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 대통령이 해외를 방문하면 현지 한인 이민사회는 “어떻든 고국의 대통령이고, 귀한 손님인데…” 하며 반기는 게 그간의 통념이고 ‘관행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최근 국내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진 데서 보여주듯,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으로 임기 말 민심이 돌아선 것은 해외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명박 대통령을 맞는 해외 동포사회의 시선이 마냥 반기는 분위기만은 아님이 그걸 말해준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한 9일 현지 동포들의 엇갈린 표정이 이채롭다. 윗 사진은 베를린 도린트호텔에서 열린 이 대통령과의 동포간담회에서 파독 간호사 출신 합창단원들이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고 있는 모습이다. 반면 아래 사진은  베를린 거주 일부 동포들이 이날 오전 9시30분부터 3시간 가량 한-독 정상회담이 열린 독일 대통령궁과 시내 중심지에서 모국의 4대강 사업과 원전 무더기 신설을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행진하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이다. 이들은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은 녹색분칠(Green-Wash)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1500자 칼럼] 정오의 램프

● 칼럼 2011. 5. 13. 16:45 Posted by Zig
- The Lamp at Noon -

이 작품은 캐나다 소설(영어)사에서 초기의 작가인 Sinclair Ross가 쓴 단편소설이다. 그의 대표작인 ‘As For Me and My House’는 캐나다문학사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을 거론하는 이유는 캐나다의 이민초기, 서부 지방을 개척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불모의 땅을 어떻게 경작할 수 있는 땅으로 만드는지가 관심사였다. 이 소설의 지리적 배경인 사스카처완은 지금은 프레리 지방이라 불리는 세계 곡창지대이다. 개척의 역사는 한 마디로 인간의 의지와 자연과의 싸움이었다. 이 작품에서는 극심한 가뭄과 바람이 자연을 대표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안정이 된 온타리오 주에서 새로운 도전을 위해 사스카처완으로 이주해 온다. 이 소설을 읽으며 시간과 장소의 차이는 있지만 이민자인 내 자신을 돌아봤다. 어차피 새 땅에 뿌리를 내리며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는 점에 있어 한가지니까.

두 젊은 부부인 폴(Paul)과 엘린(Ellen)에겐 요람에 누운 어린 아기가 있다. 소설은 엘린이 정오 조금 전에 램프의 불을 켜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그녀의 집안은 어둡고 먼지로 가득 차 있다. 창문에 매달려 밖을 보아도 짙은 안개가 낀 양 먼지에 가려 밖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오랜 가뭄 속에 3일째 쉬지 않고 바람이 불고,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그녀가 남편을 위해 준비한 식사에도 어느 덧 먼지가 잔뜩 쌓여있다. 이 장면은 무엇보다 그들의 어려운 현재와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미래라고 할 아기마저 먼지로 가득 찬 공기 때문에 폐렴에 걸릴까 걱정한다.  “There’s dust in everything.”
몇 해 째 가뭄이 계속되고, 심은 밀들은 마른 지푸라기가 되어 날아간다. 새 땅에 심은 꿈도 날아가고 앞에는 먼지만 남은 셈이었다. 늘어나는 것은 빚뿐이었고 점점 가난의 수렁 속에 빠져 들어갔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그들의 싸움은 상대방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에린은 그녀의 친정이 있는 온타리오 주로 돌아가길 원한다. 폴은 결코 자신의 꿈이 남아있는 땅을 버리고 돌아갈 수 없는 농부였다.

“This is where I belong,” 그는 언젠가 비가 내리고 좋은 시절이 오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에린은 말한다.”어디 간들 이보다 못한 곳이 있겠어요?” 결국 그녀는 어린 아이를 껴안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가, 모래바람 속에 파묻히고 만다. 폴이 발견했을 때, 에린은 흙바람 속에 아이를 보호하려고 아이를 껴안고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몸은 벌서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녀가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손질하려고 폴이 아이를 안고 있는데 아이가 앞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걸 보고 에린은 말한다.”당신은“여태 아기를 안을 줄도 몰라요?“ 집으로 돌아가며 그녀는 남편에게 말한다.”당신 말이 맞아요. 오늘 밤부터 바람이 잦아 들 거라고 했죠? 지금 너무 평온하고 하늘이 빨갛군요. 이건 내일부터 괜찮을 거라는 예기에요.”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말하고 있다. 아이까지 잃어버린 줄 모르고, 내일을 말한다는 이유로 그들은 결코 패배자가 아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그들은 결코 쓰러지지 않고 일어나 앞으로 나가리라. 지금 이 땅에서 쓰러지는 많은 이민자들에게, 다시 일어서 걸어야 하는 이민자들에게 소설은 좋은 교훈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민자는 결국 내일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다. 소설의 마지막 줄을 다시 음미해본다.
 “-tomorrow will be fine.”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기고] 사람(人)

● 칼럼 2011. 5. 13. 16:42 Posted by Zig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하여 사람인(人)자는 둘이 서로 기대어 버티고 선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한다. 글자의 뜻과 같이 우리는 가족을 포함하여 너무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지만 외로워 견디기 힘들 때도 있고, 근심과 절망에 쓰러질 때도 있다. 서로 의지하여야 하는 사람들이 절망을 안고 쓰러지고, 자기 혼자만의 성을 쌓고 외로워하는 것은 슬픈 이야기다.
그래서 ‘사람’ 이라는 제목을 써놓고 보니, 이거 잘못 들어갔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을 주제로 글을 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일이 아닐까 해서다. 인간이 창조되고 부터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다루었고, 그 답은 저마다 모두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글을 쓰기 시작하였으니 나름대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우리들은 사람을 인간(人間)이라 하며 잘못된 사람을 향하여 “먼저 인간이 되라”고 훈계를 한다. 아직도 우리의 글에는 한자(漢字)가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많이 있다. 사람을 인간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한자가 주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이미 사람’人’자가 사람임을 표시하는데도 사이’間’ 자를 붙여서 그 뜻을 완성하였다.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가 형성될 때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 ‘인간’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사람다운 사람을 인간이라 칭해야 되는데, 가끔 사람답지 못한 사람을 칭할 때 “아이구! 이 인간아!”라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 정말 인간이란 사람과의 관계형성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슬픔, 기쁨, 행복, 빈부, 화, 인내, 평화, 사랑, 이 모든 것이 관계가 없다면 무의미 해진다. 어떤 이는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 간섭하지 말라, 주는 것도 싫고 받는 것도 싫다.” 하면서 극히 자신을 공평한 사람으로 인식하시는 분도 계신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부모와 친척, 친구, 선생님, 책을 쓴 저자, 각종 생활용품을 만드신 분들, 정치가에 이르기 까지 나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지금도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스스로 만들어 진 것이 하나도 없다. 가끔 서로의 신뢰가 깨어지는 아픔이 있다. 쌍방 모두의 손실이며 쌍방 모두의 오해와 관용의 부족으로 신뢰는 깨어진다. 이럴 때도 지혜가 필요하다.
모든 이들이 실리를 추구하거나 자신이 도움을 받았던 것을 잊음으로 인하여 오해가 생긴다.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 조금 손해를 보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고려 말 충신 목은 이색은 “사람이 가진 것이,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없는데 자기 손에 들어오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라고 하였다. 사람의 욕심에 대하여 일침을 하신 말씀이다. 심지어 부부간에도 매일을 서로가 힘들어 하며 사는 경우가 있다. 반면에 서로가 너무나 소중한 사람으로 알고 서로를 아끼며 사랑으로 사는 부부도 있다.
예수님의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명쾌한 해답을 얻게 하신다. 모두를 사랑하셨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삶 이다.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음이라고 하셨다. 믿음은 약속이며, 약속은 서로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이웃과의 믿음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하여준 모든 것을 생각해 본다. 내가 남에게 기대어 서는 사람 인(人)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어보자. 특별히 가정의 행복은 이웃을 행복하게 만들고 사회를 행복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하여도 천국을 만들 수 있음을 믿고 나아가자.

<정훈태 장로 - 목민장로교회>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9일 베를린에서 “북한이 핵 포기를 확고하게 하겠다고 국제사회와 합의하면 내년 봄 서울에서 열리는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초청할 의사가 있다”고 제안했다. 독일을 방문중인 이 대통령이 내놓을 대북제의를 놓고는 그 어느 때보다 기대가 높았다. 발표 장소가 분단국가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인데다 최근 남북대화 및 6자회담 재개를 놓고 나라 안팎의 움직임도 활발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연 이 대통령의 제안은 한마디로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다.
우선 실현 가능성이 너무나 희박하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제1차 워싱턴 핵안보정상회의 뒤에도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 이전에 북한이 핵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보이면 김 위원장을 서울로 초대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북은 “미국의 핵정책이 변하지 않는 한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때 이후 상황이 바뀐 게 없는데도 똑같은 제안을 재탕한 것은 애초에 성사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정치적 쇼’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김정일 위원장이 그동안 다자 정상회담에 한차례도 참석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도 그가 50여개국 정상이 참석하는 서울회의에 오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게다가 핵안보정상회의는 핵개발 잠재력을 가지고 있거나 핵물질을 보유한 나라들에 대한 미국의 관리를 강화하고 핵 비확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자는 성격을 갖고 있어 북한으로서는 가뜩이나 껄끄러운 회의다. 그런 회의에 백기를 들고 투항하라고 하는 셈이니 북한의 거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피격 사태 등에 대한 북한의 사과를 사실상 전제로 내건 것도 이번 제의의 실효성을 더욱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물론 이번 제의는 비핵화 문제에 집중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정치적 의지를 표명했다는 의미는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지금의 남북 상황은 대화를 하자는 시늉이나 내고 명분 쌓기에만 머물 때가 결코 아니다. 북한과 대화를 통해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생각이라면 상대방을 끌어들일 실질적 조건을 만들고 신뢰를 형성해나가야 한다. 이 대통령은 이제 임기말이 가까워오고 있다. 진정성을 발휘해도 시간이 별로 없는데 자꾸 다른 쪽만 바라보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