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수구의 본질과 친일의 악취

● 칼럼 2011. 11. 21. 13:06 Posted by SisaHan
얼마 전 중국을 방문했다가 그곳 학자로부터 난감한 얘기를 들었다. 누구보다도 친한적인 학자가 조심스럽게 “한국 사람들은 왜 자기 나라를 남에게 지켜달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가 미국 정부에 애걸하다시피 해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시기를 3년7개월이나 연장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내 나라 흠집에 맞장구칠 수는 없었지만, 남북 간 경제력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져 있고 남한이 북한에 비해 최소한 10배 이상의 국방비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에게 구차하게 변명하기도 어려웠다. 내 나라는 내가 지켜야 하며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그만큼만 도움을 요청하면 되는 것이 상식인데, 주권국가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군사주권조차 돌려주겠다고 해도 못 받겠다는데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과 여권은 야권 단일후보인 박원순 변호사에게 ‘종북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평양시장도 아니고 서울시장이 된다는 게 정말 끔찍한 일”이라며 막말을 해댔다. 집권세력은 고질병이 도진 듯 오로지 시민운동 한길을 걸어온 그에게도 선거에 이기기 위해 터무니없는 색깔론의 패악을 행한 것이다. 
국정운영세력의 행태치고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이런 일들이 왜 벌어지는 걸까? 나는 그들의 본질이 수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상식과 원칙을 존중하면서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라고 주장할지 모르나, 그것은 위장에 불과하다. 반칙과 특권이 몸에 밴 기득권을 고수하고자 하는 수구일 뿐이다. 
그들의 뿌리는 친일이다. 속성은 반주권적 기회주의이며 생존방식은 배타적 독식이다. 해방 후 친일파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아래서 청산은커녕 오히려 집권세력으로 소생하였다. 그리고 장면, 박정희 시대를 넘나들며 기득권 세력으로 뿌리를 내렸다. 반민족 행위의 전력 때문에 그들에게 국가주권이나 민족이라는 말은 ‘경기’가 날 만큼 부담스러운 용어였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 대신 붙잡은 것이 반공의 끈이었으며 미국 숭배주의였다. 그들의 반공은 맹목적 반공주의로 흘러 오늘의 색깔론으로 이어졌으며 숭미는 우리 사회에 과도한 대미의존심리 구조를 고착시켰다. 수구세력이 번성할 수 있는 토양은 분단체제이며 남북대결구조였다. 그들은 정치적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몰기를 서슴지 않으며 여러 세력 간의 공존을 거부하고 부와 권력의 독식을 추구해왔다.
 
수구세력은 진보진영에 ‘친북’ ‘종북’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억압하려 하지만 따져보면 이것도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진보가 ‘친북’ 혹은 ‘종북’이라면 북한의 세습체제가 진보적이라는 말인가? 터무니가 없다. 내가 보기에 북한의 세습정권은 북한판 수구세력이다. 그렇기에 굳이 남한에서 북한 정권과 유사성을 지닌 집단을 찾는다면 오히려 수구세력일 것이다. 그럼에도 수구세력이 진보를 북한 정권과 얽어매려는 것은 그들이 분단의 모순을 먹고 사는 비합리적 반칙 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일에 뿌리를 둔 수구세력은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뒤 기고만장하여 자신을 키워준 독재를 정당화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미화한 식민지근대화론을 역사교과서에까지 넣으려 하고 있다. 특히 과거 수구세력은 자신의 뿌리인 친일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라도 식민지 시대를 정당화할 엄두를 못 냈는데, 지금의 수구는 정부·정치·언론·경제를 망라한 광범한 연대를 통해 뉴라이트라는 이념 집단을 전면에 내세워 역사교육을 흔들어대며 민족정기에 말뚝을 박으려 하고 있다. 이제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는 수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이어져서는 안 된다. 수구는 보수와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보수로 진화할 수도 없다. 이제는 수구세력을 우리 공동체의 지도적 위치에서 몰아내고 상식과 원칙이 통하고 국가주권과 남북평화가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며 여러 세력 간의 공존이 실현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대한민국 제대로 세우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할 2013년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2012년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통해서만 가능해질 수 있다.


400여 시민사회단체가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사퇴를 촉구했다.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인한 그의 진퇴 문제가 역사학계에서 시작해 교육계와 정치권을 거쳐 시민사회단체로 확산되고 있다. 무수한 경고와 반발에도 아랑곳 않고 권력을 앞세워 사실을 왜곡하려 했으니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교과부와 국사편찬위원회가 어제 집필기준 설명회를 열어 진화를 시도한 것은 이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집필자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균형성과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5.16 군사정변이나 5.18 민주화운동 등 구체적인 사례들은 집필기준에서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포함되지 않으면 통과되기 어렵다고 쐐기를 박기도 했다. 일부 물러선 셈이다. 하지만 대원칙인 교육과정 각론과 집필기준은 그대로 두고, 심사기준만 바꿔 바로잡겠다는 이들의 태도는 억지춘향의 본보기다.
이들 말대로 자율성을 존중했다면 학계의 절대다수가 반대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변경하는 문제,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 기술 문제부터 자율에 맡겼어야 했다. 당장 소나기나 피하자는 속셈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정권의 의도가 이미 드러날 대로 드러났는데 어떤 출판사가 집필기준에도 없는 내용을 자율적으로 기술할까. 정권의 역사 농단 의지를 심사기준의 손질로 바로잡을 순 없다. 장관 사퇴 요구가 빗발치지만 그것도 해법이 아니다. 그는 민주주의와 학문 그리고 역사의 이름으로 경질돼야 한다.
 
그는 학계의 일치된 연구결과나 의견은 물론 정해진 절차마저 철저하게 유린했다. 역사교육과정 연구위원회와 심의위원회가 만장일치로 결정한 내용을 멋대로 바꿨다.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개발위원회의 다수의견도 묵살했다. 이를 위해 역사교육과정 개발 추진위원회라는 자문기구를 급조해 들러리를 세웠다. 개악 이후 학계의 항의는 모두 외면하거나 묵살했다. 친일 청산 과정, 독재체제의 폐해, 이를 바로잡으려는 민주발전의 중요 계기들에 대한 기술이 집필기준에서 빠진 것은 그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그가 맹종한 것은 사익추구 혹은 이념 집단에 불과한 수구언론이나 관변학자들뿐이었다. 
이제 학문의 자유와 교육의 중립성은 치명상을 입었다. 실무선에서 이를 미봉하려 하지만 정권에 의한 역사 농단의 과오를 덮을 순 없다. 최소한 이 장관을 경질해야 하는 까닭이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엊그제 1500억원 규모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자신이 소유한 안철수연구소의 지분 절반을 기부해 저소득층 청소년들의 장학금 등으로 쓰겠다는 것이다. 안 원장의 통 큰 기부는 오랫동안 품었던 결심을 실천에 옮긴 것이기에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안 원장은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이 있다고 밝혀, 새로운 기부문화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최근 들어 안 원장은 그를 빼놓고는 정치 구도를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치적 비중이 높아졌다. 그 때문에 그의 진의와 무관하게 기부행위와 관련해 정치적 맥락에서 이런저런 풀이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정치 참여를 위한 계산된 행보라고 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편협하고 작위적이다. 민주당 이용섭 대변인이 말한 대로 정치란 무릇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안 원장은 정치를 하든 안 하든 이미 우리 사회에 보탬이 되는 큰 정치를 하고 있다고 보면 될 터이다.
 
안 원장의 기부는 나눔에 대한 그의 철학에 바탕한 새로운 기부의 장을 열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순수한 기부로 보기 힘들었던 일부 재벌 총수와 정치인들의 사재 출연과는 격이 다르다. 일찍이 무료 백신 보급 등으로 나눔을 실천해온 안 원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해왔다. 그는 자신이 이룬 것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며, 혜택을 받은 만큼 앞장서서 공동체를 위해 공헌할 필요가 있다고 말해왔다. 게이츠재단을 설립한 뒤 280억달러를 기부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부자증세를 주장하고 나선 세계적 자산가 워런 버핏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해 사회적 책임을 다한 것이다. 
기부가 구조적인 문제를 온정주의로 돌린다는 지적도 있지만 순수한 나눔은 값지고 소중하다. 게이츠와 버핏이 주도하는 기부 서약에 미국의 400대 억만장자 상당수가 동참하고 영국에서도 부자들 사이에서 유산 10%를 자선단체에 기부하자는 캠페인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전 재산을 기부하는 독지가나 남몰래 기부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도 적지 않지만 정작 재력 있는 기업가들의 통 큰 기부는 유한양행 창업주인 고 유일한 박사가 유일할 정도로 드물다. 안 원장의 실행으로 우리 사회를 보듬는 아름다운 기부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식이 확산되기를 바란다. 


- The River In The Pines -

지난 11월 2일, 로이 톰슨 홀에서 있었던 죤바에즈(Joan Baez) 콘서트를 구경 갔다. 80년 대 초반에 가고, 근 30년 만에 두 번째 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다. 그녀의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캐나다로 막 이민을 오기 전, 시를 쓴다는 여자를 그녀의 학교 앞 다방에서 기다릴 때였다. 약속 시간에 나오지 않아 만남이 늘 마지막 같을 때, ‘The River In The Pines’가 흘러나왔다. 영어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 내용은 몰랐지만 슬픈 노래라 느꼈고 예감처럼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가슴 속에 슬픔처럼 강물이 흐르고……. 
이유 분명치 않고 명분 없던 이라크 전쟁 중에 그녀는 왜 노래도 없이 침묵을 지켰을까? 나이가 많아 은퇴를 했을까? 아니면 미국의 역사와 전통인 마녀사냥을 당했을까? 그녀는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한 ‘사코와 벤자티’, ‘사이공 신부’를 노래했고, 융단 폭격이라는 무차별한 폭격을 반대해 하노이에 가서 전쟁에 반대했다.
 
그녀는 살아 노래 부르고 있었다. 가로수의 낙엽은 떨어지고 늦가을인지 아니면 초겨울인지 애매한 2009년 밤 토론토의 메시 홀에서 공연한다는, 광고를 우연히 보았다. 70년 말, 20대 초반에 바다를 건넌 텅 빈 가슴을 달구었던 그녀의 노래는 슬픈 사랑보다 분노에 떨리는,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 기타소리는 힘이 있었다. 그녀의 노래는 월남에 젊은 병사를 파병한, 반공이 국시인 우리의 군사정권 아래 대부분 금지곡이었다.    
겨울의 문턱, 남의 땅 걸을수록 키가 작아지는, 바람 불지 않아도 어깨 움츠리는 소시민이 되고, 60년대 월남에서 싸우던 미군은 먼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우고, 젊은 병사들 죽어 영웅이 되어 자랑스러운 성조기에 덥혀 돌아오고,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의 피는 강물처럼 흘러도, 촛불을 들고 잠시 데모했을 뿐, 열기는 촛불처럼 이내 꺼지고 60년대의 뜨거운 반전운동은 없었다, 이제 먹고 살기 바쁘고 자유를 누리기에 바쁜 선진국 시민들은 먼 나라 일에 분노의 목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이년 전에는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들과 비싼 입장료를 생각했다. 전쟁이 전쟁을 끝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평화는 전쟁 사이의 휴식시간,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시간일까? 쳐들어간 이유가 잘못이라면 사과를 하고 나와야 하는데, 눌러 앉아 점령한 땅 나올 생각 하지 않는다. 미국식 민주주의 가 사막에서 꽃 피우기를 바라며…… 역사는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말하지 않지만, 남의 나라 점령하여 주둔한 군대 영원히 머물 수 없다.
 
그녀는 이제 예전처럼 떨리는 목소리가 고음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가끔 쉰 소리가 나기도 했지만 여전히 힘찬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혼자서 거의 서서 1시간 30분이나 노래를 부른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노래 중간 중간에 말을 하여 강한 메시지를 전달해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We have to see this world in both eyes, not to left, not to right.”
 이번에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Occupy에 대해서 말했다. 
 “They are extraordinary people, and we are extraordinary people, too.” 
나는 이번이 그녀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갔지만,  그녀의 노래는 끝이 나지 않았다고 공연장을 나오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야 말로 죽을 때까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뜻이 담긴 노래는  강물처럼 흐르고…….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