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의 20세기와 21세기의 가장 큰 차이는 한마디로 문명 수입국에서 공급국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무역 규모가 세계 10위를 넘나들고 국민소득 3만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경제지표가 이를 말해준다. 무수한 한국 제품이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고 케이(K)팝을 비롯한 대중문화가 한류를 이루며 자랑스럽게도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해주는 나라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20세기를 살아오면서 우리가 문화적으로 크게 마음 써온 것은 한국 문화의 정체성이었다. 한국인은 누구이고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무수히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런 고뇌와 논의의 결과 우리는 한국 문화의 특질을 세심히 볼 수 있게 되었고 민족적 자존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중심부 문화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모든 문명수입국들이 겪는 문화적 고뇌로 대단히 방어적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자칫하면 폐쇄적인 보호막으로 둘러지고 심지어는 열등의식의 삐뚤어진 행태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고 끝내는 세계 속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데 오늘의 자랑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사실을 체감하지 못하고 여전히 지난날의 관성에 빠져 있는 면이 없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의식과 문화에 대한 시각을 아직도 민족적인 것의 굴레에 가두고 글로벌한 시각으로 전환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한 예로 우리는 한국의 역사라고 하면 으레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사고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역사를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병자호란도 청나라가 쳐들어와 인조가 항복하였다는 사실 못지않게 왜 청나라가 명나라와 싸우다 말고 조선을 침공했는지, 임금을 무릎 꿇렸으면서도 지배하지 않고 인질만 데리고 철수하는 데 그쳤는지도 면밀히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조선왕조의 존재감이 살아난다.


역사책에서 고려왕조는 무수히 많은 침략을 받은 왕조로 기록되어 있다. 거란의 요나라, 만주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그리고 홍건적의 침입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서 보면 중국 대륙이 북송, 요, 남송, 금, 원, 명 등 여섯 왕조가 뒤집어지는 와중에도 고려왕조는 475년간 이어간 대단히 슬기롭고 건강한 나라였다. 원나라의 사위 나라가 된 것도 불명예만은 아니다. 그 막강한 몽골의 27년간 일곱 차례 침공을 막아내고 결국 협상을 통해 ‘칸’의 지배를 받지 않고 대원제국의 사위 나라로 대접받는 것으로 전쟁을 마감하였다.
인간이 만든 밥그릇 중 자기를 능가하는 것은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중국 자기의 역사는 4세기 초보적 청자인 고월자로부터 시작되어 10세기에는 퍼펙트한 청자를 만들어냈다. 이는 중국 문화의 위대한 발명이었다. 고려는 이 중국의 청자를 벤치마킹하여 11세기가 되면 아름다운 고려청자를 만들어냈다. 이후 어느 나라도 청자를 만들지 못했다. 고려마저 청자를 만들지 못했다면 세계 청자의 역사는 중국의 문화로 국한되고 말았을 것이다. 고려는 더 나아가 12세기가 되면 상감기법을 개발하여 청자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구현하였다.
그럼에도 소더비와 크리스티 옥션에서 송나라 청자는 고려청자보다 몇십배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질로 따져서 한 치 꿀릴 것이 없고 희소성을 따지자면 고려청자가 더 귀한데 왜 국제시장에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런던의 브리티시 뮤지엄, 파리의 기메 뮤지엄에서 중국실, 일본실에 비해 한국실의 비중은 비참할 정도로 초라하다. 실로 억울하기 그지없다. 중국은 그렇다고 치고 왜 한국 문화가 일본의 반의반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글로벌 마인드의 선구적 노력이 없었다.또 중요문화재를 제외한 일반문화재는 해외 반출이 자유로워 문화 외교관 역할을 해야 한다.
서구에는 서양인 중국문화 전문가가 많이 있다. 그러나 서양인이 볼 수 없는 중국 문화의 진수를 알기 쉽게 가르쳐준 것은 중국인 임어당(林語堂·린위탕)이었다. 그는 “한 다리로는 서양, 한 다리로는 중국을 딛고 한마음으로 우주를 향해 글을 썼다.”고 했다. 우리에게도 그런 능력과 기백을 갖고 있는 학자·문필가가 나와야 한다.

< 유홍준 - 전 문화재청장, 명지대 석좌교수 >


지금 온 세계가 한반도를 주목한다. 남북한 전쟁 상태가 종식되고 화해와 평화의 길이 어렴풋이 보인다. 70년 적대와 갈등을 끝내자는 숨막히는 순간이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으므로 물이 들어왔을 때 조심스럽게 노를 저어야 한다. 그동안 한국은 한반도 문제의 주인 노릇을 거의 할 수 없었지만, 이제 문재인 대통령의 ‘운전자론’이 현실화하고 있다.
남북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리가 흔히 분단체제라고 부르는 한반도 문제는 실제로는 분단/전쟁 체제이고 여기에는 식민지 청산(탈식민), 종전, 분단 극복, 통일, 동북아 평화 등 중첩되지만 별개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남북 분단이 과거 동서독처럼 단순히 이념 대립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면 북한이 붕괴하거나 전쟁으로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다. 미국과 대부분의 서구 사람들이나 한국의 냉전 보수세력은 그렇게 기대하고 주장해왔다. 그것은 틀렸다. 그리고 가능하지도 않다.


한반도 분단은 일제 식민지 체제의 극복(자주독립국가 수립)의 실패를 의미한다. 지구적 탈냉전, 90년대의 심각한 경제위기와 기근을 겪고도 북한이 붕괴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는 6·25 한국전쟁에서 미국에 맞서 체제를 지켰다는 기억과 민족주의의 힘 때문이다.
남북은 피비린내 나는 3년간의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고, 그 이후 70년 가까이 (준)전쟁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정전체제를 종식시키는 것이 남북의 소모적 대결을 끝내는 첫 단계다. 그런데 한국전쟁은 남북 간의 전쟁이 아니라 미·중이 개입한 국제전이었기 때문에 종전, 더 나아가 남북 화해와 평화 문제는 미·중이 가장 중요한 당사자다.
종전도 너무 엄청난 진전이지만, 그렇다고 종전이 곧 평화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종전이 한반도 평화 질서 수립으로 가기 위해서는 북-미 수교가 필요하고 남·북·미·중 4자와 더불어 일본과 러시아까지 포함한 동북아평화협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동북아평화협정이 맺어진다고 해서 그것은 항구적 평화도 아니고 한반도 분단의 극복 혹은 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남북이 6·25 전쟁 이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48년에 수립된 적대적 두 분단국가 상태는 남는다. 그리고 남북한에는 과거의 베트남이나 독일과 달리 70년이나 지속되면서 이미 확고하게 다른 정치경제 체제가 정착했고, 상호 적대의식이 교육이나 미디어를 통해 국민들 마음에 매우 강하게 뿌리내려 있다. 즉 분단의 극복은 각 체제 내부의 일제 식민지, 분단 잔재의 극복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분단 극복이 곧 통일은 아니다. 성급한 통합, 통일은 훨씬 심각한 갈등, 심지어 내전의 위험도 안고 있다. 그래서 경제교류, 이산가족 상봉은 지속하되, 서로의 경계는 닫아두는 것이 좋다. 화이부동의 정신으로. 즉 한반도에 두 국가 체제를 유지하면서 군비를 축소하고 교류하는 일, 대외적으로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평화와 통일은 분리된 과제이며, 별도의 프로세스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두 국가는 각자 21세기 조건에 맞는 이상적인 사회 경제 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모색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한반도는 그 지정학적 위치의 특성 때문에 주변 강대국 간의 패권 경쟁이 격심해지면 그것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고, 국내 정치세력들이 주변 강대국과 손을 잡고 내전의 소용돌이로 몰아갈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두 국가 체제의 공존, 한 국가 두 체제의 길을 모색함과 동시에, 주변국과 국제사회에 영세중립국으로서의 지위 보장을 받아내는 문제도 검토해야 한다. 평화와 통일이 왜 필요한지, 어떤 평화, 어떤 통일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모으는 과정이 시작되어야 한다. 학교와 사회에서 평화·통일교육이 전면화되어야 한다.

< 김동춘 - 성공회대 NGO대학원장, 다른 백년 연구원장 >


삶의 행복감 좌우‥ 친구 사귀기

페이스북 같은 SNS가 발전하면서 친구(?)들이 부쩍 많아진 시대가 됐다. 수백명은 기본이고 수천, 수만명의 온라인 친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기존 오프라인 중심의 교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인터넷 네트워크 덕분에 그만큼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법이 간편해진 덕분이다. 미국의 여론조사업체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미국 페이스북 이용자들의 평균 페친 수는 338명이다. 그러나 소셜 네트워크로 맺어진 이들과의 관계를 진짜 친구 사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친구관계 최대범위 ‘던바의 수’, 150명
영국의 인류학자 로빈 던바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 사람이 지속적으로 안정적 관계를 유지해나갈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제한돼 있다. 이는 인간의 뇌가 처리할 수 있는 용량에 한계가 있어 일정 규모 이상의 인간 관계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인지과학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던바는 그 범위를 100~230명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중간값인 150명을 일반적인 친구 관계 최대 범위라고 주장했다. 이를 ‘던바의 수’라고 부른다. 던바의 개념 규정에 따르면 “초대받지 않은 술자리에서 우연히 동석해도 당혹스러워하지 않을 정도의 사람”이 이 범주에 포함되는 사람이다.
과학자들이 친구 수에 관심을 갖는 건 친구가 삶의 행복감, 만족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어린 시절 사회적 친교 정도를 보면 30년 후의 고독감, 웰빙, 우울감 정도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처음부터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친구가 되기 위해선 그만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많은 사람들이 친구를 사귀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인의 경우 사람들과 교류에 쏟는 시간은 하루 평균 41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는TV나 출퇴근에 보내는 시간의 3분의 1 수준이다.
또 친구 관계라 해도 친밀감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친구 또는 절친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도 사람마다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러나 대략적인 추정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최근 미 캔사스대 연구진이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캔자스대 제프리 홀(Jeffrey Hall) 커뮤니케이션학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사회와 개인 관계 저널> 3월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친구나 절친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추정했다.

지인-그냥 친구-정식 친구-절친
연구는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됐다. 우선 연구진은 지난 6개월 안에 이사를 해서 새 친구를 사귄 성인 35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사 후에 만난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유지해 왔는지, 즉 그들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조사했다. 이와 함께 응답자들에게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네개의 범주로 구분하도록 했다. 아는 사이(지인, acquaintance), 그냥 친구(casual friendship), 정식 친구(friend) , 가까운 친구(절친, close friend)로 나눠보도록 했다. 그리곤 이를 통해 사람들이 각각의 단계에 해당하는 친교를 쌓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추정했다. 지인의 개념은 “알고는 있지만 친구라고는 할 수 없는 사이”를 말한다. 연구진은 이 단계에선 같이하는 시간이 10시간 늘어날 때마다 친구가 될 가능성이 3.9%씩 늘어나는 것으로 추정했다. 다른 한 연구는 112명의 대학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다. 연구진은 학생들에게 개학 이후 최근 2주 동안 만난 사람 중 2명을 고르도록 했다. 그리고 4주와 7주 후에 이들과의 친교가 어떤 단계까지 발전했는지를 추적했다.
연구 결과 그냥 친구 관계가 되는 데는 40~60시간이 걸렸다. 정확하게는 만난 지 첫 3주 동안 43시간을 함께 보낼 경우 친구가 될 확률이 50%를 넘었다. 그 다음 단계인 정식 친구가 되는 데는 80~100시간이 걸렸다. 대학 신입생의 경우엔 첫 3주 동안 57시간, 성인그룹의 경우엔 3개월 164시간이 친구 단계가 격상하는 지점이었다. 최고 단계인 절친이 되는 데는 200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생은 3주간 119시간, 성인은 3개월간 219간을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친교에 공들인 시간과 우정의 정도가 비례 관계를 보인 것이다. 연구진은 “종합해 보면 3주에 걸쳐 120~160시간을 보낼 경우 절친관계로 발전해갈 수 있지만, 실제 그런 관계가 되려면 6주 동안 200시간이 필요해 보인다”고 분석했다.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는 신호
또 대학생들은 성인에 비해 쉽게 좋은 친구 관계를 맺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상대방한테 열심히 빠져들었다는 걸 뜻한다. 연구진은 “사귄 지 6주에서 9주 사이에 친구 단계가 격상된 사람들은 그 3주 동안 친구와 보내는 시간을 두배로 늘린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조사에 참가한 어떤 신입생은 한 달 동안 깨어있는 시간의 3분의1을 한 친구와 보내기도 했다.
친구가 되자고 상대방에게 강요할 수도 없고, 같이 보내는 시간만으로 친구 관계를 평가할 수도 없는 일이다. 홀 교수는 그러나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면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고 강조했다. 또 하나 친교 관계의 맥락도 중요하다. 홀 교수는 우정을 쌓으려면 친교의 공간을 바꾸라고 조언했다. 함께 일하는 사이라면 사무실에서 벗어나 바깥에서 점심이나 음료, 술을 마시라고 권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행위라는 것이다.

< 곽노필 기자 >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삶”

● 교회소식 2018. 5. 1. 19:45 Posted by SisaHan

은퇴목사회, 염광교회서 4월 모임


한인 은퇴목사회(회장 정태환 목사) 4월 정기모임이 지난 19일 오전 11시 염광교회(담임 이요환 목사)에서 열려 예배를 드리고 오찬과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이재철 목사 사회로 드린 예배는 한영길 목사의 기도에 이어 이요환 목사가 누가복음 9장 28~36절을 본문으로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 목사는 “교회 안에서, 또한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도 예수님과 무관한 말이 들리고 또 그런 일들에 관심을 갖는 일이 많은데, 신앙인과 교회는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만 들리고 예수님만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면서 “오직 예수님만 보이고 예수님만 바라보는 교회와 신앙인,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듣고, 따르며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 가기를 소망한다”고 말씀을 전했다.

참석자들은 말씀을 들은 뒤 통성기도를 통해 나라와 교회, 그리고 회원 목사들의 건강을 위해 뜻을 모아 기도했다. 이어 특주 순서에 홍원표 집사가 색소폰 연주로 은혜를 전했다. 광고시간에는 양로원 요양 중인 김향순, 정동섭, 최기남 목사를 임원진이 심방한 것과 기도를 당부하는 등 정태환 회장이 전한 광고를 들은 뒤 김인철 목사(염광교회 원로)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염광교회 여전도회가 마련한 오찬을 함께하며 회원들이 친교를 나누었다.
한편 은퇴목사회는 5월 정례모임을 17일(목) 오전 11시 토론토 한인장로교회(담임 손명수 목사: 67 Scarsdale Rd. M3B 2R2)에서 가질 예정이다.

< 문의: 905-380-7966, 416-909-00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