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4일 오후 부산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폴란드 경기에서 유상철(맨왼쪽)이 후반 8분 두번째 골을 터뜨린 뒤 설기현(왼쪽 두번째), 김태영(등번호 7번), 박지성(오른쪽) 등 동료들과 함께 환호하고 있다.
2002 한·일 월드컵 4강의 주역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이 별세했다. 향년 50.
대한축구협회는 7일 췌장암으로 투병하던 유상철 감독이 서울 아산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했다고 밝혔다. 유상철 감독은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시절 췌장암으로 진단됐고, 이후 1년여 치료를 받아왔으나 결국 이겨내지 못했다.
유 감독은 2019년 11월 자신의 몸 상태를 세상에 알렸다. 췌장암 4기였다. 이후 2020년 1월 인천 지휘봉을 내려놓았고, 항암치료를 받으며 건강 회복에 대한 의욕을 드러냈다. 팬들한테는 병마와 싸워 이겨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 몸 상태가 악화했고 이날 세상을 등졌다.
유상철 감독은 선수 시절 원조 멀티플레이어로 유명했다. 수비에서 미드필더, 공격까지 모든 포지션을 맡을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벨기에전에서는 투혼의 동점골(1-1)을 뽑아내 팬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겼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첫 경기인 폴란드전에서 골을 뽑아내는 등 한국을 4강에 올린 주역이었다. 대표팀 경기 124회 출장, 18골의 기록을 남겼다.
1971년 서울 출생으로 건국대를 졸업했으며, 1994년 울산 현대에 입단하면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일본의 요코하마, 가시와 레이솔 등에서 뛰었고, 2006년 울산 현대에서 프로 생활을 마감했다. 국내 프로에서는 142경기에서 37골을 올렸다.
선수 은퇴 뒤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유 감독은 선수층이나 재정 측면에서 좋은 팀을 만나지 못했다. 이런 까닭에 늘 도전하는 감독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대전 시티즌, 전남 드래곤즈의 감독을 역임했고, 2019년에는 마지막으로 인천 유나이티드를 이끌었다.
당시 유 감독은 팀이 시즌 막판 강등권까지 가는 위기를 겪었지만, 지도자로서 능력을 발휘하며 팀을 1부 리그에 잔류시켰다. 췌장암 진단을 받았음에도 선수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웃음을 잃지 않고 현장을 지키면서 선수들의 응집력을 끌어냈다.
김대길 해설위원은 “워낙 축구 재능이 뛰어나면서도 마음이 착한 선수였다.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팀을 위해 헌신했고, 스포츠의 정신을 몸으로 보여주었다”고 회고했다. 김창금 기자
1989년 6월5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톈안먼) 광장 앞 큰 길에서 시위 진압에 나선 인민해방군의 탱크를 막아섰던 이른바 ‘탱크맨’이 천안문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 32주년을 맞아 재소환되고 있다. 여전히 신원 미상인 탱크맨은 중국 현대사의 가장 쓰라린 사건 중 하나인 천안문 민주화 시위 진압 사건의 상징적 존재이다.
<CNN>과 <가디언> 등은 6일 중국 천안문 유혈진압 32주년을 맞은 4일 마이크로소프트(MS)의 검색엔진 빙(Bing)에서 탱크맨(tankman)의 사진이나 영상 등이 검색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애초부터 천안문 사건 관련 검색이 제한된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과 독일, 싱가포르, 프랑스, 스위스 등에서도 탱크맨 검색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 대변인은 “사진 등이 실수로 오프라인으로 전환됐다. 인간의 실수였다”고 말했다. 탱크맨 사진은 하루 뒤인 5일부터는 다시 검색에 나타났다.
5일 동유럽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도 탱크맨이 등장했다. 중국과 헝가리 정부가 지난 4월 합의한 상하이 푸단대학의 헝가리 분교 건립에 반대하는 시위에 부다페스트 시장 게르겔리 카라소니가 탱크맨 사진을 들고 나온 것이다.
세계 100위권 안에 드는 중국 국립대학을 유치하는 것이지만, 헝가리 시민들은 거대한 중국 대학의 분교를 수도 부다페스트에 세우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건립 비용이 2조원이나 들고, 이 중 1조7천억원을 중국에서 차관 형태로 받는 것도 반대를 키운다. 카라소니 시장은 이날 “우리는 5천억 포린트(약 16억달러)나 되는 시민들의 세금을 중국의 엘리트 대학 캠퍼스에 퍼붓고 싶지 않다”고 주장했다.
탱크맨은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 당시 보여준 용감한 행동으로 중국 현대사의 상징 중 하나가 됐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그해 4월 시작된 중국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50일 만인 6월4일 새벽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튿날인 5일 중국제 59식 탱크 10여대가 줄지어 천안문 광장 앞 큰 길로 진입하자, 검은 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남성이 가로막는다.
돌발 사태에 잠시 머뭇거리던 탱크가 비켜가려 방향을 틀자 남성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다시 가로막는다. 그러기를 몇 차례, 남성은 탱크 위로 뛰어올라 군인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남성과 탱크 부대의 짧은 승강이는 멀찍이 떨어져 사진을 찍던 외신 기자들의 카메라에 담겼고, 전 세계에 영상과 사진으로 퍼져나갔다. 세상은 이 남성을 ‘탱크맨’이라 부르고 천안문 사건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다.
탱크맨의 신원은 사건 30여년이 넘도록 미궁이다. 중국 활동가와 외국 언론들이 그를 찾아나섰지만 아직 공식 확인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당시 광장에서 탱크 부대에 의해 사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사건 당시 직접 사진을 찍었던 <에이피>(AP) 통신의 미국인 사진기자 제프 와이드너는 “그가 4명에 의해 끌려갔으며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2014년 독일 <도이체 벨레>에 말했다.
와이드너는 “그(탱크맨)는 탱크가 오는 것을 보았고, 자신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며 “가족이나 친척이 군에 의해 죽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탱크맨에 대해 수감설, 사망설 등 여러 추측이 돌고 있다. 2017년에는 미국에서 중국 인권운동을 하는 ‘공민역량’이 “탱크맨은 현재 중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외국에도 널리 알려진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현준 기자
미국 전역의 마을과 호수, 개울, 산 등 1000여 곳에 ‘스쿼’, ‘니그로’ 등 인종차별적인 지명이 남아있다고 현지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가 6일 내무부 산하 연방지명위원회의 자료를 인용해 보도했다.
악시오스는 이날 보도에서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의 기념물을 제거하고 인종차별주의자의 이름을 딴 공공건물의 이름을 바꾸는 작업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지만, 곳곳에 이런 인종차별의 유산이 끈질기게 살아 남아있다고 지적했다.
자료를 보면,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을 비하하는 용어인 ‘스쿼’(Squaw)가 들어간 곳이 799곳으로 가장 많다. 미네소타에는 ‘스쿼 호수’가 있으며, 캘리포니아의 유명한 ‘스쿼 계곡 스키 리조트’는 1960년 겨울 올림픽이 열린 곳으로 지난해에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항의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 아메리카 원주민의 피부색과 연관된 차별적 용어 ‘레드 맨’(Redman)은 82곳에, ‘레드 스킨’(Redskin)은 12곳에 남아있다.
흑인을 비하하는 ‘니그로’(Negro)란 말이 621곳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일리노이에 ‘빅 니그로 개울’이 있고, 버지니아에는 ‘니그로 발’이란 지명이 있다. 니그로 발은 노예가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발을 자른 끔찍한 사례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흑인의 검은 살갗을 비아냥거리는 ‘다키’(Darkey)도 7곳에 남아있고, 흑인의 야간통행 금지를 뜻하던 ‘Ain’t No(N-words) Allowed’를 가리켰던 ‘애나’(Anna)란 말도 5곳에서 살아 있다.
중국계 미국인을 경멸적으로 표현한 ‘차이나맨’(Chinaman)은 29곳에서 사용하고 있다. 오리건에 ‘차이나맨 모자’란 곳이 있고, 콜로라도엔 ‘차이나맨스 협곡’이 있다.
멕시코인을 차별한 말도 남아있다. ‘그리저’(greaser)는 12곳에 남아있고, ‘웻백 탱크’(Wetback Tank)는 뉴멕시코 저수지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동부 유럽이나 남부 유럽 출신 백인들을 차별하는 용어도 남아있다. 폴란드 출신을 겨냥한 ‘폴락’(Polack)이 6곳, 이탈리아계를 가리키는 ‘데이고’(dago)도 20여곳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정부는 과거 인종차별적 지명을 변경하려고 노력도 했다. 내무부 장관 스튜어트 유달은 1963년 지도상 모든 연방 지명에서 흑인 비하를 뜻하는 ‘N-word’를 없애도록 했다. 그는 나중에 일본인을 모욕하는 ‘잽’(Jap)이란 표현을 쓰지 말라는 지시도 내렸다.
미국 정부에는 사람들이 지명 변경을 제안할 수 있는 창구가 있다. 그러나 지역사회의 주민들은 기존 지명이 그들 집안이 몇 세대에 걸쳐 살아온 지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이들 지명의 본질적 의미를 외면하고 있다고 악시오스가 지적했다.
아메리카 원주민 권익옹호단체의 활동가 ‘크리스털 에코 호크’는 “미국은 원주민을 비인간화하고 원주민의 전통과 문화를 조롱하고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끊임없이 만들어낸 오랜 역사가 있다”며 “인종차별적 지명 변경은 시작이며 더 나아가 원주민을 보는 미국인의 시각이 바뀔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병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