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인동초를 만드는 정치

● 칼럼 2024. 1. 15. 13:3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인동초를 만드는 정치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었던 지난 1월6일, 토론토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 김대중’이 동시 상영됐다. 그가 떠난지 벌써 15년이 지났지만 생전의 생생한 영상기록을 통해 역시 시대의 거목이었다는 감명을 전했다.

김대중의 삶과 정치역정은 그야말로 상처투성이다. 반독재와 민주회복을 외친 그에게 군사 독재권력은 납치, 살해 위협, 투옥과 사형선고 등 다섯 번의 살해 시도와 여러 차례의 정치테러를 가했다. ‘빨갱이’라는 이념의 낙인을 찍어 세뇌당한 국민들의 외면과 조소를 부추겼다. 네 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세 번의 대선에서 패배와 시련에도 백절불굴, 인고의 세월을 견뎌 대통령과 노벨평화상의 영예를 누린다. 그러나 말년에 다시 온 ‘민주 퇴행‘을 걱정하며 ‘여한’을 품고 눈을 감아야 했다.

김대중의 영욕은 한국 민주주의의 수난사 바로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한국 민주주의가 그에게 진 빚 또한 엄청났음을 되새기게 된다. 아울러 ‘인동초’라는 별칭과 ‘행동하는 양심’의 대명사가 된 것처럼 독재권력에 짓눌린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 고초와 핍박을 당하고 견뎌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담금질로 강철이 만들어지듯 수많은 고통과 생명의 위협까지 이겨내는 연단의 열매들이었다는 실증의 하나이기도 하다.

 

새해 초 암살당할 뻔했다가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져 국내외 동포들을 놀라게 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정치인생에서 또 다른 고난의 인물사를 본다. 아무리 권력에 박해를 받는다 해도, 설령 범죄 혐의자일지라도 생명까지 말살하려는 무법적 형벌까지 당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피땀어린 민주화 도정을 하루 아침에 거꾸로 돌리고 있는 이른바 ‘검사독재’ 권력 하에서 그는 무려 3백번이 넘는 압수수색을 당했다. 단 한번의 압색에도 빌미가 잡히거나 견디지 못해 자살로 항변하는 일도 많은데, 그는 털어도 털어도 꿋꿋했다. 노무현부터 여러 민주인사들을 무너뜨린 검찰권력의 ‘기우제-토끼몰이’ 수사는 지금도 계속 중이다. 수사기밀을 흘리는 불법적 언론재판은 물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광적 여론전을 부추긴다. 대통령은 야당대표를 ‘범죄자’라며 외면하고 무시했다. 법무장관은 한술 더 떠 ‘잡범’이니 ‘비리 정점’ ‘중대범죄자’ 등 갖은 악담으로 죄인이라 단정하고 ‘악마화’해 왔다. 정권 측의 그런 ‘기우제식 권력테러’ 여파는 거대 신문·방송을 필두로 유튜브와 SNS 등에 넘치도록 번졌다.

 

백주 대낮 암살미수 테러사건이 그런 와중에 벌어진 나비효과의 하나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이재명은 그렇게 ‘수사테러-검찰테러’와 ‘언론테러-여론테러’를 당한 것에 그치지 않고 ‘암살테러-정치테러’를 당한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시련이 닥쳐올지 알 수 없으나, 김대중이 온갖 박해에 단련되며 큰 지도자로 거듭났듯이, 그 역시 눈물을 삼키며 가시밭길을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 벌써 ‘테러 이후의 테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현장의 수많은 사람들, 특히 기자들과 카메라가 양날의 칼로 정확하게 급소를 노린 범행 전후를 지켜보았는데도, ‘별 것 아닌 사건’으로 흘려보내려 애를 쓴다. 동시에 물타기 여론전이 기승을 부린다. 인간 이하의 혐오 조작과 가짜뉴스·저질 선동으로 왜곡과 덮어씌우기에 ‘혈안’이 된 것을 본다.

동네 아저씨도 칼에 찔리면 이웃 모두가 안위를 걱정한다. 생명이 위태로우면 구급차 헬기 가리지 않고 어서 병원에 옮겨 살려내라고 발을 구른다. 그리고 왜 찔렀는지, 범인을 족쳐 강력 처벌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차기 대통령으로도 유력한 야당의 거물 정치인이 목숨을 잃을 뻔한 전문적 솜씨의 자객테러를 당했다. 국가적 사건으로 추적해야 마땅함에도 진실을 왜곡하고 서둘러 뭉개려는 건 야비한 정략이고 사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수사권을 쥐고 사건을 통제하는 정권측의 경찰과 검찰은 소극적으로 일관하더니, 예상대로 범인의 인적사항과 당적 등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고 공범도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상한 선동현상과 두루뭉술 수사에서 거대한 사건 축소 카르텔의 그림자를 감지하게 된다.

 

김대중 100주년 기념식에서는 그의 민주 평화 인권 화합의 정신을 ‘귀감’(龜鑑)으로 삼아 본받아 나가야 함을 이구동성 역설하고 나섰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겉치레 허언도 할 수 있겠으나, 그를 괴롭혔던 독재권력의 후예들까지 칭송에 나선 것은 쓴웃음을 짓게 했다. 민주와 인권을 파괴하고 후퇴시키는데 앞장선 세력, 민주행보에 동행하다 변절해 독재에 부역한 자들이 김대중을 추켜세우는 낯뜨거움을 보여주었다. 민족 갈등과 대결과 심화시켜 신냉전을 초래하고, 정치·사회적 차별과 적대감정을 조장, 악용한 정권의 핵심들이 그럴 듯한 자기변명에 활용하는 교활함도 엿보게 했다. 그런 자들의 양심 한쪽에도 민주 평화 화합 등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있기는 있는 것인지, 이재명 정치테러에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즉각 입을 모은 자들이 ‘미심쩍은 수사’에는 딴소리들을 하는 데서 양두구육(羊頭狗肉)을 떠올리는 이유다.

진실은 하늘이 보고 있어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있다. 김구과 여운형 조봉암… 그리고 장준하 박종철을 테러한 세력과 인물은 민족사에 악행자들로 기록되고 있다. 잠시 국민을 속여 카르텔 권력의 꿀맛을 즐길지 모르나, 부나방의 허무를 명심할 일이다.

[목회 칼럼] 처음 가는 길

● 칼럼 2024. 1. 15. 13:2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믿음과 소망]   처음 가는 길

 

서부장로교회 박헌승 담임목사

 

처음 가는 길을 갑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갑니다. 그 누구도 걸어보지 못한 길, 아니 갈 수도 없었던 길입니다. 그 길은 2024년 새해에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미지의 세계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전에 가보지 못한 새 길은 꽃구경가는 길이 아닙니다. 여행차 떠나는 길은 이미 수많은 사람이 다녔던 길입니다. 지도도 있고, 상세한 정보도 많습니다. 여행 꿀팁도 수북합니다. 그러나, 지금 가는 길은 차원이 다릅니다. 자랑하거나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 가는 길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나는 것은 위험합니다. 반드시 안내서가 필요합니다. 지도, 나침반, 내비게이션 같은 길잡이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처음이라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 안내서는 오직 성경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는 처음 가는 길에 대하여 상세한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길을 잃지 않고 정로를 따라갈 수 있는지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 되고 빛이 되어 줍니다.

처음 가는 길에 길동무가 필요합니다. 혼자 가기에는 너무 외롭고 힘든 길이기에, 동행자가 필요합니다. 말동무하며 함께 걸어가면 서로 의지가 되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넘어지면 일으켜 줄 동료, 지치면 같이 쉬어가 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단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야 할 길을 훤히 다 알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친구, 길벗, 동행자가 되어 주십니다. 분별력이 없는 양들을 잘 이끌어주시는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그분만 따라가면 방황하지 않고, 의의 길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습니다.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원수를 만나도 상관없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2024년 365일 처음 가는 길, 두렵지 않습니다. 인생의 안내서 성경이 있고, 인생의 길동무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신년 논설-한마당] 편집인 칼럼

다시 우울한 새해, 그러나 반딧불 열망들이 모이면, 빛의 세상 되리

 

 

신년 카운트다운과 함께 시작된 폭죽의 화려한 불꽃이 사그러든 밤하늘은 검고 우중충하기만 했다. 몰려든 사람들의 함성은 메아리 없이 허공을 맴돈다. 둔중하게 울리던 서울의 보신각 종소리도 도심의 소음에 묻혀 이내 사그라든다. 희망을 발견하려 모여든 사람들 얼굴에는 왠지 허전하고 자조적인 기색들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뉴욕도, 토론토도, 서울도, 모두들 기쁨으로 맞이할 새해가 왔는데, 새 아침의 축제마당 뒤안길에 드리워진 불안과 어둠의 그림자가 지구촌을 짓누르는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새해 벽두 한국의 야당 당수가 충격적인 백색테러를 당했다. 불길과 불행의 전조인가, 기적적으로 생명은 건졌으니 소위 ‘액땜’의 희망적 조짐일까. 

팬데믹으로 전 지구적 홍역을 치른 이후 빠른 원상 회복의 기대와는 달리 해가 바뀌어도 우리가 직면한 세상은 어둡고 우울하기만 하다. 참혹한 전쟁의 충격파는 광범위하고, 경제는 여전히 휘청댄다. 고유가와 고물가·고금리가 올해는 완화될지, 전망이 엇갈린다. 기후위기로 인한 가뭄과 홍수 등 재난과 지진·화산·산불 등의 천재지변이 혹독해지면서 막대한 인명과 재산피해가 속출한다. 여전히 코로나 변이종들과 독감 바이러스는 신종 괴질들과 함께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 생명을 위협한다. 기후변화 때문에 아마도 더 심각한 제2 제3의 COVID 사태가 발생하리라는 경고도 있다. 혹시라도 태평양에 쏟아붓고 있는 일본의 원전 핵폐수에 물고기는 물론 사람들도 이미 오염의 독소를 삼켰을지 모른다. 2023년이 지난 174년 만에 가장 더운 해였다는 과학자들은 어쩌면 ‘가장 기온이 낮고 재난이 적었던 해’로 기록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면서 “지구 온난화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다”는 암울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국제사회 정치와 이념의 대결상도 위태롭다. 미-중의 패권싸움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화로 미국의 동맹들과 중-러 및 그 동조국들 간의 동-서 진영대립으로 번져 ‘신냉전 시대’가 됐다. 거기에 제3세계의 중견 결집체가 된 브릭스(BRICS)의 부상, 그리고 이스라엘 전쟁까지 겹치며 최강 미국의 역량과 신뢰가 눈에 띄게 기울었다. 힘의 균형추가 요동치자 복잡해진 와중에 너도나도 자국 이기와 실리에 매달리는 각축으로 언제 어느 곳에서 파열음을 빚을지 모를 국제역학의 위기국면도 짙어지고 있다.

정치분석가들과 미래학자들은 이같은 글로벌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리더십의 등장만이 해답이라고 제시한다. 격동적이고 종말적인 상황에서 이기적이고 대결적인 지도자들은 위기를 키울 뿐이지만, 미래 비전을 가진 포용적 리더십의 정치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면 인류와 지구의 위기를 줄이고 파멸을 막을 수 있다는 처방이다.

올해는 ‘슈퍼 선거의 해’라고 한다. 전세계 76개국에서 대선·총선 등을 치르는데, 인류의 2분의 1인 42억명이 투표를 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선거에서 유능하고 지혜로운 지도자들이 과연 몇 명이나 뽑힐 것인가. 낙관보다는 비관적 전망이 압도하는 것은, 역시 국제사회의 심화된 이념과 가치대립의 혼란상에서 유추된다. 유럽 각국에서 배타적이고 역사 퇴행적인 극우정당이 득세하고 남미와 아시아·아프리카 등 각처에서 잇달아 국수적 보수인사들이 등장하는 현상을 보면 수긍하게 된다.

올해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등장 할 기세인 것도 그 대표적 사례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그가 내놓은 메시지는 반대자들을 향해 “지옥에 떨어져 썩어라! (Rot in Hell)”는 막말이었다. “분노에 가득찬 정신상태요 극도의 현실 부정적 인격장애를 드러낸 것”이라는 언론의 지적에도, 미국민 다수가 귀를 기울이지 않는 현실이 미국과, 나아가 국제사회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만약 트럼프가 등장하면 한국은 어떻게 될까. ‘큰 형님’ 바이든을 맹종하여 오로지 ‘한-미-일 동맹’에 올인하고 북한을 ‘박살낼 주적’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적대 진영으로 만든 윤석열 정부는 ‘닭 쫒던 개’나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거라는 예측이 나온다. 윤 정권의 대북 증오심을 조롱한 김정은은 “남북은 동족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교전국 관계로, 통일이 아닌 영토 평정의 대상”이라고 매몰차게 규정했다. 9.19 군사합의도 무효화 했으니, 언제 충돌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됐음을 보여준다.

동족간의 분열이 깊어진 것 뿐인가. 미-일 편중적·굴종적인 외교는 민족대결 첨예화 뿐만 아니라, 자존심도 먹칠했다. 일제 강제징용·동원 피해자들의 사죄와 배상요구를 묵살했고, 핵폐수 방류를 국가예산을 들여 홍보해 주었다. 홍범도를 비롯한 독립투사들을 폄훼하고, 동해를 일본해로 용인하더니, 국방부는 독도를 분쟁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중-러 와의 관계악화로 윤 정권은 막대한 무역적자와 외교적 고립을 자초했다. 정상회담 거부에다, 부산엑스포 유치 참패에도 중국의 방해외교가 작용했다니, 반감이 얼마나 컸으면 그러겠는가. 현대차는 러시아 공장을 단돈 14만원에 팔고 철수했다 한다. 무역수지 악화에 경제난 심화로 기업과 가계의 고통은 가중되는데, 부자들 감세혜택에 집착하다 세수가 줄자 재정 삭감과 각종 복지마저 칼질하고 있다.

윤 정권이 잘한 단 한가지는 검찰개혁 필요성을 입증해준 것이라 한다. 검찰을 정권유지의 앞잡이 삼아 ‘압수수색 정권’ ‘검사왕국’소리를 듣는 탓이다. ‘일가 범죄’에는 눈감고 ‘영부인 특검법’은 즉각 거부를 외친 뻔뻔함과 내로남불의 몰양심. 각종 참사에는 매정하면서도 야당대표와 세계적 배우 죽이기에는 불독에 버금간다. 정치혐오를 부채질한 적개심과 악마화가 끝내 정치테러를 부른 꼴이 되고 말았다. 언론장악 집착은 군사정권보다 더하다는 세계적 망신을 사고 있다.

문제는 안팎으로 총체적인 추락만 있을 뿐 회복과 도약의 비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점수를 주고 싶어도. 도무지 철학 하나없는 무지·무능·무도·무책임의 ‘우매한 리더십’ 밖에는 달리 묘사할 길이 없다. ‘세계 최고’를 좋아하는 한국이 지구촌의 위기와 퇴행 부문에도 동키호테 리더십으로 선두가 되고 싶은 것인지, 도대체 민망하고 가슴은 더 답답해진다.

그렇다고 다시 찾아온 새해도 흑암과 카오스에 눈 질끈 감고 속을 끓이다 말 것인가. 통탄의 한숨에 우리의 꿈을 흘려 보내야 하나?. 아니다. 때 마침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축제가 심판과 혁파의 희망을 싣고 깜깜한 어둠의 문을 두드린다. 추락한 국격과 거꾸로 가는 역사를 바로 세워 민족정기와 자존감을 청룡처럼 날아오르게 할 천재일우의 기회가 우리를 깨우고 있다. 밤이 깊을 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희망의 불씨에 정성껏 마음을 모으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땀과 눈물이 고이고 모이면 강물이 될 수 있다. 외침들이 어우러지면 세상을 흔드는 함성이 된다. 깨어있는 반딧불 열정들이 세상의 미래를 밝힐 빛의 바다를 이루는 승리의 꿈을 꾸어보자!.

티끌모아 태산의 지혜다. 각자 양심과 정의의 촛불을 켜고, 뜻이 모여 어둠을 밝힐 때 파사현정의 횃불을 이루리니, 터널 끝을 향해 함께 달려 나가면 눈부신 빛의 장관을 볼지라!. 물방울들이 바위를 뚫듯,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끈기와 힘을 모으면 흑암에 활개치는 사악한 불의는 무너지리라!.

우리는 연대와 협력으로 전 지구적 팬데믹을 이겨낸 바 있다. 엄청난 글로벌 재난과 천재지변도 서로 돕고 힘을 모아 극복해 왔다. 행동하는 작은 양심들이 함께하면 기후변화로 죽어가는 지구에 생기가 돌 것이다. 너도 나도 세계 시민의 힘을 모으면 전쟁광들의 발호를 물리칠 수 없겠는가. 비록 작지만 나 한사람부터 기꺼이 나서 마음과 손길을 보태면, 올 한해 온 세상이 어둠이 아닌 빛의 누리가 되리라는 믿음을 갖자. 

[새해 축원] "새해 비전을 크게, 마음을 넓히세요"

● 칼럼 2024. 1. 14. 03:2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새해 아침 소망과 축원

 

북미 여교역자협의회장 김광숙 목사 (로이교회)

 

할렐루야!

Happy New Year! 행복한 새해 되세요.

2024년 희망찬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귀한 은총이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모든 일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가 되면, 새로운 다짐과 미래의 계획들을 세우며 어떻게 하면 후회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마도 누구든지 고민하며 다시금 다짐하게 됩니다.

아모스 5장 4절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시편 81편 10절에는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과 비전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께서는 많이 채우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인생의 삶에서 비전은 매우 중요합니다.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의 사닥다리를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이 그의 인생 포부가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소원이 있습니까?

위대한 선교사였던 윌리엄 케리는 “위대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위대한 꿈을 가진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믿음과 생각을 크게 합시다. 비전을 크게 가집시다. 주님의 뜻이 내 뜻이 되게 합시다. 내 뜻이 주님의 뜻이 되도록 마음과 신앙의 그릇을 키웁시다.

고린도후서 6장 11절에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해에 마음을 넓히며 사십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해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 정도의 넓은 마음과 큰 아량을 갖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음이 넓어지면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마가복음 7장 34~35절에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십니다. 그에게 “에바다” 하시니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리며 말하는 것입니다. 에바다는 ‘열리다’라는 뜻입니다.

올 한해 열려야 할 문들이 많습니다. 복음화의 문, 교회 부흥의 문, 가정 구원의 문, 건강의 문 등이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누가 그 문을 열어 주십니까? 바로 주님이 그 문을 열어 주십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가 기도하고 담대하게 일어섰더니 민족의 운명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새해에는 여러분의 교회와 가정과 그리고 시사한겨레 위에, 주님의 축복의 문이 열리는 2024년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