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하는가?

● 칼럼 2014. 12. 21. 17:3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갑의 못된 횡포를 ‘갑질’이라고 한다. 갑의 갑질이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한지는 당해본 을만이 안다. 그런데 갑을관계의 진짜 비극은 갑의 갑질에 있다기보다는 갑질을 당한 을이 자신보다 약한 병에게 갑질과 다를 바 없는 을질을 한다는 데에 있다. 병은 또 자신보다 약한 정에게 갑질·을질과 다를 바 없는 병질을 한다.
이런 먹이사슬 관계를 온몸으로 가장 잘 드러내는 이들이 놀랍게도 아직 갑을관계의 본격적인 현장에 뛰어들지 않은 대학생들이다. 미리 연습을 하려는 걸까? 사회학자 오찬호 박사가 출간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은 대학생들의 ‘대학서열 중독증’을 실감나게 고발하고 있다. 대학생들과의 자유로운 대화에 근거한 애정 어린 고발인지라 분노보다는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오 박사는 대학의 수능점수 배치표 순위가 대학생들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전국의 200개 대학을 일렬종대로 세워놓고 대학 간 서열을 따지는 건 단지 재미를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인정투쟁이자 생존투쟁이다. 서열이 한두개 차이 나는 대학을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서열이 앞선다는 대학의 학생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흥분한다. 이런 현실에 대해 오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대학생들은 ‘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 십대 시절 단 하루 동안의 학습능력 평가 하나로 평생의 능력이 단정되는 어이없고 불합리한 시스템을 문제시할 눈조차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본인이 당한 인격적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본인 역시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한다. 그렇게 멸시는 합리화된다.”
대학생들의 이런 정신상태는 우리 사회에서 갑을관계와 비정규직 차별이 사라지기는커녕 앞으로 더욱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 박사 말마따나, 오늘날 이십대는 “부당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로서 그런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편한 시절을 살았던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죄스러울 따름이다.


대학생들의 ‘대학서열 중독증’은 미국에서 벌어진 ‘능력주의’(meritocracy) 논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오늘날 미국의 극심한 빈부격차를 정당화하는 주요 이데올로기가 바로 “능력에 따른 차별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하는 능력주의다. 능력은 주로 학력과 학벌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고학력과 좋은 학벌은 주로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결정된다. 학력과 학벌의 세습은 능력주의 사회가 사실상 이전의 귀족주의 사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웅변해준다.
이런 한국형 ‘세습 자본주의’를 바꾸는 것이 제1의 개혁의제가 되어야 하겠지만,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사소한 차이에 대한 집착’도 성찰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수능점수 몇점이나 정규직•비정규직의 능력 차이는 사소한 것임에도 우리는 그런 차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에 따른 차별에 찬성하는 것을 정당한 능력주의라고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평등주의가 강한 사회라곤 하지만, 평등주의는 위를 향해서만 발휘될 뿐이다. 밑을 향해선 차별주의를 외치는 이중적 평등주의를 진정한 평등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이중적 평등주의는 우리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의 ‘사소한 차이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그 체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50년 전 시인 김수영이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물었듯이, 이제 우리도 스스로 물어야 할 때다. 우리가 사소한 차이에만 집착하고 그 차이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에 분개하는 동안 세상은 점점 더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건 아닐까?
< 강준만 -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



[사설] ‘재벌 세습’ 과 ‘땅콩 회항’ 되풀이

● 칼럼 2014. 12. 21. 17:38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의 파장이 만만치 않다. 그동안 숨겨졌던 사건 전말이 점차 드러나면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행태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더욱 커지고 있다. 조 전 부사장 개인에 대한 사회적 단죄와는 별개로 이번 사태를 계기로 능력과 자질을 검증받지 않은 재벌 3세의 경영 세습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사회적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세 자녀 가운데 맏이인 조 전 부사장은 1999년 미국에서 대학을 마친 뒤 곧바로 대한항공에 입사해 7년 만에 임원 자리에 앉았다. 2011년 대한항공의 객실·기내식·호텔사업 등 세 가지 사업본부의 수장 자리에 올랐고, 지난해에는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객실 서비스와 승무 업무까지 총괄하게 됐다. 조 전 부사장이 회사에서 이처럼 빠르게 높은 지위에 올라가게 된 배경은 자명하다. ‘오너 회장의 딸’이기 때문이다.
조 전 부사장의 입사와 승진 경로는, 국내 다른 재벌 3세들의 경우도 거의 다를 바가 없다. 경영 능력이나 자질을 검증받지 않은 채 단지 총수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경쟁없이 회사에 들어가 곧바로 경영 세습 절차를 밟는다. 이런 특혜는 그 자체로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해친다. 스스로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회사 재산을 사유물로 여기고, 임직원들을 부속품처럼 대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경쟁을 뚫고 입사해 밑바닥부터 시작한 다른 직원들과 호흡을 맞추기도 어려워진다.


재벌의 예외없는 경영 세습은 부정과 부패의 위험까지 태생적으로 안고 있다. 총수 가족의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기능이 마비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총수 가족이 위험에 빠질 경우 합리적인 의사결정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결국에는 위기관리 능력의 총체적 부실도 초래한다. 땅콩 회항 사건이 터진 뒤 대한항공이 보인 졸렬한 대응 방식은 좋은 예다. 게다가 견제받지 않는 총수 가족의 권력과 경영 세습은 기업 이익을 외부로 빼돌릴 위험마저 안고 있어 결국 기업가치의 위험까지 초래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만 독특하게 존재하는 기업 형태인 재벌 체제가 우리 경제의 발전에 어느 정도 기여한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경제 규모가 이미 커지고 재벌 총수 가족 경영이 3세로까지 넘어가는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단지 총수의 자녀라고 해서 무조건 경영에 참여하고 경영권을 승계받는 관행은 이제 끝나야 한다.



[사설] ‘4대강’이 빅딜·타협 대상인가

● 칼럼 2014. 12. 21. 17:3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지난 10일 해외자원개발 국정조사를 실시하고 공무원연금 개혁을 위한 국회특위 및 국민대타협기구를 구성하기로 하는 등 주요 현안에 대한 ‘빅딜’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4대강 사업 국정조사는 실종됐고, ‘정윤회 국정농단 의혹’에 대한 국회 차원의 조사도 포함되지 않았다. 정치란 게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타협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핵심 현안들을 물건 흥정하듯 주고받는 게 과연 바람직한지 여야 모두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여야 협상 테이블에 올라온 사안들은 모두 국회가 진지하게 접근하고 깊숙이 다뤄야 할, 어찌 보면 의회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과 맞닿아 있는 것들이다.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돼왔고, 자원개발과 방위산업 문제도 예산을 낭비하고 비리 의혹을 방치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행정부의 정책 잘못과 비리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건 의회의 기본 기능이기에, 사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선 벌써 국회가 나서 조처를 취했어야 옳다. 공무원연금 개혁 역시 중요하긴 마찬가지다. 이런 사안들을 ‘빅딜’이란 이름 아래 ‘뭐는 넣고 뭐는 빼는’ 식으로 타협을 하면, 4대강과 같은 사안은 국회에서 아무런 책임추궁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게 된다. 이는 국회의 임무를 방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 상원이 수년간 중앙정보국(CIA)의 테러용의자 고문 실태를 파헤쳐 행정부의 치부를 드러낸 건, 의회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훈적인 사례다. 민주당 출신인 다이앤 파인스타인 상원 정보위원장은 보고서 내용과 범위를 축소하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존 케리 국무장관의 요청을 거절하고 원안 공개를 밀어붙였다. 전직 대통령과 정부를 보호하려고 핵심 사안의 조사를 회피하는 새누리당이나, 그걸 용인해주고 “우리가 이겼다”고 자평하는 새정치연합은 이걸 보면서 무엇을 느낄지 궁금하다.


이런 식으로 무원칙한 ‘빅딜’을 하니, 협상이 끝나고도 계속 뒷말이 나오면서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벌써 새누리당은 “공무원연금 처리와 자원외교 국정조사는 동시에 시작해 동시에 끝내야 한다”고 고리를 걸었다. 행정부 비리를 추궁하는 일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갈리는 제도를 바꾸는 일을 연계해서 한꺼번에 해치우자는 건 누가 봐도 억지다. 지금 ‘빅딜’ 대상에 오른 사안들은 하나하나 모두 국민의 관심이 큰 현안이기에 국회에서 책임감을 갖고 별개로 다뤄나가는 게 옳다.



[칼럼] 무릎 꿇는 사회

● 칼럼 2014. 12. 21. 17:36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우리에게는 난해하기로 소문난 책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오늘날의 독일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유대인이었던 아도르노는 나치가 집권하자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 프롬 등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동료 학자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고, 서독이 세워진 직후인 1949년 독일로 돌아와 1969년 사망할 때까지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가르쳤다.
독일로 귀환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독일이 다시는 나치즘과 같은 야만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완전히 ‘새로운 독일’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가 가장 중요시한 것이 바로 과거청산이었다. 오늘날 독일이 ‘과거청산의 나라’, ‘역사 민족’이라고 불리며 주변국들로부터 도덕적 권위와 신뢰를 회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연합의 중심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도르노의 역할이 컸다.


아도르노는 과거청산이 제도적·인적 청산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다. 왜냐하면 “과거청산의 본질적인 문제는 드러내놓고 극우적인 집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속’에서 살아남아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위협하는 권위주의적인 성격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강조한 것이 ‘반권위주의 교육’과 ‘비판교육’이었다. 권위 앞에서 쉬이 순종하는 ‘약한 자아’가 민주주의에 가장 위협적인 요소이기에, 학생들의 비판의식을 고취해 강한 자아를 가진 시민으로 길러내는 것이 민주주의 교육의 요체라는 것이다. 그는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부당한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맞서는 능력을 키워줄 ‘저항권 교육’을 특히 강조했다. 이는 오늘날 독일 교육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교육부의 기본지침에는 “수용할 수 없는 지배관계와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능력”, “저항기술에 대한 지식”, “개혁적 혹은 혁명적 성격의 기획을 실현하는 능력”, “주어진 사회적 규범을 자유로이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규범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되어 있다.


오늘날 독일은 - 일본과는 달리 - ‘반권위주의 교육’, ‘비판교육’, ‘저항권 교육’을 통해 나치즘의 과거를 성공적으로 청산한 ‘과거청산의 모범국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숨겨진 본성을 처연하게 드러낸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고 왜소한 존재인지, 사회적 약자가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한국 자본주의가 얼마나 천민적이고 야만적이며 재벌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폭력적인지, 우리는 새삼 확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근의 사건들이 보여준 것은 우리가 여전히 권위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항공기 사무장이 무릎 꿇고, 승무원이 무릎 꿇고, <카트>의 계약직 노동자가 무릎 꿇고, <미생>의 직장인들이 무릎 꿇고, 강남의 아파트 경비원이 무릎 꿇는다. 이는 한편으로는 부당한 권력의 폭력성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현시한다.


‘무릎 꿇는 사회’는 민주사회가 아니다.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는 사상누각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려면 이제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갖춘 민주주의자를 학교에서 길러내야 한다. 더 이상 무릎 꿇는 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의 권위주의적 구조와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민주주의 교육’, 특히 ‘저항권 교육’이 시급하다.
< 김누리 - 중앙대학교 독문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