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은 제50주년 방송의 날이다. 방송의 날은 1947년 9월3일 우리나라 방송이 국제무선통신회의에서 일본 호출부호 대신 독자적인 호출부호를 배당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64년 제정됐다. 이른바 전파 독립, 방송 독립을 기념하는 날인 셈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라면 방송인뿐 아니라 온 국민이 매우 축하를 해야 마땅한 날이다. 더구나 50주년은 자주 오지 않는 특별한 기념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방송의 현실은 축하를 받기엔 너무나 참담하다. 2일 저녁 열린 방송의 날 50주년 기념 축하연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과 이경재 방송통신위원장 등 박 정권의 고위인사들과 방송사 사장 등 간부들이 무엇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를 자르고 손뼉을 쳤는지 알 길이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시청자의 사랑을 받는 공정방송을 축하하는 자리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최근 이른바 ‘공영방송’이라고 자부하는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는 이들 방송이 단순히 국민을 위한 방송이길 포기한 데 그치지 않고 얼마나 뼛속까지 권력과 정권의 시녀로 전락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국방송은 지난달 31일 방영 예정이던 <추적 60분>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전말’ 방송을 내보내지 않았다. 담당 국장이 내세운 이유가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사건 수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방송 시기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별개의 사건을 연계하는 창의성이 놀라울 뿐이다. 이에 앞서 23일에는 문화방송의 <시사매거진 2580>의 3편 중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을 다룬 ‘국정원에 무슨 일이?’ 편이 통째로 날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권 때 해고된 뒤 아직도 거리를 헤매고 있는 해직기자 18명 가운데 문화방송, <YTN> 등 방송기자가 절대다수인 14명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도 방송의 날 50주년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다.
 
박 대통령은 축하연 연설에서 ‘방송산업을 창조경제의 핵심 산업으로 육성하겠다. 방송산업을 저해하는 규제를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지금 공정성과 언론의 책임은 방기한 채 편파와 왜곡, 시청률만을 좇는 선정적 프로그램을 남발하는 종합편성채널의 허가를 앞두고 당시 정부·여당이 내놓았던 논리와 너무 흡사하다. 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당국은 공정성을 상실한 방송은 창조경제의 핵심이 되기는커녕 그 이전에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흉기’가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방송의 공정성을 위해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그의 대선공약을 이행하는 데 주력할 때다.


새들은 도로의 ‘제한속도’를 안다

● 토픽 2013. 9. 9. 16:55 Posted by SisaHan

생존을 위한 놀라운 적응능력

미 년8천만마리 로드킬
날개 긴 새들은 사라져
제한속도 맞춰 날아올라

도로는 새들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단절시킬 뿐 아니라 자동차 충돌이라는 직접 위협을 가한다. 미국에서만 연간 8000만 마리의 새들이 도로에서 죽임을 당한다. 세계적으로는 해마다 수백만 마리가 희생될 것이다.
이런 대규모 위협에 잘 적응한 새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사라질 것이다. 도로는 새에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진화할 것을 요구한다.
사실, 새들은 놀라운 적응 능력을 가지고 있다. 도시에 사는 명금류는 소음에 맞서 노래의 주파수를 높이기도 하고, 러시아워를 피해 노래시간을 조정하기도 한다.
새들은 도로에서 어떻게 적응할까. 관건은 차가 어느 정도 다가왔을 때 날아갈까이다. 너무 늦으면 차에 치고 너무 이르면 먹이를 제대로 먹지 못한다. 이런 적응은 처음이 아니다. 탐조 애호가가 많은 도시의 새들은 이미 농촌에서보다 사람이 더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날아간다. 도시 사람이 농촌 사람보다 덜 위험하기 때문이다.
 
최근 캐나다 연구자들은 새들이 새로운 천적인 자동차에 어떻게 적응하는지를 실험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프랑스에서 새들이 자동차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했다. 주로 까마귀, 집참새, 대륙검은지빠귀 등이 도로에서 먹이를 먹다가 자동차가 다가서면 날아갔는데, 흥미롭게도 도로의 제한속도에 따라 날아오르기까지의 접근 허용 거리가 달라졌다.
제한속도가 시속 50㎞인 도로에서 새들은 15m까지 접근했을 때 날아갔지만 제한속도 110㎞ 도로에선 75m 밖에서 날아올랐다. 어떤 도로냐가 중요하지 개별적인 자동차의 속도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새들은 도로의 위험을 자동차의 평균 속도, 곧 제한속도와 연관지어 평가한다는 것이다. 마치 도시에서 사람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먹이를 먹는 것이 유리하듯이, 도로에선 제한속도에 맞추어 날아오르는 거리를 잡는 개체가 살아남는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바이올로지 레터스> 최근호에 실린 이 연구는 또 새끼를 기르는 어미 새가 많은 봄에는 자동차가 가깝게 접근했을 때에야 날아가는 경우가 많았고, 어린 새가 많은 가을엔 멀찍이 차가 와도 날아간 사례가 많다고 밝혔다.
 
도로가 새들을 무자비하게 ‘선택’한 사례도 있다. 일본 나고야 대학의 미국인 연구진은 지난 30년 동안 미국 네브라스카에 서식하는 삼색제비의 사회행동과 군집생활을 연구해 왔다. 이 새들은 1980년대 도로가 건설되자 절벽 대신 다리, 고가도로, 배수로 등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당연히 자동차와 충돌해 죽는 개체가 많았다. 그런데 30년 동안 이 제비의 전체 개체수는 증가했는데도 로드킬을 당하는 제비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놀랍게도 그 사이 이 제비의 날개 길이는 상당히 짧아졌다. 날개가 긴 제비가 주로 자동차와 충돌해 죽었던 것이다. 날개가 짧아야 도로에서 재빨리 수직으로 날아오를 수 있다.
도로는 날개가 긴 제비를 솎아냈고, 날개가 점점 짧아진 제비들은 로드킬을 당하는 횟수가 훨씬 줄어들게 된 것이다. 이 연구는 지난 3월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실렸다.


홍피터 선교위원장(앞 왼쪽 2번째) 차광일 총회장(3번째)과 성결선교회원들.


차광일 총회장 등 참석… “바울처럼 복음전파 열정을”

미주 성결교회 캐나다지방회(회장 안도환 피터보로교회 담임목사)의 성결선교회(회장 허정기 몬트리올 호산나교회 담임목사)가 이성국·서지연 러시아선교사 2차 파송예배를 지난 28일 저녁 벧엘성결교회에서 교단 총회장 차광일 목사와 해외선교위원장인 홍피터 목사, 지방회 성결선교회원을 비롯한 소속 목회자와 성도 등이 참석한 가운데 드렸다.
선교회장 허정기 목사 인도로 드린 예배는 지방회장 안도환 목사의 기도와 서기 박종현 목사(늘푸른교회 담임)의 사도행전 26장 24절 성경봉독, 송경란 집사(벧엘교회) 찬양에 이어 차광일 총회장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는 제목으로 바울이 예수님에게 미쳐서 위대한 사도가 된 것처럼 주님의 복음전파 사역에 혼신과 열정을 다하는 선교사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전했다.
 
이어 파송식은 이성국-서지연 선교사와 가족 소개 후 서약과 총회장 및 선교위원장이 파송기도 및 파송장 수여, 후원 약정서 및 선교비 전달 등 순으로 진행됐다. 홍피터 총회 선교위원장은 권면에서 “한 영혼만이라도 사랑한다는 열정으로 겸손하고 성실하게 섬기라”고 당부했다. 러시아에서 헌신중인 바로네즈 벧엘교회 사역을 동영상으로 소개한 이성국 선교사는 인사를 통해 “든든한 마음으로 나아가며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성심을 다하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이 선교사 가족들은 이어 헌금 특송을 했다. 
예배는 선교회 회계 여민상 목사(벧엘교회) 헌금기도와 총무 이양무 목사(리치몬드힐 교회 담임) 광고, 부총회장인 김병곤 목사(새순교회 담임) 축도로 마쳤다.
 
< 문의: 647-405-7417 >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을 살며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구하는 기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및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또 신앙 생활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필요한 가장 핵심적인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을 이해하는 두 가지 중요한 관점이 있다. 간구와 서약! 이다. 즉, 주기도문은 ‘이렇게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간구이며, 동시에 ‘이렇게 되도록 살겠습니다’ 라는 서약이다. 가령,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는 그 자체가 간구이면서, 동시에 나도 유혹에 빠져서 악에 넘어지지 않도록 살겠습니다! 서약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각각의 기도를 따라 간구할 뿐만 아니라, 생활 신앙인으로서 순간 순간 그렇게 살겠노라 서약하며 실천하라는 뜻을 가르치신 것이다.
신자의 일상 생활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들이 생각보다 참 많다. 순간 순간 세상과 사탄의 유혹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매 순간 이런 유혹에 직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기도는 산을 옮기는 일과 같은 굉장한 문제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 우리의 생각이나 말, 행동을 결정하는 일상적인 삶 속에 필요로 하는 것이다. 

또 사람은 어떤가? 세상 사람도 그렇다 하더라도, 솔직히 가까운 사람도 웬수(?)로 보일 때가 참 많다. 남편, 아내, 가게에 찾아온 손님, 심지어 같은 교인들끼리도 대놓고 웬수라고 하진 않지만, 웬수 비슷하게 볼 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 잘 다니고,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잘 하는 것 같은데, 생활에서 덕이 안되는 사람이 있다. 인격에서, 일터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그래서 저 사람이 있는 교회라면 차라리 교회 안다니는 게 낫다! 이렇게 까지 말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웬수 아닌 사람이 왜 웬수로 보이는가? 왜 신앙인이라는 사람 때문에 교회 가기가 싫은가? 신앙생활이 문제라기 보다는 생활신앙이 안되니까 시험에 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겐 비단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생활신앙이 있어야 한다. 신앙은 좋은데 사람이 좀 그래! 이렇게 말하는 심중에는 이미 우리가 생활신앙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을 반증한다. 신앙생활하면 왠지 우리 삶의 일부분만, 가령 교회 간다든지 기도 한다든지 선교 한다든지…뭐 이런 것만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 만이 전부는 아니다. 소위 말하는 신앙생활이 다가 아니라 생활신앙도 참으로 중요하다! 아니 우리 생활이 다 신앙 생활의 연장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신앙이 좋다는 말은 비단 신앙생활을 잘 할뿐만 아니라 생활신앙도 함께 따라 주는 사람에게 써야 할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선언한다. 이 고백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생활도 잘 하고, 생활 신앙인으로서 이 땅에서 하늘에 속한 시민답게 살고자 할 것이다. 주기도문처럼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 고백과 다짐에 걸맞는 삶을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서약하며 살 것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생활신앙으로 보다 성숙한 삶을 추구할 때이다. 

< 이부형 목사 - 시온성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