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공범을 자청하는 동키호테"

● 칼럼 2023. 7. 7. 07:1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마당 칼럼]  공범을 자청하는 동키호테

 

일본 도쿄의 중심지에 있는 신쥬쿠교엔(新宿御苑)은 넓고 아름다운 도심공원이다. 봄이 되면 온통 벚꽃(사쿠라,桜:さくら)이 뒤덮어 장관을 이룬다. 평소에도 많은 이들이 찾는 공원이지만 벚꽃이 만개할 즈음에는 ‘하나미’(꽃구경, 花見:はなみ)를 즐기려 소풍나온 가족과 인파가 줄을 이어 잔디밭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빈다. 아마 요즘도 그럴 것이다.

얼추 30년 전의 기억이다. 특파원으로 있던 당시 고베 대지진으로 5천명 이상이 숨지는 대참사 등 큰 사건이 많아 ‘파김치’로 지낼 때였다. TV에서 하나미소식이 넘쳐나기에 모처럼 짬을 만들어 가족과 함께 공원을 찾았다. 어렵게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먹으며 둘러 본 주변은 음식을 먹고 웃으며 떠드는 사람들로 왁자지껄 했지만, 어쩌면 그리도 평온하고 모두들 행복해 보이는 것인지-. 장난치며 딩구는 아이들,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며 훈풍에 날리는 벚꽃 잎들을 바라보는 여성들의 감상어린 모습…청명한 봄 날씨 아래 푸른 잔디밭 위에 펼쳐진 분홍빛 사쿠라 세상은 그야말로 평온과 평화가 가득한 천국이었다.

순간 머리에 맴돌고 가슴에 치미는 생각이 있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하구나! 이 나라가 어떤 나라, 어떤 사람들인데 이렇게 평화가 이 땅에 넘쳐난단 말인가, 이들에게 과연 이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인가….

일본 사람들에게 짓밟혔던 한반도는 분단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북의 핵개발과 경수로 문제 타결에 집중하느라 정신없었고, 북한은 김일성 주석이 죽은 후 권력내부 정리까지 겹쳐 혼돈스럴 상황이었다. 일본 내부적으로도 1월에 고베지진, 3월에는 옴 진리교 지하철 사린살포 사건 등 대형 악재가 잇달아 터져 자민당 정권이 무너진 뒤 소란스런 정치상황 속에 뒤숭숭할 때였다.

안팎 정세야 어떻든 상관없어 보이는 도쿄 도심공원의 충만했던 평화는 묘한 대비로 다가오며 질투나 분노와도 같은 탄식을 자아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주변국에 저질렀던 만행을 아랑곳하지 않는 무감각도 그러려니와, 자국의 수많은 국민들이 지진의 대재앙 수습으로, 살인 독가스 살포로 공포와 불안에 잠겨있는데도, ‘너는 너, 나는 나’ 라는 이기와 무관심이 지배하는 일본수도 도쿄의 평화로운 공원풍경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방사능 핵폐수를 방류하겠다고 막무가내 밀어부치는 요사이 일본을 보면, 나만 편하면 남이야 어찌되든 관심없고 상관도 않는다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의 이기적 속성과 그들의 변치않는 ‘시마구니 곤조’(島國根性: 섬나라 근성)를 그대로 드러내 준다. 한마디로 정수처리에 자신있거든 바다에 내다버릴 리가 없으니 이기적 속임수가 아니고 무엇인가.

저들은 오로지 조선 침탈의 야욕만 채우면 그만인 자들이었기에 동학혁명의 농민들을 수 십 만명 학살한 제노사이드 범죄를 기억하거나 사죄할 이유가 없었다. 조선인 1만명 가까이를 관민합작으로 학살한 관동대지진 당시의 야만범죄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땅과 사람들을 수탈한 식민범죄도, 태평양전쟁으로 3천만 명 이상을 죽게 한 전쟁범죄도 저들은 참회나 사죄하기는커녕 이제는 피해자 코스프레 마저 하고있다. 그런 그들에게 태평양과 인근 나라 바다를 오염시킬 핵 오염수 방류 쯤이야, 뭐가 대수겠는가. 태평양 섬나라들과 중국 등 몇 나라들, 그리고 그린피스 같은 환경단체들이 ‘지구파괴 생태범죄’라고 제동을 걸긴 하지만, 우방인 미국이 눈감아 주고, 캐나다는 침묵하고, 한국의 동키호테 지도자는 앞장서서 변호인 노릇까지 해주니, 일본에게 “범죄는 더 이상 저지르지 않겠다”며 인류건강을 생각하는 양심을 기대하기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크고 작은 공동체안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간다. 마을공동체에서 아픔과 기쁨을 공유하며 서로 힘이 되고, 국가적으로도 한 마음으로 경기를 응원하는가 하면 국난에는 함께 위로하고 고통을 나눈다. 지구촌이라는 인류공동체 역시 다를 바가 없다.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고, 자기 나라만 편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는 없는 세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물가가 뛰고 경제가 불안한 것을 우리 모두 겪고 있다. 퀘벡의 산불 연기가 뉴욕까지 뒤덮었고 유럽과 호주의 소방관들이 캐나다로 달려온다.

유독 일본인들만 이웃이야 어찌되든 신경 안쓰는 족속의 특성을 보이는데, 한국의 윤 정권은 무슨 빚을 졌기에 굴욕을 마다않고 저들의 앞잡이 노릇을 자청하는 것일까. IMF 당시 한국의 긴급 외화차입 요청을 완강히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꺼낼 것도 없이 일본은 믿을 만한 이웃나라가 못된다. 과거 군국·제국주의 망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여러 행태만 보아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나라다. 그런 일본을 꿰뚫어 보면서도 미국은 힘이 있으니 압박하며 활용한다지만, 친일에 목을 맨 한국 윤 정권은 불꽃의 유혹을 좇다가 타죽는 부나방처럼 우둔의 늪을 가고 있다. 지구의 70%인 물을 병들게 하는 환경범죄의 후과를 일본과 같이 짊어질 작정인지,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다.     < 김종천 편집인 >

 

[목회 칼럼] 창조의 파괴

● 칼럼 2023. 7. 7. 06:5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창조의 파괴

박원철 목사 <늘사랑교회 담임>

        성경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천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性)의 구별은 성경적 가치관일뿐만 아니라 종교와 문화, 인종과 나라를 막론하고 동일한 인류의 보편적 질서였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성적 구별은 성적 평등이라는 이름 하에 파괴되고 있다. 성의 구별에서 오는 차별을 없애고 성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활동가들의 주장에 의해 성별의 문화적, 생물학적, 사회적 및 심리학적 역할이 파괴되고 있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내세우며 다양한 성정체성을 포용하자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적 구별이 없는 젠더리스(genderless)의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이렇게 성의 구별이 파괴된 시대 상황 속에서 남자가 치마를 입거나 여자가 터프하게 남성적 복장을 하는 것을 뛰어넘어 요즘엔 남녀 성별 경계가 모호한 패션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성적 중립성의 움직임은 이미 오래 전에 언어에서 먼저 나타났다. 특히 상대적으로 성적 구별이 엄격하지 않은 영어권에서도 남녀를 구별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mankind”를 “humankind”로, “chairman”을 “chairperson”으로, “manpower”를 “staff”로 바꾼 것이 일부 사례들이다. 심지어 “God our father”을 성적 중립 언어 사용이라는 명목으로 “God our parents”로 바꾸었다. 언어는 “사유의 도구”이자 “세계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남/여”라는 성적 구별을 거세하고, 남/여 이분법으로 정의되지 않는 성소수자(LGBTQ)까지 아우르는 성적 중립 언어는 이 세상이 점점 성의 구별이 없는 젠더리스(genderless)의 시대로 바뀌어 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소수자의 인권과 성차별금지를 위해 활동하는 사회운동가들은 이러한 성별 파괴를 성적 차별을 없애고 성적 평등을 실현하는 “창조적 파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젠더리스(genderless)의 상황을 하나님의 “창조의 파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이런 “창조의 파괴”는 급기야 남성의 신체를 가진 트랜스젠드가 여성 전용 스파에 출입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하였다.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아 남성의 성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트랜스젠드가 한인이 운영하는 여성 전용 찜질방의 멤버십을 거절당하자 소송을 제기했는데, 연방법원 워싱턴주 지법은 여성 전용 스파에서 남성의 신체를 가진 트랜스젠더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은 “성차별금지 규정의 위배”라고 판결을 하였다고 한다. “진짜 세상이 완전히 미쳐가고 있구나!”

        성경적 세계관을 설명하는 내용 중 하나는 “구조-방향”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각 영역에 부여하신 규범이나 본질은 “구조” (structure)로 설명하고,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왜곡을 “방향” (direction)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타락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의 본질(구조)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몰고 간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을 통해 한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고 본질이다. 그러므로 성적 중립성(젠더리스)나 동성애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왜곡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창조 파괴”의 시대에 끝까지 하나님만을 향해 나아가는 “남은 자”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끓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왕상19:18).

 

[1500자 칼럼] 세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

● 칼럼 2023. 7. 7. 06:5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세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

은의 길’을 완주하고.

임순숙 수필가

최근 세번 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병하기 이전 계획했던 여행을 실행하는데 꼬박 3년이 걸렸다. 그 자유롭지 못했던 기간 동안 산티아고라는 해방구는 상상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지만 때론 쉬이 나설 수 없는 상실감에 우울해지기도 했다. 이미 두 번의 완주 경험을 했음에도 마음 한쪽은 늘 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으니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이다. 다행히 마음의 병이 깊어지기 전에 하늘길이 열려, 삼월하순 ‘은의 길’ 출발지인 스페인 남부 세비야로 향했다. 이번 여정에선 그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고 스스로 자문자답하며 지루한 길을 줄여나갔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여러 순례길 중 ‘은의 길(Via de la Plata )’은 스페인 남부도시 세비야에서 북쪽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1000km를 약간 웃도는 거리이다. 옛 로마시대의 군사들이 전쟁물자 수송을 위해 사용된 도로가 현재의 순례길로 전환되었으며 곳곳에 그 시대의 유적들이 산재하여 감상하며 걷는 재미도 특별했다. 스페인에서도 가장 스페인다운 곳으로 호평받는 ‘은의 길’은 아마도 로마시대의 유적들이 주민들의 일상에 그대로 흡수되어 어우러진 옛스러움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은의 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외로움의 길’이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수많은 길 중 ‘은의 길’을 택한 사람은 전체의 5 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하루종일 걸어도 고작 5~6 명의 사람들과 스칠 정도였다. 순례길은 곧 고행의 길이라 외로움도 감수해야겠지만 때론 힘들기도 했다. 그 순간마다 내 곁을 묵묵히 지켜주는 짝꿍이 더 없이 고마웠고, 초반전 함께 했던 일행들의 안위가 몹시 궁금해지기도 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어쩌다 그들 중 몇몇이 같은 숙소에라도 묵게되면 그날은 모두 어린아이가 되어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한동안 풀어내지 못한 갖가지 사연들을 토해내며 전의를 다지는 시간, 내일을 위한 활력을 비축하는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우연히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일 뿐인데 서로의 감정을 그토록 잘 공유하며 다독일 수 있었는지, 아마도 외로움에서 온 산물이 아니었을까 쉽다.

꼬박 40여일 걷는 동안 우리부부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의기투합했던 사람들은 불과 7~8명에 불과하다. 그들은 모두 엄청난 산티아고 애호가, 혹은 하이킹 마니아 들이었다.

앞으로의 여정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며 네잎 클로버를 나에게 쥐어준 아이슬란드 여인, 무려 11번 째 순례길 방문이라는 그녀는 언제 어디에서나 늘 호쾌한 언변과 웃음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그리고 오래 전 부인과 이혼한 후, 여건이 될 때마다 ‘은의 길’만 고집한다는 프랑스에서 온 얀, 최근 부인과 사별한 후 3개월째 세계 여행 중이라는 오스트리아 출신 Dussy, 그외 정말 하이킹을 좋아해서 오게 됐다는 미국, 독일계의 두 커플들과 긴 시간 함께 하면서 내린 답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는 온 몸과 마음을 바쳐 구현해 낸, 모든 순례자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토론토 출신의 산티아고 애호가, 샌드라로 부터 장문의 이 메일을 받았다. 허연 싸리꽃이 온 산을 뒤덮은 어느 이른 아침이 몹시 그립노라고. 여름한철 서드버리 별장에서 식구들과 즐겁게 지내면서, 고생바가지 그때를 그리워하는 마음 이해하고도 남는다.

이번 가을엔 그녀와 브루스 트레일을 걸으며 특별한 하루를 보내려 한다.  

 

 

Open Building Permit 을 가진 주택매매시 심각한 문제점들.

김종욱 리얼터

사례) 지난 2020년 5월 Chris 씨 부부는 Markham의 Helen Ave.에 있는 주택을 $1,050,000에 구입계약을 맺는다. 클로징 전인 7월초, 그들의 변호사는 Markham시청에 조회한 결과 Open Building Permit이 등록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Seller측 변호사에게 이를 통보하였고( Requisition Letter), Permit 파일을 클로스 해달라고 요구한다.

‘Open Building Permit’ 은 심각한 명의상(Title)의 결점이 될 수있으며, 온타리오 주에서는 이를 이유로 Buyer가 클로징을 거절하는 것도 용납된다.(단, Title Insurance Company가 이의 커버를 거절할 경우에 한한다)

하지만 클로로징 날짜인 7월20일까지도 파일은 클로즈되지 않았고, Title Insurance Company 도 만약의 경우 있을 손해에 대한 커버를 보장해 주지 않았다.

이에 Buyer는 클로징을 거부하였고, Deposit $50,000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Seller 측에서는 “자기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계약 위반이다”라며 Deposit 반환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결국 사건은 법정으로 가게 되었고, 2022년 4월 판결이 이루어진다. “Buyer는 당연히 Open Permit이 없는, 흠없는 Title(명의)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Deposit과 이자를 함께 돌려주라”는 판결이었다

그러나 7월에 다시열린 법정에서의 쟁점은 재판비용(Court Cost )이었다.

Buyer인 Chris 씨는 법정비용으로 $70,000을 Seller가 지급해주기를 청구한다. 그러나, 판결은 $25,000을 지급하라고 나온다.

이제 Buyer와 Seller, 각자의 손익을 계산해보자.

# Buyer: $25,000(Seller에게서 받는 금액)- $70,000(변호사 수입료)=$45,000 손해.

# Seller: $25,000(Buyer에게 줄 금액)+$45,000 (변호사 수임료)=$70,000 손해.

그러면 법정에서의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Buyer? Seller? 아니면 양쪽의 Lawyers?

과연 어느 누구의 무지와 잘못으로 연유된 문제이며, 누구를 원망해야 할 것인가?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적어도, Seller측에서는 Buyer가 클로징을 거부하였을 때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Deposit 을 반환하였어야 했다. Open Building Permit 이 있다는 사실을 리스팅할 때 미리 적시(Disclose)할 의무를 위반했기 때문이다.

Open Building Permit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보자.

집 주인이 주요 리노베이션( Material Renovation), 즉 증축(Addition), 패티오 설치, 덱 설치,HVAC 시스템교체,새로운 배관 등 주요 건축공사 및 수리를 하기 위해서는 지방 자치단체로부터 Building Permit을 받아야한다. 이에는 자치단체가 요구하는 각종 규제 및 Building Code에 맞게 공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공사가 끝나면 최종검사(Inspection)를 받아 통과가 되어야한다. 만약 하자가 발견된다면, 자치단체는 Work Order를 내려 이를 시정토록한다.

그러나 Building Permit을 받은 후, 공사를 하지않거나 최종 Inspection을 받지않고 방치하게 된다면 Building Permit이 Open된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실제로 Building Permit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대수롭잖은 경우도 많지만, 의외로 적지않은 금액의 손실을 볼 수도 있다.

일례로, 2013년 온타리오 고등법원에서 다루어졌던 사건 중 위험이 있는 Garage를 허물고 다시 짓는데 $11만불이 들게되었고, 이로 인하여 법정다툼으로 번진 일도 있었다.  [ 문의: 416-409-90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