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CBS 인터뷰에서 왕실과 불화 인정
‘아들 피부색 걱정하는 이들 있었다’ 주장
해리 “아버지 내 전화 안 받아…실망했다”

 

영국 해리 왕자와 메간 마클 이 7일 방송된 미국 <C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야기기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영국 해리 왕자의 부인 메간 마클이 7일 저녁 미국 <CBS>에서 방송된 인터뷰에서 “왕실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오프라 윈프리가 진행자로 나선 이 인터뷰에서 마클은 “더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아주 분명하고 끔찍하고 거듭된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해리 왕자)가 부드럽게 안아줬던 것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자해하거나 자살을 생각했느냐는 취지의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했다. 마클은 왕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영화배우 출신인 마클과 해리 왕자는 지난 2018년 세계적 주목을 받으며 결혼했으나, 지난해 왕실 가족으로서 공식 역할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부부는 언론과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가정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지만, 왕실과의 불화설이 끊이지 않았다.

흑인과 백인 혼혈인 마클은 왕실의 인종차별 의혹도 제기했다. (왕실) 주위에서 2019년 태어난 아들 ‘아치’의 피부색이 걱정스럽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는 주장이다. 마클은 “임신했을 때, 아이가 태어나면 피부색이 얼마나 어두울지 우려와 대화들이 오갔다”며 “그들은 그(아치)를 왕자로 만들기를 원치 않았다”고 말했다. 마클은 누가 아치의 피부색을 문제 삼았지는 밝히지 않았으며, 이름을 언급하면 “매우 해가 갈 것”이라고만 했다. 해리 왕자도 “그 대화를 공유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마클은 “나는 왕실 가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환경에 자랐기 때문에 순진한 상태에서 그곳(왕실)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마클은 “왕실로부터 보호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왕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에 대한) 거짓말도 하려 했다”고도 주장했다. 다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언제나 나에게 멋진 분이었다”며 선을 그었다. 해리 왕자는 아버지인 찰스 왕세자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실망했다. 그(찰스 왕세자)는 (나와)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해리 왕자는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파파라치의 추격을 받다가 교통사고로 숨진 어머니 다이애나 왕세자비도 언급했다. “나는 (어머니가) 이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매우 화가 나고 슬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내와 함께 여기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정말 기쁘고 다행이다. 그 세월 동안 어머니가 혼자서 이런 과정을 겪었을 때 어땠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부부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다. 부부는 올해 초 둘째를 임신했으며, 둘째는 여자아이라는 사실도 인터뷰에서 공개했다.

영국 왕실은 이 인터뷰를 나흘 앞둔 지난 3일 마클이 왕실 직원을 괴롭혔다는 의혹을 조사하겠다고 밝혀, 해리 왕자 부부를 둘러싼 왕실 내부의 알력과 갈등, 그리고 상호 비방전이 표면화됐다. 조기원 기자

 

윈프리 “아치 피부색 얘기 꺼낸 건 여왕 부부는 아니다”

“인종차별이 영국 떠난 큰 이유…영국 타블로이드들 편협해”

 

영국 왕실과 결별하고 미국에 거주 중인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 왕자비가 유명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와 독점 인터뷰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영국 해리 왕자 부부와 인터뷰한 미국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8일 이들 부부의 아들 피부색과 관련해 얘기를 한 인물이 여왕 부부는 아니라고 말했다고 BBC가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윈프리는 CBS에 해리 왕자가 "그 말을 한 사람을 알려주진 않았다"면서도 "여왕 부부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기회가 닿으면 이를 알리길 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녹화 중에나 카메라가 꺼졌을 때도 발언자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결국 답을 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해리 왕자는 CBS에 독점 방영된 인터뷰에서 "아들이 태어났을 때 피부색이 얼마나 어두울지 등에 대한 우려와 대화들이 오고 갔다"면서 "그들은 그를 왕자로 만들기를 원치 않았다"고 주장했다. 윈프리는 인터뷰 중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이날 CBS가 공개한 새로운 영상에서 해리 왕자는 인종차별 때문에 영국을 떠났느냐는 질문을 받고 "많은 부분이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영국 언론사 데스크급들과 친한 이로부터 "영국은 아주 편협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때 자신이 "영국이 아니라 영국 언론, 특히 타블로이드들이 편협하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그는 "불행히도 정보 공급처가 부패했거나 인종차별적이거나 치우쳐있다면 그것이 나머지 사회로 흘러간다"고 덧붙였다.

해리 왕자 부부는 영국 대중지와 오래전부터 긴장관계에 있으며 소송도 여러 건진행 중이다.

영국 언론이 다른 왕실 일가에는 어떤 태도냐는 질문에 마클은 "무례한 것과 인종차별주의자인 것은 같지 않다"고 답했다.

그는 "사실이 아닐 때는 방어해주는 언론팀이 있는데 우리한테는 작동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윈프리가 '떠나게 된 것에 대해 다른 식구들로부터 사과를 받았냐'고 묻자 해리왕자는 "슬프게도 그렇지 않다"며 "이건 우리 결정이니 결과도 우리가 책임지는 것이란 느낌"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마클 폭로에 영국도 관심폭발…왕실 대신 '지원사격' 쏟아져

영 - 미 온도차 "해리 왕자는 미국이 자기 가족을 미워하길 바란다“

 

해리 왕자 부부 인터뷰가 영국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미국과는 반응에 온도차가 역력하다.

이들 부부가 던진 인종차별 의혹 등에 관해 왕실은 아직 침묵하고 있고 대신 인터뷰 자체를 비판하는 '지원 사격'이 대거 쏟아졌다.

8일 BBC를 포함해 영국 언론들의 웹사이트에는 일제히 해리 왕자 부부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다. 마클은 이날 영국 조간신문 1면 지면도 거의 독차지했다.

진작부터 '폭탄 발언'이 나올 것으로 예상됐지만 인터뷰 내용은 이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는 반응이다.

더 타임스는 '해리와 메건의 인터뷰 폭로는 왕실이 걱정한 것보다 더 심하다'라는 제목의 분석기사를 실었다.

 

영국 왕실과 결별하고 미국에 거주 중인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 왕자비가 유명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와 독점 인터뷰를 하는 모습. 두 시간짜리 인터뷰는 미 CBS에서 7일 황금시간대인 밤 8시에 방영됐다. 마클은 왕자비로서 왕실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침묵하고 지내야 했으며, 왕실이 '피부색'을 우려해 자기 아들 아치를 왕족으로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다고 인종차별 의혹까지 제기했다. [하포 프러덕션 제공]

 

왕실을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리는 미국 언론과 달리 영국에서는 인터뷰 자체를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왕실 전기 작가 페니 주노는 BBC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들이 프라이버시를 원한다면서 왜 이런 인터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마클 갑질'과 관련해서 왕실에서 할 말이 훨씬 많을 것이라면서도 "정말 품격 떨어지는 보복전이 됐다. 왕실이 여기에 들어가고 싶어할까?"라고 말했다.

역시 왕실 전기작가인 애너 패스터낙은 BBC 아침방송 인터뷰에서 인터뷰가 "매우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며 "메건의 입맛에 맞는 연속극 느낌이었다. 아무도 메건과 아버지의 관계나, 왜 결혼식에 메건 식구는 단 한 명만 온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방송인 피어스 모건은 '여왕을 완전히 추하게 배신한 인터뷰'라고 규정하며 "해리는 미국과 세계가 자기 가족, 왕실, 국가를 미워하길 바란다"고 성토했다.

 

해리 왕자 인터뷰 시청하는 미국인들 [AFP=연합뉴스]

 

1990∼1997년에 여왕의 공보비서를 지낸 찰스 앤슨은 텔레그래프 인터뷰에서 "왕가 내에 인종차별은 한가닥 흔적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해리 왕자 부부 결혼식 때 "환영하는 느낌이 압도적이었다"고 말했다.

트위터에는 이들 부부의 '서섹스 공작' 직위까지 박탈해야 한다는 글들이 올라왔다고 데일리 메일이 전했다.

마클의 유명한 지인들이 미국에서 지지 글을 올리는 것과는 상반된 분위기다.

한 노동당 의원이 스카이뉴스 인터뷰에서 왕가 인사가 해리 왕자 부부 아들의 피부색과 관련해 얘기했다는 의혹에 관해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비키 포드 아동 담당 정무차관은 BBC 인터뷰에서 "인종차별은 우리 사회에 설 자리가 없다"고만 말했다.

왕실은 아직 반응이 없다. 다만 인터뷰 몇 시간 전에 여왕의 영연방의 날 인터뷰가 방영돼서 해리 왕자 부부의 '드라마'에 관계 없이 왕실은 의무를 다 한다는 메시지를 줬다는 분석이 나왔다.

스카이뉴스는 적어도 인종차별과 자살 생각 문제와 관련해서는 왕실에서 답변이 나와야 한다는 압박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 공보비서 앤슨은 "여왕이 69년간 해온 대로 할 것"이라며 "가족 문제를 세계에 까발리지 않고 사적으로 처리하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클,500만원대 아르마니 입고 인터뷰…해리왕자 옷은 70만원대

아르마니 드레스 속 연꽃 의미는 '재탄생' '왕실에서 독립' 나타내

해리 왕자는 재작년 첫아들 공개 때 입은 옷과 거의 비슷

 

영국 해리 왕자 부인 메건 마클이 7일 미국 CBS방송에서 방영된 인터뷰에서 연꽃이 새겨진 드레스를 입은 이유는 부부가 왕실에서 독립된 주체로 '재탄생'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나왔다.

마클은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와 한 부부 동반 인터뷰에 흰색 연꽃이 상반신 오른편에 수 놓인 검은 실크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품으로 가격은 4천700달러(약 532만원)다.

왕실에서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등 마클의 폭로와 함께 드레스도 인터뷰 방영 직후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마클이 세계인이 지켜보고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인터뷰에서 입을 드레스를 고르면서 옷이 주는 메시지를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왕실의 이혼'이 화제가 되면 찰스 왕세자의 아내 고(故)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결혼생활과 파경에 관해 폭로한 1995년 BBC방송 인터뷰가 여전히 재소환된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이날 관심은 연꽃에 특히 집중됐다.

NYT와 월간지 '타운앤드컨트리' 등은 마클이 드레스를 선택할 때 연꽃의 상징성을 특히 고려했다고 전했다.

재탄생을 상징하는 연꽃이 수 놓인 드레스를 입은 것은 '부부가 독립체로 재탄생'했고 '왕실과 확실히 분리됐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연꽃은 '부부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는 의미와 앞으로 태어날 둘째 아이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언론들은 분석했다.

언론들은 연꽃이 가혹한 환경에서도 피어난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했다.

 

7일 미국에서 방영된 영국 해리 왕자 부부 인터뷰를 지켜보는 사람들. [EPA=연합뉴스]

 

NYT는 마클이 비싼 드레스를 입은 것을 두고 "드레스를 입은 사람의 피해자성과 '고통 속에서 회복하고 있음'을 나타내기에는 다소 모순이 있다"라고 짚었다.

해리 왕자는 인터뷰에 '제이크루 루드로우'의 회색 정장을 입고 나왔는데 자켓은 425달러(약 48만원), 바지는 225달러(약 25만원)다. 그는 재작년 5월 첫째 아들 아치의 모습을 공개했을 때도 거의 비슷한 옷을 입었다.

이날 마클의 드레스와 함께 그가 다이애나빈 소유였던 카르티에 '다이아몬드 테니스 팔찌'를 찬 점도 주목됐다.

부부는 해리 왕자의 어머니인 다이애나빈이 부부와 함께 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이 팔찌를 착용하기로 했다고 피플지는 전했다.

이와 함께 마클은 아쿠아주라의 695달러(약 78만원)짜리 힐과 캐나다 브랜드인 '버크스'(Birks)의 귀걸이, 영국 디자이너 피파 스몰의 목걸이를 착용했다.

현재 마클은 과거 두 차례 공식석상에 사우디아라비아 실권자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선물한 귀걸이를 착용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상태다.

빈살만 왕세자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한 배후로 지목됐다.

마클은 2018년 피지 순방 시 귀걸이를 착용했는데 당시는 카슈끄지가 암살되고 3주 후였다.

카슈끄지가 숨지기 전 설립한 인권단체를 이끄는 마이클 아이즈너 변호사는 데일리메일에 "(마클이 착용한) 귀걸이는 살인자가 피 묻은 돈으로 사들여 선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폭스뉴스에 따르면 이 귀걸이는 애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선물된 것이었다. 연합뉴스

미얀마 근세사... 쿠데타 배경과 전망 

60여년 집권한 군부의 선택은…미얀마 미-중 사이에서 줄다리기?

 

 

전 세계적으로 군부가 퇴조한 가운데, 미얀마 군부는 어떻게 60년 이상 정권을 유지했을까?

미얀마는 지난 2월1일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군정으로 돌아갔다. 시민들은 연일 쿠데타에 저항하는 거리 시위를 벌이고, 군부는 발포도 마다하지 않는 강경 진압에 나서는 대치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사태를 이해하려면, 크게 세 가지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160여개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고 영국 식민지를 거친 미얀마의 특수한 역사, 그 속에서 군부의 역할과 위상, 여기에 더한 국제사회의 지정학적 변화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축을 바탕으로, 미얀마 군부 쿠데타의 향방을 문답 형식으로 전망해본다.

 

-미얀마에서 군부가 장기 집권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이 나라 현대사에서 군부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 때문이다. 작금의 쿠데타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미얀마에서 군부는 건국과 독립은 물론 이후 국정을 주도한 정치 세력으로 그 만큼의 지분을 행사해왔다. 소련과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집권한 뒤 당 중심으로 권력을 운용했다. 미얀마에서는 독립과 건국 주도 세력이 군부로 남아, 권력을 승계해왔다. 군부라는 외피를 쓰고 있었을 뿐이다.

미얀마의 원형은 서기 11세기부터 국토의 중심인 이라와디강 유역에 자리잡은 버마족 왕국이다. 몇차례 왕조가 교체되다가 19세기말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인도를 거쳐 침공한 영국은 당시 버마와 세차례나 전쟁을 벌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영국의 식민통치에 본격적으로 저항해 독립과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현재 군부의 기원인 버마독립군이다.

 

-버마독립군 세력이 어떻게 건국 중심 세력이 됐는가?

=버마독립군은 현재 군부에 의해 구금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이 일본에서 결성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아시아에서 영국 세력을 축출하자, 아웅산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버마 독립을 추구했다. 아웅산의 버마독립군이 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편에 선 것이 현재 미얀마 비극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일본군이 영국 식민지인 버마를 침공할 때, 아웅산의 버마독립군이 동참하기도 했다. 반면, 미얀마의 소수민족들은 영국 등 연합군 쪽에 섰다. 다수민족인 버마족 중심의 미얀마가 줄곧 서방 세계와 불화한 배경이다.

버마족 지도자인 아웅산은 1947년 미얀마 소수민족과의 협상을 통해 연방국가를 건설하는 ‘팡롱협정’을 맺었다. 아웅산은 임시정부인 미얀마행정위원회 부의장으로 취임해, 건국 작업을 하다가, 같은 해 정적에 의해 암살됐다. 그가 암살된 뒤 건국된 버마연방에서 초대 총리 우누 등 친서방 세력이 집권했다. 우 누는 아웅산과 달리 무장 독립투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건국 주도 세력인 네윈 등 버마독립군은 군부로 남았다.

 

-건국 초기 군부가 국정을 장악하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군정이 성립된 것인가?

=독립 이후 지속된 소수민족과의 분쟁이 가장 큰 배경이다. 이에 더해 중국 국공내전에서 패한 국부군이 북부 국경지대를 점령한 것도 한 원인이다. 소수민족의 무장투쟁과 국부군에 대처하면서, 군부에게 권력이 집중됐다.

미얀마는 총 160여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로, 이중 정부가 인정하는 소수민족만 135개다. 언어도 100여개가 넘는다. 건국의 바탕인 팡롱협정도 소수민족들과 연방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건국 이후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버마족 위주의 중앙집권적 통치가 이뤄지면서 소수민족들이 독립과 자치를 요구하는 무장투쟁이 분출했다. 북서부 변경주인 샨주의 샨족, 북부의 카친족, 남부의 카렌족 등은 독립 이후 지금까지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미얀마는 독립 이후 지금까지도 기술적으로는 내전 상태다.

국부군 패잔부대가 북부 접경 지대를 점령한 것은 더 심각한 위기였다. 미얀마는 중국과 갈등의 역사가 있는 데다, 국부군 패잔부대들이 주변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에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내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네윈이 이끄는 군부의 권력이 커졌고, 허약한 우 누 정부는 1958년 네윈에게 임시총리를 맡아줄 것을 요구하며 권력을 넘겼다. 네윈은 선거로 다시 구성된 정부에 권력을 넘겼다가, 1962년에 쿠데타로 집권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군정의 길을 열었다.

 

-소수민족 문제는 언제부터 비롯된 것인가?

=소수민족 문제는 군정뿐 아니라 미얀마라는 나라의 최대 모순이다. 미얀마의 현재 영역은 영국 식민통치 때 성립됐다. 이라와디강 유역의 다수민족인 버마족이 주변 지역에 영향력을 갖기는 했으나, 과거에는 이런 영역이 성립된 적은 없었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때 영국과 프랑스가 남아시아에서 세력분할을 하면서 타이 서쪽이 영국 세력권으로 획정됐고, 영국은 현재의 영국령 버마를 만들었다. 영국도 처음에는 남부 버마, 북부 버마, 변경지역 3개의 별개 지역으로 통치했다.

버마족은 팡롱협정에 의해 건국된 미얀마를 자신들의 중앙집권적 국가로 여겼다. 반면 나머지 소수민족들은 과거보다 자치나 독립의 공간이 줄었다고 생각한다. 군부가 ‘버마족의 국가’ 미얀마를 지키는 보루로서 기능한 것이 군정 지속의 배경이다. 이 때문에 영국 인류학자 에드먼드 리치는 미얀마를 “지도 제작자들의 소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대 정치지도 위에 표시된 버마는 자연스런 지리적 혹은 역사적 실체가 아니다”라며 “19세기말 영국 제국주의 무력 외교와 행정 편의의 창조물”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에서 군부독재는 냉전과 분단을 배경으로 한다. 미얀마에서는 군정이 제도화된 셈인데, 국제적 배경이 있지 않나?

=미얀마 역시 냉전 전후의 지정학적 정세가 결정적이었다. 미얀마 군부는 반서방 버마민족주의에다가 사회주의 성향이었다. 군부는 미국과 영국이 미얀마를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만들려고 소수민족 분리독립을 부추긴다고 봤다. 군부가 건국 초기 국부군 패잔부대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중국 인민해방군과 협력하며, 중국과의 관계가 밀접해졌다.

1960년대 이후 베트남전 등 인도차이나 전쟁 발발은 군부정권의 반서방 노선을 더욱 강화했다.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한 네윈 군사정권은 이때부터 ‘버마식 사회주의’라는 독자 노선을 취했다. 1970년대 중반 인도차이나 전쟁 종결도 미얀마의 반서방 고립폐쇄 노선을 결정화하는 계기가 되는 역설을 낳았다. 미-중이 화해하면서 베트남전 종전이 가능했고, 종전 뒤 미국은 아시아에서 대중국 봉쇄망을 풀었다. 이는 중국 세력권의 인정을 의미했다. 미국 등 서방은 중국과 긴밀한 관계였던 미얀마를 중국 세력권으로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개입을 중단했다.

네윈 정권은 베트남전이 끝난 1974년에 버마연방사회주의공화국 헌법을 제정했고, 형식적으로 군정을 종식했다. 전역한 군인들이 주도하는 버마사회주의프로그램당의 일당 체제로 전환했다. 미얀마는 이때부터 완전히 서방 등 국제사회와 절연되는 고립·폐쇄 노선으로 접어들었다. 1970년 중반까지 한국 축구의 아시아 경쟁자였던 버마와의 경기를 볼 수 없게 된 배경이다.

 

-미얀마가 다시 국제사회의 ‘문제’로 등장한 1988년 민주항쟁의 배경은 무엇인가?

=군부정권의 고립·폐쇄 노선으로 미얀마는 아시아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군부정권의 사회주의 프로그램은 군인들의 이권 축적의 도구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전 종전 이후 동남아에 경제개발 붐이 일고, 한국과 필리핀에서는 군부독재가 종식되는 물결이 일었다.

민생고에 시달린 미얀마 시민들은 1988년 ‘8888 항쟁’으로 불리는 광범위한 반독재 시위 운동을 벌였다. 군부는 3천여명을 사망자를 낼 정도로 무차별 진압을 했다. 동시에 군부는 통치력을 상실한 네윈 정권을 축출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군정 형태로 복귀했다. 당시 영국에 살던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치가 어머니의 간병으로 귀국했다가, 버마 민주항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군부는 민주화 압력 앞에서 1990년 5월 다당제 선거를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군부는 이 선거에서 아웅산 수치를 내세운 야권 세력인 민족민주동맹(NLD)이 의석의 80%를 차지하는 압승을 하자, 선거 결과를 취소하고는 군정을 이어갔다.

 

-2015년 결국 아웅산 수치의 민족민주동맹으로 권력이 이양되지 않았는가?

=국내외적인 요인이 상호 작용을 했다. 첫째, 미얀마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이다. 1988년 항쟁 이후 미얀마에서는 시민들의 투쟁이 이어졌다. 2007년 8월에는 88년 항쟁에 버금가는 샤프론 혁명이라는 민주화 투쟁이 벌어졌다.

둘째, 국제정세의 변화다. 샤프론 혁명이 일어난 2007년 이후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는 ‘아시아태평양으로의 귀환’ 전략을 발표했다. 대중국 봉쇄망을 다시 구축하려는 미국이나, 이 봉쇄망을 뚫고 인도양으로 나가려는 중국 모두에게 미얀마는 중요 고리가 됐다. 미국은 미얀마를 더이상 중국의 세력권으로 인정하지 않고, 적극적인 개입에 나서기 시작했다. 제재 강화라는 채찍과 경제지원이라는 당근을 동시에 제시하는 개입 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정세 변화 속에서 미얀마 군부는 대외적으로는 개방, 국내적으로 타협이라는 이중 트랙을 통해 권력을 공유하는 연착륙 전략을 택했다. 군정은 이미 1997년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에 가입하며, 외교적 고립에 탈피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고립과 국제적 제재 앞에서 유일한 대외창구였던 중국의 영향력이 커진 것에 대한 반발도 작용했다. 시민들의 반중국 정서가 큰 데다, 군부 역시 커지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자신들의 권력과 경제 이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샤프론 혁명 뒤인 2008년 5월 군부는 신헌법 국민투표를 통해 민주화 일정을 내놓았다. 헌법은 다당제 투표를 통한 민간정부 수립을 명시했으나, 군부가 의회 의석의 25%를 지명하는 한편 국방·내무·국경수비 부처 장관을 독점하도록 했다. 군부와 민간정부의 권력공유 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신헌법에 따라 2010년 치러진 총선은 수치의 민족민주동맹 참가가 불허되고 사실상 군부의 연합연대개발당(USDP) 일당 선거였다. 이 선거에 따라 2011년 3월30일 군 총사령관에서 전역한 테인 세인을 대통령으로 하는 형식상의 민정이 성립됐다.

테인 세인 정부 출범 이후 국내적으로는 수치의 가택연금 해제와 민족민주동맹의 선거참여 허용이 이뤄졌다. 대외적으로는 2011년 12월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방문을 시작으로 서방과의 관계정상화에 들어갔다. 미얀마는 2012년 1월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발표해, 국제사회 복귀를 일단락했다. 특히, 미얀마는 2013년 테인 세인의 백악관 방문을 계기로 본격적인 미-중 등거리 외교로 전환해, 일방적인 친중 노선에서 탈피했다.

2015년 11월 치러진 총선에 민족민주동맹이 참가해, 투표로 결정되는 의석의 80%를 얻는 압승으로 집권했다. 외국 국적의 배우자를 가진 자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헌법에 따라 수치는 국가고문 직책으로 실질적인 국가 지도자가 됐다. 하지만, 군부는 헌법 개정 비토권 및 국가안보와 치안 권력도 유지했다. 이는 군부, 수치의 민족민주동맹, 미국이 권력공유와 국제사회 복귀를 타협한 결과다.

 

-왜 군부가 권력공유 타협을 깨고 다시 쿠데타에 의한 군정 복귀를 택했나?

=이 역시 국내외적인 요인이 결합됐다. 첫째, 소수민족 문제가 군부와 수치 사이의 권력에 긴장을 불어넣었다. 군부는 2017년 서부 연안 라카인주 무슬림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벌여, 70만명의 로힝야족 난민위기를 조성했다. 군부가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고 로힝야족 소탕작전을 벌인 것은 자신들의 역할을 제고하는 한편, 국제사회에서 수치의 입지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있었다.

수치는 로힝야족에 대한 혐오가 큰 다수 버마족의 정서를 의식해, 이 작전을 옹호했다. 수치의 노벨평화상을 박탈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이 일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치러진 총선에서 수치의 민족민주동맹은 의석을 늘렸고, 군부의 연합연대개발당은 오히려 의석이 줄었다. 군부를 반대하는 시민들로서는 수치 외에는 대안이 없기도 했거니와, 수치가 소수민족 문제에서 강경한 입장을 보이자 다수 버마족의 지지가 증폭됐다.

둘째, 로힝야 사태 이후 미얀마를 사이에 둔 미-중의 각축이 다시 격화됐다. 수치는 집권 직후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주석과 회담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 확대를 추구했다. 로힝야 사태로 서방의 비난을 받은 수치는 한층 중국 쪽으로 밀착했다. 중국 역시 수치 정부에 대한 정책적 개입을 확대했다. 군부와 중국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냉랭해졌다.

군부로서는 ‘3중 포위’의 위기를 느꼈을 수 있다. 지난해 총선 결과가 예상보다 저조한 데다,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로힝야 사태로 다시 미국 등 서방의 제재 대상이 됐다. 군부는 수치 정부에게 총선의 불공정성 등을 문제삼아 조사를 요구하다가, 결국 지난 2월1일 쿠데타를 감행했다.

 

-쿠데타 이후 미얀마 시민들의 저항과 군부의 강경진압이 정면 충돌하고 있다. 사태가 바뀔 전기는 없는 것인가?

=현재로서는 군부가 물러서거나, 권력의 균열이 보일 조짐은 없다. 하지만, 1988년 직후와는 달라진 국내외 상황이 변수다. 당시 3천명을 희생시키는 전면적인 탄압에도 미얀마의 군부독재가 건재했던 것은 애초부터 고립·폐쇄 노선이었던 데다, 중국이라는 마지막 보루가 버텨줬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개입도 미약했고, 그 실효성도 없었다.

하지만 현재 미얀마는 상당한 수준의 개방이 이뤄진 데다, 군부를 받쳐줄 중국의 버팀목 비중은 낮아졌다. 중국 역시 미얀마 군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가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줄었다. 군부가 1988년 때와 같은 전면적인 싹쓸이 탄압을 감행하면, 중국도 반군부로 돌아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이 미얀마 사태의 관건이란 말인가?

=중요 변수라 할 수 있다. 쿠데타 직전인 지난 1월 군부와 수치 정부 사이에서는 타협이 모색됐고, 중국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수치 정부의 거부로 타협은 무산됐고, 군부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쿠데타 이후 군부의 대중국 입장은 더욱 미묘해지고 있다. 군부는 미얀마가 중국의 영향권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군부에 고용된 아리 벤메나세라는 유명한 이스라엘인 무기거래 로비스트는 워싱턴의 로비업계 매체인 <포린 로비> 및 <로이터> 통신과의 회견에서 “아웅산 수치가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에 알려진 것보다 큰 역할을 했고, 미얀마를 중국의 영향권으로 흘러가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벤메나세는 자신이 지난주 군부에 의해 고용돼 “미얀마의 진짜 상황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기로 했다”며 미국 등으로부터 오해받는 미얀마의 장군들을 돕겠다고 밝혔다. 그는 <로이터>와 회견에서 “(수치가) 중국에 더 접근하려는 데 반대해, 서방 및 미국 쪽으로 움직이려는 (군부의) 진정한 추동이 있다”며 “그들은 중국의 괴뢰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군부가 반중친미 노선을 취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는 또 “국가 지도자로서 로힝야족을 탄압한 이들 중 한 명이 아웅산 수치이며, 군부가 한 것이 아니다”라고도 항변했다. 그는 “군부는 정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원한다”며 “하지만, 그것은 과정”이라고 말해, 군부가 타협을 통해 점진적으로 사태를 수습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벤메나세의 입을 빌린 군부의 이런 주장은, 미국에게는 화해를, 중국에게는 경고를, 수치 정부에게는 타협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그만큼 미얀마에 개입할 지렛대가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얀마 군부는 진압의 강도를 조절해 파국은 막아가며, 미-중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할 것으로 보인다. 정의길 기자

교조적 검찰 소아병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김남일 ㅣ 디지털콘텐츠부장

 

그래서 남은 검사들은 이제 어쩌겠다는 것일까. 검찰조직을 지켜주겠다던 검찰총장이 대차게 직을 던지고 나갔다. 대선 출마 얘기가 나온다. 그건 더 이상 같이 자장면 먹던 검사 윤석열이 아닌 정치인 윤석열의 일이다. 다 같이 조국·추미애와 싸울 때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정치인과 검사가 한배를 타는 건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1년, 남은 검사들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사실상 정치를 택한 검찰총장을 박수 치며 떠나보내고 여전히 응원하는 검사들은 아래 질문에 답해야 한다.

전직 검찰총장이 하려는 정치, 그의 대권가도를 알게 모르게 지원하겠다는 것인가. 새 검찰총장이 와도 윤석열만이 진정한 총장이라며 상왕으로 모시겠다는 것인가. 대통령이 돼서 지금 정권이 추진하는 검찰개혁을 없던 일로 만들어달란 것인가.

앞으로 검찰이 하는 수사마다 정치적 꼬리표가 붙게 될 이 상황을 어찌할 것인가. 생각 있는 검사라면 말장난을 상소문이랍시고 검찰 게시판에 올릴 시간에 제발 그 뜻 거둬달라며 전직 총장 집 앞에서 짧은 목을 내놓고 지부상소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말은 거창하나 지켜진 적 없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니 이제부터는 아예 없는 셈 치겠다는 것인가. 정치가 검찰을 흔든다며 호기롭게 실명 비판하던 검사들은, 저런 정치로는 안 된다며 직접 정치에 나서려는 검찰총장에게는 왜 아무 말 안 했던 것인가. 검찰이 정치를 흔드는 건 괜찮은가. 이 또한 내로남불인가.

윤 전 총장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했다. 미리 준비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누구로부터가 없다. 정치의 언어는 한없이 헐렁해 보이지만 막상 뱉어놓으면 주어 하나가 없다고 몇날 며칠 난리법석이 벌어진다. 체제와 국민을 위협하는 세력이 누구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공소장에 흔히 쓰듯 성명불상자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검찰총장이 이런 첩보를 유훈으로 남겼으니 박수 쳤던 검사들은 체제 위협 세력 발본색원에 나서지 않겠는가.

정치는 엉망이고 사회는 혼란스럽다며 무력을 쥔 이들이 직접 나서면 쿠데타가 된다. 지금 미얀마가 그렇고 5·16, 12·12가 그랬다. 민주화 이후 가장 센 권력기관은 검찰이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검사들이다. 검사들은 구국의 심정으로 떠난다는 검찰총장을 따라 노도와 같이 들고일어나겠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현직 검사들이 답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검찰총장이 사상 초유 대선 출마 가능성을 시사하며 직을 던졌기 때문이고, 그렇게 떠난 총장에게 잘하신다며 박수 치는 검사들이 있기 때문이며, 검찰을 이용해 정치하려는 이를 교조적으로 따르는 검사들이 많아서고, 당면한 조직의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검사들은 더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법무부 장관이, 대통령이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느냐고 따질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억울해하는 피의자가 있다면 검사 당신은 무어라 하겠는가. 박수 칠 때 어서 조사실을 떠나라 하겠는가. 누가 괴롭히면 정치로 갚아주겠다며 옷을 벗는 게 검찰수사실무인가. 수사가 막히니 별건정치를 하겠다는 것인가. 하긴 몇몇 검사는 그렇게 금배지를 달았다. 검찰의 생존전략은 정권 페이스에 맞춰 충성과 배신의 스톱워치를 누르는 데 있지 않았던가. 힘 빠진 정권이 막판 내달려 등을 보인 것이 그리 억울한가. 솔직히 이번 정권은 다를 거라 믿었는가. 공익의 대표자라면서 내심 무엇을 바랐길래 그리 배신감을 토로하는가.

질문의 답은 간단하다. 윤 전 총장이 정치를 안 하면 된다. 이 간단한 답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이러할 것이다. 윤석열이 정말로 정치하겠다고 나서니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아니다. 그저 이 모든 상황이 낯설고 신기할 뿐이다. 후배 검사들이 앞으로 하게 될 정의로운 수사마저 정치수사, 표적수사라는 기본값에서 출발하게 만든 검찰지상주의자 윤석열의 행보가 황당하고, 조직으로 뭉쳐 그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검사들이 기이하기 때문이다.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명한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청사를 나서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윤 총장의 사의를 한 시간여 만에 즉각 수용했다. 연합뉴스


[칼럼]  윤석열 총장, 정치 하지마라

 

대선주자로 나서려면 ‘왜 내가 대통령을 해야 하는지’, ‘내가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정확히 밝혀야 한다. 두 가지가 없으면서 대선주자로 나서는 것은 사기와 다름이 없다. 유권자는 절대 멍청하지 않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때문에 사퇴했을까? 아니면 내년 3월9일 치러지는 대한민국 20대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기 위해 사퇴했을까?

어리석은 질문이다. 검찰 수사권 박탈에 대한 반발은 명분이고, 대선 도전은 실리다. 명분과 실리를 정확히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세상사다.

보통은 명분을 내걸고 실리를 취한다. 정치인에게 애국은 명분이고 당선은 실리다. 애국과 당선을 선명하게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의 문제도 있다. 검찰총장 사퇴는 과거의 일이고, 대선 출마는 미래의 일이다. 윤석열 전 총장이 대선에 출마하지 않으면 명분이 부각될 것이고 출마하면 명분은 사라질 것이다.

양자역학에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있다. 상자를 열어서 확인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다.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는 가능성의 상태로 병존한다.

윤석열 전 총장의 지금 상태가 바로 그렇다. 검찰 직접 수사권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특수부 검사들의 영웅일 수도 있고,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검찰 조직 전체의 명예를 팔아먹은 파렴치한일 수도 있다.

특수부 검사로 잔뼈가 굵은 윤석열 전 총장에게 ‘정치 바람’이 들어간 이유가 뭘까?

첫째, 여론조사 때문일 것이다.

2019년 조국 사태, 2020년 추미애 장관과 윤석열 총장의 충돌을 계기로 문재인 정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윤석열 전 총장을 대선주자로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여론조사에서 뜨면 멀쩡했던 사람도 눈이 돌아간다.

2011년 청춘콘서트에 나섰던 안철수 교수가 그랬다. 고건 전 국무총리가 그랬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그랬다. 그래도 고건·반기문 두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둘째, 수사 경험 때문일 것이다.

특수부 검사는 프레임을 짜는 사람이다. 프레임을 짜서 피의자를 악당으로 선언하고 구속영장과 중간 수사 발표를 통해 ‘여론재판’에서 성공하면 승리하는 것이다. 뒷날 법원에서 유죄 판결까지 받아내면 금상첨화다.

무죄가 나와도 괘념치 않는다. “범죄 방식이 전형적인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서 입증이 어려웠다”고 치부하면 된다. 프레임을 짜서 상대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선거를 치르는 정치인과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윤석열 전 총장은 정치하면 안 된다. 대선주자로 나서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잘할 수 없다.

‘치국경륜’의 핵심은 경제와 외교다. 정치 경험과 국정 경험이 없는 사람은 대통령을 할 수 없다. 윤석열 전 총장이 경제와 외교를 알까?

부패가 만연한 부패 공화국에서는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부패 공화국이 아니다. 범죄율도 다른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낮다.

둘째, 될 수 없다.

지금 여론조사 수치는 반문재인 성향 유권자들의 화풀이에 불과하다. 거품이라는 얘기다. 진짜라고 믿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대선주자로 나서려면 ‘왜 내가 대통령을 해야 하는지’, ‘내가 대통령이 되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정확히 밝혀야 한다. 두 가지가 없으면서 대선주자로 나서는 것은 사기와 다름이 없다. 유권자는 절대 멍청하지 않다.

윤석열 전 총장은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우리 사회와 국민을 위해 어떻게 봉사할지 퇴임 후 방법을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답변했다.

좋은 방법이 있다. 그가 평생 쌓은 특수 수사 경험을 살려서 대한민국 수사 기관의 반부패 역량을 높이는 데 기여하면 된다. 그러면 평생 존경받으며 살 수 있다.

윤석열 전 총장의 검찰 후배였던 김웅 국민의힘 의원이 ’여권의 개들’을 비판하며 “살아 있는 권력과 싸우다 사그라지는 것이 정치 행보인가. 만약 그렇다면 사육신도 정치 행보를 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윤석열 검사가 사라져도 우리에게는 수천명의 검사와 판사들이 남아 있다”며 “그 소중한 직분을 민주주의와 헌법 정신을 위해 불꽃처럼 태우라”고 촉구했다.

김웅 의원의 말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윤석열 전 총장이 새겨들어야 한다.

‘천하의 윤석열 검사’가 거악 척결이라는 풍운의 꿈을 안고 검사가 된 수많은 후배 검사들을 쪽 팔리게 해서야 되겠는가.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시민기자들' 활약에 경의…유엔 특사 "안보리 이사국들 보기를"

 

총에 맞아 숨진 시민을 경찰 2명이 끌고 가는 모습. 베란다에서 찍은 듯 철제 구조물이 화면 아래 보인다.[트위터 캡처]

 

미얀마 군부의 유혈 진압 강도가 거세지는 가운데 위험을 무릅쓰고 휴대전화로 군경의 만행을 고발하는 미얀마 시민들의 용기가 빛나고 있다.

지난달 1일 쿠데타로 인해 국영 매체는 사실을 은폐하는데 동원되고 있다.

독립 인터넷 매체들은 사실을 전하려 고군분투 하지만, 조직과 인력이 미약하다.

이런 가운데 각지의 시민들이 휴대전화로 찍어 SNS에 올리는 사진과 동영상이 미얀마 군사정권의 잔악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 군정을 압박하는 국제여론의 불쏘시개가 되고 있다.

지난 3일 크리스틴 슈래너 버기너 유엔 미얀마 특사는 화상 기자회견에서 "오늘은 2월 1일 쿠데타 발생 이후 가장 많은 피를 흘린 날"이라면서 "이제 쿠데타 이후 총 사망자가 50명을 넘었다"고 말했다.

버기너 특사는 이와 관련 "오늘 매우 충격적인 동영상들을 봤다"며 "그중 하나는 자원봉사 구급대를 군경이 폭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경이 시위 참가자 한 명을 끌고 가다 약 1m 정도 되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쏘는 장면이었다. 그는 체포에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은 거리에서 숨졌다"고 말했다.

구급대원 중 한 명을 경찰이 총 개머리판으로 내려치는 장면.[트위터 캡처]

버기너 특사가 언급한 동영상은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의 노스오깔라빠에서 발생한 구급대원 폭행 장면과 군인들이 시위대를 끌고 가다가 거리 한복판에서 총을 쏘아 숨지게 한 뒤 시신을 군경 2명이 끌고 가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으로 보인다.

건물 폐쇄회로(CC)TV에 찍힌 동영상을 네티즌들이 SNS에 올리거나, 군경에 의해 사격을 당할 위협을 무릅쓰고 직접 찍은 영상이다.

먀 뚜웨뚜웨 카인이 경찰이 쏜 실탄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 [이라와디 캡처]

지난달 9일 경찰의 실탄 사격에 머리를 맞고 쿠데타 이후 첫 사망자가 된 먀 뚜웨뚜웨 카인(20)의 피격 당시 장면도 네티즌의 동영상에 '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 고스란히 기록됐다.

이밖에도 SNS에는 시위대는 물론 일반 미얀마 시위대를 상대로 한 군경의 무차별적이고 야만스러운 폭력을 보여주는 사진과 동영상들이 수없이 올라와, 네티즌들에 의해 공유되며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다.

네티즌들은 관련 사진과 동영상을 공유하며 "이것이 군사정권이 우리 시민들에 대해 테러를 가하는 증거"라고 적고 있다.

                 미얀마 경찰이 기관단총에 탄창을 끼우는 모습. 화면 한쪽에 장애물로 인해 까만부분이 드러나 있다.

특히 동영상의 경우, 화면 양쪽에 검은 부분이 나타난 경우나 창틀이나 발코니의 기둥들이 드러난 경우가 적지 않다.

군경이 휴대전화를 꺼내 든 시민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는 상황에서 좁은 틈새를 통해서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군경의 만행을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국제사회는 이들을 통해 미얀마의 진실을 알 수 있다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알리려는 이들 '시민 기자'들의 활약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톰 앤드루스 유엔 미얀마 인권 특별보고관은 유엔 안보리 비공개 회의를 앞둔 지난 4일 트위터에 "미얀마 전역에서 군사 정권의 야만성이 또 다시 끔찍하게 드러나고 있다"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멤버들이 안보리 회의 전에 평화 시위대에 대한 충격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사진과 동영상을 보기를 촉구한다"고 적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