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에서 두 번 탄핵 당한 대통령


권력 획득·유지 위해 무슨 짓이든 했던 인물
계엄·백골단·발췌개헌·사사오입·우의마의…
숱한 희생자 내고 85세 쫓겨나 90세 사망

보수 기독교 앞장 선 역사 쿠데타 성공 못해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이승만은 대한민국에서 두 차례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두 번 모두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한번은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탄핵되었고, 다른 한번은 1960년 4.19 혁명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났지요. 더구나 두 번 모두 원래 헌법 초안에는 대통령이라는 직위가 없었으나, 그의 억지가 관철되어 대통령 중심제가 만들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으로 일어난 임시정부 수립운동에서 대표적인 지도자로 추대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전혀 실체가 없는 대한공화국임시정부의 국무경에 임명되었다는 연락를 받아서, 처음에는 그렇게 행세를 했습니다. 이 정부 수립안의 대통령에는 손병희, 부통령에는 박영효가 추대되어 있었어요. 이 정부는 사실상 실체가 없는 종이 정부에 불과했습니다.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지위가 임시정부 대통령 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이를 배경으로 사무실을 열고 국무경의 업무를 시작했어요. 그는 한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필라델피아에서 제 1회 한인회의를 주도하였습니다. 이 대회의 의장은 필립 제이슨(서재필)이었고, 그를 통해 한국친우회를 조직했어요. 미국 정부에 편지를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소식이 서울에서 온 신흥우로부터 미국으로 도착했어요. 또 하나의 종이 정부였던 한성정부에서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멋대로 President로 번역하여, 대통령으로 행세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내각 명단에 같은 집정관 총재인 이동휘를 마음대로 국무총리로 격하시켰어요.

 

한성정부는 주로 국내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13도 대표자회의는 열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끝까지 이를 근거로 자신이 대통령으로서의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했어요. 그 시기에는 이미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는 연락을 상하이로부터 받은 상태였으나 외면해 버렸습니다.

 

안창호가 이 소식을 듣고 아직 대통령이 선임되지 않았다고 편지를 보냈지만 무시하고, 오히려 앞으로 대통령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어요.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총리로 선임했다는 사실이 미주 동포사회에 전해져 논란이 되자, 이번에는 자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언론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쓴 것이라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이승만 상하이 도착 환영회

나랏일 아닌 자기 활동을 위한 자리가 필요했던 이승만

 

이승만은 존재하지 않는 한성정부의 권한을 내세워 공채 발행권과 구미위원부 설립을 강행하였습니다.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 측도 상하이, 한성, 노령 정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한성정부의 주장을 수용하기에 이르렀어요. 그 결과 1919년 9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사후 인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바로 상하이로 가서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어요.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이 미국에서 활동하는데 필요한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이었습니다. 그리고 국채발행권과 미주교민들이 어렵게 번 돈으로 내는 독립운동 기금을 받는 권한이었어요. 실제로 그는 수입의 18%만 상하이로 보냈고, 대부분의 지출을 자신을 포함한 인건비와 사무실 유지비로 썼습니다. 이승만이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20년 12월이었어요.

 

그런데 상하이는 자신이 제왕 노릇을 하던 미국과 달리 다양한 경험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자리잡은 곳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이동휘 국무총리를 비롯한 김규식, 안창호 등이 사퇴했어요. 아울러 이승만에게 위임통치 청원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1921년 5월에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925년 3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과 면직안이 통과되었음을 알리는 독립신문 호외. 

 

결국 1924년에는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 유고안이 가결되었고 마침내 1925년 3월 탄핵안이 통과되었습니다. 박은식 총리는 1925년 5월 구미위원부의 폐지령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승만은 탄핵도 폐지령도 무시하고, 구미위원부를 통해 독자적인 활동을 계속했지만 활동은 미미했어요. 그러다가 1932년부터 다시 임정과 협조의 길을 걷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단정 수립 후 대통령제 관철시키고 개헌과 계엄으로 정권 연장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자, 이승만은 귀국 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친미반소 노선을 걸으며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단정수립운동을 주도했어요. 1948년 5.10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로 당선되었습니다. 1948년 5월 31일 개회식에서 최고령자였던 이승만은 임시 의장으로 선출되는데요.

 

그런데 헌법 제정 작업을 맡은 유진오는 국가원수의 지위와 권한은 대통령이, 정부수반으로서의 지위와 권한은 국회가 선출하는 총리가 담당하는 전형적인 내각제 헌법 초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뒤늦게 대통령 중심제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어요. 유진오는 이승만을 설득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대통령 중심제로 급하게 수정되었습니다.

 

48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 수락연설 장면

 

마침내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계엄과 개헌을 통해 집권을 연장해 나갔어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여수 순천과 제주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습니다. 1948년 제주에서 4.3이 발생한 가운데, 10월 19일 여수와 순천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21일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뒤이어 1948년 11월 17일 제주에도 계엄령이 선포되었어요.

 

제주에 선포된 계엄 포고문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 24일입니다. 그러니까 여수와 순천 및 제주에서 선포되었던 계엄령은,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에 집행되었으므로 불법인 것이지요.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해당 지역에서의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헌법과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감행하는 것이 이승만 정권이었어요.

 

직선제 ‘발췌개헌안’ 통과 위해 동원한 1952년의 백골단

 

이승만 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민심 이반과 반민특위 실패로 인한 친일세력 득세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들끓었습니다. 그 결과 1950년에 치러진 2대 총선에서 무소속이 약진하여 대다수를 차지했어요. 따라서 이승만은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면 당선될 가능성이 없게 되자, 자신의 추종세력을 내세워 자유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들고 나왔어요.

 

그러나 국회가 1952년 1월 18일 개헌안을 압도적으로 부결시키자, 이승만은 백골단과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관제시위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5월 25일에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의원들을 불법적으로 연행하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어요. 결국 군경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발췌개헌안’이 기립투표로 통과되었습니다.

 

독재자의 실정과 무책임, 압제를 겨냥한 독립투사의 총

 

이에 참다 못한 의열단 출신 유시태가 이승만을 저격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같은 의열단 출신으로 안동에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던 김시현이 배후 인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는 영화 ‘밀정’에서 공유 배우가 맡았던 김우진의 실제 인물인데요. 김시현은 3.1운동부터 시작하여 모두 6차례에 걸쳐 15년 동안 독립운동으로 감옥생활을 했던 투사입니다.

 

그들이 이승만을 저격하려 했던 이유는 민생문제에는 무능과 실정을 거듭하면서 6.25 전쟁의 책임을 지지않는 자격미달 대통령이라는 것이었어요. 민족운동가를 멀리하고 친일세력을 요직에 등용한 것도 이유였습니다. 무엇보다 전쟁이라는 국가위기에도 관권으로 금품 살포, 깡패들과 청년단 동원 등으로 국회를 압박하는 것을 비판했어요.

 

김시현은 법정에서 ’이승만은 할복자살하기 전에는 국민의 한이 풀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김시현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4.19 혁명 이후 석방되었어요. 김시현은 안동에서 5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정계를 은퇴했습니다. 이때 형사처벌을 받았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했어요.

 

끝내 수많은 희생자 낸 ‘사사오입’ ‘우의마의’ 의 장기집권 야욕

 

그럼에도 이승만은 1952년 8월 5일 직접 선거로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대통령 3선을 금지하는 조항을 폐지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였는데, 당시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는 재적의원의 2/3 이상인 136명이었지요. 하지만 1954년 11월 27일 국회에서 투표를 한 결과, 찬성이 135표에 불과해 부결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 사사오입 이론을 들고 나와, 135표가 개헌선이라고 번복했어요. 이런 억지를 통해 1956년 3대 자유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때 이승만이 ‘나이 팔십이 넘어… 물러가는 것이 옳을 줄로 생각한다"고 마음에 없는 불출마 서한을 보냈지요. 그러자 자유당은 우의마의(牛意馬意)까지 동원한 관제 시위를 벌였고 이승만은 마지못한 듯이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1960년 3월 15일 4대 대통령 선거에도 이승만은 85세의 나이로 출마를 했어요. 이번에도 야당 후보가 선거 기간 중에 사망함에 따라 그의 당선은 확정되어 있었습니다. 부정선거는 바로 장면의 재선을 막고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추진되었어요. 혹시 모를 80대 대통령의 유고 시에 야당 부통령에게 정권이 이양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정선거에 대한 반발이 마산에서 시작되자, 일단 민심수습 5개 항목을 지시했어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4월 19일에 경찰이 학생, 시민들에게 발포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잠복한 공산주의자 간첩이 배후인 폭동‘이라며 다시 계엄령을 선포했어요. 하지만 출동한 계엄군은 시위대에게 발포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4.19혁명 당시의 시위 장면

 

85세에 쫓겨난 독재자, 하와이 요양원에서 90세에 죽다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고, 4월 25일에는 교수단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거리시위에 나섰지요. 결국 그는 4월 27일 국회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하였고 즉시 수리되었습니다. 4월 28일 이화장으로 물러갔다가,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는데, 그는 계속해서 귀국을 원했지만 미국과 박정희 정권은 허락하지 않았어요.

 

경무대를 떠나는 이승만(왼쪽) 대통령 사직서(가운데) 끌어내려진 이승만 동상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의 요양원에서 90세로 사망했습니다. 유가족과 지지자들은 국장을 요구했으나 박정희 정권은 국민장을 제안했지요. 그러자 결국 7월 27일 가족장으로 현충원에 묻혔습니다. 박정희는 "이승만 노인은 국헌을 준수해야 할 본분을 망각한 채, 헌법을 유린하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은 독재자였다“라고 규정하였어요.

 

지금 대한민국도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시도로 유례없는 혼돈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실패한 대통령은 여당과 극우 세력들을 선동하며 여전히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지요. 그런데 이런 모습은 이승만 시대를 연상시킵니다. 반공을 내세워 정치적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려 했어요.

 

기념관, 동상, 영화, 유투브, 보수 언론… 이승만 지지자들의 역사 쿠데타

 

이들은 최근에 이승만을 부활시키려고 집요하게 노력해 왔습니다. 전 국가보훈부 장관은 재직 시절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공언하였고, 보수 기독교가 지원을 하고 있어요. ‘건국전쟁’이라는 다큐 영화를 만들고 관람객들을 동원했으며, 보수 언론은 물론 이영훈 무리가 운영하는 ‘이승만 학당’을 비롯한 여러 유튜브 채널들이 거짓 신화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승만의 실체를 역사적 근거에 입각하여 대중에게 알리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아요. 그저 ‘4.19 혁명 정신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을 내세우는 비판 정도가 대부분입니다. 이승만의 실체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있지만 거의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 않아요. 그러는 가운데 극우 세력들의 역사왜곡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1995년에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대대적으로 이승만 부활을 시도할 때에도 진보 학계와 언론의 대응은 미미했어요. 모두들 이승만을 땅에 묻었다고 생각하고 전혀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최근에도 유명 출판사 대표에게 이승만에 대한 연구논문들을 모으거나, 또는 그의 평전을 제안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는데 이것이 현실이지요.

 

윤석열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압살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워 종신독재를 꿈꾸었던 이승만처럼, 이번에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승만을 국부로 칭송하며 역사 쿠데타를 시도하고 있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믿어요. 그들은 결국 이승만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김, 검찰 수뇌부와 비화폰 통화 후 '셀프 출석'..."검찰, 경호처 수사 그래서 막나"

 
 
심우정 검찰총장이 지난해 12월 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으로 출근하고 있다. ⓒ 연합
 


검찰이 비상계엄의 스모킹건인 '비화폰(보안 핸드폰)'에 대한 경찰 수사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비화폰을 써온 계엄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을 향한 경찰의 강제수사가 임박하자 심우정 검찰총장까지 나서 김 전 장관의 신병을 경찰이 아닌 검찰에서 확보하려 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국방부 차관 "12월 6일 심우정 총장이 전화, 김용현 전 장관 연락 방법 문의"

국회 내란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국조특위) 의 내용을 종합하면, 지난해 12월 6일 경찰이 김 전 장관에 대한 압수수색을 검찰에 신청하자, 심 총장이 당일 저녁 김선호 국방부 차관에게 직접 전화해 김 전 장관에게 연락할 방법을 물었다고 한다. 김 차관은 6일 국회 국조특위에 출석한 자리에서 "(심우정)검찰총장이 (김용현 전 장관에게)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확인해달라고 해서, 제가 (김용현)전 장관께 전화를 드렸다"라며 "전화번호를 주시면 제가 (심 총장에게)알려주겠다고 했고, (김용현)장관께서 번호를 알려주셨다"고 했다.

이때 김 전 장관이 일러준 번호는 그가 갖고 있던 비화폰 번호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장관은 지난해 12월 5일 면직됐기 때문에, 민간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관리하는 비화폰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진동 대검찰청 차장검사가 이 번호로 김 전 장관에게 문자를 보냈고, 김 전 장관이 이 차장에게 전화를 걸면서 둘 사이 통화가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김 전 장관은 검찰 쪽과 통화 후 하루 정도 뒤인 12월 8일 새벽 1시 30분께 검찰에 돌연 자진 출석했다.

이진동 차장은 6일 국회 국조특위에 출석한 자리에서 "당시 김 전 장관 신병 확보가 제일 중요했다"라며 "수사팀에서 김 전 장관 설득이 잘 안 된다고 해서 전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차장은 윤석열 대통령과 가까웠던 친윤 검사로 꼽힌다.

일각에선 이 차장과 김 전 장관간의 통화가 성사되기 전 윤 대통령이 개입했을 가능성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조특위에서 "(이진동·김용현 통화가 이뤄지기 전에)심 총장이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 소속)이찬규 부장검사에게 얘기해서 이찬규와 김용현과 통화가 됐는데, 김용현은 '대통령과 통화 후에 얘기하겠다'고 했다"라며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김용현에게 '김주현 민정수석과 협의하라'고 얘기한 것으로 안다"라고 주장했다.

다만 국조특위에 출석한 김주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은 윤 의원 질의에 "김 전 장관의 출석과 관련해 전화 통화하거나 한 일은 없다"라며 의혹을 부인했다.

검찰 출신인 김 수석은 비상 계엄 다음날 저녁인 12월 4일 삼청동 대통령 안가에서 열린 '법조 4인 회동' 참석자 중 한 명이다. 계엄 수사 대응 작전을 짠 것 아니냐고 의심 받는 이 회동에는 김 수석 외에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박성재 법무부 장관, 이완규 법제처장이 참석했다. 판사 출신인 이 전 장관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모두 검찰 출신이다.

"윤석열, 검찰 출석 김용현에 '민정수석과 협의하라' 했다" 주장 나와

이진동 대검찰청 차장검사가 지난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 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내란 국조특위)' 3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김 전 장관이 검찰에 '셀프 출석' 하기 전 검찰 고위층과 비화폰으로 통화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검찰이 최근 경찰의 비화폰 수사를 일부러 막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은 더 커지고 있다. 검찰은 김성훈 대통령경호처 차장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두 번 연속 반려한 바 있는데, 비화폰 통화 내역을 포함해 계엄 수사가 확대될 경우 검찰 수뇌부에게 그 여파가 미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한 전직 경찰은 7일 통화에서 "김용현 출석 전 상황을 보면 정황상 김용현 쪽이 아닌 검찰 쪽에서 먼저 움직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라며 "아무리 엄중한 사건이라 해도 검찰총장까지 등판해 피의자의 전화번호를 구해다 주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했다.

국회 국조특위 관계자는 "검찰이 김용현 수사 때부터 이미 수사 범위를 관리하고 있었음이 이제야 드러난 것"이라며 "김성훈 차장 구속이 뭉개지고 늦어지는 것도 비화폰 수사가 본격화되는 걸 검찰이 꺼리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나"라고 지적했다.

검찰이 김성훈 차장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받아주지 않으면서, 비화폰 수사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김 전 장관 등 계엄에 연루된 주요 인물들이 사용해온 비화폰은 경호처에서 관리하는데, 김 차장이 이끄는 경호처가 군사 비밀 등을 이유로 경찰의 비화폰 서버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국회 국조특위 관계자는 "검찰은 윤석열 대통령 공소장을 쓸 때도 '검찰'을 굳이 '수사기관'으로 표현해 애써 연관성을 차단하기 바빴다"라며 "검찰 입장에선 계엄 수사를 통제 관리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경찰은 현재 김 전 장관이 비화폰을 사용해 검찰 쪽과 통화했던 부분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 측은 김성훈 차장에 대한 세 번째 구속영장 신청 계획에 대해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 오마이 김석욱 기자 >

저 살자고 국민에게 환각제 주입하는 꼴

 

어? 동해에서 대형 유전이 발견됐다는 거야? 아, 그건 아니고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로군. 그 정도라면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발표해도 될 텐데, 왜 대통령이 긴급 기자회견을 해서 내일이라도 석유가 뿜어 나올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걸까? 참 이상하네.

 

2024년 6월 3일, 대통령 윤석열은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나라도 곧 산유국이 될 거라는 ‘깜짝’ 발표를 합니다. 이른바 대왕 프로젝트, 경북 포항 앞바다에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발표였습니다. 천연가스는 최대 29년, 석유는 최대 4년 넘게 쓸 수 있는 엄청난 규모라고 했습니다. 조선일보를 필두로 윤석열 친위대 언론은 ‘산유국의 꿈’이라는 환각제를 열심히 살포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3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열린 국정브리핑에 참석해 동해 석유·가스 매장과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2024.6.3. 연합
 

기자의 촉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추가 아닌 지질 탐사에서 가능성을 봤다는 것이고, 그 정도라면 대통령이 아닌 산업부 장관이 발표하는 게 적절합니다. 중요한 사안을 있을 때는 기자들에게 미리 알려주고 언제까지 보도하지 말아 달라는 엠바고 요청을 합니다. 미리 예고를 하는 거죠. 그런데 뭐가 그리 급했는지 ‘대왕고래 프로젝트’는 산자부 장관이 아닌 대통령이 예정에 없는 기자회견을 열어 서둘러 발표했습니다. 국민에게 김칫국부터 마시게 하는 환각 요법을 쓰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당시에 대통령 윤석열의 처지는 이러했습니다. ‘김건희 디올백’은 거짓 변명으로 혹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였고, 불리한 선거 판세를 뒤집어 보려고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카드를 던졌다가 의료사태를 촉발하고는 미제사건으로 마냥 방치하고, 누구의 청탁을 받았는지 해병대 임성근 사단장 구해주려다 격노가 발단이 되어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채 해병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대되어 궁지에 몰리고....

 

윤석열이 난데없이 ‘동해에 대규모 유전 발견’이라는 깜짝 발표를 했을 때,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거 혹시 궁지에 몰리니까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는 정치쇼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의문은 많았습니다. 대통령의 깜짝 발표도 그러했지만, 지질 탐사 단계에서 ‘대규모 유전 가능성’에 도장을 찍어주었다는 외국의 탐사전문업체는 본사 건물이 일반주택인 1인 기업이었습니다. 호주의 세계적인 유전개발업체는 경제성이 없다며 철수했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그런 걸 일컬어 ‘합리적 의심’이라 합니다. 기자의 취재는 대개 합리적 의심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대다수 언론은 의심을 해소하는 보도가 아닌 김칫국 들이붓는 보도를 했습니다.

 

대구 경북지역 신문 캡처.

 

특히 대구 경북 지역의 매체들은 ‘산유국의 꿈이 대구 경북 앞바다에서 실현된다’ ‘포항은 한국판 두바이가 되나’ ‘포항 앞바다에서 석유 가스 콸콸 쏟아지나’ ‘산유국의 꿈, 현실로’ 등등 환각 성분이 듬뿍 들어간 기사를 뿌려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거 뭔가 이상한데?’ 하고 의문을 제기하면, ‘너는 나라가 잘 되는 게 싫으냐’ ‘윤석열이 잘 되면 배가 아프냐’는 핀잔을 들을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다들 자의반 타의반으로 입을 다물었습니다.

 

합리적 의심은 결국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헌재에서 윤석열 탄핵 심판 6차 변론이 열린 날에 산자부는 ‘대왕고래 프로젝트’의 1차 시추 결과를 발표했는데, 가스 징후가 일부 발견되었으나 경제성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름과 직책이 익명으로 보도된 산자부의 고위 관계자는 ‘정무적 영향이 개입됐다. 죄송하다’고 사과했답니다. 그 정도의 고위 관계자라면 장관이나 차관일 겁니다. 대왕고래 프로젝트는 국면전환용 정치쇼였고, 국민에게 환각제 주사를 놓는 희망고문 사기극이었다고 실토한 겁니다.

 

민주당은 ‘대왕고래 프로젝트’ 예산을 전액 삭감했습니다. 대통령이 저 살자고 국민을 환각에 빠지게 하는 희망 고문에 국민 세금을 낭비해선 안 된다고 판단해서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대통령 윤석열은 야당이 예산 폭거로 국정을 마비시켰다며 12·3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유의 하나로 거론했습니다. 여당인 국힘은 민주당이 삭감한 ‘대왕고래 프로젝트’ 예산을 복원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사골곰탕 우려먹듯 저 살자는 국민 기망으로 ‘대왕고래 프로젝트’를 계속 우려먹은 겁니다.

 

그런 사기극은 또 있습니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이 그랬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우리나라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막판 역전극을 펼칠 거라고 분위기를 띄웠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한국이 받은 표는 고작 29표, 굳이 수천억 원을 들인 유치전을 하지 않아도 나올 만한 결과였습니다.

 

민심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윤석열은 재벌 총수들을 데리고 부산에 가서 엑스포 유치 실패를 잊게 해줄 선물 보따리를 푸는 정치쇼를 했습니다. 깡통시장에 가서 재벌 총수들을 병풍으로 둘러치고 서민 흉내를 내는 먹방쇼도 했습니다. 엑스포 유치라는 환각제의 효력이 떨어지니 재벌 동원 먹방쇼라는 환각제를 새로 투여한 겁니다. 대다수 언론은 먹방쇼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보도하며 환각제가 잘 스며들도록 바람잡이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6일 부산 중구 깡통시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한 재벌기업 총수들과 떡볶이 등 분식을 시식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재원 SK 수석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윤 대통령, 구광모 LG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정기선 HD현대 부회장. 2023.12.6. 연합
 

대통령의 거짓말 행진, 검증하지 않은 언론

 

윤석열은 억수로 운이 좋은 사나이입니다. 불쑥 내뱉은 한마디의 말로 일약 스타 검사의 반열에 올랐고, 그 덕에 검찰총장도 되고 왕이 절대 부럽지 않은 일국의 제왕적 대통령도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우리가 속은 거였습니다. 그가 불쑥 내뱉은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그 말은 ‘나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고집불통이다’라는 의미였습니다. 대통령으로 인간 윤석열을 겪어보니 그는 지독한 고집불통이고 지독한 청개구리였습니다. 대학생 때도 아버지에게 고무호스로 맞았다더니 오죽하면 고무호스를 휘둘렀을지 그 아버지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내가 아버지라고 그랬을 것 같으니까요.

 

윤석열의 말에는 무게가 없습니다. 말을 함부로 합니다. 거친 말도 잘하고 욕도 잘한다고 합니다. 그뿐인가요, 거짓말도 참 잘합니다.

 

국힘당의 대선후보가 되어 TV토론에 나왔을 때, 그의 손바닥에는 왕(王)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일종의 부적과 같은 거죠. 기독교인이 1000만 명을 넘는다는데 당연히 문제가 됐습니다. 미신을 믿는 거냐는 비난이 일자 윤석열 후보는 주일에 대형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아내는 교회를 열심히 다녀 구약을 다 외운다.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드는 언론은 없었습니다. 대선후보의 명백한 거짓말인데, 유야무야 흐지부지 넘어갔습니다.

 

대선후보 시절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전두환이 그래도 정치는 잘했다. 전두환은 정권 탈취를 위해 광주를 피로 물들인 학살범입니다. 그런 전두환을 두둔하는 말을 했으니 그를 대선후보로 배출한 국힘까지 발칵 뒤집혔지요. 그러나 윤석열은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SNS에 개에게 사과를 주는 사진을 올렸습니다. 국민을 조롱하는 거였죠. 그랬는데도 무사히 넘어갔습니다. 마녀사냥에 특별한 재주가 있는 이리떼 언론도 윤석열 앞에서는 애완견으로 변했습니다.

 

국민의힘 대권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TV토론회 당시 손바닥 한가운데에 '왕(王)'자를 그려놓은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2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지난 세 차례 TV토론회에서 임금을 뜻하는 한자 '왕'자가 그려진 윤 전 총장의 손바닥을 캡처한 사진이 나돌았다. 지난 1일 MBN 주최로 열린 5차 TV토론회에서 윤 전 총장이 홍준표 의원과의 1대1 주도권 토론에서 손을 흔드는 제스쳐를 하면서 손바닥에 적힌 '왕'자가 선명하게 포착됐다. 윤 후보 측은 후보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지지자들이 토론이 있을 때마다 응원한다는 뜻에서 손바닥에 적어주신 것이라고 밝혔다. 2021.10.2 [MBN 유튜브 캡처. 연합
 

입이 가볍고 혀를 함부로 놀리는 입방정으로 화를 자초하는 걸 ‘설화’라고 합니다. 역사책을 뒤져보면 설화로 목숨을 잃은 사례도 많습니다. 대선후보 윤석열은 입방정으로 여러 번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하는 거다, 가난한 사람은 부정식품이라도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은 자유의 의미를 모른다... 대선후보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인데도 묻고 따지는 언론은 없었습니다. 상대 후보에겐 티끌만한 빌미만 발견돼도 태산처럼 부풀려 잘근잘근 씹기 좋아하는 언론이 윤석열에겐 참 관대했습니다.

 

거짓말을 하도 많이 해서 그랬을까요. 대선후보 윤석열은 당선 인사에서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참모 뒤에 숨지 않고, 정부의 잘못은 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은 솔직하게 털어놓고 국민 여러분께 이해를 구하겠습니다. 국민을 속이지 않는 정직한 정부, 국민 앞에 정직한 대통령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 하고, 오냐 오냐 하니 할애비 수염 뽑고 상투 잡아 흔든다고 합니다. 대통령 윤석열이 그랬습니다. 후보 시절의 못된 버릇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여전했으니까요. 거짓말을 해도 언론이 비판하지 않으니 거짓말 면죄부를 받았다고 오판했는지 거짓말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이든-날리면’입니다. 미국을 방문한 대통령 윤석열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모금 행사에 가서 ‘48초 정상회담’을 하고 그 대가로 1억 달러 기부를 약속했습니다. 물론 그 돈은 윤석열의 개인 돈이 아니라 국민 세금입니다. 알현인지 정상회담인지 아리송한 면담을 하고 나오면서 윤석열은 ‘바이든 쪽팔려서’라는, 전 국민에게 듣기 평가를 강요한 비속어 실언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사과는 하지 않았습니다. 언론과 국민에게 사슴을 말이라 하는 지록위마의 거짓을 강요했고, 실언을 최초로 보도한 MBC에겐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감정적인 보복을 했습니다. 기자가 보복을 당하는데도 대다수 언론은 침묵으로 권력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한 빌딩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를 마친 뒤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윤 대통령 비속어 논란이 촉발된 장면. 2022.9.22.연합
 

윤석열의 12·3 계엄, 거짓말 행진의 종착역

 

윤석열의 거짓말 버릇은 점점 고약해졌습니다. 거짓으로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고, 그 거짓이 들통나면 새로운 거짓을 창조하여 어제의 거짓을 덮으려 했습니다. 윤석열의 말에선 겸손함이나 진지함이나 진정성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는 세간의 평가는 윤석열이 실증적으로 보여준 겁니다.

 

김건희 디올백을 예로 들어 볼까요? 부적절한 처신이었다고 사과하면 될 일을 모른 척하는 위장으로 덮으려 했습니다. 함정 취재의 피해자라는 억지 주장으로 판을 뒤집으려 했습니다. 박절하게 대할 수 없어서 그랬다며 감정에 호소하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종류를 바꿔가며 국민에게 환각제를 투입했지만 먹혀들지 않자 결국 아내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이었다며 사과인 듯 사과 아닌 사과를 했지만, 휘하의 친윤 검찰은 비난의 화살로 맞아 고슴도치가 되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김건희에게 면죄부를 발부했습니다.

 

거짓말로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윤석열의 습성은 12·3 계엄에서 절정을 이뤘습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계엄령을 발동한다더니 계엄이 실패하고 탄핵과 감옥행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아스팔트 극우에 매달려 연명하는 비루함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국회는 범죄자 소굴이고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려고 계엄령을 발동했다더니 야당에 경고하기 위해서였다고 말을 바꾸고 그게 먹히지 않으니 다시 국민에게 호소하기 위해서였다고 또 말을 바꿉니다.

 

저 살자고 태연하게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저 살자고 공수처와 경찰, 법원과 헌재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다고 홍장원 전 국정원 차장과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에겐 회유니 공작이니 하는 몹쓸 프레임을 씌우고, 평화로운 계엄이니 계몽령이니 하는 말을 태연하게 입에 올리고, 비상계엄을 발동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뭐가 문제냐고 억지를 부리고... 나라 꼴이 어찌 되든 저 살자고 거짓말을 멈추지 않는 윤석열과 그의 변호인들과 국힘당의 뻔뻔함과 비루함에 구토가 날 지경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본인의 탄핵심판 4차변론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게 직접 증인신문을 하자(사진 왼쪽), 김 전 장관이 답변하고 있다. 2025.1.23. 연합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따라서, 유불리에 따라서, 카멜레온처럼 말을 바꾸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윤석열을 보면서 많은 국민은 저런 한심한 사람이 내 나라의 대통령이었다니 하는 자괴감에 분통을 터뜨립니다.

 

윤석열은 저 살자는 계엄령 발동으로 나라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국제사회의 망신거리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로 인한 유무형의 피해는 수십 조원을 넘어 숫자로 환산하기 조차 어려운 지경이고, 국민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는 오래도록 그 비용을 할부로 갚아야 합니다. 언론이 대선후보를 검증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제대로 역할을 했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검증하지 않고 감시하지 않은 언론도 내란 수괴 윤석열의 공범입니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음으로 양으로 내란 수괴 윤석열을 비호하고 있습니다.

 

사주의 이익을 위해 언론이기를 포기한, 겉은 언론이지만 속은 특정 집단의 선전도구인 무늬만 언론에도 혹독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가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악의 무리와 한패가 되어 국민을 속이고 홀리는 언론, 그들이 나라 망치는 주범입니다.     < 민들레 송요훈 편집위원 >

몰락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윤석열 공통점

국회의원 경험 없이 집권해 계엄 패악질

 

 

2024년 12월 3일, 내란수괴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윤석열은 계엄선포와 함께 국회에 완전 무장한 특수부대를 대거 출동시켜 국회를 봉쇄하고자 했고,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여순반란 당시 계엄을 선포한 이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 혁명 진압을 위해 계엄을 선포할 때까지 총 일곱 차례나 계엄을 선포하였다. 박정희는 5.16 군사쿠데타 이래 10.26으로 스스로 붕괴될 때까지 18년 장기집권 기간 내내 계엄과 군사통치로 일관했다. 그런가 하면 전두환은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이래 광주학살의 흉악범으로서 가히 계엄 그 자체라 할 정도의 무단 통치자였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숭앙해온 내란수괴 윤석열

 

내란수괴 윤석열은 문자 그대로 “철들고부터” 줄곧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숭앙해왔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주위 친구들에게 “제2의 이승만이 되고 싶다”고 말해왔고, 검사 시절부터 ‘쿠데타’를 찬양하고 꿈꿔왔다. 12.3 계엄선포 당시의 포고령 1호는 1980년 전두환이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동시에 발표한 포고령 1호를 그대로 베꼈다.

 

윤 대통령은 이승만 미화로 논란이 된 영화 <건국전쟁>이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진실을 담아낸 작품”이라 상찬하며 참모들에게 시청을 권유했다.

 

국민의힘 대권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42주기를 맞아 “박 전 대통령의 그림자도 있지만, 우리는 이 분의 위업을 기리고 본받아 대한민국의 재도약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석열은 부산 해운대구 갑 당원협의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쿠데타와 5·18만 빼면 그야말로 정치를 잘했다는 분들도 있다. 호남 분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이 꽤 있다”고 주장했다.

 

45년 만에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국회 본청에는 계엄군이 진입했다. 국회의 발 빠른 결의로 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됐지만 그 여파는 컸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내란 혐의를 받는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과 수사기관의 수사를 동시에 받는 처지가 됐다. 사진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2월 3일 밤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새벽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계엄군이 국회 본청으로 진입하는 장면. 2024.12.17. 연합
 

‘대통령병’ 이승만, 이 나라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왜곡시킨 장본인

 

이승만은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스스로 사용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3.1 운동 이후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는 원래 국무총리 제도였고, 또 다른 임시정부인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대통령이라는 호칭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이승만은 ‘무단으로’ 대통령이라는 명함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에 도산 안창호가 이승만에게 그 호칭을 사용하지 말라는 서한을 보냈지만, 이승만은 그 요청을 거부하고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군림하였다.

 

한편 해방 이후 유진오 박사가 중심이 되어 작성한 대한민국 헌법 초안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국무총리’가 실권을 쥐고 대통령은 단지 상징적 지위일 뿐인 의원내각제 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초대 대통령으로 내정된 이승만은 반드시 대통령이 강력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면서 한사코 대통령제를 주장하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의원내각제 위에 대통령제를 덧붙이는 정부 형태로 마무리된 것이 바로 제헌헌법이었다. 이승만은 이후 사사오입 개헌으로 국무총리를 없애버렸다. 이승만이야말로 ‘대통령병’ 환자로,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처음부터 오염시켰다.

 

1958년에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의 자유당은 경찰과 공무원을 총동원하여 부정선거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10석이 줄어든 126석을 차지한 반면, 47석에 불과했던 야당인 민주당은 79석으로 늘어났다. 민심이반의 반영이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하였다. 결국 이 부정선거로 인해 4.19 혁명이 발생하였고 이승만 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시종일관 국회 무력화에 집착했지만, 도리어 자멸한 박정희와 전두환

 

박정희는 10월 유신 선포와 함께 국회를 해산하였다. 이후 국회의원 정수의 1/3은 자신의 충복 ‘유정회’로 채우고 오로지 자신의 명을 충실히 받드는 '사쿠라 야당'만을 인정하면서 시종일관 국회를 허수아비로 만들고자 했다. 1978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신체제의 관권선거가 극성을 부렸는데도 야당인 신민당이 32.8%를 얻어 박정희 수하의 민주공화당(31.7%)을 앞섰다. 커다란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야당 총재인 김영삼을 제명하는 등 본격적인 야당 압살에 나섰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부마항쟁이 발생하고 결국 10.26으로 박정희가 피살되면서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몰락하고 말았다.

 

박정희 군사독재의 충실한 계승자 전두환은 5.17 계엄을 선포하면서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조직하고 국회를 해산하였으며 주요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일체 금지했다. 전두환은 야당의 존재 자체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사실상 민정당 일당독재 체제 구축을 꾀하였다. 하지만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총선을 불과 20여 일 앞두고 창당한 야당 신민당은 독재자 전두환의 민정당에 사실상 승리를 거두었다. 서울에서 민정당은 27.3%에 그친 반면, 신민당은 43.9%의 득표율을 올렸다. 전두환 정권은 호헌조치를 발표함으로써 대대적으로 탄압에 나섰지만, 전국적인 6월항쟁이 전개되면서 전두환 정권은 몰락했다.

 

국회는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존재일 뿐

 

이 지점에서 우리가 여태껏 별로 주목하지 못했던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에 주목한다. 계엄을 선포했던 이들 네 명의 대통령 모두 하나같이 국회의원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인물들이라는 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윤석열.

 

국회 경험이 없던 그들에게 국회는 오직 이질적인 적대 집단이었고, 정치적 협상과 교섭 그리고 타협을 중요한 활동 요소로 하는 국회란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존재일 뿐이었다. 민의의 대표기관이며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의 국회의 존재의미에 대한 인식은 애당초 부재했다.

 

그들이 선포한 계엄의 제1 목표는 바로 국회를 없애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권위주의로 충만된 이들 독재자들에게 국회는 유일하게 자신에게 계속 도전하는 ‘체제 전복세력’이었다. 그리하여 국회는 반드시 절멸시켜야 할 제1호 척결대상일 뿐이었고, 결국 그들은 모두 계엄에 의한 국회 제압으로 치달았다.

 

윤석열 내란 청산 과정은 한국 민주주의 전진의 커다란 이정표 될 것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계엄선포라는 독재자의 무력적 방식에 저항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독재자들은 총칼로써 무자비하게 민주주의를 짓밟고자 했지만, 이 땅의 민중들은 독재자의 압제에 맞서 4.19 혁명부터 광주민주항쟁, 6월항쟁 그리고 지금의 내란수괴 윤석열의 내란 청산 투쟁에 이르기까지 결코 굴하지 않고 이 나라 민주주의를 수호해왔다.

 

내란수괴 윤석열은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의 반민주적인 독재정치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계엄을 선포하고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절멸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이 땅의 민중들이 피땀으로 일궈낸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반란 행위로서 시대착오적이며 명백한 위헌 범죄이다. 이제 내란수괴 윤석열은 파면될 것이고, 그 일당의 내란은 철저히 청산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이 나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분명하게 전진시킨 민중의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 소준섭 전 국회도서관 조사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