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국화꽃 따는 아침

● 칼럼 2013. 11. 17. 21:09 Posted by SisaHan
요즘 들어 불면의 밤이 잦아졌다. 나는 반갑지 않은 이 손님이 찾아드는 시간이면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멀리 지리산 피아골 산(産) 백초차를 감히 꿈꾸어 본다. 백여 가지 넘는 산야초가 어울려서 빚어 낸 차는 쓴맛, 달큰한 맛, 새큼한 맛이 차례로 감돌아 정신을 맑게 한다는데, 어차피 깨어있는 밤이니 더 맑아져도 상관이 없겠다. 다만 그 차를 마시는 동안은 백여 가지 이름 모를 산야초의 살랑거림으로 불면의 밤이 짧아지리라는 상상도 은근히 해 본다. 
 
지난 여름 끝머리에 지인이 보내 준 책 꾸러미에서 산야초에 대한 책을 먼저 뽑았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문학 서적은 뒷전으로 하고 지리산 산야초 이야기에 한동안 정신을 빼앗겼었다. 자연과 합일을 이룬 한 지리산 붙박이가 들려주는 차(茶) 이야기는 까다로운 다도 운운하며 멀리했던 다기를 가까이 하게 했고, 손수 산야초 차를 만들어 보고 싶은 유혹이 들게도 했다. 

가을엔 감국, 구절초, 국화, 구기자차 류가 으뜸이라기에 뜰 안에서 왕성하게 자리 잡은 국화 무더기에 눈길을 자주 보냈다. 초가을부터 봉긋봉긋 올라오는 꽃봉오리를 보며 마음은 이미 국화차에 잠겨버렸다. 놈들이 개화를 하면 넉넉히 말려서 가을 노래 부르며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리라는 흑심을 품고서다. 
어느 쾌청한 날 아침, 이슬 머금은 꽃이 향기가 짙다는 지침을 상기하며 국화꽃이 벙글거리는 화단에 들었다. 하지만 해맑게 피어오른 꽃송이들 곁에 서니 손이 선뜻 나가지 않았다. 무심한 마음일 땐 그토록 곱던 꽃이 따려는 순간엔 수 백, 수 천, 적의에 찬 눈빛으로 조여 오는 듯했다. 말 못하는 식물에도 인간이 감당 못할 기가 있음을 그때야 알았다. 잔뜩 기에 눌린 나는, 손품은 좀 들어도 덜어낸 티가 덜 나는 자잘한 토종이 그래도 낫다고 자위하며 몇 줌 따서 도망치듯 나왔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수없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낸 사실을 잊은 채 내 욕심만 채우려고 했으니, 참으로 미안했다. 
 
계절 탓인지 부질없는 생각이 부쩍 많아졌다. 무심결에 이는 바람에 이유를 묻고, 그냥 스쳐가는 인연에도 의미를 찾게 된다.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양 가볍게 흘려보낸 것들을 되새김질 하며 창밖을 보다가 기울어가는 황국에서 눈이 멎었다. 초롱초롱한 꽃망울로 꾸짖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된 서리 몇 번 다녀가고 나니 허물어지는 낌새가 역력했다. 나는 가볍게 걸쳤던 몽상가의 옷을 벗어던지고 비닐봉지 하나 챙겨서 뒤란으로 나섰다.
느슨해진 화단에서 가을 향을 딴다. 황국, 백국이 엇비슷하게 누워서 얼른 데려가 달라고 재촉 하는 듯하다. 푸근한 마음으로 한 무더기 끌어안고 얼굴을 들이민다. 농익은 향기가 온몸으로 스며든다. 수수하면서도 친숙한 향, 그럼에도 끝 모를 깊이로 이끄는 국향이다. 
 
어느 원주민 부족은 십일월을 일컬어‘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고 한다. 조급함을 버리고 기다리다보면 언젠가 때가 오리라는, 자연의 순환 이치를 통찰한 사람들의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다. 

풋풋함 대신 평온함이 배가되어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아침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한국을 주요 정보 수집 대상으로 분류하고 도·감청을 포함한 무차별적인 정보 수집 활동을 해왔다고 외신이 폭로했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미국은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한국의 외교·안보·통상 정책의 출현 가능성을 예의주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한국의 최고위급 정책 결정자를 감시했는데,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도·감청을 자행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미국이 공연한 수고를 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굳이 엄청난 첨단 장비와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한국을 감시하지 않아도 한국에는 자발적으로 미국에 정보를 가져다 바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미 정보기관 요원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있는 한 관리는 재임 기간 중 한국 국방부, 합참, 방위사업청 관계자들이 수시로 찾아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제점을 까발리고 상관에 대한 험담까지 늘어놓는 데 대해 깜짝 놀란 적이 많았다고 회고한다. 
그런가 하면 정치적 야심가들이 청와대와 대통령에 대한 정보를 미국 대사관에 제공하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거물급 정치인들이 자신과 관련된 정치 현안에 대해 미 대사관을 찾아가 설명하는 것도 이제는 관례화되었다.
3년 전에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외교전문만 보아도 한국에는 자발적인 미국의 정보원이 널려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2008년 11월13일자 외교전문은 박근혜 대통령도 2002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을 캐슬린 스티븐스 미 대사와 오찬을 함께 하면서 상세히 소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재작년에는 한국 공군이 미국 전투기의 센서 장비인 ‘타이거아이’를 무단으로 분해했다는 제보가 미 대사관에 접수되었다. 이후 미 정부는 대규모 감시단을 한국에 파견했고 한국의 방산 보안 정책을 미국에 유리하게 바꾸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성공했다. 이 사건은 한국군 내부의 정보제공자, 즉 밀고자와 한국계 미군 장교의 합작품이었다.
 
얼마 전 미국이 한국에 판매하고자 하는 스텔스 전투기를 한국이 구매하지 않으려는 조짐을 보이자 이를 정확히 간파한 미국 정부가 모종의 압력을 가해 김관진 국방부 장관으로 하여금 기존의 사업을 부결하도록 했다. 이것도 역시 우리 국방부 내부의 정보 제공자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미군의 감청장비가 배치된 한국군 정보부대의 경우 미 정보기관과 정보 교류 비밀 합의서를 체결하였는데 그 말미에 “합의 체결 사실을 각자 본국의 정부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다. 이 조항이 필요했던 이유는 자명하다. 미 정보기관이 한국의 주권을 유린하는 불법행위를 한국 정부에조차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에 정보를 제공하는 밀고자들에게는 조국이 두 개다. 이들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뿐만 아니라 동맹국에 대한 ‘이중 충성’이 덕목이다. 이런 정보 제공자들이 국회, 국방부, 외교부, 군부대, 방위사업청에 득실거린다. 미국이 없으면 당장 우리나라가 망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중 충성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란 없다.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국방부 정보본부장은 “미국이 없이 남북한이 일대일로 싸우면 진다”고 했다. 그에게 미국이란 단순한 동맹국, 그 이상의 존재다. 여기에는 미국에 대한 의존성을 넘어선 자발적 식민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왜 굳이 번거로운 도·감청을 하였을까? 안 해도 얼마든지 정보가 들어오는데 말이다. 
불신 때문이다. 정보 제공자가 자신의 조국을 배신하며 미국에 정보를 제공하는 데는 모종의 개인적 야심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 정부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를 갖고 있으면서도 도·감청에 예산을 투입하며, 앞으로도 절대 멈출 수 없다. 

< 김종대 - 디펜스21 플러스 편집인 >


관측 사상 최대 순간풍속(시속 379㎞)의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 중부 지역을 강타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인적·물적 피해를 불러일으켰다. 외신들이 현지에서 전해오는 사진과 기사를 보면 지옥이 따로 없을 지경이다. 먼저 느닷없는 대자연의 횡포 앞에 공포와 고통을 겪고 있는 피해지역 주민들에게 깊은 위로를 보낸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레이테섬의 주도이자 최대 피해지인 인구 20만명의 해안도시 타클로반은 시내에 건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쑥대밭이 됐다고 한다. 거리는 쓰레기와 건물 잔해로 뒤덮인 강으로 변했고, 고인 물에 주검이 숱하게 떠다니고 있는 아비규환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사망·실종된 피해자만 1만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서배스천 로즈 스탬파 유엔 재해조사단장은 피해 현장을 둘러본 직후 22만명의 인명을 앗아간 인도양 쓰나미 직후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피해 규모가 지금 추정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커질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피해 규모가 이렇게 커진 데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예측불허의 기상 교란과 필리핀의 후진적인 재해예방시스템도 한몫을 했다. 앞으로 인류 공영 차원에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대비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긴급한 것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하루빨리 구호하고, 피해지역을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복구하는 것이다.
 
필리핀 정부가 이미 국고의 재난기금을 투입하기 위한 ‘국가 재앙 사태’를 선포했고, 미국, 유럽연합, 영국, 일본 등이 즉각 구호기금과 수색장비 및 인력 제공을 약속하는 등 앞다퉈 지원에 나서고 있다. 우리 정부도 11일 긴급구호대 파견과 구호금 지원 규모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웃의 엄청난 불행에 인류애를 발휘하는 것은 정상국가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필리핀은 6.25전쟁 참전국이자, 동남아시아의 핵심 우방국이다. 결코 지원에 인색할 이유가 없다. 또한 정부는 레이테섬 등에서 연락이 두절된 것으로 알려진 40여명의 국민에 대한 소재 파악과 구출에 최선의 노력을 펼쳐야 한다. 가장 위급할 때 도움을 주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유럽 순방을 수행했던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의 ‘페이스북 폭언’을 둘러싼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프랑스 파리 반정부 시위대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한 그의 발언에 대해 집회 참가자들이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가 하면 미국의 대형 웹커뮤니티 사이트에 관련 기사가 링크되어 국제적 망신까지 샀다고 한다.
문제의 발언은 박 대통령이 파리를 방문한 지난 2, 3일 현지에서 교민과 유학생들이 국가정보원 등의 대선 개입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인 데 대한 것이었다. 당시 집회 참가자들은 ‘박근혜는 한국의 합법적 대통령이 아닙니다’라는 등의 펼침막을 내걸고 집회를 했다고 한다. 김 의원은 이를 두고 ‘통진당 파리지부 수십명이 모여서 했다네요’라는 등의 주장을 편 데 이어 ‘이번에 파리에서 시위한 사람들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채증 사진 등 관련 증거를 법무부를 시켜 헌재에 제출하겠습니다’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집권여당의 국회의원이, 외국에서 교민들이 조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며 벌인 반정부 집회를 두고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등의 협박성 발언을 한 것은 경솔하기 짝이 없으며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의 양식을 의문스럽게 하는 행동이다. 헌법에 보장된 집회·시위의 자유를 들먹일 필요조차 없다. 더우기 그들은 집회 시위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선진국에 거주하는 재외국민이다. 현지 한국대사관이 프랑스 당국에 시위를 막아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해 망신을 당했다는 소식과 함께 실로 낯뜨거운 망동이 아닐 수 없다. 국회 법사위 소속 국회의원이 사진 채증 운운하며 헌재에 제출해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한 것은 마치 조폭도 같은 수준이다. 헌재가 무엇을 한다는 것인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안되는 겁박에 실소를 자아낼 뿐이다. 시위 참가자들은 통합진보당 파리지부의 집회였다는 김 의원 주장은 명백한 허위사실이라며 정정과 사과를 요구했다. 명확하지도 않은 사실에 입각해 집회 참가자들을 낙인찍고 유형, 무형의 피해를 주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뒷골목 조폭같은 행태일 뿐이다.
 
박 대통령이 방미 때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사건으로 망신을 샀던 게 불과 몇달 전이다. 이번엔 김 의원이 박 대통령의 유럽 순방을 수행하며 과잉충성으로 오히려 화를 자초한 꼴이 됐다. ‘종북 저격수’를 자칭한다는 김 의원이 수준 이하의 발언을 쏟아낸 것은 한두번이 아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맡았던 후배 검사를 운동권 출신으로 몰아붙이는가 하면 채동욱 전 검찰총장과 여성 국회의원이 부적절한 관계가 있다는 등의 막말을 내뱉기도 했다.
김 의원 같은 이가 수준 이하 발언으로 주목받는 것 자체가 우리 정치의 한심한 수준을 보여준다. 정치에도 품격이 필요하다. 김 의원은 당장은 종북몰이로 ‘장사를 좀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수준이 안 되는 정치인은 결국 퇴출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김 의원은 강원 춘천 지역구 주민들의 수준을 너무 얕잡아 봐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