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협 주최 3.1절 연합예배 참석자들이 삼일절 노래를 제창하고있다.


“영적 자유 얻어야 진정한 자유인”


온타리오 한인교회협의회(회장 서인구 소망교회 담임목사)는 1일 오후7시 소망교회에서 제93주년 3.1절 기념 연합예배를 드렸다. 
서인구 목사 인도로 드린 예배는 교협 총무 박종민 목사(샬롬장로교회 담임)가 대표기도하고 부서기인 박인기 목사(21세기 희망의 교회 담임)가 성경봉독(갈 5:1~6, 13~15)을 한 뒤 김요환 목사(토론토 한인성결교회 담임)가 ‘자유인으로 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참 자유는 영적 자유이며 이는 죄의 속박과 사망의 권세 및 사탄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어야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라며 “아울러 피와 땀으로 얻은 자유는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 하고, 자유에 수반되는 의무와 책임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배는 교협회계 정진오 장로(염광교회)의 봉헌기도에 이어 참석자 모두 기립해 3.1절 노래를 제창한 후 서기 윤철현 목사(한인침례교회 담임)의 광고, 주권태 목사(수정교회 담임)의 축도로 마쳤다.
이 자리에서 일제의 제암리교회 학살만행을 담은 동영상이 상영됐으며, 석동기 목사(한인감리교회 담임)는 ‘기독교와 3.1운동’이라는 발제로 기독교가 독립운동과 근대화에 중추적으로 기여한 사실을 되새겨 주었다.
이날 예배에서 기독여성성가단과 소망교회 성가대는 특별찬양을 했다.

< 문의: 647-204-5380 >



독립-구국운동 양생, 민족종교로
‘기독교회와 3.1운동’ … 석동기 목사 발제 요지

다음은 온주 교협 주최 3.1절 연합예배에서 석동기 목사(사진)가 발제를 통해 발표한‘기독교회와 3.1운동’의 주요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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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민족운동의 근간에 한국기독교가 있었다. 3.1운동에 기독교계 및 기독교인들이 대거 주동세력으로 참여, 신앙운동이라기 보다 민족운동이지만 신앙적 동기에 의한 현실 참여임은 취조문이나 판결문을 보면 명확해진다.
 
민족이란 창조의 질서에 속하며 그 민족을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이고, 기독교가 민족을 향하여 있으며 민족의 아픔과 함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억압과 수탈에 맞서서 민족의 자기실현을 성취하도록 격려 하였다. 그런 점에서 3.1운동은 기독교의 관점에서 정당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구 한말 한국기독교인들의 독립구국운동의 역량은 1905~1910년 사이에 애국계몽운동, 부정부패 추방운동, 경제, 정치, 종교적 항일운동을 통하여 놀랄만하게 성장하였다. 1901년부터 배출된 목회자와 신학교의 설립 그리고 1903년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을 거쳐 1912년에 이르러서 총회설립 등. 기독교계는 민족운동을 가능케 한 전국적인 조직과 지도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기독교가 전래 되면서 선교의 저변을 확대해 나갔으나 처음부터 우호적이거나 박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차소동(전차가 개통된지 5일만에 5세 아이가 치어 죽는 사고로 1900년 12월 1일을 기해 기독교 학살 비밀지령이 계획됐던 일)과 105인 사건 등을 겪었고, 3.1운동 이후에야 비로소 기독교는 민족적 종교가 되기에 이르렀다. 3.1운동은 한국 기독교에 있어서도 그 선교적 신앙적 변화를 가져온 운동이기도 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거두고 존중하며 서로 협력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는 3.1운동의 준비, 점화 단계만이 아니고 전국화 단계에서도 기여가 컸다. 
전국 각지에 세워진 기독교 사학(배재, 이화, 경신, 평양숭실…)은 애국 계몽운동으로 인재양성과 민족의식 교육에 선구적 역할로 훗날 3.1운동을 민족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한미 통상조약 체결로 3.1운동 직후까지 입국한 선교사들은 미국 북장로교회의 경우 한국에 파견한 선교사가 미국이 전세계에 파견한 선교사 총수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당시 교회의 매일학교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후 더욱 왕성해져 민족구국과 애국신앙고취 애국계몽운동으로 전국에 퍼져 나가 한일합방 이후에는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교육사업 이외에 기독청년회(YMCA)를 결성하여 청년활동을 복돋웠고 최초의 출판사인 감리교 삼문출판사와 예수교서회(대한기독교서회)를 통해 한국의 출판문화에 이바지했다. 또한 청년교육에 열심을 더해 1897년 5월 5일 정동교회에서 최초의 청년회 ‘엡윗청년회’가 생겼고, 1904년 최병헌목사(애국가 작사자)는 엡웟청년회를 확장하고 학교를 설립했다. 최 목사가 세운 민족구국을 위한 야간학교에 1906년에만 1천명 이상의 학생들이 공부했다. 
을사보호조약 무효 상소운동과 구국기도회 등으로 엡웟청년회가 해산 당하자 전덕기 목사는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여 중등교육 수준으로 교육과정을 정해 애국애족의 국어교육과 국사교육, 체육과 군사훈련으로 무장 항일운동의 기틀을 마련했고, 주시경은 국어교육을, 최남선은 국사교육을 나머지는 남궁억, 또 구 한국군 출신 이필주 목사의 군사훈련은 훗날 간도에서 무관학교의 원류가 되었다.
 
특히 신민회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애국지사들의 모임에서 시작돼 본격적으로 조직된 것은 미국에 있던 안창호의 귀국으로 서울중심 애국지사들과 서북지방의 기독교 애국지사들의 비밀단체로 출발해 양기탁, 이동녕, 전덕기, 이승훈, 김구 ,임휘정, 이동휘, 안창호 등이 참여했고 비밀 모임장소는 상동교회였다. 신용하 교수는 ‘3.1독립운동 발발 경위’라는 논문에서 초기 조직화 7개의 계통 중 기독교가 6개 조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최초의 독립선언인 2.8독립선언을 후원하였으며 3.1독립선언의 이념에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기록하고 있다. 
3.1운동으로 감옥에서 취조 중에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대답은 “하나님의 가르치는 바가 있으니 오색인종 어느 누가 조국의 흥왕과 종족의 번영을 바라지 아니하며 더욱이 남의 나라에 병합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아니하였으랴” 하였다.  그 해 장로교 총회장으로 있던 김선두 목사는 운동에 앞장 서다가 많은 교역자들과 함께 투옥되어 총회장으로서 사회를 보지 못할 형편에 이른 사례까지 확인된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기독교 지도자들은 감옥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 체험을 한 것을 적고 있다. 신앙체험은 성경통독과 성서연구와 함께 이루어졌다. 길선주 목사는 옥고를 치르는 동안에 요한계시록만 800독 하였다고 했다.
 
국내에서 3.1운동의 기획은 상당수가 신민회 출신의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상해 신한청년당이었는 데 이 청년당의 당원들이 국내로 들어와 기독교지도자들에게 운동을 종용하였다. 또 3.1운동 후 입감자들의 종교별 분포를 참고하면 기독교는 3.1운동의 가장 큰 동력이 되었으며 교회와 기독교 학교는 3.1운동의 중요한 근거였다. 1920년 4월 일제가 포교규칙을 개정하여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가 독립운동에 사용되지 못하도록 한 것을 보아도 교회와 기독학교가 3.1운동의 거점지로 역할 된 것을 볼 수 있다. 
간도에서의 3.1운동은 기독교 조직이 중심세력이 되어 동원되었고, 용정교회를 중심으로 북간도의 전교회가 독립운동에 참가했으며, 1918년 9월부터 11월까지 함북노회 특별회가 교회에서 모일 때 마다 교회가 단결하여 독립운동에 매진 할 것을 주장하였다. 
1919년 2월 8일 400여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모여서 동경 YMCA 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김 마리아가 2.8독립선언서 원문 10여장을 가지고 2월 15일 부산에 도착, 부산에서 대구, 대전, 광주로 달려가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복사하여 사방으로 배포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한 전체 여성의 70%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에서 여성 민족운동에 있어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임이 밝혀졌다.
 
3.1운동 이후에 일제의 식민지 경제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과제는 민족자본을 육성하여 경제력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다. 이 목표 아래 평양의 조만식, 이승훈 등 물산장려운동, 소비절약운동 등을 5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920.8.23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 1922년 6월 26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발족시키고 회장에 조남식 장로를 선출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평양을 중심으로 감리교, 장로교 연합저축조합을 조직하여 30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매달 25전씩 3년 동안 저축한 결과 1만 5천원의 자금이 적립되어 이 자본을 융자받아 평양 최초의 양말공장, 고무공업, 메리야스 공업들이 민족자본의 기업체로서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 후 물산장려운동은 전국에 확산, 이상재를 회장으로 1920년대 민족기업활동과 깊은 연관을 가지며 국산품애용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전국민의 80%가 농민인 현실에서 기독교회는 하기성경학교, 농한기 야간 성경학교 운영으로 문맹퇴치와 항일독립을 향한 민족역량 강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20~30년대에 활발했던 농촌계몽운동, 문맹퇴치운동, 주일학교 진흥운동 등은 자주독립과 민족자유라는 이념과 일치하며 한국기독교가 민족종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한국기독교는 자금 세계 수위의 선교국이 되었다 세계 도처에 아직도 억압과 수탈이 일어나는 곳에 예수의 신앙으로 세계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대한다.


[기쁨과 소망] 지혜자의 마음은?

● 교회소식 2012. 3. 10. 18:38 Posted by SisaHan
솔로몬이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어도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잔치집에 있다고 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마도 더 진실된 믿음의 삶과 자신의 삶을 돌아볼 장소가 초상집이라는 뜻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지지난 한 주간에 입관 예배에 3번이나 참례를 했습니다. 한창 살아야 할 오십대와 누구라도 호상이라고 말하는 90대에 소천하신 분의 입관 예배를 드리면서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진실해지는 법이 아닐까요?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 죽음의 관문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우리는 ‘돌아 가셨다.’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는 본래 하나님의 본향으로 갔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임종을 앞에 두면서 후회하는 몇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그 때에 좀 더 잘 해줄 것을, 좀 더 베풀고 살 것을”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답니다. 사실 죽음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가는 것이 아닙니까? 하여,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이 죽으면 관속에 구멍을 뚫어 자신의 빈손을 내 보이라고 부탁했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매 수요일 저녁마다 히브리서 말씀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면서, 믿음의 선조인 에녹이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칭호를 받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에녹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당신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격려합니다. 에녹은 자식을 낳고 살면서 특히 65살에 무두셀라를 낳고 난 뒤에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 땅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 승천한 신앙의 선조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가장 큰 동기는 아들 무두셀라를 얻은 후 더욱 확실해집니다. 아들 이름의 뜻은 창을 잡는, 던지는 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창을 잡고, 던지는 자라는 말은 군사적인 용어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전쟁할 때 군사들이 성 밖으로 나가 적군과 싸움을 합니다. 저들은 적진에 나아가기 전 성문에 창을 잡고, 지키는 사람 한 사람을 세워 놓습니다. 적진에 나간 군사들이 밖에서 싸우다가 지게 되면 적이 성으로 쳐들어옵니다. 이 때 성문을 지키는 창던지는 군인이 마지막으로 적군을 향하여 창을 던지는 순간 전쟁은 끝나는 것입니다. 이는 창던지는 자가 마지막 성안의 보루이자 그의 죽음이 항복을 뜻합니다. 이어 성 안에는 적에게 짓밟히고 죽고 포로로 잡혀갈 뿐 아니라. 성 안의 모든 집은 불태워지게 됩니다. 창던지는 자의 죽음은 성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죽음의 시작이자 마지막 심판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에녹이 무두셀라를 낳고 난 후에 아들 무두셀라가 죽으면 세상에 심판이 온다는 것을 믿었기에 그 무엇보다도 아들의 죽음에 관심을 두고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이자 세상의 심판을 바라보며 하루 하루를 성실하게 심혈을 기울여 살았을 것입니다. 세상의 심판과 더불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 때에 진실된 삶이 따라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참된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서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자신의 주어진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사는 우리들에게 에녹은 그렇게 답했습니다. “당신도 나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받는, 신앙의 후배이자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칭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심판이 있음을, 그 뒤에는 행한 만큼의 상급이 따름을 인식하며 사는 자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인생의 건축자가 아니겠습니까?

<안상호 목사 - 동산장로교회 담임목사>


“힘들어도 꿈 품고 도전을”


“실패를 두려워해선 안된다. 도전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주님이 주신 꿈을 품고 주님 의지하며 전진해 나가라” 
올해 창립 7주년의 해를 맞은 조이플교회(담임 최규영 목사)가 17일부터 19일 주일까지 마련한 ‘다음 세대와 함께 하는’ 신년 부흥회를 인도한 박형은 목사(LA 동양선교교회 담임)는 ‘주님의 꿈을 안고 도전의 삶을 살라’고 젊은이들과 성도들에게 강조했다.
 
17일 저녁 집회에서 ‘꿈이 있는 삶’(마 25:24~23)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시작으로, 18일 새벽 ‘변해야 할 것들’(롬 12:1~2), 저녁 ‘신앙의 유산‘(시 100: 1~5), 19일 주일 1,2부 예배 ’짝퉁과 진품‘(고후 4: 7~12), 그리고 청년예배 시간에 ’영적 성형‘(겔 36: 26) 등 제목으로 6차례 말씀을 전한 박 목사는 집회마다 삶과 신앙의 바른 길을 제시하고 북돋우는 설교로 은혜를 주었다.
박 목사는 “하나님 꿈을 이루려다 보면 꿈을 꾸는 결단의 순간부터 우리 인생은 힘들어지고 꼬인다”고 선지자들의 예를 들고 “잘 풀린다고 교만해서도 안되지만 꼬인다고 절망하지 말고 고통을 각오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역경을 거쳐갈 때 그 보다 더 보람된 일은 없다”면서 하나님이 주셔서 이루어 가시는 꿈을 꾸며 주님 바라보고 담대하게 나아가라고 용기를 주었다.
 
박 목사는 “하나님의 꿈은 작은 일부터 시작된다”고 강조, “작은 꿈부터 꾸되 게으름 피우지말고 당장 실행해 나가며, 두려워도 기도의 능력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이루고 채워주신다“면서 ”한 세대로 끝나는 게 아닌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교회와 성도들로 하나님 주신 꿈을 향해 멋진 인생을 살아보라“고 도전을 주었다. 박 목사는 아울러 다음 세대를 위한 신실한 신앙을 역설하며 ”2세들이 성장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부모들이 교회와 가정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 실망을 주는 때문“이라고 지적, 가정에서 부터 바른 신앙의 자세로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 문의: 416-590-0191 >


▶밀알교회 안수집사-권사-명예권사 등 임직자들이 노승환 담임목사와 기념촬영 했다.


“신앙의 본 되어 섬기는 일꾼”


밀알교회(담임 노승환 목사)는 19일 주일 2부 예배시간에 안수집사 및 권사·명예권사 등 12명의 임직식을 거행했다. 이날 임직식에서는 전익수, 이장열, 이강원, 정영욱, 윤돈영, 오응철, 노명신 집사가 안수집사로 장립하고, 강윤복, 김애란, 원정민 집사가 권사로 임직했다. 또 이복자, 조영자 집사가 명예권사로 추대됐다.
 
임직식은 임직자 소개와 서약, 안수집사 안수 및 공포, 임직패 수여 등 순으로 진행됐다.  노승환 목사는 임직자들에게 임직패를 수여하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는 말씀을 전하며 “진실한 주님의 종으로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본이 되고, 귀한 주님의 제자가 되어 교회 섬기는 신실한 일꾼들이 되어달라”고 당부했다.

< 문의: 416-226-41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