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원자력진흥위원회 회의를 열어 2016년까지 모두 6기의 원전을 예정대로 짓기로 했다. 정부는 원자력을 수출의 중심축으로 키워 세계 3대 수출국이 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원전에 대한 깊은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른바 원자력 르네상스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뜻이다.
정부는 원자력 확대가 불가피한 선택임을 강조해왔다. 신재생에너지만으로는 에너지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주요 선진국들은 원전에서 탈피해 신재생에너지 쪽으로 정책 전환을 하고 있다. 에너지 소비를 줄이면서 깨끗하고 안전하며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자원에 투자하는 게 가야 할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부는 원전 수출을 위해 프리미엄급 원전을 개발하고 중소형 원자로 및 연구로 시장을 겨냥한 원자로도 개발하겠다고 한다. 노후 원전 정비와 폐로 시장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그 분야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기회로 삼겠다는 이런 발상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라면 몰라도 인류의 미래와 국민의 안전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국가가 세울 계획은 아니다. 독일 정부가 전문가들로 구성된 ‘안전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윤리위원회’에서 원전 정책을 포기할 것을 권고하자 이를 수용한 것과 너무 대비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일본 국민들에게는 공포와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고 한다. 어제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 ‘탈핵의 모색’에서 일본 학자는 “핵의 안전 신화와 저비용 신화는 허위로 가득 차 있다”며 “후쿠시마처럼 참혹한 피해가 나고 50년이 요구되는 폐원자로 처분이나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비용 등 빚의 유산을 후세에 남기는 비윤리적인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후쿠시마 사고로 원전은 안전하지도 값싸지도 않다는 게 입증됐다. 우리 세대가 무책임한 결정을 내리면 다음 세대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원전 위주의 에너지 정책을 중단하는 게 옳다.

한나라당이 2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전격적으로 날치기 처리했다. 한-미 FTA는 단순한 또하나의 통상협정이 아니다. 우리 경제와 사회의 앞날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조약이며 방대한 법률이다. 그런 중차대한 사안을 여당이 의회민주주의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폭거를 다시 한번 자행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한나라당이 중요 쟁점 사안을 국회에서 날치기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오만과 독선에 가득 찬 여당의 행태에 국민의 염증과 분노도 쌓일 만큼 쌓였다. 그런 터에 한나라당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려보려고 술수마저 동원했다. 새해 예산안을 심의하기 위한 의원총회를 여는 척하다가 갑작스럽게 본회의장을 점거했다. 심지어 본회의장 방청석을 봉쇄하고 보도진의 접근조차 막으려 했다. 역겨운 행태가 도를 넘고 극에 이르렀다.

이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는 한동안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재논의 가능성을 거론했다. 이를 토대로 여당 협상파는 한-미 장관급 회담에서 이 문제를 재론한다는 방침을 서면으로 합의한다면 야당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되묻기도 했다. 그러나 22일 상황을 보면 그런 행위들조차 위장된 몸짓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국회에서 몸싸움을 할 경우 내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황우여 원내대표가 버젓이 원내 사령탑에 머문 가운데 벌어진 이런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이렇게 하고 한나라당이 앞으로도 신뢰 회복과 쇄신을 거론하며 국민 앞에 나설 수 있을지 참으로 의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협정의 졸속 처리에 따른 후과이다. 일부 수출 대기업의 대미 수출 여건은 다소 좋아질지 모르겠으나 공공서비스 위축과 양극화 심화가 불 보듯 뻔하다. 협정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독소조항들은 서민생계 안정을 위한 정책 자율성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과 경제주체간 조화를 강조하는 우리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까지 거의 유명무실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당장에는 농어업과 중소상인, 중소기업의 피해가 걱정이다. 정부가 농어업 분야에 앞으로 10년 동안 22조원의 예산 투입 계획을 발표했으나 실상은 눈속임이 많다. 협정에 따른 농어업 피해는 단지 농산물 생산 감소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식량안보의 기반마저 뒤흔들 수 있다.

우리 국회의 행태는 미국 의회와 비교해도 너무나 대조적이다. 미국 의회는 지난 4년 반 동안 협상안을 나름대로 점검했다. 그 결과 두 차례 재협상을 통해 자신들한테 유리하도록 협상 내용을 고쳤다. 또 협정 이행법률안에는 협정보다 자국 법령이 우선한다는 점을 못박아, 사법주권을 철저하게 지켰다.
반면에 우리 국회는 피해 대책은커녕 번역문 오류조차 제대로 점검하지 못한 터였다. 그런 가운데 법적 구속력도 없는 협정 발효 시점에만 매달려 이번 회기 처리를 밀어붙인 것이다. 이런 행태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비준안을 날치기한 한나라당은 국민을 두려워하는 정치집단으로 볼 수 없다.

몇 년 만에 온가족이 모였다. 객지에서 활동하던 아이들이 겸사겸사 돌아와 에너지 충전을 해야겠단다. 그들에게 아직도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 부부를 흐뭇하게 했다.
호젓했던 빈 둥지가 모처럼 활기를 되찾나 했더니 며칠 못가서 다시 조용해졌다. 방마다 자신의 컴퓨터와 소통하느라 여념이 없는 탓이다. 어쩌다 한 공간에 식구들이 모여도 각자의 기기를 소지 한 채 들어서니 일상의 대화는 뒷전인 듯 하여 씁쓰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최신형 기기가 출시되면 될수록 열외로 밀려나는 우리 집 텔레비전, 장기 폐업 상태로 벽면을 지키고 섰는 가구와 같은 심정이 아닐까 하여 깜깜한 모니터를 쓰다듬어 본다. 손끝으로 밀리는 허연 먼지가 소외층의 현실을 대변하는 듯하다.
삭막한 전자기기에 대부분의 시간과 공간을 내어 준 아이들에게 양질의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 제공만이 능사가 아닌 듯 하여 캠핑을 제안했더니 순순히 응했다.

장성한 두 아들과 가을 캠핑을 준비한다. 기껏해야 사흘 필요한 것들인데 순식간에 산더미가 된다. 텐트, 침낭, 코펠, 등등 십 수 년간 잠자던 캠핑도구들이 줄줄이 엮여 나와 어리둥절해 하는 반면, 방마다 엎드려 있는 노트북은 굳은 침묵이다. 단 며칠이지만 자신들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노트북을 놓고 가야하는 녀석들은 아예 체념한 듯 연연해하지 않는 눈치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서 그들은 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지 궁금하면서도 신경이 쓰인다.
올망졸망한 일용품들을 한 차 가득 실은 우리는 약 400km를 북상하여 캠핑장에 도착했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가랑잎을 쓸고 있는 넓은 캠핑장은 주인도 손님도 모두 떠나 을씨년스러웠다. 사나운 산짐승이 수시로 찾아 들 것 같은 숲속에서 네 식구는 텐트를 치랴 모닥불을 피우랴 바삐 움직인다. 기껏해야 잠자리 준비와 먹거리 마련인데 온 식구가 매달려 비지땀을 흘리는 것을 보니 컴퓨터 앞에 있는 것 보다 훨씬 건강해 보여 좋다.

아름드리 상록수가 하늘을 가린 밀림지대를 누비며 하이킹도 하고 텅 빈 호수에서 카누도 타고 호숫가 산책도 빼놓지 않았다. 해가 넘어가자 주위는 금방 어둠이 짙어갔다. 물소리, 거센 바람소리, 짐승들의 포효로 숲은 차츰 야성의 기질을 뿜어내며 번잡해졌다. 모닥불을 더 높이 올린 우리는 오랜만에 둘러앉아 옛이야기도 하고 별도 헤아려 보고 자연의 소리에 심취하기도 했다.
어느 덧 밤이 이슥해지자 한사람씩 분산되기 시작했다. 작은 녀석은 셀룰러폰을 충전한다며 인근 마을로 차를 끌고 나가고 큰아인 배낭에서 아이패드를 꺼내든다. 뜨악해 하는 나를 보곤 영화 상영시간이 되었다며 다가앉는 아들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고 해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거다.
한 사흘 문명과 담을 쌓고 자연속에 파묻히려던 계획은 남편과 나의 생각이었을 뿐 아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준비가 있었던 것이다. 천지가 노오란 단풍나무 숲, 모닥불 앞에서 수시로 영화감상은 물론 독서며 글쓰기 등을 입맛대로 즐기는 아들을 보며 디지털세대와 아날로그세대의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한다.
자연과 문명은 항시 충돌만 하는 게 아니라 운용에 따라서 조화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 아침, 적요를 깨는 소음이 터져 나왔다. 남편의 아이팟에서 흘러간 가요가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한국문단 등단>

[칼럼] 한인사회의 쿠데타들

● 칼럼 2011. 12. 4. 14:58 Posted by SisaHan

2009년 6월28일 중미 온두라스에서 쿠데타가 발생, 마누엘 셀러야 대통령이 코스타리카로 추방되는 정변이 일어났다. 세라야가 권좌에서 쫓겨난 배경을 보면 “그래도 싸다”는 말이 이해됐다. 그는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장기집권을 겨냥한 개헌을 추진, 국민투표를 강행하려다 투표일 새벽 전격적으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 경우 어느 쪽이 옳고 정당한 것일까. 자신의 집권연장을 위해 주변의 압도적 반대에도 귀를 막고 개헌을 밀어부친 게 잘 한 일인가. 대통령의 일방독주를 막으려 무력을 써서라도 몰아낸 쿠데타 세력이 정당한가?

그로부터 20일 뒤 제헌절인 2009년 7월17일, 토론토 한인회에 유례없는 정변이 일어났다. 회장이 불법 무효라던 임시총회가 회관에 몰래 잠입한 이들에 의해 개최돼 회장과 이사회를 즉각 업무정지 시키고 임시운영위원회라는 정관에도 없는 비상기구가 설치됐다. ‘임운위’는 회장단과 이사회는 물론 선관위 역할도 하는 무소불위의 기구였다. 한인회에 계엄령이 선포된 것이다.
차기회장 선거를 놓고 여러 잡음과 ‘미운 털’이 박혔다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법적기구’를 일거에 와해시켜 버린 초법적 행동을 ‘속시원하고 멋지다’고 박수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초법행동’에 나선 이들 가운데는 한인사회에서 명망있다고 알려진 이들이 포함됐기에 더욱 아연했을 수 밖에-.
세계 각지 한인단체들이 내분으로 낯뜨거운 것은 알려진 일이로되, 토론토에서 또 다른 희한하고 괴이쩍은 사례를 만들어 기록에 남겼으니 동조자나 반대자나 모두 개운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협에서 마침내 사단이 벌어져 동포사회에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왜 우리 한인들은 그렇게 밖에 못하나” 하는 자조의 소리들이 새어나온다. 참으로 실망스럽고 한심하다는 실소와 자괴의 탄식들이다.
짚어보면 양비(兩非)일 수밖에 없다, 최근의 몇몇 양상만을 보자. 선거에 후보를 내지않아 단독을 허용해 놓고는 당선은 못마땅해 했다. 총회인준 요구에 당당히 임했으면 될 일을 감정만 돋웠다. 이런저런 시비에 아량으로 대화의 성의를 보일만도 했다.  총회에서 적법하게 의결했으면 물리력이 아닌, 적법하게 사임과 퇴거를 시키면 됐다. 서로 감정을 접고 대승적으로 한발짝씩 물러날 여지도 찾아야 했다. 밤낮 먹고살기에 매달리는 수천 회원들의 처지부터 최우선으로 헤아려야 했다.
그런데 ‘너 죽고 나 살자’는 적개심만 나도는 전쟁터다. 상대방에 귀를 막고 감정적인 일방 독주만을 외치며 충돌을 향해 마주 달렸다. 마침내 한바탕 ‘코피가 터진 뒤’ 실협은 이제 마비와 분열, 그리고 와해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어느 쪽이 잘했고 못했다거나, 정당과 불법을 따지는 것은 전체 실협 회원들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설령 법관의 판단에 의지한다 할지라도 그 것은 지금 시점에서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한시라도 급히 민주적 상궤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최근 사태는 우리가 과연 민주 질서의 틀 안에서 살고 있는지 조차 의구심을 낳았고, 회원 분란을 자초했으며, 한인사회에 실망을 안긴 큰 말썽이기 때문이다. 
잘했고 정당하다 해서 절차와 방법이 폭력적·독선적이어서는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비록 잘 못했어도 피고인이 존중받고 절차와 방법에 정당성을 두는 게 민주주의다. 정해진 규칙과 질서를 지키며 순리에 따름이 대명제다. 과연 작금의 실협 사태는 질서와 절차와 상식과 순리가 통용되고 있는가, 모두가 자문해 볼 일이다. ‘비정상’을 바로 잡겠다며 결과적으로 비정상적 방법에 의존한다면, 그야말로 ‘비정상’이며 ‘비민주’ 가 아닌가.   
실협은 일부의 소유가 아니다. 1천여 회원이 있고, 그 뒤에는 10만여 한인 동포들이 있다. 양측은 어서 속히 감정을 접고 대화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세상에 승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걸음씩 물러나 회원과 동포들의 걱정과 자존심을 헤아려 달래주어야 한다. 속은 상할 테지만, 상식과 순리로 돌아가야 뒷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