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미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A 씨가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만일 지난 날,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취해 갔다면 오늘 북한 땅에 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실망한 것은 사회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 속에 숨어있는 무서운 ‘독선’과 ‘위선’속에 있는 ‘절대주의’라고 말했다. 나는 너보다 우월하고, 너는 나에게 복종해야 하는, 나의 원칙은 절대이고, 네 원칙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는 절대주의! 요즘 유행하는 사자성어 가운데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말과 같은 잘못된 가치관이다. 사실 오늘 현대의 위기는 이기주의 속에 숨어있는 인간의 절대주의란 병에 있다.


하나님은 요나를 찾아와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곳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라”… 이는 하나님의 이방선교의 첫 명령이었다. 그런데 요나에게 이 하나님의 명령은 납득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았다. 어째서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는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고 도리어 그곳에 가서 구원을 선포하게 하시는가? 라는 의심이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저항을 느끼면서 결국 요나는 스페인의 남쪽 항구 다시스를 향하여 도피행각을 시작하고 만다. 하나님께 향한 요나의 저항! 요나의 도피! 우리는 여기서 요나 속에 깊숙이 깔려 있는 가장 무서운 인류 공동의 병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이기주의 속에 숨어있는 ‘절대주의’라는 교만이었다. 이스라엘만이 구원을 받아야 하고, 니느웨는 의당 멸망되어야 한다는 바로 이 이분법(二分法)! ‘나는 흥하여야 하고, 너는 망해야 한다는 자기 절대화에 있었다. 요나가 이 자기 절대화라는 병에 걸려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심령 속에 여백이 없었다. 그는 민족주의라는 미명의 위장을 쓰고 다녔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보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내 것’과 ‘우리 것’만의 절대화와 이기주의가 있는지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내 말과 행동은 옳은 것이요, 내 지식, 내 가치관, 내 것은 최고라는 교만과 독선! 또 우리 교회만 부흥해야 하고, 내 사업만 흥해야 하고, 우리 가정만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하는 속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때문에 정녕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이 비극이 우리 속에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부와 명예를 누리는 재벌들, 정치인들과 교수들,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큰 교회 목회자들 중에도 보면 정의와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실상은 ‘나’는 ‘나’를 우상으로 만들고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시며, 정의의 잣대로 우리들을 향한 치수를 재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만의 성공! ‘나’만의 절대화! 이는 하나님도 너도 부정해 버리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결국 요나의 교만과 절대주의가 깨어진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요나의 이기주의와 절대주의를 부정하셨다.

결국 요나는 큰 물고기 배속에서 3일 동안 큰 고통을 받다가 드디어 붙잡힌 바 되어 니느웨로 끌려가게 된다. 자신은 원치 않았지만 그곳에서 요나는 복음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니느웨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리시고 니느웨 백성들을 심판에서 구원해 주셨다. 이 모습을 요나는 분명하게 보았다. 이는 구약에 처음으로 증언된 이방 나라의 첫 구원 사건이었다. 성경은 ‘요나’의 교만함과 부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 하나 하나를 사랑하시므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려는, 전 우주적인 뜻을 이루어가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감사해야 하며, 혹시 내 속에 지나친 이기주의나 절대주의라는 교만이 있지나 않은지 말씀에 비추어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 선교와 전도 사역에 동참하여 하늘나라를 확장하는데 귀하게 사용되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 정태환 목사 - 한인은퇴목사회장 >


오는 6월 7일에는 온타리오 주 총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나라와 정부, 그리고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교회로서 명심하며 지켜야 할 부분들이 있기에 이전에 연방 총선 때에 나누었던 내용을 다시 담아 봅니다.
캐나다 시민권을 가진 1.5세로서 늘 마음속에 부담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왜 이민교회는 한국의 정치, 대선에 관심을 보이고 대통령을 위하여 기도하면서도 정작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하며 살아야 하는 캐나다의 총선이나 지도자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물론 정서적으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 충성과 헌신은 중요한 것이며 마땅히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본향이 천국임에도 그리스도인은 사는 곳의 다스리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그 권위를 따라야 함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조국을 위해서만 기도하고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곳 캐나다를 품고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섬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1세들의 헌신과 섬김을 통하여 이민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경험케 하셨습니다. 이제 다음 세대들은 이민 사회에만 제한되지 않고 캐나다 주류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영향력을 가지고 섬겨야 하는 부르심과 거룩한 책임감을 느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장한 큰빛교회는 이제 캐나다에서도 영향력을 끼치며 빛을 발하는 부르심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우리 교회를 방문한 연아 마틴 상원의원과 같이 신앙을 가진 정치인들이 우리 교회는 물론 토론토의 한인 교회를 통하여 배출되는 꿈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요셉, 다니엘, 에스더와 같이 다음 세대가 일어서도록 기도해 주시며 자녀들에게 비전을 주십시오.

참고로 교회로서 해야 할 것과 삼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다음 사항들은 캐나다 복음주의 교회연합회에서 정한 항목입니다. 건강하며 교회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균형을 지킬 수 있는 지침이기에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나누길 원합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사항들>
1. 교인들은 그 지역에 있는 후보의 신상과 또한 그들이 어떠한 공약을 하고 있는지 파악 하며 신앙의 양심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사역자, 봉사자, 교인은 교회 밖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자신의 개인적인 시간이나 물질을 투자하여 정치적인 활동이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3. 교회는 정치적인 이슈를 특정한 정당이나 후보자와 연관을 짓지 않는 가운데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성도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4. 교회에서 어떠한 이슈에 대하여 듣고자 후보자를 초청하기를 결정하면 모든 후보자를 함께 초청하여 그들을 소개하며 의사를 들을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하지 말아야 할 사항들>
1. 특정한 후보자나 정당만을 초청하여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2. 강단에서 어떠한 후보나 정당을 홍보하며 교인들에게 투표하도록 하는 것이나 교회 앞에 사인을 붙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3. 교회의 헌금은 어떠한 정당이나 후보자의 정치자금으로 사용되지 못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러한 사항들을 잘 지키면서 동시에 캐나다를 아름답게 섬길 수 있도록 함께 협조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노희송 목사 - 큰빛교회 담임목사 >


“예수 잘 믿는 목사를 보내주세요.”


한 교회가 목회자를 청빙하면서 사용한 표현이라고 한다.
총회 임원회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딘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쩌다가 이런 말이 나올 지경까지 왔나 싶다.
기술 좋은 사람을 보내달라는 말은 전혀 거북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기술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앞으로 배우면 된다. 그런데, 목사가 예수를 잘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예수를 잘 믿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믿고 목회를 할까? 자기의 힘이나 경험을 믿든지, 아니면 교회 안에 힘 있는 사람을 믿든지, 여하튼 무엇인가는 믿어야 목회를 할 것이다.
처음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에 갈 때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믿음이 아닌 세상 생각에 빠지게 되면서 변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람은 항상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 사도바울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친 주의 종을 보면 정말 부럽다.

목회자만 변질에 노출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 성도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를 섬겼던 성도가 지금은 뒷짐을 지고 있다. ‘교회의 궂은 일은 내가 한다’는 믿음으로 열심히 봉사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방관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내가 그렇게 되었다면, 정신을 차리고 어디에서부터 나의 믿음이 변질되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나의 순수함과 열정이 사라진 구체적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시험이, 어떤 유혹이 나를 무너뜨렸는지 반드시 돌아보아야 한다.

정상적인 주님의 제자라면 험한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항상 있어야 한다.
반대로, 쉽고 편한 길을 가겠다는 마음이 자꾸 든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말씀과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첫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다. 주님의 음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 잘 믿는 목사를 찾는다는 표현이 매우 불편하게 들렸지만, 생각해보니 크게 잘못된 표현이 아니다. 이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 펑펑 울며 크게 회개했다. 그래도 회개한 베드로가 멋있는 사람이다.
회개하자. 다시금 복음 앞으로 나오고, 주님 만난 그때로 다시 돌아가자.

< 송민호 목사 - 토론토 영락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저 땅에 평화를

● 칼럼 2018. 5. 8. 19:30 Posted by SisaHan

4.27 판문점 선언에 부쳐

처음 이곳에 이민 와서 학교 다닐 때, 역사시간에 한국전쟁을 “Forgotten War”라고 말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그 이유가 한국전쟁이 싸운 명분이 없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없어 잊혀진 전쟁인지, 아직도 전쟁상태인데 그걸 잊고 있어 그런지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나는 포성이 멈춘 지 오래 돼서 전쟁이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직도 전쟁 중이라는 사실이 이해 가지 않았다. 여기 학자들의 눈에는 실질적으로 아직도 전쟁 상태이고 지금은 휴전 중이었다. 언제 또 다시 전쟁이 재발할지 모르는 상태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꼭 남쪽이냐 북쪽이냐를 물었다. 그리고 “아직도 전쟁 중”이거나 “언제 다시 전쟁을” 하는 투로 물었다. 한국은 세계유일의 분단국가이다. 게다가 비교적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어 세계 평화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직간접적으로 세계 4대강국(미.중.러.일)의 이익이 맞물려 있어 한국의 평화는 세계평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통일을 원하느냐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주변 강국의 이익이 얼마나 개입되어 있느냐는 사실도 중요하다.

동족상잔의 전쟁 때문이지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적대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생각도 듣다. 4대 강국의 축의 하나인 구 소련이 붕괴되고 또 다른 축의 하나인 중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일본과도 경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었는데도 북한과는 조금도 관계를 개선치 못했다. 우리가 서로 전쟁 중인 나라로 생각한다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관계가 개선되는가 했지만. 이명박, 박근혜의 보수정권이 지속되면서 북한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우리의 최대의 적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평화와 공존의 시대가 반드시 와야 한다고 믿는다.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고 생각한다. 돌연 개성공단의 문을 닫게 한 이유 중의 하나가 그랬다. 실제가 아님이 누차 강조됐으나, 개성공단을 통해 번 돈으로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했다는 것이 보수측의 주장이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풍요한 남한이 도움을 주려 하는 경우에 반대측이 늘 내놓은 주장이다. 굶주린 백성들 먹여 살리라고 보낸 돈을 핵무기 개발에 쓴다는….

이번 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돋보인 이유가 우리가 그에 대해서 너무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전 보수정권에서 그를 너무 부정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이 어린 철부지 독재자, 친인척 마저 잔인하게 처형하고. 핵무기를 개발하여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전쟁광…그런 것들이 우리가 대강 알고 있던 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모습을 보니 너무 달랐다. 그도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도자였다. 남북의 두 지도자들이 판문점 회담 끝에 내놓은 선언문이 한국의 내일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희망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회담 장면만을 보도 한 것이 아니라 만남에서 헤어짐까지 온 국민에게, 나아가 전세계에 보여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하루 만에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 우리를 당혹하게 했다. 감동을 주고 기쁘게 했다.

물론 그들이 만나 대화를 하고 선언문을 하나 발표했다고 세상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당장 평화가 오고 통일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이 정확한 현실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방향을 제시했다. 전쟁보다 평화의 길을 제시했다는 사실이 이번 선언문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나는 수많은 동영상과 사진, 말들 중에 처음으로 김정은 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적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넘고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땅을 밟고 그리고 둘이서 손잡고 넘은, 우리의 가슴에도 그어져 있었을 그 선… 누가 그 선을 그었는가? 그 선이 과연 넘어서는 안될, 넘지 못할 선이었던가?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