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지법에서 근무하던 현직 부장판사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위반 혐의로 검찰 송치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 부장판사는 법원장 후보에 올랐다가 스스로 사퇴한 인물이다.
광주경찰청은 21일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가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로 ㄱ(57) 부장판사를 수사해 불구속기소 의견을 달아 지난달 20일 검찰로 사건을 송치했다”고 밝혔다. ㄱ판사는 업무상 횡령 혐의로 고소된 지인에게 법률상담을 해준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1년여 동안 수사를 해왔다. ㄱ판사는 지난해 경찰 조사에서 금품수수 사실은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ㄱ판사는 사건 당시 광주지법에 근무했으나 이달 법원 정기인사에서 타 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경찰청 관계자는 “현직 판사를 청탁금지법 위반으로 송치했다. 피의사실공표 우려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려주기 어렵다”고 밝혔다. ㄱ판사는 평소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근검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지역 법조계에서는 지난달 일어난 ㄱ판사의 법원장 후보 사퇴건과 이번 사건이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ㄱ판사는 광주지법 소속 판사들이 추천한 광주지방법원장 후보 가운데 한명이었지만 지난달 스스로 후보에서 물러났다. 이 자리에는 고영구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임명됐다. 대법원은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도입한 7개 법원 중 광주지법만 일선 판사들이 추천한 후보 대신 다른 인물을 법원장으로 발령했다. 이 과정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이 대법원 고위관계자에게 지시해 ㄱ판사를 법원장 후보에서 물러나게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 대법원장이 도입한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스스로 무력화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ㄱ판사가 금품 수수 혐의로 검찰에 송치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대법원이 결격 사유가 생긴 그를 법원장 후보에서 제외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수사기관은 법관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면 이를 소속 법원에 통보한다. 김용희 기자
지만원씨가 5·18 당시 사진에 찍힌 광주시민을 북한 특수군으로 지목한 사진 자료. 5·18기념재단 제공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조사위)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 광주침투설’을 허위로 판단했다. ‘5·18 역사왜곡 재판’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5·18기념재단은 21일 “5·18조사위가 지난달 31일 펴낸 ‘2020년 하반기 조사활동보고서’를 지만원씨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 재판에 증거로 제출했다”고 말했다. 5·18조사위는 이 보고서에서 일부 탈북자들이 제기한 5·18 당시 북한 특수군의 광주 침투설에 대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탈북자 이주성씨는 2017년 펴낸 체험담 <보랏빛 호수>에서 북한 특수군 50명이 배를 타고 1980년 5월22일 새벽 2시께 전남 영광 해안에 도착했다고 썼다. 이 책에는 북한군이 5시간 동안 도보로 영광에서 광주 무등산에 있는 사찰 증심사로 이동해 식사와 휴식을 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5·18조사위는 영광과 증심사의 직선거리가 60㎞이기 때문에 걸어서 5시간 안에 이동하기에는 불가능하며, 건물들이 밀집한 증심사 안에서 들키지 않고 50명이 머무르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했다. 5·18조사위는 일부 탈북자들이 광주에 투입됐던 북한군 묘역이라고 주장한 북한 청진 열사릉은 한국전쟁 전사자의 묘지라고 설명했다. 북한에서 철도운송 무사고운동 명칭으로 사용한 ‘5·18 무사고 정시 견인초과 운동’의 5·18은 광주와 무관한 1979년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18차 전원회의를 의미한다고 확인했다.
5·18재단은 이번 보고서가 향후 5·18 왜곡 재판에서 자신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차종수 5·18기념재단 고백과 증언센터 팀장은 “이번 보고서는 향후 지만원의 5·18 왜곡 논리를 깨뜨리는 데 한몫할 것”이라고 말했다.
극우인사인 지씨는 2015년 자신이 운영하는 누리집에서 5·18 당시 사진에 찍힌 광주시민을 북한 특수군이라고 지목해 피해자 15명으로부터 2015~2018년 명예훼손 혐의로 네차례 고소당했다. 지씨는 전남도청에서 시민군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남선씨를 전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황장엽이라며 71번 광수(광주에 투입된 북한 특수군이라는 의미)로 지목했다. 또 아들의 관 앞에서 울고 있는 김진순씨는 162번 광수 성혜량(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처형), 유가족을 위로하는 고 백용수 신부는 176번 광수 김진범(북한 조선대외문화연락위원회 부위원장)이라고 했다.
지씨는 지난해 2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지만 고령이라는 이유로 법정구속은 되지 않았다. 지씨는 항소 뒤 지난해 5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집회를 열어 “5·18은 북한이 일으킨 폭동”이라며 5·18 왜곡을 이어가고 있다. 지씨의 항소심 다음 재판은 다음달 2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다.
지씨에게 388번 광수 문응조(북한 식량공급기관인 수매양정성 장관)로 지목당한 박철씨는 “5·18 때 어린 나이였지만 나름 민주화에 일조했다고 생각한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해서 우리를 북한군으로 모는 일은 없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보안법 있는 한 ‘남북 합의’ 무용지물, 분단장벽 두고 떠난 마음 오죽하실까 신냉전 기류 ‘쿼드동맹’ 끌려들 우려 국익 지킬 ‘민족 자존감’ 본보기 삼아야
2019년 2월 ‘국정원 조사 동의’ 설득을 위해 네번째 방문했던 일본 요코하마 정경모 선생 자택에서. 왼쪽부터 이명준 전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정 선생과 부인 지요코 여사, 이부영 이사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제공
지난 2월 16일 일본 요코하마의 자택에서 별세하신 정경모 선생님 이름 앞에는 일제 식민지시대의 독립지사를 떠올리는 ‘망명객’이라는 호칭이 따라다녔습니다. 반세기를 넘도록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사셔야 했으니 기막힌 일이었습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대에는 일본에서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을 벌인 이유로 귀국하지 못하셨다고 해도, 민주화로 들어선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나아가 촛불혁명으로 이룬 문재인 정부에서도 국가보안법의 족쇄를 풀어주지 못해 끝내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민주정부라해도, 정보기관이나 공안 검찰이 보안법으로 ‘빨갱이 딱지’를 붙여 잡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나라입니다. 보안법 앞에서는 대통령도 별 볼 일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그토록 온몸으로 넘어서고, 깨뜨리고자 했던 분단 장벽이 켜켜이 쌓인 조국을 이렇게 남겨 두고 떠나시는 정 선생님의 마음이 오죽하셨겠습니까.
지난 수년동안 문익환 목사님 자제들과 몇몇 후학들이 정 선생님 귀국을 위해 정부 당국과 타협안을 마련해 보려고 애썼지만, “내가 뭘 잘못했다는 말이냐. 갈라진 민족, 나라를 할 걸음이라도 가까이 만들려고 노력한 게 뭐가 죄가 된단 말이냐. 나를 조사하겠다고? 필요 없다. 그럴 거라면 안 간다. 전향? 자술서? 나에게 모욕을 주자는 것이냐? 안 가고 여기서 죽고 묻히겠다.” 선생님은 단호하셨습니다. 결국 선생님은 떠나셨습니다. 못난 정부와 후학들에게 ‘마지막 망명객’의 절절한 묵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동안 해마다 한번씩은 자택을 찾아뵙고 술 한잔 올리던 일도 이젠 영원한 추억이 됐습니다.
정 선생님은 유원호 선생님과 함께 문익환 목사님을 모시고 1989년 3월 25일 평양으로 떠나셨습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쪽 재야민주화운동의 통일방안을 전하고 논의하고 싶다는 문 목사님의 간절한 소망을 실현시키자는 뜻이었지요. 그해 연초에 문 목사님을 만나 먼저 대강의 계획을 전해 들었던 저는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 대한 탄압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남북 정부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문 목사님이 전민련 상임고문 자격으로 남쪽 민간인을 대표한 것이니 한국전쟁 이후 처음 이루어지는 역사적 북행이었습니다. 노태우 정권도 국가연합을 인정하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는 등 남북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에, 한편으로 유연한 반응을 기대했지만 역시 그들의 본질은 옛날 그대로였습니다.
그래도 정 선생님 일행이 김 주석에 이어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을 만나 합의하신 ‘4·2 공동성명’은 “1.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해 통일문제를 해결 2. 한반도 분열의 지속 반대 3. 정치·군사 회담 추진과 이산가족문제 등 다방면의 교류와 접촉 실현 4. 공존 원칙에 입각한 연방제 방식의 통일 지지에 합의한다”는 큰 성과를 냈습니다. 문 목사님과 유 선생님은 귀국하시자마자 구속됐고 전민련에서는 저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옥고를 치러야했습니다. 무엇보다 정 선생님은 그 뒤 남북회담이 셀 수 없이 열렸지만 끝내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남북관계의 진전과 민간 교류의 확대는 국가보안법이 온존하는한 불가능해 보입니다. 어느 정부가 들어선다해도 우리 안에 뿌리 깊은 극우세력과 외세의 충동질이 있으면, 남북 합의를 뒤집어버리는 만행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김구·여운형·장준하 선생이 하늘에서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시면서 나누는 가상의 대담을 엮은 정 선생님의 책 <찢겨진 산하>를 읽고 우리는 큰 감명을 받았었습니다.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젊은이들에게 해방 전후와 군사독재 치하에서 진정한 지도자의 초상을 바로 세우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문 목사님과 정 선생님 자신이 그 모범을 또 세워주셨습니다.
정 선생님께서 한국전쟁 때 ‘판문점 정전회담’의 미군 쪽 통역관으로 문익환·박형규 목사님과 함께 참관했던 경험이 평생토록 분단극복·민주화·남북화해-평화통일 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후학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또한 일본에서 사는 긴 세월 동안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민족적 양심을 가진 이는 어디에 서 있든지 쉬는 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난 2월16일 별세한 고 정경모 선생의 빈소. 일본의 장례 풍습에 따라 화장을 한 뒤 평생 거주했던 요코하마 히요시의 자택에 모셨다. 유족 제공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기류가 거세지는 지금, 미국의 군사주의와 북한의 핵 보유 사태는 한반도에 다시 핵전쟁 위기를 몰고 올 기세입니다. 미국이 일본·호주와 더불어 주도하고 있는 ‘인도-태평양 4자 동맹’(쿼드)의 주 무대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입니다. 한국이 한미동맹이라는 ‘인계철선’ 때문에 이른바 쿼드동맹에 끌려 들어가지 않을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미동맹도 줄여가야 하는 처지에, 자유무역과 상호의존이 주류를 이루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이념 대결과 적대적 배제를 앞세우는 강대국 지배 논리에 다시 포로가 된다면 지난 세기처럼 그들의 제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한국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와는 달리, 그리고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이후와는 달리, 민주화와 산업화 그리고 문화예술과 스포츠의 위상으로 국제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인류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대재난에도 한국은 케이(K)방역을 통해 모범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국제적 본보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미·일·중 등 강대국들에 대해서도 중견국으로서 민족적 자존감을 가지고 국가 이익에 근거해서 발언하고 외교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입니다.
정 선생님께서 어떻게든 고국에 돌아와 ‘오래된·새로운’ 지혜를 들려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던 와중에 홀연 떠나시니 후학들은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구·여운형·장준하·문익환·유원호 선생님과 하늘에서 함께 모여 ‘한반도 통일’을 환영하는 감격의 잔치를 벌이시는 날이 어서빨리 오도록 남은 후학들이 노력하겠습니다.
정경모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
“신념 지키며 ‘조국과 민족’ 뜨겁게 사랑하며 멋지게 사셨습니다”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님을 추모하며]
1989년 4월9일 문익환 목사는 방북 일정을 마치고 도쿄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가와사키에 있는 재일동포 이인하 목사의 사쿠라모토 교회에서 예배를 올렸다. 왼쪽부터 유원호씨, 정경모 선생과 맏아들 강헌씨, 문 목사와 정 선생의 손자, 정 선생의 맏며느리와 손녀. 유족 제공
선친 문익환 목사와 ‘운명적인 역사의 동지’
“통역 · 주례 · 방북… 하나님 예비한 섭리”
문 목사·유원호 선생과 남북 활보 하시길
저의 선친 문익환 목사님과 고 정경모 선생님은, 널리 알려진 대로 1989년 이른바 ‘방북 사건’의 주역이었습니다. 더불어 ‘운명적인 역사의 동지’였습니다.
두 분이 처음 만난 것은 1950년 한국전쟁 와중이었습니다. 미국 유학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조국의 전쟁 소식에 유엔군에 지원하여 일본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판문점을 오가며 정전회담 통역을 하고, 문서들을 번역했으며 미군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쳤습니다. 해방 직전 게이오 의대 유학 시절 인연을 맺은 하숙집의 딸이 5년이 넘도록, 기약없이 자신을 기다려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감동했지만, 일본인이란 이유로 결혼을 주저하는 정 선생님에게 문 목사는 용기를 주고 직접 결혼식 주례를 해주며 새 가정을 축복해주셨다지요. 정 선생님이 한국에 머물던 1960년대 문 목사님이 그 동생분의 결혼식도 주례를 섰으니 ‘각별한 인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70년 정 선생님이 ‘정치적 망명’을 한 이후, 문 목사님은 한국에서 신학자이자 재야의 민주인사로 살아갈 동안 정 선생님은 일본에서 문필가로 자유분방하고 날카로운 필체로 한국의 문제를 파고들었으며 <씨알의 힘> 간행물을 출간했습니다.
긴 세월 각자의 삶을 살았음에도, 두 분이 서로를 믿고 역사적인 과업을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활동과 글을 통해서 지속적인 소통을 해온 덕분이었습니다. 정 선생님은 문 목사의 ‘옥중서신집’을 번역해 일본에서 출판하고 제자들에게 한글 교재로 소개했습니다. 문 목사는 정 선생님의 <찢겨진 산하>를 읽으며 ‘민족주의자 정경모’의 참모습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문 목사님은 1988년부터 ‘방북’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정 선생님으로부터 방북 의사를 타진하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정 선생님은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여운형 선생 추모 모임’을 도쿄에서 해마다 열어왔고, 이에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낸 몽양의 둘째딸 여연구 선생이 ‘감사 편지’를 보내면서 서로 교분을 나누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 선생님은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비롯한 방북 과정의 모든 준비를 진행했고, 이듬해 3월말 평양 도착 성명, ‘4·2 공동선언’의 초안도 작성했습니다.
2014년 11월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문익환 목사 서거 20주기와 4·2남북공동성명 25돌 기념행사’에 참석한 뒤 요코하마 정경모 선생님 자택을 방문했을 때. 왼쪽부터 부인 지요코 여사와 정 선생, 문영금 관장과 동생 문성근 배우. 통일뉴스 제공
훗날 정 선생님은 문 목사님을 두고 ‘한국전쟁 중에 만나 민족의 아픔을 함께하고 가정을 꾸미게 해주었으며, 김 주석을 만나 민족통일을 논의하게 된 것은 모두 하느님이 예비하신 섭리’라고 감회를 나눈곤 했습니다.
정 선생님은 그 흔한 ‘반성문’ 한 장 때문에 그렇게도 그리던 고국 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구름 위에 계신 여운형·김구·장준하 선생님은 만나셨겠지요? 평양에서 나란히 ‘선구자’를 불렀던 문 목사님과, 재작년 먼저 세상을 뜨신 유원호 선생님과도 만나 옛 생각 추억하며 평양거리, 서울거리를 활보하고 계시겠지요?
정 선생님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며 뜨겁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며 멋있게 살다 가셨습니다. 선생님은 남기신 글들을 통해 저희 안에 살아 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모님과 자손들께 위로를 드립니다. 하늘에서 편히 쉬십시오.
우버 기사들이 19일 영국 런던 대법원 밖에서 우버 기사가 노동자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는 소식을 태블릿을 통해 접하고 기뻐하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우버 운전기사는 “노동자”라는 영국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거대 디지털 플랫폼에서 자영업자 취급을 받으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전환점이 될지 주목된다.
영국 대법원은 차량 공유 서비스 사이트인 우버의 운전기사들은 자영업자가 아니라 노동자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만장일치로 지난 19일 판결했다고 영국 언론들이 20일 보도했다. 이 판결로 영국 내의 우버 기사들은 노동법에 따라 최저임금을 보장받고 휴일수당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영국 대법원은 우버가 자신의 플랫폼에서 기사들이 일할 때 임금과 계약조건을 정할 뿐만 아니라, 노동 규율도 감시한다며 우버 기사들이 고용된 노동자라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우버가 기사들의 서비스를 감시할 뿐만 아니라 업무 계약의 연장과 종결권도 가진 점을 지적했다. 이런 요인을 고려할 때 우버 기사가 자신의 수입을 증가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것뿐이라며, 기사들의 지위가 우버에 종속돼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대법원은 우버 기사들이 우버 앱에 로그인할 때부터 로그 오프 할 때까지 “노동자”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우버는 그동안 우버 기사들이 승객을 태우고 운전한 시간만 근무한 시간으로 보고, 고객을 기다리는 시간은 근무한 시간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영국 우버의 기사였던 제임스 패러 등 2명은 지난 2016년부터 자신들이 우버를 위해 일한 노동자였음을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노동법원에 제소해, 이날 대법원까지 가는 법적 투쟁 끝에 승리했다. 이들은 노동법원의 1심과 항소심에서 승소했으나, 우버는 일반 고등법원에 이어 대법원까지 항소와 상고를 했으나 모두 패소했다. 우버는 이들이 자영업자여서 최저임금 지급 대상이 아니며, 휴일수당을 지급할 의무도 없다고 주장해왔다.
영국 대법원 판결은 우버 기사에게만 적용되지만,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세계 다른 디지털 플랫폼 업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버 등 거대 디지털 플랫폼 업체를 통해 일 하는 이들이 노동자로 대우받게 된다면, 디지털 경제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해 3월 프랑스 대법원에 해당하는 파기법원도 우버 기사를 자영업자가 아니라 노동자라고 판결한 바 있다.
이날 판결로 우버 주가는 미국 증시에 크게 하락했다. 우버는 판결 뒤 “이번 판결이 처음 제소당했을 당시인 2016년 우버 앱을 사용한 소수의 기사들에게 적용됐던 것”이라며, 사업모델을 시대에 맞게 바꾸고 있다고 해명했다. 정의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