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국 탈북자 2600여명

캐나다 300, 미국 400명선

정확한 통계 없어…불법체류 등 힘든 삶

북미와 유럽 등에 거주하는 탈북자들은 스스로 ‘제3국 탈북자’라 부른다. 중국·러시아에도 탈북자가 있지만, 두 나라는 한국 또는 서방 국가로 향하는 중간기착지이므로 중·러에 거주자들은 제3국 탈북자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법적 지위를 기준으로 보면, 제3국 탈북자에는 크게 3종류가 있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심사를 거쳐 난민 자격을 얻거나, 해당 국가로부터 망명자 지위를 얻거나, 여행비자 등으로 입국한 뒤 불법 체류하는 경우 등이다. 제3국 탈북자의 정확한 규모는 밝혀진 바 없다. 유엔난민기구의 공식 통계, 각국 정부 통계, 탈북자 단체, 탈북 관련 선교단체, 난민·망명 전문 변호사 등의 증언을 종합해 제3국 탈북자 수를 추산할 수 밖에 없다.

■ 정확한 통계는 난민뿐 : 유엔난민기구의 통계를 보면, 2010년 말 현재, 세계적으로 1194명의 탈북자가 난민 지위에 있거나 망명 신청 단계에 있다. 2000년엔 67명에 불과했지만, 2002년 300명을 넘긴 뒤 2007년 842명, 2008년 1097명 등으로 급증하고 있다. 한국에 오는 탈북자가 2006년 이후 매년 2000~3000명 정도인 것과 비교해 적지 않은 수다.
‘출신 국가로 돌아갈 경우 인종,종교,국적,신분,정치적 의견 등을 이유로 박해 받을 공포’가 있다고 판단되면 난민 지위를 얻을 수 있다. 유엔난민기구의 심사를 거쳐 난민 지위를 얻으면, 정착하고 싶은 나라를 선택하여 해당 국가 대사관의 입국 심사를 받게 된다. 유엔난민기구 자료를 보면, 2010년 현재 영국에는 581명, 독일에는 146명의 탈북 난민이 살고 있다. 미국 정부 자료를 보면, 2011년 6월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탈북 난민은 모두 122명이다.
입국 심사를 기다리지 못해 중도에 미국행을 포기하는 탈북자들도 많다. 미국 회계감사국(GAO)이 지난해 의회에 제출한 <미국의 북한 난민 재정착과 망명 실태> 보고서를 보면,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243명의 탈북자가 난민 지위를 얻어 미국행을 신청했으나 107명이 스스로 신청을 취소했다. 1년 안팎의 심사 기간을 기다리지 못한 것이다.

■ 그마저도 영주권자는 통계 제외 : 유엔난민기구의 통계에는 제3국에서 영주권을 얻은 탈북자는 빠져 있다. 미국 정부 발표 자료를 보면, 2010년 말까지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온 탈북자는 100여명이다. 그런데 유엔난민기구 통계에는 25명의 탈북 난민만 미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온다. 나머지 70여명은 미국 입국 이후 영주권을 얻은 경우로 추정된다. 유엔난민기구는 영주권자가 아닌 순수 난민만 집계, 발표하고 있다. 따라서 유엔난민기구의 자료조차 제3국 탈북자의 실제 규모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 ‘공식적으로는’ 1194명의 탈북 난민이 제3국을 택했지만, 해당 국가에서 영주권을 얻은 경우를 더하면 그 수는 더 불어난다.

■ 망명 신청자와 불법체류자 : 난민이나 영주권자보다 더 많은 것은 불법체류자다. 불법체류자의 대부분은 한국으로 들어와 국적을 취득한 뒤 다시 미국·유럽으로 출국한 경우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해당 국가에 입국한 뒤 망명을 신청한다. 한국 여권을 들고 미국에 들어간 뒤 “본국에 돌아가면 (차별과 위협을 당할) 공포가 있어 보호가 필요하다”며 미국 정부에 거주 승인을 요청하는 것이다. 한국 국적 탈북자의 망명 신청은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신 망명 심사 과정이 길어질수록 탈북자의 체류 기간도 늘어난다. 최종적으로 망명 신청을 거부당해도,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눌러앉아 불법체류자가 된다. 불법체류자가 된 탈북자의 규모를 알려주는 통계는 없다. 이런 실태를 참작하여 난민,영주권자,망명신청자,불법체류자를 모두 합하면 최소 400명의 탈북자가 미국에 거주한다는 게 현지 선교단체·탈북자 등의 추산이다. 캐나다에는 300여명의 탈북자가 난민 자격으로 거주하거나 입국 심사를 받고 있다. 영국은 공식 난민 581명을 포함해 600명 이상, 독일은 영주권을 취득한 탈북자를 포함해 1300명 이상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새출발 땅’ 굶주림보다 더 냉혹
‘약속과 동경의 나라’ 찾은 탈북자들의 꿈과 좌절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하는 아들 이장길씨의 귀가는 늦었다. 지난 6월18일 밤 11시, 집에 들어온 이씨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9, 1, 1을 눌렀다. 어머니가 거실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소방차,경찰차,구급차가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 사우스클린턴 애비뉴에 차례로 도착했다. 집안을 수색하던 경찰은 다락방에서 목을 맨 아버지를 발견했다. 부부 싸움을 하다 54살 탈북난민 남편이 48살 탈북난민 아내를 흉기로 찌르고 자살했다는 게 경찰 조사 결과였다.
그날 밤, 이씨는 부모를 한꺼번에 잃었다. 미국 온 지 2년 만이었다. 사건 이후 이씨는 낮밤없이 매일 술을 마신다. 동생 명길(가명.22)씨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 8월 초, 로체스터에서 어렵게 만난 장길씨는 사건 이야기만 나오면 굳게 입을 다물었다. 가족이 겪은 천신만고에 대해서만 말했다.

목숨 걸고 왔지만 고된 삶 지속
그래서 일부는 극단적인 선택

죽지 않으려 감행한 탈북이었다. 이씨의 또다른 형제 3명은 북한에서 굶어 죽었다. 남은 아들 둘이라도 대학 보내는 게 아버지의 꿈이었다. 1998년, 아버지는 고향 양강도를 떠나 국경을 넘었다. 중국 공안에 붙잡혀 강제북송당했다. 10년 동안 세차례 탈북하면서 아내와 두 아들을 중국 연변에 데려다놓았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이장길 씨 가족이 세차례 탈북을 거쳐 중국 연변에 함께 모인 것은 2007년이다. 네 식구는 움막에서 살았다. 어느 조선족이 개,돼지를 키우는 야산 움막에 이씨 가족을 들였다. 해가 뜨면, 아버지는 두 아들을 데리고 공사판에 나갔다. 철근을 날라 돈을 벌었다. 해가 지면, 어머니는 개죽 끓인 솥에 밥을 지었다. 네 식구의 끼니였다. 식구들은 한국에 대한 불길한 소문을 들었다. “한국에 가면 북에 남은 친척이 위험해진대. 차별도 심하고.” 다른 나라에 대한 좋은 소문도 들었다. “서양 국가엔 복지가 잘 돼 있대.”
2008년 10월, 4500여㎞ 떨어진 라오스로 향했다. 가짜 신분증을 들고, 기차·버스를 갈아타며 두 발로 산을 넘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김일성, 김정일이 ‘철천지원수’라던 나라에 가서 보란듯이 잘 살아 보자.” 2009년 6월, 난민 자격을 얻은 이씨 가족은 라오스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입국 허가를 받아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미국에선 네 식구 모두 일했다. 어머니는 옷공장에서 일했다. 아들 형제는 생선가게에서 일했다. 아버지의 미국 적응은 더뎠다. 아버지는 일을 금세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았다. 안경공장, 세탁소, 생선가게로 옮겨 다녔다. 아버지의 영어 실력은 좀체 늘지 않았다. 부부 싸움이 잦아졌다. 로체스터의 어느 한인은 아버지 이씨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가족도, 교민도 자기를 따돌린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좋게 좋게 사시라고 위로했는데….”

원래 탈북자들이 선호한 서양 나라는 유럽이었다. 2000년대 초반, 유럽 각국은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여 받아들였다. 한인들이 많은 영국·독일로 건너가는 탈북자가 생겨났다. 한국에 왔다 유럽으로 건너가는 탈북자도 있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흐름이 바뀌었다. 한국 국적 탈북자의 ‘위장망명’을 적발한 영국 정부가 2000년대 중반 이후 탈북자의 입국 문턱을 높였다. 반면 미국은 2004년 ‘북한인권법’을 만들어 탈북난민 수용을 본격화했다. 이후 탈북자 사이에 ‘미국행 열풍’이 불었다.
“북한에 돌아가면 목숨이 위험하니 난민 지위를 주세요.” 2009년 6월, 미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이씨는 난민·입국 심사를 더해 10번 이상 면접을 거쳤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난민 심사를 통과하려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말을 꼭 해야 한다는 게 탈북자들의 상식이다. 심사 때마다 라오스 주재 미국대사관 직원이 물었다. “왜 한국이 아닌 미국에 가려고 합니까?” 이씨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미국이 가장 강대국이고, 세상에서 최고인 나라 아닙니까.”
세상 최고의 나라에 오자마자 이씨 가족은 빚을 졌다. 미국행 비행기삯 5000달러를 미국 정부에 갚아야 했다. 1인당 35달러씩, 모두 140달러를 매달 냈다. 미국 정부는 시장주의 방식으로 난민을 지원했다. 각 주나 도시마다 차이가 있지만, 지정된 가게에서 사용하는 ‘식품구입권’(푸드 스탬프)과 입국 초기 3개월 동안 월 200~400달러의 집세 또는 지원금이 금전적 도움의 전부다.
당장 갚아야 할 빚이 있으므로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내려던 아버지 이씨의 꿈은 미뤄졌다. 북한 양강도에서 이씨 형제는 인민학교(한국의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거들었다. 중국 연변에서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공사판에 나갔다. 미국 로체스터에서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시급 6~8달러를 받으며 생선가게에서 일했다.

“한국위험·차별, 서양은 복지잘돼”
 떠도는 소문 의지해 행선지 결정

탈북자의 미국행에는 ‘중개인’(브로커)이 끼어든다. 조선족,한국인,재외동포 등이 합세한 브로커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난민·망명 신청을 하는 탈북자는 거의 없다. 여기에는 비용이 든다. 이씨 가족은 해외 한인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그 비용을 충당했다. 지난 2007년, 아내와 함께 미국에 온 탈북자 배경식(가명.41)씨는 그런 후원을 받지 못했다. 배씨는 아내 몫까지 더해 1인당 3000달러씩, 모두 6000달러의 ‘소개비’를 브로커에게 갚고 있다. 미국 정부에 빚진 비행기삯까지 더해 배씨에겐 날품팔이조차 마다할 여유가 없다. 엔지니어링 전공으로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한 배씨는 미국 시애틀의 어느 공장에서 모터 부품을 점검하는 시간당 7달러 단순노동을 했다.
‘미국행 탈북비용’은 탈북자의 순조로운 정착을 막아서는 첫번째 장애물이다. 그런 현실을 이장길씨 가족은 잘 몰랐다. 그들이 가진 정보는 보잘것없었다. “영국은 요즘 들어가기 힘들대.” “캐나다는 의료비용이 공짜라던데.” “‘기회의 땅’인 미국에선 일한 만큼 벌 수 있다잖아.” 중국에서 단속을 피해 숨어 지낸 이씨 가족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다른 탈북자가 전해준 입소문뿐이었다. 그 소문 속에서 이씨 가족은 ‘아메리칸드림’을 만났다. 임대주택 보증금과 정착 지원금 2000여만원을 지급하는 한국보다 “일한 만큼 벌 수 있다”는 미국에 더 끌렸다. 심지어 “미국은 한국보다 10배 더 많은 돈을 준다”는 뜬소문까지 들었다.
정보의 차이는 정착지의 차이로 이어진다. 한국에 왔다 다시 미국으로 가는 탈북자들은 한인이 많이 사는 서부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반면 탈북 직후 곧바로 미국을 택한 탈북자들은 동부 뉴욕주의 크고 작은 도시에 주로 정착한다. “높은 건물 많은 그 뉴욕을 떠올리면서 무조건 ‘뉴욕주’로 가겠다고 했다”는 탈북자가 많다. 이씨 가족이 사는 로체스터 역시 뉴욕주의 작은 도시다.

이씨 가족의 초기 정착을 도와준 어느 탈북자는 아버지 이씨와 나눈 대화를 기억한다. 일이 힘들다는 아버지 이씨에게 그가 말했다. “중국에서도 힘들게 일했으니, 미국에서도 그런 고생은 견뎌야죠.” 아버지 이씨가 답했다.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잖아요.” 아버지 이씨는 북한·중국에서 겪은 날품노동과 가난을 미국에서 반복하고 있는 처지를 좀체 이해하지 못했다.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을 때, 아버지 이씨는 수용소에 갇혔다 풀려나왔다. “젓가락처럼 말라 수용소 밖으로 버려졌지만, 다시 살아났다”고 자랑스레 말하곤 했다. “그렇게 고생한 것을 미국에서 한번에 보상받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웃 탈북자가 회고했다.
저임 노동이나마 가능한 것은 한인 교회 덕분이다. 로체스터 공항에 도착한 이씨 가족을 마중 나온 것은 한인 교회의 목사와 신자들이었다. 교회에서 만난 한인은 다른 한인이 운영하는 생선가게 일자리를 이씨 가족에게 소개해줬다. 제3국 탈북자에게 한인 교회의 도움은 결정적이다. 그 끈을 놓치는 건 치명적이다.
지난해 뉴욕에 정착한 원만호(가명.51)씨는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다른 탈북자의 말을 믿었다가 갖고 있던 돈까지 잃었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기댈 곳이 없었다. 한인 교회가 그를 구제했다. 교회 소개로 한인 슈퍼마켓에서 채소 정리 일을 시작했다. 원씨에게 한인 교회는 울타리다. 그것에 기대 살아가지만, 그 밖으로 나갈 궁리는 못하고 있다.
북한에 있을 때, 원씨는 자동차 기술자였다. 기술이 있으니 미국 생활에 걱정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영어를 못하는 그를 제대로 써주는 곳은 없었다. 한인 경제권 안에서도 탈북자들은 한국인과 다른 대접을 받는다. 탈북자들이 한인 업주들에게 한인과 똑같은 임금을 달라고 요구하면 “왜 이리 비싸냐”는 말을 듣는다.

언어 장벽을 넘는 길은 수월치 않다. 이장길씨는 북한에서 중학교 6년 과정 가운데 1년밖에 다니지 못했다. “(해방 직후) 할아버지가 혁명을 하겠다고 남쪽 고향을 버리고 북으로 왔대요. 고향은 남한이지, 아버지는 탈북해서 중국에 있지, 출셋길은 영원히 끊어졌다 생각하고 공부를 안했어요.” 이씨는 성년이 되도록 알파벳을 몰랐다. 미국 도착 뒤, 난민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육 시설에서 알파벳을 처음 배웠다. 그것은 초급 영어였다. 아버지 이씨는 그 장벽을 넘지 못했다. 아들이 미국인 친구를, 아내가 한인 이웃을 조금씩 사귀어가는 동안, 아버지는 오히려 말수가 줄었다. ‘318 파트너즈 선교회’의 스티브 김 대표는 아버지 이씨가 로체스터 공항에 도착했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이제 나한테는 돈 쓰지 마세요. 한국 사람 안 만나고 영어 실력 쌓아서 미국 사람하고 상대해 돈 많이 벌 테니까.” 김 대표는 “내가 본 탈북자 가운데 가장 자립심이 강하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50대인 아버지 이씨의 영어 실력은 늘지 않았다. 미국 사람과 상대하여 돈을 벌 기회도 없었다. 업종을 바꿔가며 한인 가게에서 점원 노릇만 했다. 아버지 이씨는 “한인 가게에서 일하면 배가 아프고 속상하다”고 종종 가족에게 말했다.

시작부터 빚더미에 날품노동
영어도 못해 임금수준 밑바닥

사회 안전망은 부족하고 함께 어울릴 집단도 마땅치 않은 상태에서 미국의 탈북자들은 때로 극단적 선택을 한다.  ‘북한인권법’ 이후 난민 자격으로 처음 미국에 들어온 6명의 탈북자가 있다. 그 가운데 1명이 지난해 4월 자살했다. 김기호(가명.36)씨는 한인 선교단체와 탈북자 단체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오랫동안 항우울제를 복용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뉴욕 플러싱 집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미국 탈북자의 고립과 좌절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체계적인 조사가 실시된 적은 없다. 그들은 미국 동·서부의 도시에 흩어져 숨죽여 지낸다. “이씨 부부의 죽음이 교훈을 남겼어요. 겉보기엔 조용하고 평온해 보여도 탈북자 모두 상담이 필요할 정도로 힘들게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지요.” 이씨 가족 미국행을 도왔던 스티브 김 대표가 말했다.

이역만리에서 부모를 잃은 이장길씨는 한인 교회·선교단체 등의 도움으로 밀린 집세와 장례비용을 치렀다. 이씨 가족은 이제 형제 두명만 남았다. 이씨의 혈육 가운데 한국에 사는 이가 있긴 하다. 남쪽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결혼하여 자식 2명을 낳았는데, 그들을 두고 해방 정국 때 월북해 다시 가족을 일궜다. 남쪽에 두고 온 할아버지의 자식들은 이씨에게 큰아버지뻘이 된다. 이씨는 장차 그들을 찾아 한국에 갈 생각이 있다. 그런 날이 오면 휴전선에도 가보려 한다. 양강도 고향 친구 6명이 북한 인민군에 들어갔다. “6명 가운데 2명은 굶어 죽고 1명은 탈영해서 소식을 몰라요.” 휴전선에 가면 고향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휴전선에 가서 물어보고 싶어요. 왜 이렇게 남북을 막고 있냐고.”
그것은 아직 먼 미래의 꿈이다. 당장은 뉴욕주 로체스터부터 떠나려 한다.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다른 탈북자 몇몇이 살고 있다. 그곳으로 옮겨 자동차 정비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어 대학에 갈 생각이다.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는 동생은 로체스터에 남는다고 했다. 동생은 미군에 입대하여 복무한 뒤, 대학에 가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하나뿐인 혈육과 서로 헤어져도 어쩔 수 없다. “여기에 더 있을 순 없어요. 다 잊고, 새로 시작할 거니까.” 북한을 떠나고 중국을 떠나고 라오스를 떠났던 이씨는 다시 로체스터를 떠난다.

< 뉴욕·로체스터= 송경화 기자 >


대구 육상대회 선수촌

● Hot 뉴스 2011. 8. 13. 09:35 Posted by Zig
8월27일부터 9월4일까지 9일간 대구스타디움에서  전세계 육상 스타들이 총 집결한 가운데 열릴 제13회 대구 세계육상대회 선수촌이 지난 5일 공개됐다.

대회 사상 처음 지어진 선수촌은 대구시 동구 율하동 금호강변에 9개동 528가구로 이뤄졌으며, 투척과 트랙, 마라톤 연습장을 갖췄다. 이번 대구 대회는 국제육상연맹(IAAF) 가맹 212개국 중 207개 나라, 2천5백여명이 이미 참가신청(15일까지 접수)을 해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천재 아닌 ‘인재’
태풍대책 발표 이틀만에 광화문 등 도심 침수
수해방지 예산 5년만에 641억→66억으로 ‘싹둑’

서울지역에 시간당 100㎜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27일 근처 우면산의 토사가 밀려든 서울 서초구 방배동 삼성래미안 방배아트힐에서 소방대원과 주민들이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


»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주택가에서 빗물에 떠밀린 승용차가 축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이틀 동안 내린 비에 2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과 강남 일대 등 도심 핵심부가 물에 잠기고, 서초구 우면산에서 대규모 산사태까지 발생하자 서울시의 치수관리 능력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특히 지난해 추석 연휴 때 폭우로 침수됐던 광화문 광장이 이번에 또다시 물바다로 변하자, 서울시가 제대로 대비를 하지 않아 발생한 ‘인재’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 지난해 추석 연휴 수해 직후 전문가들이 서울시내 하수관의 구조적 문제와 빗물저류조 등의 물관리 시설 부족을 지적했지만, 서울시는 이러한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시 관계자는 27일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하수관 시설 확충 등을 위해 올해 285억원의 예산을 편성했고 하수도 설비에 대해서는 용역업체 선정 작업 단계”라며 “강서·양천·광진구와 강남역 일대 등 침수 지역에 빗물을 모아두는 빗물저류조를 5개 신설하고 빗물펌프장을 12개 증설하겠다는 계획 역시 추진중”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수해 이후 올해 장마철이 지나도록 침수 피해에 대한 실질적인 대비가 이뤄지지 않은 셈이다.

더욱이 서울시가 지난 25일 지하철역 침수 등을 막기 위한 ‘슈퍼태풍 대비 종합교통대책’을 발표한 지 이틀 만에 지하철 1호선 오류역과 도심 일대가 물에 잠기자, 서울시가 내놓은 수해 대책의 실효성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염형철 서울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 “지난해 수해가 난 뒤 전문가들이 모여 서울시에 원인 분석과 대책 마련을 위한 공동조사, 통합적 수방대책 마련 등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서울시가 ‘2010년 풍수해대책 종합 결과보고’를 통해 ‘최악의 상황에서도 피해 내용이 경미했다’고 주장하는 등 수해 원인을 폭우 탓으로만 돌리고 주먹구구식 대책만 내놓은 결과 똑같은 피해가 반복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대한하천학회 등이 주최한 ‘서울 한가위 홍수 진단과 지속가능한 복구방향’ 토론회에서도 전문가들은 “서울시가 도시의 겉모습만 신경쓰는 정책 위주로 가다 보니 아주 기본적인 수해 방지 대책은 실종됐고 예산도 줄어들고 있다”고 성토했다. 실제 2005년 641억원이었던 서울시 수해방지 예산은 지난해 66억원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이마저도 대부분 서초동 하수관 신설 등 대규모 공사에 쓰여 체계적인 수방대책을 위한 예산은 사실상 전무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서울시가 그동안 한강 공원 조성 사업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것과 대조적이다.

특히 서울시는 일상적인 하수관 관리를 위한 예산마저 충분히 책정하지 않아, 일선 구청에서는 수해 발생 때 응급복구 등을 위해 적립하도록 한 재난관리기금까지 끌어다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내 지역이 수해를 입은 한 구청 관계자는 “지난해 대대적인 조사를 통해 하수관 내의 병목 구간과 물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구간을 발견했지만 아직까지 예산 등의 문제로 보수를 하지 못했다”며 “장마철이 아니어도 집중호우가 내리는 경우가 많아 하수관 안 퇴적물을 전보다 자주 치워줘야 하는데 이 역시 예산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는 “하수관 보수 등 일부 공사가 일정상 늦어지고 있긴 하지만 배수관 내 퇴적물 준설은 90% 이상 완료한 상태고, 여러 대책 마련에도 불구하고 100년 만의 최대 폭우가 쏟아져 침수 피해를 막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주민 6명 사망


26일 밤부터 쏟아진 폭우가 27일 서울 서초구의 우면산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산에서 밀려 내려온 막대한 양의 ‘토사 쓰나미’가 마을 곳곳을 집어삼켰고, 주차돼 있던 차량들은 흙탕물에 쓸려 골목 여기저기에 처박혔다. 우면산 산사태로 서초구 방배2동 남태령 전원마을은 마치 폭격을 당한 듯 보였다. 전원마을은 이번 산사태로 20여가구가 매몰돼 주민 6명이 사망하고 1명이 실종됐다. 희생자 중엔 일가족 4명과 18개월 된 아기도 있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남태령 전원마을은 서울 사당역 네거리에서 과천 방향 왼편으로 우면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은 단독주택촌이다.

산사태의 조짐은 이날 아침 6시께부터 감지됐다. 남태령 전원마을의 맨 위쪽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허경열(56)씨는 이날 산사태로 집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허씨는 26일 밤부터 내린 폭우가 심상치 않아 기상특보를 지켜보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고 했다. 허씨는 아침 6시께 날이 밝기 무섭게 산 쪽으로 갔다가 밭에서 토사가 흘러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고 두 시간 뒤 엄청난 양의 토사가 마을을 덮쳤다. 김종국(62)씨는 “오전 8시20분께 어른 허벅지 높이의 토사가 밀려 내려왔다”며 “불과 몇 분 사이에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고 말했다.

» 우면산 산사태로 주민 5명이 숨진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 27일 오전 차들이 산에서 흘러 내려온 토사물 등과 뒤엉켜 있다.
마을 중간쯤에 살던 이응규씨는 담을 뚫고 들어온 토사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마을 주민 전호갑(57)씨는 토사가 밀려 내려온 뒤 30m쯤 떨어진 길 건너편 수도방위사령부까지 맨발로 뛰어가 신고했다. 전씨는 “이제 갓 18개월 된 아기도 침대 밑에 있다가 밀어닥친 토사에 깔려 숨졌다”며 안타까워했다.

마을 위쪽 비닐하우스에서 살던 이순애 할머니는 토사에 휩쓸려 끝내 실종됐다. 남편 우씨도 이 할머니와 함께 마을 아래 300여m를 떠내려갔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이 할머니의 조카 김아무개씨는 “오전 11시께 연락을 받고 왔는데, 이모님이 실종됐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을 주민 이광수(41)씨는 “지난해 구청에 배수관을 넓혀 달라고 요청했는데 ‘이상 없다’고 했었다. 배수관이 작아 결국 참사를 빚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경찰·군·소방 당국은 밤늦도록 실종자 수색과 매몰자 구조 작업을 계속했다. 오후 늦게 전기가 다시 들어왔지만, 물은 나오지 않았다. 오후 6시께부터 생수를 공급받기 위해 마을회관 앞에 길게 늘어선 주민들의 얼굴에 깊은 시름이 드리웠다. 마을 골목마다에 어지럽게 던져진 가재도구들 위로 다시 비가 내렸다. < 한겨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