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9일부터 10명 이내 제한 조치따라

교회들 4월25일 주일 예배부터 비대면

 

 

온타리오 주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강화조치에 따라 교회들이 다시 온라인 예배로 전환한다.

지난 16일 온타리오 더그 포드 수상은 최근 감염자가 급증하고 있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봉쇄조치를 더욱 강화한다고 발표, 현재 5월 초까지 시행 중인 ‘Stay at Home’을 2주간 연장하는 것 등과 함께 19일부터 교회예배와 결혼식, 장례식 등의 참석인원을 10명 이내로 다시 제한하도록 행정 명령 했다.

 

교회들은 집회 참석인원 10명 이내로 제한할 경우 담임목사와 교역자, 중직자 등에 온라인방송 제작 등 최소 인원 만으로도 10명을 넘길 수 있기 때문에 일반 교인은 사실상 예배참석이 어렵다.

이같은 조치에 따라 지난 3월 중순이후 수용인원의 15%까지 허용되면서 일부 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면예배를 드려온 교회들은 다시 전면 온라인 예배로 전환하게 됐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지난 18일 주일 예배시간에 다음 주일 25일부터 다음 달 20일까지 다시 온라인 예배로 드리게 됐다고 광고하면서,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와 새벽예배 및 성경공부 등 다른 온라인 프로그램에도 적극 참여해 팬데믹의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낼 용기와 은혜를 나누자고 당부했다.

[1500 칼럼] 가계도(家系圖 / Jo family tree)

● 칼럼 2021. 4. 25. 03:10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가계도(家系圖 / Jo family tree)

임순숙 수필가

 

겨우내 적요했던 동네가 얼마 전부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풋풋하게 번져가는 연둣빛 울타리 넘어 가가호호 집 단장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웃사람들의 움직임이 생동감을 준다. 앞집은 칙칙함에서 벗어나려는 듯 화사한 빛깔로 페인팅을 시작했고, 정원손질을 하느라 온 식구가 동원된 건넛집은 잔치분위기를 방불케 한다.  한껏 고조된 새봄맞이 분위기를 응원이라도 하듯이 근거리에서 울러 퍼지는 망치소리는 쉼 없이 똑딱거린다. 해마다 이맘 때면 늘 보아온 풍경이련만 모진 세월을 겪다 보니 자연스런 일상이 생경하기까지 하다.

햇볕 좋은 날을 골라 우리도 집 단장을 시작했다. 현관으로 향하는 진입로는 오래된 벽돌을 걷어내고 멋스런 디딤돌로 교체하기로 했고, 자그마한 뒤뜰은 잔디밭을 줄여서 꽃밭을 대폭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 타 인력 동원이 힘든 시기여서 식구끼리 힘을 합치기로 했지만 생각보다 밑 작업이 만만치 않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더구나 집 고치는 일은 하나 끝내면 또 다른 곳이 민 낯을 드러내기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며칠간 바삐 움직여야 할 것 같다.

추위와 불청객에 갇혀 지낸 세월에 비하면 이 얼마나 행복한 노동인가. 집안 구석구석 잔 일거리들을 들춰내며 하루 해를 보냈다. 내일은 손녀들도 동참하기로 했으니 한 달만의 재회가 더 기대된다.

                                         

단편적이나마 잠깐 부여된 일상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신바람 날리며 일하는 내내 불안한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마도 최근에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수치가 연일 기록을 경신한다는 어두운 소식 탓이리라. 요염한 바이러스는 3차, 4차 전이에 전이를 거듭하며 인간을 위협하는데 우리들의 경각심은 날로 희박해져 가니 겉잡을 수 없는 확진자 증가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저녁엔 예상보다 더 강력한 봉쇄조치가 내려졌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하지만 정부의 강력한 봉쇄조치에 수긍은 하면서도 내심 집 앞뒤에 벌여놓은 미완의 공사 걱정이며 내일 손녀들과의 만남이 무산된 점이 못내 아쉬워 벽에 걸린 가계도(家系圖)로 눈길을 옮긴다.

 

우리집 ‘가계도’란, 얼마 전 할아버지 생신 선물로 손녀들이 그려온 조 패밀리 트리(Jo family tree)이다. 가족 중 가장 어린 여덟, 열살 인 두 자매가 합동으로 그린 그림을 펼쳐보며 우리는 와! 하는 함성과 함께 감동과 회한으로 숙연해졌다. 이토록 암울한 시기에 어른인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어야 할 환희와 희망의 메시지를 우리 대신 아이들이 나무 가지마다 주렁주렁 메달아 선사한 것이다. 아이디어 또한 기발했다. 수령이 수 백년도 더 됨직한 우람한 나무둥치 맨 윗자락에 할아버지 부부의 얼굴을 그린다음 상향으로 다음 그 다음 세대를 배치하여 자손들의 풍성함을 화려하게 표현했다. 잠깐 들여다 보기만 해도 미소를 머금게 하는 가계도는, 가장 윗세대인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또한 의미심장하다.

꽃에 비유하면 꽃받침 격인 우리가 건강하게 잘 받쳐주어야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어 자손을 번성케 하는 본연의 역할을 해낼 수 있단다. 미래를 예측조차 하기 어려운 지금, 우리의 안위를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대 명제를 손녀들로부터 부여받은 셈이다.    

 

임순숙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에세이스트'로 등단



[목회칼럼] ‘봄의 소리를 들어봅시다’

● 칼럼 2021. 4. 25. 03:04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우리교회 기쁨과 소망]   ‘봄의 소리를 들어봅시다’

이진우 목사 / 낙원장로교회 담임

 

며칠전 아내와 함께 집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트레일(산책로)을 걸으며 풍경을 보니, 겨우내 갈색이었던 나무와 풀들이 어느새 연초록색으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나무에는  잎들이 움터 나왔고, 개나리와 벚나무는 벌써 꽃망울을 활짝 터트렸습니다. 길가에는 이름모를 들꽃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습니다. 봄이 온 것입니다.

 

가곡 ‘동무생각’(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은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위에 백합 필 적에”라는 가사로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습니다. 땅에서 솟아나는 새싹들, 나무에 물이 오르며 연초록빛으로 돋아나는 잎들, 노랑, 분홍, 보라 등 총천연색으로 피어나는 꽃들,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이 모든 자연의 변화를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진다’는 은유적인 가사로 표현했습니다.

그날, 육신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마음의 귀를 감동으로 채우는 ‘봄의 교향악’을 듣고 보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왔습니다.

 

봄은 이렇게 소리없이 우리 삶을 아름답게 채우며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의 주위에는 우리 귀를 잡아끌려고 들려오는, 소음에 가까운 소리들이 참 많습니다.이 소리들은 귀청이 울릴 정도로 우렁찹니다. 때로는 욕설과 다름없는 언어로 상대를 도발하고 자극하며, 때로는 확신에 찬 감언이설로 세력을 모으며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이러한 소리를 발산하는 ‘빅마우스(허풍쟁이)’, ‘프로보커터(선동가)’들이 주목받는 것이 최근의 세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각 분야와 각 진영마다 자리잡고서  “내 말만이 진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외치는 목소리의 크기에 달려있지 않음을 성경은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헤롯왕(헤롯 안티파스)에게 심문당할때 침묵으로 메시야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사야 42:2-3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반면, 초대교회를 박해했던 헤롯왕(헤롯 아그립바)는 뛰어난 연설로 ‘신의 소리’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허망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COVID-19 팬데믹으로 모두 어려운 시기입니다.  팬데믹으로 인한 위기는 건강과 가정경제를 위협하고 공동체의 대면접촉을 막아 개인을 고립시키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주위를 둘러보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기울일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유튜브 등 각종 매체를 통해 들리고 보이는 자극적인 소음들에  이전보다 더 많이 귀와 눈을 열어놓고 있다면,  하나님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소리없이 찾아온 봄처럼 조용하게 다가오는 주님앞에 오감을 열고 겸손히 귀 기울이므로 더 깊고 넓은 신앙의 길로 나아가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이진우 낙원장로교회 담임목사

[한마당] 어느 판사의 친일 쿠데타’

● 칼럼 2021. 4. 25. 02:5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편집인 칼럼 [한마당]

 

 

 

따지고 보면 100년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를 집어삼킨 뒤 36년 동안 조선 사람들을 왜식으로 마음껏 요리하며 부려 먹었다. 그런데 해방된 나라에서도 그들에게 비위 맞추고 앞잡이가 되었던 모리배들이 변신하고 득세하여 70여년 간을 백성들 위에 군림하면서 ‘왜풍'으로 호의호식하고 있다.

 

오로지 권좌에 눈이 멀어 약삭빠른 배신자들을 끌어안아 숨통을 열어준 게 이승만이다. 역사적 단죄의 기회였던 ‘반민특위’를 일제의 부역자들 손으로 박살낸 것은 치명적인 민족범죄에 다름아니다. 단 한마디 회개나 사죄도 없는 교활한 자들에게 칼과 총을 쥐어주어 날뛰게 만들었고, 오히려 고난을 견딘 선량한 백성들에게 이념과 사상의 용수를 씌워 멸문지화를 불렀으니, 역사를 되돌리고 천심(天心)을 짓밟은 죄과를 어찌 지우겠는가.

이승만이 일제 잔재의 불씨를 되살린 바탕 위에서 4.19 혁명의 분노도 잠시, 아예 일제 빼닮은 정치로 친일의 뿌리를 넓고 깊게 만들어준 인물이 박정희다. 그는 일본 천황에게 피로 충성을 맹세한 황군의 혈맥과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식민시절 득세했던 자들과 기업, 그 후예를 중용하여 ‘만년 기득권층’의 신분세탁과 권세영화를 궤도에 올려주었다.

일제 잔재의 생명력을 길러주는 데 혁혁하게 기여하고 있는 친일 족벌 언론들 또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저들의 교묘하고 음습한 왜색 논조가 친일 후예들에게 든든한 우군이 되고, 독버섯을 번지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 ‘카르텔’까지 이루게 된 것은 부인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독립투사들은 멸시당하고 설자리가 없어 북으로 피신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들을 악랄하게 색출하고 고문했던 고등계 형사, 독립군을 토벌했던 일제군관들이 떵떵거리며 살다가 지금도 국립묘지에 버젓이 누워 현충의 선열들로 참배를 받고 있다. 그들의 묏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친일부역자 파묘법 제정에 기를 쓰고 반대하는 인물과 카르텔이야말로 본색이 친일이요 왜색종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 있겠는가.

그런 카르텔의 영향력을 믿는 자들과 친일의 피를 속이지 못하는 이들, 또한 일본우익의 ‘장학금’으로 학문적 ‘계급장’을 단 자들은 철면피한 반민족적 언동을 멈추지 않는다. 일본극우들이 외쳐대는 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모독하고, 일본정부의 억지 변명을 대변하고 옹호하는데 기를 쓴다.

 

그들의 소리가 마침내 사법의 영역에서도 대놓고 터져 나왔다. 역사적인 강제징용 배상요구 소송을 각하 판결하면서 하는 소리 왈, “일본 포함 어느 나라도 식민지배 불법성을 인정한 나라가 없다”느니, “일본의 청구권자금이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고 일갈했고, “(배상을 위해 강제집행 했다가) 일본과의 관계나 미합중국과의 관계가 훼손될 수 있고 문명국 위신이 추락할 것”이라고 오지랖 넓게 걱정하는 우국충정을 설파했다.

마치 일본정부나 일본법원이 했을 법한 말을 대한민국의 서울 중앙지법 부장판사가 대법원 판례까지 어겨가며 판결문이라고 외쳐댄 희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일말의 양심이나 염려는 있었는지, ‘법정의 평온과 안정’을 이유로 선고일을 기습 변경해 소송당사자들도 참석하지 못했다니, ‘극우 판사의 친일쿠데타’라고나 할까.

 

친일세력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활개치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재판장을 일본으로 보내라”는 분노가 들끓고, “탄핵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폭발하는 것을 보면 결코 저들이 한국사회의 미래는 아닐 것이요, 시대와 세대가 흐르면 한민족의 정체성에 짓눌려 쇠락하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대다수 국민이 독도에 애착하고, 일제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며,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응원하면서 강제징용 배상을 외면하는 일본정부와 기업에 분노하는 민심을 보면 그렇다. 더구나 사죄는 커녕 적반하장의 치졸함에 정치 후진인 일본에 비해, 민주정치 선진에 부쩍 커진 한국의 국력과 활력의 자부심으로 믿음은 더 커지게 된다.

 

우리 이제 저들을 가여워하자. 오염과 중독을 벗어나려면 몇 배의 노력과 희석이 필요하니까. 허물은 쌓기 쉬워도 회개하고 용서받아 떳떳해지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세상은 약삭빠르며 사악한 자들이 설치게 되어있지 않나. 그렇지만 교활한 자들은 강자 앞에선 맥을 못추는 법이니.

일제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교육과 노예근성을 떨치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은 걸릴 것이다…” 그래, 식민 노예근성의 마지막 발악들 해보라고 하자. 이제 70여년 흘렀으니 20여년 만 참고 견디면 친일 독버섯들은 햇볕아래 곰팡이처럼 자연 소멸되고야 말 것이다. 이 독한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제 종말을 향해 가고있지 않는가.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210610 >

[한마당 칼럼]  ‘한번 저지르면 그만’

 

"개혁은 ‘한번 저지르면 그만’인 범죄적 통념과 악행을 뿌리뽑는 일이다."

 

조선시대 ‘보쌈’이라는 일종의 납치풍습이 있었다. 약탈혼, 즉 강제결혼 방식의 하나였다. 흔히 장가 못간 노총각이 처녀를 보에 싸서 납치해 결혼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수절과부가 홀아비나 노총각을 보쌈해 과부처지를 면하곤 했다. 또 양반집에서 남편을 둘 이상 섬길 팔자라는 처녀 딸을 위해 총각을 은밀히 납치해다가 한번 동침시켜 ‘액땜’하고는 다른 남자에게 출가시키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의 보쌈 비슷한 ‘약탈혼’의 풍습은 다른 나라에도 많다. 정복자 칭기스칸도 어머니 호엘룬이 몽골판 보쌈을 당해 태어났다고 전한다. 지금도 이슬람 나라들과 아프리카 등에서 종종 그런 뉴스가 나온다.

 

‘보쌈’은 아무리 선의이든 절박한 사정이 있었든, 사람을 납치하는 것이므로 명백한 원시적 강력 범죄다. 그런데도 서슴없이 결행하고, 일부에서 ‘묵인’해 온 관행은, 어느 경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 번만 해치우면 그만’이라는 통념이 바탕에 깔려있다. 다시 말해 여자든 남자든 한 차례 범하면 어쩔 수 없이 자기 사람이 되고, 결국 인정받지 않느냐는, 강제적 체념과 이기적 범죄 합리화의 산물이다. 요즘 일부 젊은 층의 성범죄와 스토킹 등에서도 그런 의식의 흐름의 저류에 있다고 본다.

 

문제는 ‘한 번 해치우면 그만’이라는 인식과 행태가 비단 남녀 관계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게 옳든 그르든, 선이든 악이든 따지지 않고 무조건 저지르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마치 보쌈하듯 해치우고도 뭐가 어떠냐는 식의 범죄적 인식과 언행들, 하지만 사람들은 잠시 분노하다가도 은연 중 체념해버리는 ‘정의의 상실과 무감각화’ 현상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유린 한 뒤 궁궐터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동물원까지 만들어 버렸다. 정기어린 명산들의 정상에는 쇠말뚝을 박았다. “자, 이쯤 해놓으면 너희들이 대대손손 굴복하지 않고 어쩌겠느냐”는 악질 범죄자의 흑심이었다. 그들 노림수대로 체념할 뻔했지만, 총독부 건물을 과감히 헐고 경복궁 창경궁을 복원하여 민족 혼을 되살렸다. ‘한 번 저지르면 그만’인 통념에 철퇴를 가해 민족 정의를 바로 세운 사례다. 그런데 “한 번 저지르면~”의 범죄적 소산을 뿌리 뽑고 “~안된다!”는 정의를 되살린 일들이 얼마나 될까. 역사에서, 공동체에서, 개인의 일상과 인륜에서…

 

최근 ‘개혁’의 화두가 뜨겁다. 재벌개혁, 검찰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 등 여러 분야가 대상이다. 개혁은 불법 불합리와 부조리들이 켜켜이 쌓인 적폐를 혁파하고 쇄신한다는 의미가 있을 터이지만, 무엇보다 ‘저지르면 그만’인 범죄적 악행을 근절하고 징벌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돌아보면 ‘한번 저지르면 그만’인 속성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삶이 무너지고, 사회가 뒤틀리고, 민주주의와, 정의와 선이 어그러졌는가.

 

독재와 사욕의 정치인들이 죄없는 사람들을 짓밟고 패가망신 시킨 일들, 멀쩡한 기업을 공중분해 했고, 국토를 마구 파헤쳤으며, 역사를 거꾸로 돌렸던 일들까지. ‘나라를 통째로 보쌈한’ 범죄적 행태들. 그런데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발상이 검찰에서 나왔었다, “이미 저지른 걸 어쩌느냐”는 것이다.

검찰의 그런 망발은 그들의 통념이고 습성이었으니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한번 저지르면 그만’인 자의적 악행과 범죄들이 너무 많았다. 선량한 시민을 간첩으로 만들기도 했던…, 그들은 여전히 그 버릇을 팽개치지 못하고 혐의 조작과, 조직 이기의 선택적 수사에, ‘한 번 기소하면 무죄가 나와도 상관없는’ 기소 독점권을 휘둘러, 재판으로 3~4년을 고생하게 만든다. 검찰개혁은 그 못된 버릇을 고쳐주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 악습과 통념의 연장선에서 역시나 잠깐 감옥에 갔던 전두환과 그 일당은 지금껏 철면피한 언행을 일삼고 있다. 그런데 갓 재판이 끝난 이명박과 박근혜도 사면하자고 한다. 권력자가 ‘한번 저질렀으니 봐주자’는 개탄스런 통념의 무감각화다.

 

언론은 어떤가. 엄청난 비리처럼 떠들다가 사실이 아니면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그걸 막자는 것이다. 처음 떠든 것처럼 아님이 밝혀졌으면 그 또한 크게 떠들고, 가짜와 거짓으로 피해를 입혔으면 합당하게 보상하라는 경고다.

최근의 선거에서 일부 후보자는 수많은 비리와 의혹이 나왔고 고발도 됐다. 하지만 이를 검증해야 할 언론은 극히 편파적으로 선택적 보도를 했다. 의혹을 선전하고 고발도 했던 정치권은 선거 가 끝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다. 선거판의 언론 못지않게 정치인들의 ‘한번 저지르면 그만’, ‘당선되면 그만’인 습관적 고질병이다. 유권자들도 의례 그러려니 한다. ‘저지르면 그만’이 바로 악행이며 범죄라는 인식과 징벌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마 다음 선거에도 그런 양상일 테니, 어느 세월에 선거가 참 민주의 축제로 승화될 것인가.

그렇다, 개혁은 뭐니 뭐니 해도 ‘한번 저지르면 그만’인 구석구석의 통념과 악행을 뿌리뽑는 일이다.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21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