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무역 대응 한-캐 공조합의

● CANADA 2018. 3. 27. 17:27 Posted by SisaHan

문재인 대통령과 트뤼도 연방총리는 전화통화에서 무역과 북핵문제 등에 협력을 다짐했다.

문 대통령-트뤼도 총리 통화, 한반도 평화노력도 협력

문재인 대통령과 쥐스탱 트뤼도 연방총리가 20일 전화통화를 갖고 보호무역주의 대응과 한반도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통화가 트뤼도 총리의 요청으로 이뤄졌다면서 오전 8시 50분부터 40분간 통화가 진행됐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과 트뤼도 총리는 양국 모두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라는 점에 공감하면서 최근 전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 확산에 우려를 표명하고, 자유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통상질서를 지키기 위해 긴밀히 협력해나가기로 했다.
트뤼도 총리는 최근 미국의 철강 관세부과 조치와 관련, “캐나다는 부과 대상에서 빠졌지만 일시적인 예외이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협상과 연계돼 있어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캐나다가 의장국으로서 올 6월 개최하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이 문제를 다루겠다”고 말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자유무역이라는 핵심 가치를 지키려는 캐나다의 노력을 평가하고 한국도 동참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또 문 대통령은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시작으로 최근 한반도 상황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며 대북특별사절대표단의 방북 결과 등 최근의 진전 상황을 설명했다.
아울러 “캐나다가 앞으로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계속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트뤼도 총리는 “남북정상회담뿐 아니라 북미정상회담까지 이어진 성과는 문 대통령의 리더십 덕분”이라며 “캐나다는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한국의 노력을 기꺼이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핵심 관계자 “모든 가능성 열어놓고 예의 주시”

청와대는 27일 북한 최고위급 인사의 중국 베이징 방문과 관련해 “누구인지는 현재까지 확인된 바 없다”며 “베이징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북중간에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로 본다”고 밝혔다. 전날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타던 특별열차로 베이징을 방문한 북쪽 최고위급 인사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인지 여부는 파악되지 않았으나, 4월말 남북, 5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그동안 냉랭했던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호전된다면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등 한반도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북한 쪽 움직임에 대해선 며칠 전에 파악하고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며 “그러나 베이징에 어느 분이 와 있는지는 현재로선 확인이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초 이날 방한 예정이었던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의 방한 연기와 북쪽 최고위 인사의 방중이 관련 있느냐는 질문에는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답했다.

한편, <블룸버그> 통신은 이날 익명의 소식통들을 인용해 김정은 위원장이 베이징을 방문한 것은 사실이라고 보도했다.

<김보협 기자>


신천 함석헌 옹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씨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씨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참 나, 내 안에 있는 말씀과 성령의 씨앗/얼/뜻/정신을 가리킵니다. 씨앗의 껍질이 깨질 때 거기에서 생명이 자라듯이 나의 껍질이 깨지고 내 안에 있는 참 나, 하나님의 형상, 말씀과 성령의 씨앗/얼/뜻/정신이 자랄 때 거기에서 참 생명이 자랍니다. 사회의 눈으로 보면 씨알은 세상의 밑바닥에서 궂은 일을 하면서 생명을 이어가는 민초/민중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밑바닥 민초/민중들은 고난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많은 피해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그런 면에서 밑바닥 민초/민중들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씨알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씨알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합니다. 씨앗이 스스로 싹을 틔우듯이 씨알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자기관리/자기혁명/자기성장이 씨알의 정신입니다. 둘째로 씨알은 고난을 통해서 새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삶에 고난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있지만 그 고난을 통해 연단받아서 더 단련되고 성숙되는 삶이 씨알의 정신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씨앗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씨가 처음에는 길가에 뿌려지고 돌짝밭에 뿌려지고 가시덤불에 떨어졌지만 나중에는 옥토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었다고 말씀하셨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일꾼들이 땅에 씨를 뿌렸는데 원수들이 가라지를 뿌려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는 씨앗이 땅에 떨어졌는데 사람이 일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낮과 밤이 바뀌는 동안 땅이 일을 해서 씨앗이 열매를 맺게 되었다고 말씀하셨고,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는 겨자씨는 아주 작지만 그것이 땅에 떨어지면 크게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그늘 아래서 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키가 큰 백향목이 아니라 겨자씨입니다. 백향목은 성전에 쓰일 정도로 키가 큰 나무이지만 겨자씨는 다 자라면 1미터 정도 되어서 작은 덤불을 이룹니다. 하나님 나라는 혼자만 크게 자라는 나무가 아니라 키는 작지만 함께 자라서 빽빽한 덤불을 이루어서 새들이 그늘 아래서 쉬고 알을 낳는 곳과 같습니다. 이 겨자씨가 바로 씨알입니다. 함께 자라면서 함께 서로를 붙들어주고 지켜주는 삶이 바로 씨알의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땅에 떨어질 때 이 땅의 역사는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역사로 바꾸게 됩니다. 물론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이 땅의 역사가 퇴보하기도 하고 거꾸로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3번 실패했어도 네 번째 씨앗이 땅에 떨어졌을 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남북한 정상회담이 4월에 있고 북미 정상회담이 5월에 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한두 달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뉴스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 민족을 지켜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좌절하고 실패하면서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씨앗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자라게 될 것입니다. 씨알에는 고난과 좌절 가운데서도 역사를 바꾸고 미래를 개척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씨앗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우리 마음에 떨어질 때 우리 마음은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우리 마음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어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헛된 유혹과 욕망에 빠지는 이유는 내 안의 속사람/씨알이 영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이 땅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내 마음에 떨어져서 나의 속사람이 성장하고 내 마음이 하나님을 모시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 정해빈 목사 - 알파 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


‘칼라일’이 인물전을 쓰면서 세상에 있는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 쓰면서도 그 속에 예수님의 이야기는 쓰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깊고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그 높은 본체를 보면서“야아!”하고 감격하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믿음이란 별 것 아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어느 땐가는 한 번 예수님의 인격과 사상 앞에서 “야아!”하고 감동하고 감격해 보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야아!”라고 하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성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은 이성의 차원을 넘어설 수밖에 없다. 이 이성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이성의 차원을 넘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믿음의 사람, 그리스도인이라면 일생에 한 번은 이 이성의 차원을 넘어 예수님에 대해서 “야아!”하고 한 번 뒤집어지는 감격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연인을 ‘사랑’하고,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고 산다는 말을 하는데 그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는 감격하고 사는 것을 말한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고 “야아!”할 수 있을 때 백합화가 내 속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 “야아!”하는 한 마디에 그만 내 가슴이 터지는 것이다. 그래서 내 속에 기쁨이 충만해 진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항상 기뻐하라는 기쁨의 생활이고 이 기쁨의 생활이란 감격을 느끼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실존이란 쉽게 말하면 신성(神性)이라고 한다. 신성을 느끼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성을 넘어서는 실존주의를 ‘엑지스탄스(existence)’란 말을 쓰는데 이 ‘엑스(ex)’라는 말은 ‘밖으로’란 말이고, ‘시스탄스(sistence)’라는 말은 ‘밖에 나가선다’는 뜻이다. ‘황홀’이라는 말로도 번역하는데 오묘하다, 아찔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야아!”감탄하는 것은 오묘하고 아찔한 것이다. 우리가 꽃을 보고 “야아!”하는데 사람이 이 꽃을 만들 수 있겠는가? 이 꽃 한 송이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이 꽃 한 송이를 보고 “야아!”라는 감동을 통해 꽃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하나님의 위대한 솜씨에 감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속에는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있는데 어려운 말로 하면 ‘탈자적 실존(脫自的實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커 철학의 핵심인데 ‘탈자’란 자기 자신이 없어진다는 말이고, ‘실존’이란 십자가를 졌다는 말이다. 바로 탈자적 실존이 되어야 존재(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실존이 되고 자기가 죽어 탈자가 되어야 부활하여 존재의 소리를 듣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말로 하면 40에 불혹(不惑), 50에 지천명(知天命), 60에 이순(耳順) 인데 불혹이 십자가요, 지천명이 부활이요, 이순이 승천이라 말할 수 있다. 스승이란 탈자적인 실존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일생에 한 번은 “야아!”하고 감탄하며 무릎 꿇는 그런 체험이 있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람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내 영안을 열어 주셔야 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비로소 “유데모니아(eudemonia)”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 한지는 오래 되었건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못했다면, 속히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야아!”하는 감동의 체험으로 믿음, 소망, 사랑, 기쁨이 넘치는 복 있는 삶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 정태환 목사 - 한인은퇴목사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