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을 남겨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홀연히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생명의 푸름이 가장 빛을 발하는 오월, 그가 없는 빈자리는 더욱 쓸쓸하고 애달프다. 날이 갈수록 나라 형편이 어지러워지고, 그가 꿈꾸었던 ‘사람 사는 세상’이 아득히 멀어지고 있는 현실도 그를 그리는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한다.

하지만 이런 분노와 허탈함 속에만 마냥 빠져 있을 수는 없다. 아무리 현실의 벽이 단단하고 높아도 고인이 매달았던 깃발을 내릴 수는 없다. 반칙과 특권의 폐지, 국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그를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남겨진 거부할 수 없는 과제다. 현 정권의 실정이 거듭되면서 희망을 말하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한동안 불가능한 것으로만 보였던 진보개혁 세력 집권에 대한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면서 노무현 정신의 계승과 발전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노무현 정신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느끼고 강조하는 대목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흔들리지 않고 나가는 용기가 바로 노무현 정신의 요체가 아닐까 한다. 생전에 ‘바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그의 우직성이야말로 요즘 정치인들이 가장 귀감으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지금 노무현 정신을 말하는 정치인들은 과연 그 정신에 투철한지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보라.

야권의 지난 2년을 되돌아보면 통합보다는 분열, 단결보다는 갈등의 모습이 더 많았다. 특히 친노세력을 표방하는 세력이 뿔뿔이 흩어져 반목하는 모습은 노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많은 유권자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물론 한때 한솥밥을 먹던 정치세력도 세월이 흐르면 분화하는 게 정치 세계의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다. 기계적인 통합과 단결만이 능사도 아니다. 하지만 조그만 차이를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차이점을 강조하는 뺄셈의 정치, 더 큰 공통의 목표를 향해 단결하기보다는 눈앞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속좁음, 입으로는 노무현의 도전정신을 말하면서도 허허벌판 광야가 아니라 문전옥답 기름진 땅에만 매달리는 약삭빠른 태도는 없었는지 겸허히 뒤돌아볼 일이다.  이제 노 전 대통령의 2주기를 맞아 야권은 이런 소아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무현 정신은 특정 정치세력의 전유물이 될 수도 없고 없고 돼서도 안 된다. 그가 남긴 뜻이 진보민주세력 전체의 공통 자산으로 뿌리내리고 자라나도록 힘을 모을 때다.

주한미군이 엊그제 서류조사를 통해, 캠프 캐럴의 의심지역 인근에 화학물질·살충제·제초제 등이 담긴 다량의 드럼통이 매몰됐다고 밝혔다. 그것이 1~2년 뒤 주변 토양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도 전했다. 심각한 오염이 있었음을 시인한 셈이다. 미군의 이런 태도는 지금까지의 일방주의나 비밀주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이어서 일단 반갑다.

그러나 그런 변화를 인정한다 해도, 여전히 께름칙한 심정을 숨길 수 없다. 고엽제 드럼통이 매몰됐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그야말로 간단하다. 시추공을 뚫어보면 알 수 있고, 지하투과 레이저 등 비파괴 검사 기술을 이용해도 미세한 균열까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미군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방대한 양의 서류부터 조사하겠다고 고집하고 있어, 공연한 의구심을 일으킨다.
서류조사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건 아니다. 매몰된 물질의 종류와 양, 반입 및 이동 경로와 시기, 이용과 처리 등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주민의 불안이나 국민의 상처 난 감정을 헤아린다면, 고엽제의 매몰 여부를 확인하는 것만큼 당장 급한 일은 없다. 일의 순서를 잘못 잡아, 불필요한 오해와 의문을 야기할 이유가 없다. 증언자를 회유할 시간을 벌려는 것 아니냐는 억측까지 나오는 게 현실이다. 일의 순서와 함께 조사 방법과 절차 그리고 현장조사를 한국 쪽과 함께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도 억측을 해소하는 데 긴요하다. 기왕에 공동조사를 약속했던 터이니, 결심만 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당장 문서 검증부터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례적으로 신속한 조처와 적극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벌써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의 불공정성이 공론화되는 이유를 숙고해야 한다. 진상규명 후 제도개선 논의가 합리적일 터이지만, 검증 방법 및 절차 그리고 조사 과정이 미군 중심으로 이뤄진다면 결과도 나오기 전에 미선•효순 사태 때와 같은 난기류가 재현될 수도 있다. 이제야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주한미군은 독극물 등을 한국 쪽에 통보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반입해 멋대로 이용하고 처리했다. 그에 대한 성찰과 반성도 이번에 함께 보여줘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도 정당한 요구를 회피해선 안 된다. 미국의 선처만 바라는 태도를 보였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맹성할 쪽은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다.

[칼럼] 돈을 버는 세 가지 방법

● 칼럼 2011. 5. 29. 15:56 Posted by Zig

세상에는 돈을 버는 방법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을 해서 버는 거고, 둘째는 남의 것을 훔치는 거고, 셋째는 남이 내 것을 훔쳐가지 못하게 지키는 거다.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우리 인간들은 이 세 가지 방법 중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을 선택한다. 일을 더 많이 하면 더 많이 벌 수 있다. 그러나 남의 것을 훔쳐서 더 많이 벌 수 있으면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에 남의 것을 훔치려고 한다. 속된 말로 도둑질의 벌이가 괜찮으면 일하는 것보다 도둑질하는 게 낫다는 거다. 그리고 남이 내 것을 자꾸 훔쳐가면 일을 더 하는 것보다 남이 내 것을 훔쳐가지 못하게 지키는 게 더 남는 일이 되고, 그러면 일하는 시간을 줄여 지키는 데 쓴다.
독자분들께는 좀 황당하게 들렸을지 모르지만,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한계생산성 균등의 법칙’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제한된 시간과 에너지를 여러 가지 생산활동에 어떻게 배분하는 게 최선인가를 설명한다.

이 이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인간의 경제적 본성을 잘 설명한다. 현명한 부산저축은행의 대주주와 경영진들은 이 원리를 잘 터득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지만, 이는 비단 여기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며, 특히 이 정부가 들어선 이후 우리 사회에 더욱 심해진 현상이다. 다만, 우리가 이런 일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건 그럴듯한 경제이론을 앞세우고 미사여구로 포장해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뿐이다.
자기가 가져야 할 정당한 몫 이상으로 가져간다면 그건 남의 것을 훔치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가 부담해야 할 정당한 몫을 남에게 떠넘긴다면 그건 남의 것을 훔치는 거와 무엇이 다른가. 열심히 일해도 자식 대학 등록금 만들기 어려운 서민들이 어찌 제 몫을 도둑맞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부자가 더 가져가야 성장이 되고 밑으로 떨어지는 국물도 생긴다는 1970년대 사상으로 중무장한 ‘747정책’ 아래 행해진 부자감세, 친재벌, 4대강 건설과 부동산투기 조장, 서민복지 축소, 대기업의 중소기업 약탈 행위 등을 생각해보라. 재벌이나 부동산 부자들한테는 이렇게 버는 것이 정당하게 일해서 버는 것보다 벌이가 훨씬 더 좋으니 현명하신 그분들께서 정부를 부추겨 그렇게 하신 건 당연하다.

대통령께서 친히 금융감독원까지 방문하셔서 “국민들보다 내가 더 분노한다”고 하시면서 “저축은행 불공정 문제를 엄중히 조사해서 조치하라”고 엄명을 내리셨다고 한다. 필자가 감히 그 말씀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는 없지만, 어째 공허하게만 들린다. 대통령께서 저축은행 사건을 감독비리 문제만으로 보셨다면 아직 문제의 본질을 모르시는 거다. 감독개혁을 해도, 아무리 엄중한 조사와 처벌을 주문해도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그때 뿐이다.
도둑질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둑질의 수익성을 낮추는 거다. 법을 엄정히 집행해서 남의 돈을 훔치기 어렵게 만들고, 잡히면 벌금이나 처벌을 무겁게 해서 도둑질의 대가로 치르는 비용을 높이면 된다.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남의 몫을 탐내지 못하게 하면 된다. 해법은 간단하다.
문제는 이 사회가 도둑질의 수익성을 높였다는 거다. 별을 서너개는 달아야 장관이 되는 정부, 두달 만에 3억5000만원을 받았다는 장관 후보자의 남편, 1년에 수억원을 버는 대통령 주변의 낙하산들, ‘경제를 위해’ 항상 용서받는 재벌 총수들, 남의 몫을 뺏는 데 열심인 재벌과 부자들…. 이렇게 부정과 비리, 편법과 사취가 난무하고 용인되는 사회에서 도둑질의 수익성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이 사회가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법은 오직 하나다. 법치다. 국민의 권리를 짓밟는 삿된 법치 말고 국민의 인권과 복리를 지켜주는 공정하고 진정한 법치 말이다. 그래서 뺏고 뺏기지 않으려고 낭비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아껴 모두 일하는 데 써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잘사는 선진사회가 된다. 대통령께서는 국민들이 대통령보다 ‘더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한다.

<이동걸 - 한림대 재무금융학과 객원교수, 전 한국금융연구원장>

[1500자 칼럼] 그리스도인의 삶

● 칼럼 2011. 5. 29. 15:55 Posted by Zig

어느 주일 설교하면서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며 유명한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오케스트라에 대해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어쩌면 한 번쯤은 칭찬할 만한 그런 때에도 연주에 충실하노라 칭찬과 격려보다 질책을 더했다. 그러니 단원들의 불만이 어떠 했겠는가?
한 번은 베토벤의 9 번 교향곡을 연주했는데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단원들은 이번에는 칭찬을 해주겠지 하며 이번에도 칭찬 안 해주면 그를 지휘대에서 밀어버릴거다 했는데 토스카니니가 일갈했다.
“내가 누군가? 토스카니니가 누군가? 여러분은 누군가?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베토벤 만이 위대하다.”고 했다.

곡을 만든 베토벤이 위대하듯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위대하다고 설교를 했는데 예배 후 친교 시간에 토스카니니의 이야기가 나오자 어떤 분이 그렇게 말했다. “우리 편에서는 베토벤이 위대하지만 베토벤 편에서는 연주자가 위대해야 하지요” 했다.
그렇다. 아무리 좋은 곡을 만들었다 해도 그 곡을 연주하는 자들이 곡을 온전하게 해석하고 나타내지 않으면 무위로 돌아가고 곡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피조물 인생 역시 아름다운 생애를 삶으로 빛과 소금으로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나님이 다시 위대한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창조하신 그 의도대로 빛을 나타내고 소금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이 생애의 목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작품을 온전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설교자로 강단에서 외치거나 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남을 향해 자비의 손을 내밀거나 오지에서 일생을 헌신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바로 작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뿐인가? 회개하는 모습으로 강단에서 회초리를 들어 자신의 종아리를 치는 모습도 교훈적일 수 있겠다.

나는 최근 한 성도의 고회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었다. 목회자의 자녀로 자란 그는 당시 목회자의 생활환경이 너무 열악하였기에 이유 없는 반항이란 표현 그대로 그는 반항하고 가출하기도 했다. 그래서 때로는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한 번은 유치장 안에서 창틀에 턱걸이를 하듯 매달려서 밖을 보는데 어린 학생들의 장래를 염려하신 교목께서 경찰서를 방문했다가 돌아가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때 가슴에 울컥 치미는 뭔가 있어 크게 결심하고 담당 형사를 불렀다. 이번에 나가면 나,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그는 그 길로 채석장으로 가서 그의 삶을 바꾸었다고 간증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분에게 감동하면서 아울러 나는 나의 지나가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감동을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말로 행동으로 작품을 이루며 나아가 말은 없으나 모습과 분위기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온전히 나타낼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나 스스로 심각해졌다.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