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객과 승무원 298명을 태운 말레이시아 여객기가 우크라이나 동부 상공에서 추락해 탑승객이 모두 숨지는 최악의 여객기 참사가 일어났다.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의 교전이 치열해, 여객기를 군용기로 오인해 지대공 미사일로 격추했을 개연성이 크다. 미국·유럽과 러시아가 맞서고 있는 우크라이나 분쟁 전개에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우크라 동부 상공서 미사일 피격 
298명 전원 사망…주로 네덜란드인

러산 ‘부크’지대공 미사일로 추정 
군용기 오인 격추했을 가능성도

정부군 “반군 격추” 도청녹음 공개 
반군 “격추 능력 없다” 정부군 지목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출발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가던 말레이시아항공 MH17 여객기가 17일 오후 5시15분(현지시각·한국시각 밤 11시15분) 우크라이나 동부 상공에서 관제당국과 교신이 끊긴 뒤 도네츠크 인근 소도시 샤흐타르스크 옆 들판에 추락했다고 <에이피>(AP) 통신 등이 18일 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은 “비행기가 공중 폭파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국 고위 관리도 <시엔엔>(CNN)에 “레이더가 지대공 미사일이 여객기 궤도를 따라가는 모습을 포착했다”며 여객기 격추를 기정사실화했다.
<가디언>은 국방 전문가들의 말을 따 “(격추에) 러시아산 ‘부크’ 지대공 미사일 시스템이 이용됐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전했다. 부크는 이동식 중거리 방공시스템으로 지상에서 고도 13.7㎞까지 목표물을 쏴서 맞힐 수 있다. 사고 당시 여객기는 10㎞ 상공을 날고 있었다. 부크는 러시아는 물론 우크라이나군도 보유하고 있으며, 반군 쪽도 최근 이를 확보했다는 얘기를 떠들고 다녔다고 <에이피>는 전했다.
 
우크라이나는 친서방 시위대에 의해 친러 정권이 축출되고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이 지난달 공식 취임했지만, 주로 러시아어를 쓰는 도네츠크·루간스크주 등 동부 지역에선 분리독립을 선언한 무장세력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서방은 러시아가 비밀리에 반군에게 무기를 지원한다고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반군은 모두 참사의 책임을 상대편에 떠넘기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반군 사령관이 러시아 정보장교에게 자신들이 격추를 했다고 말하는 내용의 도청 녹음을 공개했다. 또 사고 현장에 간 반군 전투원이 현장에서 25㎞ 떨어진 반군 진영에서 공격이 수행됐다고 말하는 전화 내용도 함께 공개했다. 녹음의 진위는 가려지지 않은 상태다. 포로셴코 대통령은 “이는 사고나 재앙이 아니라 테러 행위”라고 비난했다.
반군은 오히려 우크라이나 정부군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이들은 “우리가 보유한 로켓은 3㎞ 상공까지 닿을 수 있는 정도여서, 10㎞ 상공을 나는 여객기를 격추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현지 목격자의 말을 따 “비행기가 상공에서 공습을 받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후 추락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보당국은 반군이 미사일을 발사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명확한 결론은 내리지 못한 상태다. 미 백악관은 17일 늦게 성명을 내어 “가능한 한 빨리 믿을 만한 국제적 조사가 이뤄져야 하고, 모든 증거물과 잔해가 훼손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고 현장에서 여객기의 블랙박스가 회수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 주체가 정부군인지 반군인지는 보도가 엇갈리고 있다. 러시아 쪽은 블랙박스를 직접 분석할 뜻이 없다고 밝히는 한편, 진상 규명을 위한 교전 중단을 촉구했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반군 쪽과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사고 현장은 반경 수킬로미터에 여객기의 파편과 함께 주검들의 잔해가 널려 있어 참혹했다. 사고기는 암스테르담을 출발해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 퍼스로 가는 항공편이었다. 때문에 탑승객 국적은 네덜란드가 가장 많았고, 말레이시아, 오스트레일리아가 뒤를 이었다. 퍼스에서 열리는 에이즈학회 참석차 탑승한 저명 학자와 전문가 등 100여명도 희생됐다. 우리 정부는 한국인 탑승객은 없는 것으로 잠정 결론내렸다.
<정세라 기자>


[1500자 칼럼] 커뮤니케이션

● 칼럼 2014. 7. 14. 18:05 Posted by SisaHan
아까부터 두 녀석이 귓속말을 나누고 있다. 이따금씩 나를 슬며시 돌아보는 폼이 의심스럽다. 장난기 어린 눈웃음까지 은근하게 내비치는 터라 이 녀석들이 어떤 장난을 칠지 조금은 긴장이 되었다. 잠시 후 긴 갈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손녀가 깡충깡충 뛰어온다.
 
“할머니, 우리 Zoo에 갈 수 있어요?”
“Zoo에 가자구? 물론이지”
“할머니, Zoo… 해보세요”
“쥬? 즈으? ” 두 녀석들이 키득키득 웃는다. 
“ Not joo, zoo… ”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는 나는 신경을 써서 아랫니 안면에 혀끝을 대고 “즈으”하고 맞는 발음을 내니 이번에는 저희들 기대에 어긋났는지 김빠진 얼굴이다.
 
손주들이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 나의 잘못된 한국식 영어 발음을 고쳐주기 시작하였다. 면목이 안 선 나는 어느 날, 한국인들이 정확하게 내지 못하는 영어발음에 대해 왜 그런지 설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어 자음의 ㅂ은 영어 알파벳으로 B와 V이고, ㄹ은 R과 L이고, ㅈ은 J와 Z이고, ㅍ은 P와 F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한국어에 익숙한 사람은 그 두 영어 발음을 구분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려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나를 놀려대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손주들 역시 처음 태권도를 배울 때 내게 물은 적이 있다. 
“할머니, 쩬찐이 무슨 뜻에요.“ 또 “훅찐은 무슨 뜻에요”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내는 발음만 듣고는 무슨 한국어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자 손녀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면서 쩬찐이라고 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훅찐” 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전진과 후진이라는 구령이었다. 참으로 요상하지 않은가. 비록 액센트가 실리긴 했지만 어찌 이곳에서 태어난 손주들 귀에는 그런 엉뚱한 발음으로 들린단 말인가. 역시 이 땅에서 40년을 살았다 해도 겨우 네 살인 손자도 따라 하는 영어노래 가사를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는 나와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이것이 이민 1세와 3세간에 일어나는 소통의 거리이다.
 
캐나다 속에 작은 한국을 심으며 살아온 이민 1세 언어는 비록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이곳에서 더 오래 살았다 해도 계속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제자리걸음에 머물고 만다. 생업에 필요한 일상 언어는 별무리 없이 통할 수 있으나 세월이 갈수록 전문용어나 깊이 있는 언어구사 능력은 장벽에 부딪히고 만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태어난 2세들이 타민족과 결혼하여 다민족가족을 이루는 상황이니 1세와 3세간 끈끈한 가족관계가 수월하지 않다. 3세인 손주들과는 언어뿐만 아니고 문화 차이도 심하여 그들과 함께 동요나 놀이도 함께 즐길 수가 없다. 사실 내 아이들을 키울 때는 낯선 풍토에 뿌리를 내리는 일이 우선이었기에 이곳 문화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손주들을 보면 내 아이들을 키울 때 보고 듣지도 못한 새로운 문화를 자주 접하고 있다. 더군다나 요즘 그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들 모두가 Ipad, Iphon, Ipod같은 디지털 산물이니 그들을 돌봐주는 일에도 소통이 문제될 때가 다반사다. 일방적인 손주사랑에 빠진 아날로그 세대는 숨이 가쁘고 아쉬울 뿐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는 언어만이 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말 없이 눈만 바라보아도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센스와 감정, 즉 마음의 언어가 있지 않은가. 그 사랑의 언어인 만국공용어가 있어 구태여 많은 말을 소통하지 못해도 손주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선 절대적인 신뢰를 갖게 되는 것 같다. 언젠가 내 영어를 못 알아듣고 어리둥절한 사촌들에게 유치원생이던 손녀가 직접 다가가서 정확한 발음으로 다시 말해 주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나의 부정확한 영어라 할지라도 내 손녀는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발견이었는지,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었다. 오늘도 내 가슴 안에 쏙 들어오는 두 녀석들과 진한 허깅으로 무지갯빛 사랑을 나눈다. “귀여운 나의 토끼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한마당] 스포츠와 인간사

● 칼럼 2014. 7. 14. 18:02 Posted by SisaHan
드라이브 샷이 ‘빨래줄’처럼 시원스레 쭉 뻗어나갈 때의 기분이란 한마디로 ‘장쾌’다. 하지만 드라이브 샷 잘 쳤다고 세컨 샷 좋으란 법 없고, 투 온에 버디나 파 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가 하면 드라이브 샷을 망쳤다고 파를 못한다는 법도 없다. 세컨 샷을 그린 주변에 보내 멋진 칩샷으로 홀 옆에 붙여서 파를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골프가 그래서 오묘하고 재미있다고 한다.
 
골프가 바로 인생이라는 말도 같은 연유다. 잘 맞은 타구가 있는가하면, 왠지 엉망이 될 때가 있다. 공이 페어웨이에 잘 날아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오비도 나고, 러프나 해저드, 혹은 벙커에 빠져 곤욕을 치를 때가 있다. 전반에 죽을 쒔어도 후반에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잘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눈 비 맞으며 풍상과 곡절의 삶, 반전이 거듭되며 희비의 교차 속에 살아가는 인생살이와 닮은 꼴이 골프의 묘미라고 매니아 골퍼들은 입을 모은다.
골프는 혼자서 즐길 수 있는 개인 경기다. 흔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하듯, 집중과 평정의 마인드 콘트롤이 필요하며, 스스로 룰을 지키면서 공을 옮겨놓거나 눈속임 같은 비신사적 얌체행위를 멀리하고, 자신의 실력에 따라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골프 게임은 삶의 태도 혹은 심성(心性)의 발로에 비유되곤 한다.
 
축구는 단체경기다. 11명이 그라운드에서 호흡을 맞추며 적진을 뚫고 유기적으로 연결해 골을 만들어간다. 멀티 플레이어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선수마다 임무와 영역을 구분해 공격에 나선다. 골키퍼는 골문을 지키고 풀백은 최후방 저지선을 구축한다. 전방 공격은 타겟포워드 혹은 센터포워드 등 포워드진이 주로 맡아 상대 저지를 돌파한다. 이들 중에 스트라이커, 골게터들이 골문을 가른다. 이같은 직역(職域)의 구분 외에 적진을 제압하는 전략과 전술이 중요하다. 치열한 공방과 체력싸움, 두뇌대결이 승부를 가른다. 선수들은 빈틈없는 팀워크와 연합작전, 거기에 개인기와 투지를 발휘해 상대 진영을 뚫고 들어가 골을 넣어야 한다. 
요즘 눈길을 모으고 있는 브라질 월드컵의 빅 게임들을 보고 있노라면 축구가 바로 인간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22명이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는 운동장에는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 같아서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그리고 ‘영원한 승자는 없다’고 했다. 일찍이 우승감이라던 브라질이 7골이나 먹는 치욕을 당할 줄 누가 알았겠나. 전 대회 우승팀인 스페인은 허망하게 예선 탈락하는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한국대표팀 처럼 기대와 달리 무력하게 꼴찌에 머무는 팀이 있는가 하면, 예상을 깨고 전통 강호들을 연파해 돌풍을 부른 ‘쨍 하고 해 뜬’ 팀도 있다. 패색이 짙던 팀이 연장 막바지 ‘9회말 투아웃’에 극적인 역전골로 승리를 거머쥐기도 했다. 경기내내 압도하던 팀이 방심했다 기습공격 골 한방에 무너지고, 수비에만 급급하더니 운좋은 역습이 먹혀 이긴 ‘부당한 승리’도 있었다. 유명 특급선수들이 이번에는 대체로 이름 값을 했지만, 한국의 박주영처럼 전혀 맥을 못춘 ‘종이 호랑이’도 있었다. 무명에서 일약 스타가 된 선수도 여럿이다. 승부가 격해지다 보니 일부 선수는 상대팀 선수를 가격해 골절상을 입히고, 위험한 태클로 퇴장 당했다. 심판 눈을 속인 교묘한 반칙, 페널티킥을 노린 헐리우드 액션이 난무한다.
 
‘쥐약’을 먹은 건지 실력이 없는건지, 엉터리 판정으로 욕을 먹은 심판이 있었고, 어떤 심판은 옐로-레드카드를 수시로 빼어 드는데, 반대로 너무 카드발동을 아껴서 답답증을 준 심판도 보였다. 적시에 기막힌 선수교체로 짜릿한 승리를 일군 명감독이 찬사를 받는 반면, 거듭된 패배로 도중에 사퇴하거나 귀국 즉시 짐을 싼 감독, 그만 둘 처지에서 정홍원 총리처럼 슬그머니 눌러앉는 홍명보 감독같은 사례도 등장했다. 장외에서는 암표가 극성을 부렸는데, 경찰이 파헤치고 보니 부패소문이 파다한 주최측 FIFA의 내부에 표를 빼돌린 용의자가 숨어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축구장의 겉과 속에는 세상의 천태만상이 고스란히 투영된 듯하다. 아름다운 우정과 정정당당한 경쟁 보다는 승리 지상주의와 정글의 법칙, 황금의 논리와 흥행 극대화가 돋보인다. 각박한 경쟁사회, 물량주의와 목표 지상주의의 세태가 그대로 녹아있음을 본다. 인간사에 있어 정의와 선과 진리와 평화라는 이상향은 늘 멀게만 느껴지는 것처럼….
스포츠 역시 삶의 표현이요, 인간사회의 축소판이다.
 
< 김종천 편집인 >


304명의 사망·실종자를 낸 세월호 참사가 정부의 총체적 무책임과 비리, 무능의 결과였음이 8일 감사원의 감사 결과로 확인됐다. 희생자 가족들과 언론이 지적했던 그대로다.
세월호는 바다에 띄워선 안 되는 배였다. 증축된 세월호는 강한 풍속에서나 급선회할 때 옆으로 기울어지는 각도 등이 복원성 기준을 초과하고 있었다. 급변침 등에 전복할 우려가 컸던 것이다. 그런데도 선박검사를 맡은 한국선급은 증축 설계업체가 허위로 내놓은 시험보고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등 부실 검사 끝에 이를 승인했다. 애초 항로 취항이 불가능했는데도, 인천항만청은 청해진해운이 변조한 자료를 받아들여 세월호의 취항을 승인했다. 인천해경은 심사 전 사흘간 해운회사의 향응을 받고, 심사 필수서류도 제출하지 않은 세월호의 운항관리규정을 승인했다. 그렇게 승인된 규정만으로도 이미 과적인데, 출항 당일 해운조합은 화물을 그보다 더 과적한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출항허가를 내줬다.
 
하나하나가 부실과 비리투성이다. 안전의 핵심 요소들이 그렇게 조작되고 확인되지 않은 채 배가 띄워졌으니 언제든 대형 참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위험을 관계자들이 몰랐을 리도 없다. 생때같은 목숨을 죽게 만든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사고 뒤에도 구조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무능과 무책임으로 다 날려버렸다. 최초 신고를 접수한 전남소방본부는 ‘해상 사고는 해경 소관’이라는 이유로 21분가량을 흘려보냈고,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는 건성건성 근무하다 뒤늦게 통지를 받은 뒤에도 긴박한 사고상황을 제대로 알리지 못해 사고 초기 구조의 ‘골든타임’ 47분을 허송했다. 현장의 해경 123정이나 목포해경도 승객의 퇴선을 지시하거나 적극 유도하지 않았다. 해경본청은 배가 가라앉는 순간까지 ‘여객선 자체 부력이 있으니 차분하게 구조하라’는 엉뚱한 지시만 했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전원구조 따위 확인되지 않은 언론보도를 전파하는 등 되레 혼란을 부채질했다. 제구실을 한 기관은 아예 없었던 셈이다.
 
무엇보다 최고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부터 자리에 없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국회 증언에 따르면, 사건 당일 오후 늦게까지 7시간이 넘도록 박 대통령은 세월호와 관련한 회의는커녕 대면보고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김 실장은 당일 대통령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지 않았다는 얘기다. 4월16일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부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