47%, 못할 것 27% 등 이었는데, 부모가 자녀의 신앙교육 방법을 잘 모른다 48%, 자녀 신앙교육 방법을 받은 경험이 없다는 부모는 73%나 돼 교회의 부모대상 자녀 신앙교육이 절실함을 나타냈다. 자녀 신앙교육 영향은 어머니가 32%, 아버지 13%로 1,2위였고, 그 다음이 목회자였다. 그리고 주일예배를 드리는 가정의 자녀들의 긍정적 지표가 다방면에서 높게 나와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코로나 이후 교인들의 소그룹 활동이 크게 위축됐는데, 개인 신앙유지에 가장 도움을 받은 것은 소그룹이고 리더와 멤버로 섬김이라고 했다. 정기적인 소그룹 활동자들의 가정 신앙지표가 긍정적이라는 답변이 10%에서 30%가 높았다. 미국 남침례교단의 톰 레이너 박사가 5년을 추적 조사한 결과 소그룹을 통해 교회 활동이 5배나 늘고 86%의 성도가 교회에 남아 교회가 건강해지면서 ‘교회의 뒷문을 닫게’도와준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큰 교회들의 소그룹활동과 성과가 두드러진데, 작은 교회들에게 더 소그룹 활동이 대안이 아닌가 여겨진다.
[논찬] 노희송 목사
캐나다를 보면 주류교단이 먼저 쇠퇴하고 그 여파가 이민교회에 몰려오는 것 같다. 탈종교화하는 이들, 특히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코로나 이전부터 이미 노년세대 기성세대가 교회를 지탱해왔고, 청년과 여성리더십 보다 목회자 중심 주입식이 아니었나 부족을 고민한다. 다니엘이나 느헤미야 같은 디아스포라적 신앙생활로 이민교회가 한국교회에 희망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예배자가 아닌 시청자로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이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겠다. 한국교회의 소그룹이 큰교회에서 더 잘 이뤄지는 것은 작은 교회들이 적극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