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한인장로회(KPCA) 캐나다 동노회 소속 우리장로교회(담임 강성철 목사: 800 Burnhamthrope Rd. Etobicoke ON. M9C 2Z3)가 강성철 목사의 조기 은퇴 계획에 따라 후임 담임목사를 4월17일(토)까지 서류 응모를 받아 청빙한다고 공고했다. 강 목사는 정년을 6년여 남겨두고 은퇴를 결심, 후임 목사 청빙절차가 마무리 되는대로 강단을 떠날 것으로 전해졌다.
강성철 목사
우리장로교회 청빙위원회가 밝힌 담임목사 지원자격은 만 40세 이상 55세 미만으로, 목사안수 후 10년 이상이고 이민목회 경력이 5년 이상인 목회자를 찾는다. 또 공인된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 이상을 받은 학위 소지자여야 하고, KPCA 회원이거나 교단 가입에 문제 없는 시민권자 혹은 영주권자로 캐나다 거주와 목회사역에 결격사유가 없이 영어 의사소통이 원활한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다.
제출서류는 이력서, 자기소개서(목회비전, 소명, 가족소개, 신앙간증 포함), 2인 이상 추천서, 최신 설교 동영상, 목사안수증명서 및 최종학교 졸업증명서 등을 4월17일(토)까지 마감해 제출 받는다. 우리장로교회 청빙위원회는 응모서류 접수와 문의는 e-Mail (loveourchurch2020@gmail.com)로 만 받는다고 밝혔다.
토론토 영락교회(담임 송민호 목사: 650 McNicoll Ave. Toronto, ON, M2H 2E1)는 부활절인 4월4일 주일 오후 5시 임직예배를 드리고 장로와 안수집사 권사 임직식을 거행한다.
영락교회는 주정부가 3월15일부터 예배참석 인원을 예배당 수용인원의 15%까지 허용함에 따라 그동안 온라인으로만 드려오던 예배를 28일 주일부터 대면예배를 겸해 본당에서 드리기 시작한다. 주일예배 참석자는 이미 예약을 받는다. 이에따라 부활절 예배는 물론 부활주일 오후 임직예배도 본당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코로나 팩데믹과 더불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아시안 대상 인종차별 혐오 발언과 범죄들에 북미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에는 큰 멍이 들고 말았습니다. 길을 걷다 괜히 봉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주위를 살피고 눈치를 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안 그래도 이민자로 약간은 주눅 들어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지난 16일 미국 아틀란타에서 있었던 4명의 한인이 총 맞아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듭니다.
캐나다라고 크게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제 둘 째 아이도 하루는 동네 trail에서 걷고 있었는데 반대쪽에서 오던 백인 할아버지가 막 ‘“차이니스 어쩌고...” 하는 욕을 하며 길에서 비키라고 했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듣자 마자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길을 비켜준 둘 째 아이가 되레 미워졌습니다. 왜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느냐고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고 말았습니다. 화가 진정이 되자 아이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이 났습니다. 이민 1세대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곳서 태어난 아이들이 이런 일을 당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서글펐습니다.
이렇듯 아시안 계 혐오범죄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가까이 집안 식구마저도 욕설과 더불어 민망한 일을 당하다 보니 제 ‘마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에도 ‘증오’가 꿈틀거림이 감지가 되었습니다. ‘내가 길 가는데 혹시라도 누가 나에게 시비를 걸기만 해봐라’ 하며 ‘마음’이 공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어떤 ‘욕’으로 대꾸해야 속이 시원하려나 ‘연습’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마주치는 ‘백인’의 눈빛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제 눈에도 힘이 들어가 째려보게 됐습니다.
하지만 곧 문제 생긴 ‘마음’ 더 깊은 곳에서 성령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위에 인용한 글처럼 말이 마음을 쓰는 것이라면 증오와 혐오가 가득 찬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은 이미 지옥임이 분명합니다. 혐오발언과 범죄 피해자가 되는 것이 끔찍한 것은 가해자의 ‘지옥’에 함께 빠져버린 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 부분을 성령님께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네 마음도 가해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이미 지옥이 되어가고 있구나!’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말이 참으로 마음의 알갱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 씀씀이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이라 선언합니다.
고로 예수는 하나님의 마음 씀씀이입니다.
예수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의 표현이요 결정체이십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에 담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욕’할 기회를 찾고 마음에 증오를 품고 있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내 ‘말’이 거칠어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변명은 옳지 않습니다.
‘지옥’을 벗어나 ‘천국’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잠언서 에는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잠 23:7)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말에 예수가 묻어 나와야합니다.
우리말에 하나님의 마음이 묻어 나와야합니다.
그러기위해서 먼저 우리 마음이 예수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겠습니다.
‘마음’이 천국이 되면 가해자를 향해서도 긍휼히 여김과 그 영혼을 위한 기도마저 가능할 것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이 땅에 임하고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성경은 역시 인류 최고의 책이다. 매일을 살아가며 얼핏 떠오르고 때로는 곰곰 음미해 볼 때마다 성경의 ‘적확무오(的確無誤)’함에 감복하곤 한다. 완전하고 흠없는 ‘정확(正確)무오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학적이거나 다른 여러 의미와 평가가 있겠지만, 나는 인간의 속성과 인간사에 대해 성경만큼 정확 정밀하게 분석 묘사하고 예견까지 한 책은 없다고 여겨져서 그렇다.
수천년 전의 기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현실감은 요즘의 팬데믹 상황에서 시간여행을 하듯 인류의 자화상에 대한 기시감을 던진다.
설령 목회자가 아니어도, 코로나19 재앙에 노아의 홍수를 떠올린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인류사에서 전 지구적 재난 가운데 첫 번째가 노아의 대홍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2월을 지나며 문득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가 다시 생각났다. 성경에는 2월17일 노아의 대홍수가 시작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하고 열흘만인 2월27일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홍수가 물러간 땅에 발을 다시 디딘 날이다.
1년을 넘어선 코로나 바이러스의 지구촌 창궐과 어쩌면 그렇게도 닮은 꼴 일까.
인간의 무절제한 자연파괴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괴물 바이러스의 출현을 낳았다. 코로나 공포에 쫓겨난 사람들은 속수무책 봉쇄되고 단절된 집안에 격리돼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인간이 머리를 짜내 겨우 백신을 만들었다지만, 코로나 괴물이 순순히 물러갈 것 같지도 않다. 세상은 바야흐로 코로나 전과 후로 구분될 큰 변혁기를 맞았다…그렇게 비슷한 지구 생태계 변전의 계기가 노아의 대홍수였다.
땅의 물이 솟고 하늘이 터진 듯 쏟아져 내린 비가 40일 밤낮을 퍼부어 지구의 높은 산꼭대기가 모두 물에 잠겼다. 세상의 숨 쉬는 것, 하늘과 땅의 살아있는 것들은 모조리 물에 쓸려 죽어갔다. 오로지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과 번식용 암수 동물들만이 살아남은 대재앙이 지구를 덮친 것이다.
세상이 타락하고 인간의 죄악이 만연하자 하나님은 탄식하며 징벌을 결심하고 경고한다. 하지만 방탕에 젖은 사람들 귀에 들릴 리가 없다. 의인인 노아만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 방주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방주는 배와는 전혀 달랐다. 모양도 기능도 크기도 상식과는 거리가 먼 기이한 방수 건조물이었다. 미국 켄터키주 윌리엄스 타운에 가면 노아의 방주를 재현한 거대한 모형이 세워져 있다. 방주는 사람들이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되고, 자력이 아닌 타력에 맡긴 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다. 돛이나 닻이 없었고, 스크류나 키도 없었다. 창문도 겨우 하나밖에 없는 이상한 배였다. 오로지 신의 섭리에 맡길 수밖에 없으니 동력장치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떠다니는 시체, 추악한 세상을 보아 유익할 일이 없으니 창문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무려 1백년 동안이나 그런 기이한 방주를 만드는 노아를 조롱했을 것이다. 노아는 오랜 세월 세상의 퇴폐와 질시를 참고 견디며 고독한 믿음의 수행을 계속한 것이다.
노아 일가는 그런 놀라운 믿음으로 천벌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자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엄청난 재앙과 축복을 직접 체험했던 아들 함은 아버지 노아의 하체를 보고 소문내는 인륜범죄로 저주를 당한다. 그리고 또 얼마가지 않아 언약을 저버린 후손들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는 망상에 바벨탑을 쌓다가 언어도 거주지도 산산이 흩어지는 징벌을 받는다. 그 얼마 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이어진다.
성서의 사람들 발자취를 보면 어리석은 배반의 반복사를 보게 된다. 언약을 세우고 숱한 기적과 역사로 지키며 인도하는 데도 그들은 하나님 신뢰를 저버리고 거역하며 반역을 일삼는다. 그래서 결국 재앙의 반복을 겪는 고난과 업보의 삶을 살아간다.
사람들의 본질적인 죄성과 기억상실, 그리고 배반의 본능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그래서 너희가 최후에는 불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일찌감치 경고했던 것이다.
천하를 호령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신병기를 자랑하고, 우주를 정복한답시고 화성까지 로봇을 보내는 놀라운 재주를 가진 인간들이, 한낱 보이지도 않는 미물의 전염병 조화에 절절매면서도 여전히 겸손할 줄은 모른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멀기만 한 백신을 먼저 맞겠다며, 또한 서로 차지하려 꼼수와 억지를 쓰는 이기적 다툼과 탐욕, 나만은 괜찮다며 마스크도 봉쇄도 걷어치우라고 악을 쓰는 오기에 인간의 뿌리깊은 본성은 드러난다. 이 만인 고통의 시기에 아시안이 싫다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패악질, 동족을 학살하는 미얀마군의 무자비한 쿠데타 만행… 그저 살벌한 생존경쟁에 이기적인 투쟁을 벌이며 날고 기는 그 영리하고 약삭빠른 동물적 본능만이 영원하리니….
아무리 인간의 오만과 사악함의 죄과에 경종을 울려댄다 해도 습성은 바뀌지 않을 테고, 이내 망각하는 반복의 재앙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질 뿐이다. < 김종천 시사 한겨레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