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스포츠와 인간사

● 칼럼 2014. 7. 14. 18:02 Posted by SisaHan
드라이브 샷이 ‘빨래줄’처럼 시원스레 쭉 뻗어나갈 때의 기분이란 한마디로 ‘장쾌’다. 하지만 드라이브 샷 잘 쳤다고 세컨 샷 좋으란 법 없고, 투 온에 버디나 파 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가 하면 드라이브 샷을 망쳤다고 파를 못한다는 법도 없다. 세컨 샷을 그린 주변에 보내 멋진 칩샷으로 홀 옆에 붙여서 파를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골프가 그래서 오묘하고 재미있다고 한다.
 
골프가 바로 인생이라는 말도 같은 연유다. 잘 맞은 타구가 있는가하면, 왠지 엉망이 될 때가 있다. 공이 페어웨이에 잘 날아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오비도 나고, 러프나 해저드, 혹은 벙커에 빠져 곤욕을 치를 때가 있다. 전반에 죽을 쒔어도 후반에 만회하고도 남을 만큼 잘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눈 비 맞으며 풍상과 곡절의 삶, 반전이 거듭되며 희비의 교차 속에 살아가는 인생살이와 닮은 꼴이 골프의 묘미라고 매니아 골퍼들은 입을 모은다.
골프는 혼자서 즐길 수 있는 개인 경기다. 흔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하듯, 집중과 평정의 마인드 콘트롤이 필요하며, 스스로 룰을 지키면서 공을 옮겨놓거나 눈속임 같은 비신사적 얌체행위를 멀리하고, 자신의 실력에 따라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골프 게임은 삶의 태도 혹은 심성(心性)의 발로에 비유되곤 한다.
 
축구는 단체경기다. 11명이 그라운드에서 호흡을 맞추며 적진을 뚫고 유기적으로 연결해 골을 만들어간다. 멀티 플레이어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선수마다 임무와 영역을 구분해 공격에 나선다. 골키퍼는 골문을 지키고 풀백은 최후방 저지선을 구축한다. 전방 공격은 타겟포워드 혹은 센터포워드 등 포워드진이 주로 맡아 상대 저지를 돌파한다. 이들 중에 스트라이커, 골게터들이 골문을 가른다. 이같은 직역(職域)의 구분 외에 적진을 제압하는 전략과 전술이 중요하다. 치열한 공방과 체력싸움, 두뇌대결이 승부를 가른다. 선수들은 빈틈없는 팀워크와 연합작전, 거기에 개인기와 투지를 발휘해 상대 진영을 뚫고 들어가 골을 넣어야 한다. 
요즘 눈길을 모으고 있는 브라질 월드컵의 빅 게임들을 보고 있노라면 축구가 바로 인간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22명이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는 운동장에는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 같아서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그리고 ‘영원한 승자는 없다’고 했다. 일찍이 우승감이라던 브라질이 7골이나 먹는 치욕을 당할 줄 누가 알았겠나. 전 대회 우승팀인 스페인은 허망하게 예선 탈락하는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한국대표팀 처럼 기대와 달리 무력하게 꼴찌에 머무는 팀이 있는가 하면, 예상을 깨고 전통 강호들을 연파해 돌풍을 부른 ‘쨍 하고 해 뜬’ 팀도 있다. 패색이 짙던 팀이 연장 막바지 ‘9회말 투아웃’에 극적인 역전골로 승리를 거머쥐기도 했다. 경기내내 압도하던 팀이 방심했다 기습공격 골 한방에 무너지고, 수비에만 급급하더니 운좋은 역습이 먹혀 이긴 ‘부당한 승리’도 있었다. 유명 특급선수들이 이번에는 대체로 이름 값을 했지만, 한국의 박주영처럼 전혀 맥을 못춘 ‘종이 호랑이’도 있었다. 무명에서 일약 스타가 된 선수도 여럿이다. 승부가 격해지다 보니 일부 선수는 상대팀 선수를 가격해 골절상을 입히고, 위험한 태클로 퇴장 당했다. 심판 눈을 속인 교묘한 반칙, 페널티킥을 노린 헐리우드 액션이 난무한다.
 
‘쥐약’을 먹은 건지 실력이 없는건지, 엉터리 판정으로 욕을 먹은 심판이 있었고, 어떤 심판은 옐로-레드카드를 수시로 빼어 드는데, 반대로 너무 카드발동을 아껴서 답답증을 준 심판도 보였다. 적시에 기막힌 선수교체로 짜릿한 승리를 일군 명감독이 찬사를 받는 반면, 거듭된 패배로 도중에 사퇴하거나 귀국 즉시 짐을 싼 감독, 그만 둘 처지에서 정홍원 총리처럼 슬그머니 눌러앉는 홍명보 감독같은 사례도 등장했다. 장외에서는 암표가 극성을 부렸는데, 경찰이 파헤치고 보니 부패소문이 파다한 주최측 FIFA의 내부에 표를 빼돌린 용의자가 숨어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축구장의 겉과 속에는 세상의 천태만상이 고스란히 투영된 듯하다. 아름다운 우정과 정정당당한 경쟁 보다는 승리 지상주의와 정글의 법칙, 황금의 논리와 흥행 극대화가 돋보인다. 각박한 경쟁사회, 물량주의와 목표 지상주의의 세태가 그대로 녹아있음을 본다. 인간사에 있어 정의와 선과 진리와 평화라는 이상향은 늘 멀게만 느껴지는 것처럼….
스포츠 역시 삶의 표현이요, 인간사회의 축소판이다.
 
< 김종천 편집인 >


304명의 사망·실종자를 낸 세월호 참사가 정부의 총체적 무책임과 비리, 무능의 결과였음이 8일 감사원의 감사 결과로 확인됐다. 희생자 가족들과 언론이 지적했던 그대로다.
세월호는 바다에 띄워선 안 되는 배였다. 증축된 세월호는 강한 풍속에서나 급선회할 때 옆으로 기울어지는 각도 등이 복원성 기준을 초과하고 있었다. 급변침 등에 전복할 우려가 컸던 것이다. 그런데도 선박검사를 맡은 한국선급은 증축 설계업체가 허위로 내놓은 시험보고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등 부실 검사 끝에 이를 승인했다. 애초 항로 취항이 불가능했는데도, 인천항만청은 청해진해운이 변조한 자료를 받아들여 세월호의 취항을 승인했다. 인천해경은 심사 전 사흘간 해운회사의 향응을 받고, 심사 필수서류도 제출하지 않은 세월호의 운항관리규정을 승인했다. 그렇게 승인된 규정만으로도 이미 과적인데, 출항 당일 해운조합은 화물을 그보다 더 과적한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출항허가를 내줬다.
 
하나하나가 부실과 비리투성이다. 안전의 핵심 요소들이 그렇게 조작되고 확인되지 않은 채 배가 띄워졌으니 언제든 대형 참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위험을 관계자들이 몰랐을 리도 없다. 생때같은 목숨을 죽게 만든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사고 뒤에도 구조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무능과 무책임으로 다 날려버렸다. 최초 신고를 접수한 전남소방본부는 ‘해상 사고는 해경 소관’이라는 이유로 21분가량을 흘려보냈고,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는 건성건성 근무하다 뒤늦게 통지를 받은 뒤에도 긴박한 사고상황을 제대로 알리지 못해 사고 초기 구조의 ‘골든타임’ 47분을 허송했다. 현장의 해경 123정이나 목포해경도 승객의 퇴선을 지시하거나 적극 유도하지 않았다. 해경본청은 배가 가라앉는 순간까지 ‘여객선 자체 부력이 있으니 차분하게 구조하라’는 엉뚱한 지시만 했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전원구조 따위 확인되지 않은 언론보도를 전파하는 등 되레 혼란을 부채질했다. 제구실을 한 기관은 아예 없었던 셈이다.
 
무엇보다 최고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부터 자리에 없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국회 증언에 따르면, 사건 당일 오후 늦게까지 7시간이 넘도록 박 대통령은 세월호와 관련한 회의는커녕 대면보고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김 실장은 당일 대통령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지 않았다는 얘기다. 4월16일 대한민국은 대통령부터 부재했던 것이다.


정부가 7일 북한의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응원단 파견 제안을 받아들였다. 남북 단일팀 구성이나 공동 응원 등과는 거리가 있지만 경색된 남북관계의 물꼬를 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기 바란다.
북쪽이 평화공세를 계속하고 있으나 태도가 이전에 비해 그다지 달라진 건 아니다. 북쪽은 이날 발표한 ‘공화국 정부 성명’에서도 핵·경제 병진노선을 고수하고 한-미 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하는 등 지금까지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공화국 정부 성명’이라는 형식이 이례적이긴 하지만 내용은 6월30일 내놓은 ‘국방위원회 특별제안’의 연장선에 있다. 자신의 노선을 기정사실화하고 여러 사안에 대한 책임을 남쪽에 돌리면서 남쪽이 굽히고 들어오기를 압박하는 것이다. 북쪽이 정말 남북관계를 풀겠다는 뜻이 있다면 이런 태도부터 바꿔야 한다.
 
그렇더라도 정부가 북쪽과 비슷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정부는 이날 북쪽에 ‘비합리적 주장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우리와의 대화의 장에 조속히 나와야 한다’고 했는데, 정부가 ‘대화의 장’을 마련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의문이다. 실제로 ‘북쪽이 먼저 잘못을 인정해야 대화할 수 있다’는 이제까지 정부 모습은 대화 재개 노력과는 거리가 있다. 남북 사이 신경전을 중단하고 생각 차이를 좁혀보겠다면 남쪽이 먼저 나서야 한다. 2월 한차례 열고 중단한 고위급 회담을 재개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본다.
최근의 동아시아 정세는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을 높인다. 우리나라는 갈수록 심해지는 미국·일본과 중국 사이 대결 구도에 끼여 운신 폭이 제한되고 있다. 북-일 협상의 진전 역시 한반도 관련 사안에 대한 우리의 주도권을 좁히고 있다. 나아가 우리의 최대 현안인 북한 핵 문제가 뒷전으로 밀리는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남북 사이 갈등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이런 양상은 더 심해질 것이다. 거꾸로 남북관계가 잘 풀린다면 한반도 관련 현안들에 집중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기게 된다.
 
과거 경험을 돌아보더라도 남북관계와 한반도 관련 현안의 진전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남북관계를 전환하려면 우리 정부의 의지와 창의적인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 북쪽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래서는 아무런 문제도 풀리지 않는다. 다른 나라들도 남북관계 개선에 반대하지 않는다. 정부 발상 전환이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6.25 한국전쟁 때문에 북한은 우리에게 상당 기간 무서운 존재였고 배척 대상이었다. 한편 1960~70년대 경제성장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심화되다 보니 사회주의 북한을 대안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중에 북한을 찬양하는 언동 때문에 법적 처벌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붕괴와 탈냉전 후에는 국가보안법 사건 자체가 많이 줄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꼭 친북 언행이 아닐지라도 진보 성향의 행동만 해도 법적 조치와는 무관하게 여론재판이 드세게 진행된다. 일단 종북-좌빨이라는 딱지부터 붙는다.
해방 후 60년대 초까지는 북한이 남한보다 군사적,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남북 체제경쟁은 70년대 중반에 남한의 절대적 우위로 끝났다. 남한은 이제 G-15 경제대국이 되었고 국제적 위상도 매우 높아졌다. 반면 90년대 중반에 시작된 탈북행렬이 아직도 이어질 정도로 북한은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핵·미사일 문제 때문에 여러해 국제적 제재를 받고 있다. 국가 이미지도 나쁜 편이다. 이렇게 남한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북한을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지금 이 시기에도 남한에 있다는 것인가? 종북 논쟁은 참으로 시대착오적이고 비현실적인 정치공세다.
 
좌익 빨갱이도 실체가 없는 공격용 용어다. 6.25를 전후하여 북한 체제가 좋다고 자진 월북한 사람들이 제법 된다. 그들은 스스로도 좌익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사람이 남한에는 없다고 본다. 다만, 정부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이 없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들도 북한을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의 폐단을 지적하더라도 북한이 아니라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수준의 복지나 분배를 요구한다. 이 정도면 좌익이라 할 수도 없고 빨갱이는 더더욱 아니다.
김영삼 정부 때까지는 통일 문제가 담론 차원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남남갈등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들어 햇볕정책이 추진되자 우리 사회 내부에 이념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패러다임이 완전히 다른 대북정책으로 남북 교류협력이 일상화되면서 담론 차원에 머물러 있던 통일 문제가 현실 차원의 문제로 다가왔다. 그러자 분단체제하에서 누리던 기득권이 위협받게 될 것을 우려한 보수층의 저항이 시작됐다. 대북지원은 ‘퍼주기’, 대북협상은 ‘끌려다니기’로 매도됐다. 남북갈등과 차별화하기 위해 남남갈등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보수층에서는 햇볕정책이 기본적으로 친북적이기 때문에 안보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한-미 동맹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고 비난했다. 동맹이 외교수단이 아니라 국가목표처럼 되어 버렸다.
 
남북관계 개선 노력 대(對) 분단체제하에서 구축된 기득권 유지 욕망 간의 충돌, 그것이 남남갈등의 출발점이고 친북-종북-좌빨 논쟁의 뿌리다. 노무현 정부 때까지만 해도 친북-반북 논쟁에 그쳤던 남남갈등은 이명박 정부 들어 종북-좌빨 논쟁으로 판이 커졌다.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하는 상황에서 민간 차원의 대북지원 노력이나 대북정책 비판까지도 종북-좌빨로 매도됐다. 박근혜 정부 들어 그 정도가 좀더 심해지는 것 같다.
종북-좌빨 논쟁이 우리 사회를 풍미하는 한, 남북 대화와 교류는 할 수 없다. 화해와 협력은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남북관계 원리상, 이런 과정과 절차를 밟지 않으면 박근혜 정부 대북정책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종북 논쟁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한 박근혜 정부는 임기 내내 통일 관련해서 아무런 업적도 남길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종북 논쟁은 실로 무서운 반통일·분단 이데올로기이고, 남북관계에는 북핵 문제보다 더 강력한 족쇄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를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제기했다면, 박 대통령은 자기 대북정책의 족쇄인 종북 논쟁부터 끝장내주어야 한다. 통일대박론을 제기할 때처럼 직접 나서야 한다.
< 정세현 - 원광대 총장, 전 통일부장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