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9대 대선 땐 이승만·박정희 참배 거부

"친일·매국 세력 아버지, 독재자에 고개 못 숙여"
2022년 20대 대선부터 '국민통합' 강조, 전환점

"대한민국 위기, 국민 힘 최대한 하나로 모아야"
윤석열 쿠데타 겪으며 통합 필요성 더 절감한 듯

계엄 이후 주요 국면마다 '탈이념‧탈진영' 강조
'보수 책사' 윤여준 영입 등 '용광로 선대위' 예고
내란 세력 단죄는 확고…"통합과 봉합은 다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28일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고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2025.4.28 [공동취재] 연합

 

"친일 세력을 등에 업고 편법으로 정권을 창출한 이승만 정권은 수십 년간 일제에 부역해온 자들이 경찰·군인·공무원·교수·교사 등 사회 각 부문의 요직을 장악하게 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부터 부를 축적해왔던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이 한통속을 이루어 '정경유착'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후 이들 친일 세력과 정치인들이 기득권을 형성하면서 '보수'를 자처했고, 이에 맞서 그들의 정치 농단을 막으려는 세력은 자연히 '진보'로 분류되었다. 이때부터 '보수'와 '진보'의 본래 의미가 완전히 왜곡되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성남시장이던 지난 2017년 2월 출간한 첫 자전적 에세이 <함께 가는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에 관해 서술한 대목이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후보는 이 전 대통령을 역사의 뒤안길로 몰아내야 할 친일 기득권 세력의 뿌리이자 '가짜 보수'의 원흉으로 묘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래서 같은 해 1월 31일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예비후보로서 첫 일정으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았을 때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소는 참배한 반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는 외면했다. 이 후보에게 이승만‧박정희는 학살자 전두환과 동급의 독재자일 뿐이었다. 당시 그는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과 노태우, 이명박과 박근혜로 이어지는 친일·독재·매국·학살 세력이 다수 국민을 힘들게 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매국 세력의 아버지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사 쿠데타로 국정을 파괴하고 인권을 침해했던 그야말로 독재자다. 우리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곳에 묻힌다 한들 광주 학살을 자행한 그를 추모할 수 없는 것처럼, 친일·매국 세력의 아버지와 인권 침해 독재자에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로부터 5년 뒤인 2022년 제20대 대선에 출마해 '국민통합 대통령'을 핵심 슬로건으로 띄우면서 그의 행보는 전환점을 맞았다. "정치교체와 국민통합에 동의하는 모든 정치세력과 연대해 국민 내각으로 통합정부를 구성하겠다"고 선언한 이 후보는 공식 선거운동 시작 하루 전인 그해 2월 14일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에 이어 박정희‧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도 차례로 참배했다. 기자들이 이유를 묻자 이 후보는 이렇게 설명했다.

 

"5년 전 경선 당시 내 양심상 그 독재자와 한강 철교 다리를 끊고 도주한, 국민을 버린 대통령을 참배하기 어렵다고 말씀드린 바 있다. 그러나 5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저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저의 사회적 역할도 책임감도 많이 바뀌고 커졌다. 국민의 대표가 되려면 특정 개인의 선호보다는 국민의 입장에서, 국가의 입장에서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28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고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2025.4.28 [공동취재] 연합

 

이제 21대 대선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그가 28일 첫 일정으로 박정희‧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자 다수 언론이 '파격 행보'라고 보도하고 있지만, 이 후보의 '통합 대통령'을 향한 발걸음은 이미 3년 전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이 후보는 이번엔 아예 순서를 바꿔 이승만·박정희·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순으로 묘역을 차례로 찾았다. 취재진의 물음에 이런 답변을 내놨다.

 

"정치는 현실이고 민생을 개선하는 것이 정치의 가장 큰 몫이다. 가급적 지나간 얘기, 이념이나 진영 등은 잠깐 곁으로 미뤄두면 어떨까. 저도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긍정적 생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양민 학살이라든지, 민주주의 파괴라든지, 장기독재라든지 이런 어두운 면이 분명히 있다. 또 한편으로 보면 근대화의 공도 있고, 음지만큼 양지가 있다. 다 묻어두자는 얘기가 아니다. 공과는 공과대로 평가하되 당장 급한 건 국민통합이다. (…) 대한민국의 상황이 녹록지 않다. 경제, 안보, 안전 등 모든 문제에서 위기이기 때문에 국민의 힘을 최대한 하나로 모아야 한다. 통합의 필요성과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시기다."

 

물론 내란 세력과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이 후보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는 욕망을 위한 헌정질서 파괴이자 최악의 내란 행위"라며 "지금 가장 큰 과제는 헌정질서를 회복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좌우나 진보·보수가 있을 수 없다. 헌정 파괴 세력을 징치(懲治)하는 것뿐 아니라 정상적 민주공화정을 회복하는 데 공감하는 모든 세력이 함께해야 한다. 그게 국민이 바라는 바"라고 확신했다. 또 "앞으로 가면서 오른쪽 길로 갈지 왼쪽 길로 갈지는 일단 (추후에 살피더라도) 뒤로 가는 세력의 시도를 막는 게 우선"이라며 "거꾸로, 퇴행적으로, 반대로 길을 가는 사람들은 막아야 한다"고 거듭 역설했다.

 

이번 현충원 방문이 3년 전과 달랐던 건 전직 대통령들에 이어 박태준 전 총리의 묘역까지 참배했다는 점이다. 포항제철(포스코) 회장과 자민련 총재를 거쳐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 국무총리를 지낸 박 전 총리 묘역을 들른 배경에는 김민석 수석최고위원의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 김 최고위원이 "이분은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일종의 진보-보수 연합정권, 통합정권의 옥동자"라며 "통합의 아름다운 열매 같은 존재이니 찾아가 보자"고 이 후보에게 권했다는 것이다. 이 후보가 집권하면 정부 요직에 보수 인사를 기용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대표는 이미 지난 대선 과정에서부터 '국민통합'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특히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친위쿠데타를 겪으며 국가적 존망 차원에서 그 필요성을 더욱 뼈저리게 절감한 것으로 보인다. 내란 사태로 훼손된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위험 수위까지 치달은 사회적 분열을 치유하는 한편 트럼프발 통상 압력 등 대내외적 경제‧안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헌정 파괴 세력'을 제외한 전 국민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진짜 대한민국'으로 재도약시켜야 한다는 각성이다.

 

자신이 당선될 경우 행정권력과 의회권력을 모두 거머쥐고 독주할 거라는 일각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포용적 리더십'에 의한 '정치의 복원'을 부각하기 위해서도 통합 메시지는 긴요하다. 이는 대선에서 중도‧보수층을 망라한 최대치의 득표를 달성함으로써 향후 원활한 국정 운영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고려가 깔린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계엄 이후 주요 국면마다 좌우 이념을 넘어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점을 다짐해왔다.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재명 대선 후보에게 선거운동용 파란색 점퍼를 입혀주고 있다. 2025.4.28. 연합

 

"더불어민주당은 더 낮은 자세로 정치의 사명인 '국민통합'의 책무를 다하겠습니다. 공존과 소통의 가치를 복원하고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되살리겠습니다. 국가와 국민만을 위한 탈이념‧탈진영 실용 정치만이 국민통합과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자 회복과 정상화, 성장과 재도약의 동력이라 믿습니다." - 2월 10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우리가 힘을 모으면 국제사회의 신뢰를 신속하게 회복하고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대한민국이 시작됩니다. 국민과 함께 대통합의 정신으로 무너진 민생, 평화, 경제,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겠습니다." -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파면 선고 관련 입장

 

"지금 이 순간부터 이재명은 민주당의 후보이자 내란 종식과 위기 극복, 통합과 국민 행복을 갈망하는 모든 국민의 후보입니다. 더 낮은 자세로 정치의 사명이자 대통령의 제1과제인 국민통합의 책임을 확실하게 완수하겠습니다." - 4월 27일 민주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가 국어사전을 좀 뒤져서 찾아봤는데,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국민을 크게 통합하는 우두머리'라는 그런 의미가 있었습니다. (…) 국민을 하나의 길로 이끌어가는 것, 국민의 에너지·역량을 최대한 결집하는 것, 이것이 대통령이 할 일일 것입니다." - 4월 28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참석 모두발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024년 10월 30일 여의도 한 식당에서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과 만나 인사하고 있다. 2024.10.30 [공동취재] 연합

 

이 후보의 적극적인 통합 행보는 조만간 출범할 중앙선거대책위원회를 통해 한층 구체화할 전망이다. 이미 경선 캠프 구성 때도 통합에 방점을 찍었던 그는 '보수 책사(策士)'로 불리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상임선대위원장으로 영입하고 30일쯤 열리는 선대위 발족식에서 공식 발표할 계획이다. 이 후보는 이날 기자들에게 "윤 전 장관은 평소에도 제게 조언과 고언을 많이 해준다. 제가 조언을 많이 구하는 편"이라며 "많은 분이 계시지만 대표적 인물로 윤 전 장관께 선대위를 전체적으로 한 번 맡아주십사 부탁을 드렸는데 다행히 응해주셨다"고 밝혔다.

 

내부적으로는 경선 경쟁자 가운데 김동연 경기지사의 경우 현직 단체장인 탓에 합류가 불가능하지만 김경수 전 경남지사를 상임 선대위원장으로 임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대표적 비명계인 박용진 전 의원의 선대위 참여도 타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본적으로 이념·계파에 얽매이지 않는 '용광로' 선대위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이 후보는 그러나 "통합과 봉합은 다르다"며 내란 세력에 대한 단죄는 확실히 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는 지난 15일 노무현재단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유시민 작가, 도울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와의 대담에서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에게는 확실하게 묻고, 자수하고 자백하고 협조하는 사람의 경우는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충분히 책임을 묻지 못하면 어느 나라처럼 쿠데타가 6개월에 한 번씩 일어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 후보는 전날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곧 대선 출마를 선언할 것이라는 관측에는 "끊임없이 내란 세력의 귀환을 노리는 게 아닌가"라고 일갈한 뒤 "경계심을 갖고 내란 극복을 위해,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엄중한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민석 최고위원은 이날 "마을의 통합과 안정을 이룰 때 그 마을에서 돌아다니는 가정 파괴범까지 통합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말로 이 후보의 입장을 뒷받침했다.  < 민들레  김호경 기자 >

 

이재명 항소심, 지난해 10월 판례 인용
대법 전원합의체 주심 대법관도 참여

 

 
 
                        24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연합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맡은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가 1차 심리 이틀만인 24일 두 번째 심리를 진행했다. 전례 없는 기일 공개와 속도전에 정치권은 물론 법조계도 그 의도를 두고 술렁인다. 6·3 대선 전 선고를 목표로 한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데, 대법원이 불과 6개월 전 ‘이재명 항소심 무죄 판결’과 판박이 판례를 내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 후보 사건 전합 주심인 박영재 대법관이 속한 소부(대법원 2부)에서 내놓은 판례다.

 

서울고법 형사6-2부(재판장 최은정)는 지난달 26일 이 후보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지난해 10월31일 선고된 대법원 공직선거법 판례(정읍시장 판례) 사건번호를 판결문에 6차례 직접 인용했다. 고 김문기씨와의 골프 관련 발언에 무죄를 선고하면서다. 사건번호를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골프 관련 발언 및 백현동 개발 국토부 협박 발언에 무죄를 선고하며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형사법의 기본 원칙”을 2차례 언급했다. 이 역시 정읍시장 판례에 언급됐다.

 

항소심 무죄 판결에 놀란 국민의힘과 보수언론은 권순일 전 대법관이 참여한 2020년 7월 이재명 경기도지사 전합 판례가 ‘이번에도 이재명을 구했다’고 지적했지만, 해당 전합 판례는 국토부 협박 무죄 판단에만 1차례 직접 인용됐다. 항소심 무죄 판단 큰 뼈대는 다른 판례에 있었던 셈이다.

 

6개월 전 나온 ‘판박이’ 판례

 

이학수 정읍시장은 2022년 지방선거에서 상대 후보에 대한 허위사실을 퍼뜨렸다는 혐의(공직선거법의 허위사실공표죄)로 기소됐다. 상대 후보는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땅과 추가 매입한 땅이 있는데, 그곳과 꽤 떨어진 구절초공원을 국가정원으로 승격시키겠다는 공약을 두고 사익 추구 목적이 의심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시장은 라디오·텔레비전 토론회, 보도자료, 카드뉴스를 통해 ‘알박기’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을 언급했다. 1심과 항소심은 당선무효형인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유권자들로 하여금 투기 목적을 인식하도록 허위사실을 공표했다는 이유에서다. 라디오와 티브이 토론회 발언은 허위이기 때문에 이를 기초로 작성된 보도자료와 카드뉴스도 허위라고 판단했다.

 

이 사건을 심리한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권영준·오경미·박영재) 판단은 달랐다. 유죄로 올라온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것이다.

 

대법원은 “여러 표현 행위가 일시와 장소를 달리하여 이루어진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개별 행위별로 허위사실공표죄에 해당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죄를 선고한) 원심은 티브이 토론회 발언 내용까지 함께 고려해 라디오 토론회 발언 의미를 해석하고 평가한 잘못이 있다” ”‘알박기’ 등 표현은 이해충돌 여지나 부적절성을 지적하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토지 보유를 지적한 부분은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한 배경 사실로 제시된 것이다” “진실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고, 허위 부분은 선거인의 판단을 그르칠 만한 중요 부분이 아닌 지엽적 부분에 불과하다”고 했다. 특히 “공표된 사실의 내용 전체의 취지를 살펴볼 때 중요한 부분이 객관적 사실과 합치되는 경우에는 세부에 있어서 진실과 약간 차이가 나거나 다소 과장된 표현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허위의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의견과 사실이 혼재되어 있는 표현은 이를 전체적으로 보아 (공직선거법에 말하는) 사실을 공표했는지 판단하여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정읍시장 판례에 대해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형사법의 기본원칙에 입각해 선거운동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대의민주주의를 택한 헌법정신을 따른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파기환송심을 맡은 광주고법 전주재판부 형사3부는 지난 2월 대법원 판단에 따라 무죄를 선고했다.

 

이재명 발언 잘게 쪼갰다? 대법 판례 따랐다

 

정읍시장 사건에서 검찰의 공소사실 구성 방식과 대법원 무죄 판단 논리는 이 후보의 항소심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됐다. 검찰은 이 후보가 2021년 4차례 방송 인터뷰에서 한 골프 관련 발언들을 하나로 묶어 포괄일죄로 기소했다.

 

그러나 이재명 항소심 재판부는 정읍시장 판례처럼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서 나온 발언들을 하나로 묶지 않았다. 각각의 발언이 나오게 된 질문 등 그 맥락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정읍시장 판례는 또 티브이 토론회에서 나온 발언을 4가지로 쪼개 △사실 공표인지 의견 표명인지 △허위사실·사실·의견이 혼재됐는지 등을 판단했는데, 이 후보의 항소심 재판부도 이재명 발언을 3가지로 쪼개 판단했다. 앞서 조선일보는 항소심 재판부가 이 후보 전체 발언을 3가지로 잘게 쪼개는 방식으로 무죄를 선고했다고 비판적으로 보도했지만, 이는 허위사실공표죄를 다루는 대법원 판결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이 후보 발언을 검토한 항소심 재판부는 “질문 자체에 골프 동반 의혹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는데, 외부의 제3자가 제기한 의혹을 기초로 피고인 발언의 목적을 추론하고 의미의 외연을 확장했다. 일반 선거인 관점에서 표현의 의미를 새겨야 한다는 법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검찰 주장의 잘못을 지적했다. 정읍시장 판례 역시 “사후적 해석을 가미해 형사처벌의 기초로 삼는 것은 선거 과정에서 장려돼야 할 표현을 위축·봉쇄하게 된다”고 지적했는데, 이 후보 항소심 재판부도 이 판례를 충실히 따른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또 국토부 협박 발언은 사실 공표가 아닌 의견 표명으로 봐야 한다며 “의견과 사실이 혼재되어 있는 표현은 이를 전체적으로 보아 (공직선거법에서 말하는) 사실을 공표하였는지 판단해야 한다”는 정읍시장 판결 등 기존 대법원 판례를 재확인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24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날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 두 번째 기일을 열어 사건을 심리한다. 연합

 

세 번째 대선 도전에 나선 이 후보의 운명을 가를 이번 전합 판결에는 대법관 14명 중 12명의 대법관이 참여하는데, 정읍시장 판례를 남긴 권영준·오경미·박영재 대법관(김상환 주심은 퇴임)도 전합 심리에 참여한다. 대법원 근무 경험이 있는 고법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대법원이 직접 유죄로 파기자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항소심이 가져다 쓴 법리와 사실관계 판단에 비춰볼 때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하기도 어려운 사건이다. 상고 기각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 한겨레 김남일 기자 >

‘명태균 특검법’은 ‘김건희 특검법’에 합치기로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2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 5개 정당은 25일 오후 ‘내란 특검법’과 ‘김건희 특검법’을 공동 재발의하기로 했다.

 

김성회 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뒤 기자들과 만나 “내란 특검법과 김건희 특검법을 이날 오후 발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 대변인은 “기 발의한 명태균 특검법은 (김건희 특검법과) 각각 (발의)하기보단 다 모아서 하나의 특검법으로 발의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김건희 특검법과 명태균 특검법은 ‘김건희’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는 만큼, 김 여사를 중심으로 법안을 하나로 합쳐 수사 범위를 구성하기로 한 데 따른 것이다. 최근 검찰 조사 결과 윤석열 전 대통령 대선 캠프 ‘비선실세’로 지목된 ‘건진법사’ 전성배(64)씨가 2022년 통일교(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세계본부장 윤아무개씨로부터 6천만원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김 여사 선물용으로 받았다는 사실 등이 공개되면서, 민주당은 김 여사와 관련된 여러 의혹을 하나로 합쳐 ‘더 센 특검법’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아울러 민주당은 이날 기존 당내 ‘명태균 게이트 진상조사단’을 확대 재편한 새 진상조사단을 꾸려, 명태균 게이트를 포함한 새로운 김건희 특검법의 주무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조사단은 명태균 의혹 분과와 건진법사 의혹 분과로 구성될 것”이라는 게 김 대변인 설명이다.

 

또 12·3 비상계엄 사태의 전말을 특별검사가 수사하도록 한 ‘내란 특검법’의 경우, 국민의힘 의원들의 특검법 표결 동참을 설득하기 위해 뺐던 ‘외환죄’ 혐의를 다시 포함시키기로 했다.

 

민주당은 두 특검법을 5월 안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의결을 거쳐, 대선 뒤 6월 안에 본회의에서 처리한다는 방침이다. < 한겨레 김채운 기자 >

 

상호관세 유예 기한 못 박고 다양한 양보 요구하는 미 의도 충실 반영

전체 한국 상품 대해 25% 상호관세 철폐 &경감 계획은 구체 제시않아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24일 미국 워싱턴 주미한국대사관에서 한·미 ‘2+2 통상 협의’ 결과에 대해 언론 브리핑을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한국과 미국의 경제·통상 장관들이 ‘2+2 통상 협의’에서 미국 고율 관세를 둘러싼 논의 범위와 일정에 관해 큰 틀에서 합의함으로써 협의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이런 합의에는 상호관세 유예 기한을 못 박고 다양한 양보를 요구하는 미국의 의도가 충실히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4일(현지시각) 워싱턴에서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와의 협의 뒤 브리핑에서 “상호관세 유예가 종료되는 7월8일 이전까지 관세 폐지를 목적으로 한 ‘줄라이(July·7월) 패키지’를 마련할 것과 양측의 관심사인 관세·비관세 조치, 경제안보, 투자 협력, 통화 정책 등 4개 분야를 중심으로 논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최 부총리는 이번에 “협의 과제를 좁히고 논의 일정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협의의 기본틀, 즉 프레임워크를 마련했다고 평가된다”고 했다. 그는 역시 협의에 참여한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그리어 대표가 별도 회동에서 앞으로 협의를 진행할 복수의 작업반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안 장관은 “한·미 양국 간의 향후 협의의 틀에 대한 원칙적 합의가 있었다”며 “‘줄라이 패키지’ 도출을 목표로 향후 협의의 방식, 범위에 대해 다음주 중 양국 간 실무 협의를 진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런 큰 틀의 의제와 협의 일정은 주로 미국의 이해관계와 협상 틀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 무역적자를 상대국의 관세·비관세 장벽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미국은 이런 장벽의 해소를 요구하면서 자국에 대한 직접투자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경제안보라는 개념도 경제와 안보가 불가분하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미국이 주로 중국을 염두에 두고 동맹국들과의 공급망 연계나 수출 통제 강화를 추진할 때 주장하는 것이다. 미국은 또 무역 상대국들이 의도적으로 통화 가치를 낮게 유지해 대미 수출을 독려하면서 무역흑자를 늘리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에도 ‘8개 비관세 부정행위’를 거론하면서 환율 조작을 우선적으로 꼽았다.

 

환율을 둘러싼 통화 정책 문제의 경우 정부가 관세 협상 의제로서 공식적으로 제기되는 것을 꺼렸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운 논의 주제가 설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일본과도 환율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일본은 이런 논의에는 응하지만 1985년 플라자합의로 엔화 평가절상을 했다가 큰 타격을 입은 기억 때문에 급격한 엔화 평가절상은 다시 추구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줄라이 패키지’를 추진한다는 것도 미국의 협상 전략과 궤를 맞추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는 이달 9일 57개국을 상대로 상호관세(한국은 25%)를 발효했다가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리자 13시간 만에 상호관세 적용을 7월9일로 90일간 유예해놓은 상태다. 트럼프 행정부는 유예 기간 안에 협상을 타결지어야 유리하다며 상대국들을 독려하는 동시에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패키지’라는 표현은 또 여러 분야에서 양보를 받아낸다는 미국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미국은 쇠고기 등 농축산물 수입 확대나 위생 규정 개정,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 해결 등 무역수지와 관련된 문제 외에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참여 등도 요구하는 등 최대한의 양보를 받아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행정부가 6월2일 알래스카에서 열리는 엘엔지 관련 고위급 회담에 한국과 일본 등이 참여해 투자의향서에 서명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이처럼 한국에 여러 양보를 요구하고 있지만 자동차·철강·알루미늄에 대해 부과한 25% 품목별 관세나 유예 기간이 끝나면 발효할 예정인 전체 한국 상품에 대한 25% 상호관세에 대한 철폐 내지 경감 계획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안 장관은 브리핑에서 “전체 패키지가 사실 합의가 돼야 하기 때문에 일부 한국의 이슈가 먼저 정리가 된다는 것을 가지고 관세가 어떻게 된다고 사전에 예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이를 종합하면, 미국은 한국의 양보안을 검토하고 확실한 약속을 받은 뒤에야 ‘대가’를 제시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정부가 이번 협의에서 일단 미국 쪽이 방위비 분담금과 대중국 압박 공조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그나마 부담을 줄여주는 대목으로 받아들여진다. 최 부총리는 이에 관한 질문에 “방위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고 했고, 중국에 관해서도 관련 언급이 없었다고 밝혔다. 앞서 트럼프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과 통화한 뒤 무역뿐 아니라 방위비 분담금 등을 포함시키는 “원스톱 쇼핑”을 원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월스트리트저널은 중국이 초기 관세 협상 상대국들에 △중국 화물선 경유 금지 △미국의 대중국 관세 회피용 제3국 투자 금지 △중국산 저가품 구매 금지를 요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중국 상무부는 미국의 이런 움직임에 협조하는 국가에는 “대등한 반격 조치”를 하겠다고 경고했다.

 

한편 베선트가 이번 회의 결과를 놓고 다음주 중 “양해에 관한 합의(agreement of understanding)”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놓고 혼선도 빚어졌다. 베센트는 이날 백악관에서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관세 협상에 대해 설명하라는 트럼프의 지시에 “한국 최선의 제안을 가져왔고, 우리는 그들이 그것을 이행하는지 지켜볼 것”이라며 “(한국과의 협의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르면 다음주에 양해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면 기술적 조건에 대해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한·미가 양해각서(MOU) 같은 식의 합의를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최근 미국 행정부 안팎에서는 인도나 일본과의 관세 협상에서 큰 틀의 합의를 먼저 한 뒤 세부 내용을 협상으로 결정한다는 ‘2단계 합의론’이 제시돼왔다.

 

안 장관은 이에 대한 질문에 “잠정 합의와 관련해 오늘 특별한 얘기는 없었다”며 “‘양해에 관한 합의’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다만 안 장관은 “다음주에 (실무진이) 기술적 협의에 들어간다는 합의는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최선이 제안을 가져왔다는 베센트의 발언을 놓고는 “저희가 이번에 설명한 내용 중에 특히 조선 산업 협력의 비전에 대해 상당히 공감대를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 이본영 선임기자 >

 

“미, 6월 알래스카 LNG 회담서 ‘한·일 투자’ 공식 발표하게 압박”

 

 
 
알래스카에서 석유 시추 중인 시설의 모습. 2007년 촬영됐다. 게티이미지뱅크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한국과 일본 등에 알래스카산 액화천연가스(LNG) 구매 계획을 공식적으로 발표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고 미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로이터통신은 백악관의 에너지위원회가 알래스카 천연가스(LNG) 프로젝트와 관련해 6월2일 알래스카에서 개최예정인 고위급 회담에 한국과 일본의 통상 관계자들이 참석해 사업 참여 등을 발표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24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익명을 요구한 복수의 관계자를 인용해 미국은 일본과 한국이 이날 알래스카 천연가스 개발 관련 투자 또는 구매 의향서(LOI)에 서명했다고 발표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달 대만 국영 에너지회사인 대만중유공사(CPC)는 미국 알래스카 가스라인 개발공사(AGDC)와 천연가스 구매·투자의향서를 체결한 바 있다. 지난해 수입한 총 액화천연가스 양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600만톤 가스를 구매하기로 했다.

 

트럼프 정부가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알래스카 천연가스 가스관 사업. 북극권 유전에서부터 알래스카 남부로 파이프라인 1300㎞를 연결해 운송한 뒤 액화해 국내용과 아시아 수출용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뉴욕타임스 갈무리

 

트럼프 정부가 국가별 관세 협상에서 에너지 수출 문제를 주요 의제로 제시한 가운데, 자국에서의 석유와 가스 생산을 끌어올리기 위한 대표 방안이 알래스카 천연가스 개발 사업이다. 북극권에 있는 알래스카주 노스 슬로프 유전에서 생산된 가스를 1300㎞ 길이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운송해 알래스카 남쪽에서 액화시킨 뒤 이 액화천연가스를 국내에서 사용하거나, 아시아 국가들에 선박을 이용해 수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총 사업비는 약 440억 달러 규모다. 20~30년 전부터 사업이 추진되어왔으나 막대한 초기 투자 비용 부담과 불확실한 경제성 등 사업성 부족을 이유로 원만하게 추진되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1월20일 취임 첫날 파이프라인 건설을 포함한 알래스카 천연가스 개발을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주요 사업으로 급부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미국산 에너지 수입을 요구하는 동시에 무역 관세 정책을 앞세워 이 사업에 참여할 것을 강권하고 있는데, 참여를 원하는 국가로 한국과 일본을 콕 짚었다.

 

지난달 초 트럼프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알래스카에서 세계 최대 규모 중 하나인 거대한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 있다”며 “일본, 한국,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 우리의 파트너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익명의 소식통은 알래스카산 천연가스의 소비자가 될 수 있는 타이와 한국 정부 관계자가 2주 안에 알래스카를 방문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무역대표부(USTR) 회의실에서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와 면담하고 있다. 산업부 제공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날 워싱턴 재무부 청사에서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양자회담을 마친 뒤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기자들을 만나 알래스카 천연가스 프로젝트에 대해서 “모든 고려 사항을 다 검토해야 하는 상황이고 사업 타당성이 현 시점에 나오기가 쉽지 않다”며 “고려할 수 있는 모든 사항을 정밀하고 면밀하게 검토해서 사업을 할 수 있는지와 천연가스 수입 확대 물량 등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현지 실사를 해서 현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있는 걸로 이해하고 있다. 실사단의 실사 결과를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최우리 기자 >

 

‘환율 문제’ 미·일은 논의 안 한다는데…최상목 “핵심 협상 대상”

 

 
 
25일 일본 도쿄 한 전광판에 엔-달러 환율이 표시되고 있다. 로이터 연합

 

미국 관세 협상 책임자인 스콧 베선트 재무부 장관이 “엔-달러 환율의 구체적 수준을 요구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재확인하면서 미·일 관세 협상에서도 통화 문제가 제외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정부가 미국과 첫 관세 협상에서 통화 정책을 포함해 ‘패키지 협상’에 나서기로 한 것과 대비된다.

 

24일(현지시각) 가토 가쓰노부 일본 재무상은 미국 워싱턴 디시(D.C)에서 베선트 장관과 50여분간 회담 뒤 기자들과 만나 “미국 쪽에서 엔·달러 환율 수준 목표나 관리에 필요한 틀 등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며 “환율 문제에 긴밀한 협의를 이어가자는 데 뜻을 같이 했다”고 말했다.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그는 “환율 관련 데이터는 시장 안에서 결정되는 것이며 환율의 과도한 변동은 경제·금융 안정성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도 미국 정부와 재확인했다”고 덧붙였다.

 

가토 재무상은 다음달 1일로 예상되는 미·일 관세 2차 협상을 앞둔 데 대해 “현재 진행 중인 미·일 무역(관세) 협상과 관련해서도 환율 문제는 지속적이고 긴밀하면서 건설적으로 협의해 나가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의 대미 무역 흑자를 문제삼으며 달러 대비 엔화 가치 약세가 미국산 제품 수출에 어려움을 준다는 입장을 잇따라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가토 재무상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엔 약세-달러 강세가 문제라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는 기자들의 지적에 “환율 관련 미국 쪽 요구는 ‘전혀’ 없었다”는 대목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베선트 장관도 이날 가토 재무상과 회담에 앞서 기자들에게 “환율의 구체적 목표를 일본 쪽에 요구할 의도가 전혀 없다”며 “환율은 시장에서 결정돼야 한다는 선진 7개국(G7) 합의를 일본이 준수할 것으로 기대한다”고만 밝혔다. 앞서 엔-달러 환율은 지난 16일 첫 테이프를 끊은 미·일 관세 협상에서 현안이 될지 여부로 주목받았다. 일본 쪽 관세 협상 책임자인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은 1차 협상 뒤 “환율은 거론되지 않았다”며 “환율은 펀더멘털을 반영해 결정되는 것으로 (일본 정부가) 시장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없는 만큼 특별히 언급할 내용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1차 협상 때 논의되지 않은 게 확인된 뒤에도 2차 협상 때 다시 거론될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미·일 관세 협상의 키를 잡은 베선트 장관이 환율 문제를 관세와 연결짓지 않는다는 입장을 명확히 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국은 일본과 달리 원-달러 환율 문제가 관세 협상의 한 축이 됐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미국 시각 기준 24일 미국 워싱턴 디시(D.C.) 주미대사관에서 열린 ‘한미 2+2 고위급 통상 협의’에서 “관세 폐지를 목적으로 ‘7월 패키지’를 마련하자는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평가한다”며 ‘관세·비관세조치’, ‘경제안보’, ‘투자협력’, ‘통화(환율)정책’ 등 4가지 분야가 핵심 협상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두 나라는 환율 정책과 관련해 각각 기재부와 재무부간 별도로 논의하고, 조만간 실무협의를 예정했다. < 도쿄 워싱턴/홍석재 김원철 특파원 >

 

최상목 “한미, 관세 폐지 위한 ‘7월 패키지’ 마련 공감대”

상호관세 유예 종료되는 ‘7월8일’까지
관세·경제안보·환율 등 4개 분야 협의키로
방위비·대중국 압박 동참은 논의 없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포함한 주요 무역 상대국을 상대로 고율의 상호관세를 발표한 이후 한-미 간에 첫 고위급 회의가 24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재무부에서 열렸다. 회의에 앞서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왼쪽부터)과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한·미 양국이 90일간의 상호관세 유예조치 종료 기간인 ‘7월8일’을 데드라인 삼아 상호관세 및 품목별 관세 폐지를 위한 협의를 진행하기로 했다고 한국 정부가 밝혔다. 논의 대상은 ‘관세·비관세조치’ 등 4개 분야다. 방위비 분담금 재협상, 대중국 압박 동참 요구 등은 논의 테이블에 올라오지 않았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4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디시(D.C.) 주미대사관에서 진행한 ‘한미 2+2 고위급 통상 협의’ 결과 브리핑에서 “상호관세 유예가 종료되는 7월8일 이전까지 관세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줄라이(7월) 패키지’를 마련하자는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이어 “‘관세·비관세조치’, ‘경제안보’, ‘투자협력’, ‘통화(환율)정책’ 등 4개 분야를 중심으로 논의해 나가는 데에도 한미가 공감대를 형성했다”며 “협의의 출발점인 ‘2+2 회의’를 통해 협의 과제를 좁히고 논의 일정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협의의 기본틀, 즉 프레임워크를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4일(현지시각) 오후 미국 워싱턴 디시(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2+2 고위급 통상 협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워싱턴 특파원 기자단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2+2 통상협의’에 이어 그리어 무역대표부 대표와 별도 면담을 갖고 “상호관세 및 일체의 관세를 면제해줄 것을 재차 요청했다”고 밝혔다. 다음달 15일부터 이틀간 개최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통상장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하는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 대표와 안 장관 간 추가 고위급 협의도 잡혔다.

 

환율정책과 관련해 최 부총리는 “한국 기재부와 미국 재무부 간 별도로 논의해 나가기로 양국이 합의했다”며 “조만간 실무협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협의에선 자동차와 조선분야가 중점적으로 논의됐다. 최 부총리는 “특히 우리 경제에 부정적 효과가 가장 큰 자동차 분야에 대해 중점 설명했다”고 밝혔다. 안 장관은 “조선 산업 협력의 비전에 대해서 상당히 공감대를 나타낸 것으로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줄라이(7월) 패키지’가 의미하는 ‘7월8일 협상 데드라인론’과 관련해 다소 다른 입장을 보였다. 베선트 장관은 ‘2+2 협의’ 뒤 백악관에서 “오늘 우리는 한국과 매우 성공적인 양자 회의를 가졌다”며 “우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이르면 다음 주부터 기술적인 조건들에 대해 논의하게 될 것이며, 다음 주 중 ‘이해에 기반한 합의’(agreement on understanding)에 이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인들은 일찍 (협상하러) 왔다. 그들은 자기들의 최선의 제안(A game)을 가져왔고 우리는 그들이 이를 이행하는지 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협상이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최 부총리는 “4개 분야로 한정해 7월8일까지 협상하자는 ‘줄라이 패키지’에 미국이 공감한 게 맞는다”고 거듭 확인했다. 베선트 장관이 밝힌 ‘이해에 기반한 합의’라는 표현과 관련해 안 장과은 “통상 분야에서 쓰는 표현이 아니다. 처음 들어보는 표현”이라며 “‘다음 주부터 실무 협의를 공식적으로 개시하기로 합의가 될 것’이라는 걸 설명하려고 쓴 표현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 한겨레 워싱턴/김원철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