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 자생 '포스트 빈라덴' 많다

● WORLD 2011. 5. 5. 09:42 Posted by Zig

▶긴박한 작전실황 주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 둘째), 조 바이든 부통령(왼쪽 첫째),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앉은 오른쪽 둘째) 등이 1일 오후 백악관 상황실에서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실행된'오사마 빈라덴 사살작전'실황을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고 있다. 백악관이 제공한 이 사진에서 힐러리 클린턴 앞에 놓인 문서는 모자이크 처리돼 있다.

오사마 빈라덴 사살 이후 테러는?… 알 카에다 와해될까?

 오사마 빈라덴은 갔지만, 알카에다 조직은 건재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포린 폴리시>는 아프간에서 빈라덴에게 충성맹세를 한 핵심 대원이 2001년 200명에서 최근 100명으로 감소했다고 전했지만, 상하수직형 단일조직이 아닌 알카에다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같은 수치를 근거로 조직의 와해를 점치긴 힘들다고 지적된다.

9·11 테러 이후 미군에 쫓긴 알카에다 본부는 현지 이슬람 무장조직들을 지부로 편입하며, 그 역량을 재편했다. 그 지부들이 현지의 작전을 독자적으로 수행하며, 자신의 관할지 밖 작전은 알카에다 본부의 지시와 허락을 통해 수행한다는 것이다. 알카에다 본부는 조정 능력을 가지고 그 위상을 유지하며 실질적 역량을 가진 지부들이 이슬람 전역에서 사실상 알카에다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부들에 대한 조정도 2선 지도부가 관리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런 가운데 빈라덴에 이어 알카에다 2인자의 자리를 굳힌 이집트 출신의 아이만 알자와히리가 빈라덴의 공백을 메울지 주목된다. 알자와히리는 9·11 이후 빈라덴과 함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접경지대에 은신해 온 것으로 전해졌는데, 이번 빈라덴 사살 작전에서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다. 최근 중동 민주화 시위 와중에 투쟁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9·11 이후 알카에다의 메신저 노릇을 하는 한편 알카에다 관련 테러에 대부분 연루된 것으로 분석된다.

알자와히리가 본부의 조정 능력과 위상을 지킬 수 있다면, 알카에다 조직의 와해 여부는 아직 먼 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알자와히리가 창건한 '이집트 이슬람 지하드'는 아라비아반도알카에다(AQAP)와 함께 최대 역량을 가진 지부이다.

리비아 출신 아부 야흐야 알리비도 빈라덴 후계자로 거론되던 인물이다. 미군의 이라크 침공 당시 체포됐다가 이라크 바그람수용소에서 탈출한 알리비는 최근 알카에다 내 이론적 강경파로 전세계 지하드 운동을 이어받을 상속자로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평가했다.

 

알카에다의 미디어 조직인 사하브가 '카불에서 모가디슈까지'라고 표현했듯이, 알카에다 지부들은 이슬람 전역에 포진해 있다. 알카에다와 연계돼 있거나 추종하는 단체들까지 포함하면 전세계 70개국에 퍼져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프간에 이어 최대 대테러 전선인 예멘에서 미군의 목표물인 아라비아반도알카에다는 이미 중동 민주화 시위 이후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지부이다. 이밖에 이라크의 '자마아트 앗타우히드 왈지하드', 알제리의 '이슬람 마그레브 알카에다', 리비아의 '리비아 이슬람 전투그룹' 등이 대표적이다.

 

 

빈라덴 은신처서 알 카에다 특급정보 다수 확보 분석중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를 급습했던 미 해군 특수부대는 빈 라덴 제거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그의 개인 소장품 가운데 각종 정보가 담겨 있는 컴퓨터 장비 10여점을 노획했다고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등 미국 언론들이 3일 보도했다. 특수부대원들은 빈 라덴 사실 직후 그의 은신처에서 개인용 컴퓨터와 USB 드라이브 등 각종 전자장비 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한 관리는 "빈 라덴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를 확보했다는 상상이 가느냐"면서 빈 라덴 은신처를 '정보의 보고'라고 말했다. 소식통은 "수백명이 검토작업에 투입됐다"면서 "알-카에다 조직의 궤멸을 앞당길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빈라덴 밀사 쫓다 단서…특수부대 헬기작전 성공에 오바마"잡았다!"

 

신출귀몰하게 미군을 괴롭혔던 전설적인 인디언 아파치족 추장의 이름인 '제로니모'는 빈라덴을 일컫는 암호였다. 오바마는 1일 오후 5시께 파네타 국장이 '제로니모 EKIA'(Enemy Killed In Action·적 교전중 사망)라고 보고하자 주먹을 불끈 쥐고 "잡았다"(We got him)고 말했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미국 당국자들은 빈라덴의 부인 중 한명이 인간방패 구실을 했으나 미군의 무차별 사격을 막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미국이 빈라덴의 은신처를 추적하는 데 가장 큰 실마리가 됐던, 쿠웨이트 출신의 빈라덴 밀사인 '셰이크 아부 아메드'도 빈라덴과 함께 사살됐다. '알쿠웨이티'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그는 빈라덴의 가장 충직한 심복이었으나 지난해 7월 빈라덴의 은신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부주의하게 통화를 하다가 미 정보당국의 추적망에 걸리고 말았다.

중앙정보국은스텔스(B-2)기 폭격, 헬리콥터 공격, 파키스탄 정보부(ISI)와의 공조 공격 등 세가지 선택지를 오바마에게 보고했으나 오바마 대통령이 스텔스 공격을 반대했고, 파키스탄 공조는 정보유출 우려로 애당초 제외돼 헬기 공격 결정이 지난 3월22일 내려졌다. 그 뒤 미군의 네이비실 특수부대는 빈라덴의 은신처와 비슷한 모의세트를 만들고 훈련을 시작했다. 이날 공격에 투입된 부대는 미 해군의 저격전문 특수부대인 '실 팀 식스(6)' 대원 20여명이라고 언론들은 보도했다.

 

 

빈 라덴을 어떻게 찾았나? 미국이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했다고 밝히면서 작전과정 등에 대한 궁금증이 일고 있다. 외신들이 전하는 세부 상황과 의문점을 요약했다.

● 빈라덴 위치 어떻게 알았나?

"10년 가까이 행적이 묘연하던 빈라덴의 위치에 대한 단서가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은 지난해 8월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오랫동안 추적하던, 빈라덴이 신뢰하는 밀사의 위치가 이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는 바깥 정보를 빈라덴에게 전해주고 빈라덴의 메시지를 바깥으로 알리는 임무를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정보국은 처음 관타나모 기지에 수감된 죄수한테서 이 밀사의 '별명'을 들었고, 4년 전에 그의 실명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가 주로 활동하는 지역을 알아내는 데 2년을 더 보냈다. 그가 정보망에 걸려든 이후 중앙정보국은 몇달 동안 조사를 거듭한 끝에 그곳에 숨은 사람이 빈라덴임을 확신했다."

● 빈라덴이 숨었던 집은 어떤 곳인가?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 있는 빈라덴의 은신처는 2005년 지어졌고, 근처 일반 집들보다 8배나 큰 고급 맨션이라고 전했다. 이 집은 외줄의 비포장길 막다른 곳에 있고 전화나 인터넷도 연결돼 있지 않았고 쓰레기는 자체 소각해, 거의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돼 있었다. 빈라덴이 얼마나 오래 이곳에서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왜 생포하지 않고 사살했나?:

"오랫동안 정보를 모아왔기 때문에 빈라덴을 사살하지 않고 생포할 수도 있지 않았느냐는 의문도 일고 있다. 하지만 미군의 무게중심은 처음부터 사살 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 통신은 미 당국자가 "이번 작전은 생포 작전이 아니라 사살 작전이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생포했을 경우 재판 등 처리과정에서 논란이 증폭되고, 이슬람 급진세력의 반발과 공격이 이어질 가능성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 빈라덴을 사살한 것은 확실한가?

"미국이 빈라덴의 사체를 공개하지 않고 수장했기 때문에 사살당한 사람이 빈라덴이 맞는지는 미 당국자들만 알고 있는 셈이다. AP 통신은 유전자(DNA) 분석을 사용해 빈라덴임을 확인했느냐는 질문에 미 정부 당국자가 답변을 꺼렸다며, 이 당국자가 '얼굴 인식'으로 빈라덴임을 확인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했다. 파키스탄 매체들은 애초 빈라덴 사후 모습으로 추정된다며 덥수룩한 검은 턱수염이 얼굴을 덮고 있고 이마와 왼쪽 관자놀이 주변에 핏자국이 넓게 묻어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하지만 이는 가짜사진을 합성한 것이란 지적이 나오며 외신들이 이후 사진을 웹사이트에서 내리는 소동까지 일었다. 빈라덴의 생전 사진과 표정까지 완전히 똑같기 때문이다. 합성의 소재가 됐다고 짐작되는 2년 전 다른 이의 주검 사진도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퍼졌다."

9·11 테러를 주도한 국제테러단체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사망했다고 1일(현지시간) 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발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오후 백악관에서 TV 생중계 통해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 북쪽에서 미군이 펼친 군사작전에 의해 빈 라덴이 사살됐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 정보당국이 입수한 빈 라덴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에 있다는 정보에 따라 그를 추적해왔다"며 "이번 작전을 승인했다"고 전했다. 이번 발표에 앞서 파키스탄 정보당국 관계자는 빈 라덴은 파키스탄 북쪽 아보타바드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에서 미군의 헬리콥터 공격에 의해 사살됐다고 말했다.

미 고위 당국자도 미군이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인근 빈 라덴의 저택을 급습했다며 빈 라덴의 시신을 회수했다고 했다. 하지만 빈 라덴이 그동안 어떻게 미 정보당국의 추적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해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미국은 9·11 테러 공격 이후 지난 10년 가까이 빈 라덴을 추적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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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라덴 아들도 함께 숨진듯


1일 파키스탄에서 알카에다 최고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사망을 가져온 미군의 공격으로 빈 라덴 외에도 다른 3명이 함께 숨졌으며 그 중 한 명은 빈 라덴의 아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오바마 미 행정부의 한 고위 관리가 밝혔다.

이 관리는 또 빈 라덴의 죽음으로 알카에다가 되돌리기 힘든 쇠토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 한겨레신문 ]

PGA 텍사스 오픈
1라운드 9번홀 난조

재미동포 나상욱(28)이 파4 한 홀에서 16타를 기록하는 ‘황당 시추에이션’이 발생했다.
지난 15일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티피시(TPC)샌안토니오 AT&T오크스코스(파72·7522야드)에서 열린 PGA투어 발레로 텍사스오픈 1라운드. 나상욱은 9번홀(파4·474야드)에서 샷 난조를 보이며 12개를 더 친 뒤 홀에서 나왔다. 나상욱의 기록은 1998년 베이힐 인비테이셔널 6번홀(파5)에서 존 댈리가 기록한 18타에 버금간다. 1938년 US오픈에서 레이 아인슬리가 16번홀(파4)에서 23타를 기록한 적이 있다.

나상욱은 첫번째 드라이버샷이 오른쪽으로 휘어지며 나무 사이로 들어가 도저히 공을 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언플레이어블(1벌타)을 선언했다. 그런데 티박스로 돌아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 아래 티샷(세번째 샷)을 다시 했다. 그러나 공은 다시 비슷한 방향으로 갔다. 이어 공을 찾아 4번째 샷을 했지만, 공이 나무에 튕긴 뒤 자신의 몸에 맞아 1벌타를 받았고, 언플레이어블(1벌타)을 선언해야 했다. 이어 7번째 샷부터 12번째 샷까지 연이은 6타도 숲속에서 헤맸다. 결국 13번째 샷이 그린 뒤편 반대편 러프로 날아갔고, 14번째 샷도 그린 프린지에 떨어졌다. 15번째 샷으로 핀 1.5m에 붙여 한번 퍼팅으로 마무리했다.

골프채널 마이크를 착용하고 있던 나상욱은 페어웨이로 이동하면서 캐디에게 “손에 감각이 없을 지경이다. 몇 타를 쳤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캐디는 “나중 투어 관계자에게 확인해야겠다”고 답했다. PGA투어조차 처음 나상욱의 9번홀 기록을 15타로 발표했다가 뒤늦게 1타를 추가한 16타로 바로잡았을 정도였다.
8번홀까지 버디 2, 보기 1개로 순항하던 그는 후반 버디 3개로 8오버파 80타 공동 140위로 마쳤다.

아랍 민주화시위 100일

● WORLD 2011. 4. 26. 16:36 Posted by Zig

▶기고만장 카다피: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지난 14일 수도 트리폴리 시가지에 나타나 차량 바깥으로 상체를 드러내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모습을 리비아 TV가 방영했다.


혁명 확산 ‘주춤’

지난해 12월16일 저녁 튀니지 중부의 소도시 시디 부지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노점상을 하고 있는 청년 무함마드 부아지지는 어머니에게 들뜬 표정으로 “내일 팔 사과와 오렌지가 이제껏 본 것 중 최고”라고 자랑했다. “과일을 팔아 선물을 사드릴게요. 내일은 좋은 날이 될거예요.” 부아지지는 그것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될 줄도, 다음날이면 자신이 아랍 민주화 혁명의 불씨가 되리란 것도 까마득히 몰랐다.
다음날 새벽 장터로 나선 부아지지는 단속경찰의 거듭된 행패와 멸시에 항의해 분신했고, 지난 1월4일 끝내 숨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흘 뒤인 8일 튀니지 전국에선 거센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시작됐다. 4월18일로 민주화 시위 100일을 넘겼다.

부아지지의 분신 이후 지금까지 아랍에선 10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엄청난 변화가 진행중이다. 튀니지에선 시위 일주일 만에 자인 엘아비딘 벤알리 대통령의 24년 독재가 무너졌고, 2월에는 이집트에서도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의 30년 철권통치가 막을 내렸다.
두 나라의 민주화 시위는 인접국 리비아와 모로코뿐 아니라, 요르단·시리아·사우디아라비아·예멘·오만·바레인 등 아랍 전역으로 확산됐다. 기득권층의 부패와 억압, 극심한 빈부격차에 수십년 억눌려온 절망과 분노가 ‘두려움의 장벽’을 허물고 폭발했다. 부아지지의 어머니는 최근 몇몇 외신 인터뷰에서 “우리는 돈도 전기도 차도 없지만, 아들의 죽음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요구 때문”이라며 “아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런 민중 혁명의 열기는 그러나 대다수 나라들에서 독재정권들의 완강한 저항에 막혀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리비아 사태는 국제사회가 무력 개입한 내전으로까지 번졌고, 시리아·예멘·바레인 등의 집권층은 튀니지와 이집트 정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온갖 유화책과 강경책을 병행하고 있다. 이집트와 튀니지도 독재 축출엔 성공했으나, 정권교체와 체제 전환을 향해 더딘 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집트 최고 행정법원은 16일에야 무바라크의 집권당이었던 국민민주당(NDP)의 해체와 재산 몰수를 명령했다. 앞서 13일에는 이집트 검찰이 무바라크 전 대통령을 구속했고, 튀니지 과도정부 검찰도 뒤늦게 벤알리 전 대통령에 대해 살인, 반란 모의, 마약 사용 등 18가지 혐의를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신자유주의 전도사였던 세계은행(WB)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아랍권 민주화와 경제 지원도 관심사로 떠올랐다. 세계은행은 튀니지 과도정부에 정부계약 개선, 공공지출 정보 공개, 공정사회 강화 등 일련의 개혁을 조건으로 5억달러를 공여하고 인근 국가들로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 총재는 “이집트와 튀니지에 대한 지원은 향후 많은 중대한 결과를 낳을 것이란 점에서 그들 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에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