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졸업 시즌에 갖는 회한

● 칼럼 2013. 6. 22. 17:48 Posted by SisaHan
장대 비 속에서 초여름을 맞는다. 싱그러운 계절과 달리 오가는 행인들의 품새는 다소 느슨해져 보인다.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서서히 이완되는 느낌이랄까. 때문인지 거리의 차량들도 차츰 줄어드는 듯 하고 팍팍하던 생활권이 헐렁해져 옴을 느낀다. 아이들의 찰진 웃음을 싣고 도심을 빠져 나가는 이들은 가족끼리 장거리 여행길에 오르거나, 호숫가 휴양지에서 도약을 꿈꾸다 여름 끝머리쯤 다시 모여들 것이다. 학생들의 학제에 맞춰 돌아가는 사회 구조가 신선하면서 부럽기도 하고 때론 시류에 편승 못해 안타깝기도 하다. 이제나 저제나 생업에 발이 묶여 온가족 함께 휴가를 떠나기는커녕 꼭 참가해야 할 중요한 자리마저 나서지 못해 발을 구를 때가 많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지만 늘 이맘때면 떠오르는 서글픈 기억이 하나 있다.
 
큰아이가 대학 신입생이 되어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그의 모교로 부터 졸업식 초대장을 받았다. 구월 어느 날 밤이라는 날짜를 확인하고 나서야 고등학교 졸업식을 건너뛰었다는 생각이 났다. 보통 유월 하순경에 치러지는 졸업식이 몇 달 뒤로 연기된 것도 그렇고 이미 대학생이 되었는데 새삼스레 고교 졸업식을 한다는 것도 의아했다. 어쨌건 온 가족이 참석하여 축하를 해야 했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은 게 문제였다. 며칠을 두고 고심하고 있는데, 전후 사정을 고려한 아이가 혼자 참석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섭섭함 뒤로 장부의 기상이 엿보여 다소 위로가 되었다.
그날 밤, ‘걱정하지 말라’며 당당하게 집을 나섰던 아이가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예식이 생각보다 성대했고 감명 깊게 치러졌다며 대학 졸업식 땐 꼭 함께 하기를 희망했다. 애써 담담한 척하며 경과를 보고하는 녀석을 보며 무리를 해서라도 참석하지 못했음이 후회되었다.
 
2년 후, 둘째의 졸업식 날이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함은 그때와 별 차이가 없었지만 큰 아이의 간곡한 권유와,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이의 고교 졸업식을 놓치고 싶지않아 혼자서 참석했다. 학부형석에 홀로 앉은 나는 쳐지는 어깨를 애써 세우며 식전의 실내를 돌아보았다. 요란하지 않으면서 진정성이 묻어나는 치장이며, 1, 2층 넓은 객석에 빼곡히 들어찬 축하객들의 여유로움이 눈에 들어왔다. 형식보다 졸업생의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하기 위한 분위기가 읽혀져 좋았다. 
잠시 후, 객석의 술렁거림과 함께 백파이프의 선율에 따라 하얀 가운을 걸친 교사들이 손을 흔들며 입장했고 뒤를 이어 청색 물결을 이룬 졸업생들이 자유롭게 들어섰다. 모든 축하객이 열렬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운집한 군중 속에서 용케 어미를 찾아내어 손을 흔드는 녀석, 비단 우리 모자뿐이 아니었으리라.
 
그 날은 신나는 둘째 옆에 쓸쓸한 표정의 큰아이가 내내 어른거렸다. 단상 위에서 졸업장을 받을 때, 우수 학생이 되어 상장을 받을 때, 꽃다발을 안고 폼 나게 사진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을 지켜 봐 주고, 시시때때 기쁨을 교감할 수 있는 가족의 부재가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그 자리를 경험하기 전에는 큰 아이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한 어미였다. 후회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만 유독 이 일은 미성년의 아이에게 빚 진 마음이 되어 떠나질 않는다. 
갓 피어오른 장미꽃 묶음을 기억 저편의 녀석에게 안겨주고 싶은 유월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칼럼] ‘소셜 픽션’이라는 화두

● 칼럼 2013. 6. 22. 17:42 Posted by SisaHan
이제 너무나 유명해진 세계적 공연기업 ‘태양의 서커스’는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시의 생미셸 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 이 서커스단이 오게 된 사연이 흥미롭다. 
1980년대 후반 생미셸 지역은 환경적·사회적 문제로 가득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수십년 동안 쓰레기를 매립해 북미 최대의 쓰레기매립장이 되어 있었다. 공기는 매립장에서 나오는 가스로 오염되어 있었다. 일자리는 사라지고 주민들은 하나둘 떠나고 있었다. 지역주민의 40%가 저소득층으로 분류됐다. 
그런데 당시 몬트리올시와 지역주민들은 대담한 사회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 지역을 친환경 공원과 문화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쓰레기매립지를 친환경 공원과 문화도시로 변화시키겠다니, 어쩌면 황당한 상상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상상력이 이 지역을 밀고 가는 힘이 됐다. 이 상상력 앞에 민간기업인 ‘태양의 서커스’와 캐나다 중앙정부 및 퀘벡·몬트리올 지방정부가 모두 힘을 합쳤다. 경계를 무너뜨리고 각자 가진 것을 꺼내 기여하며 협업했다.
 
지금 태양의 서커스가 입주한 단지 ‘라 토후’도 이들이 함께 기여해 만들었다. 바로 쓰레기매립장 위에 세워진 곳이다. 이 단지에는 국립서커스학교, 서커스 공연장, 예술가 숙소, 태양의 서커스 본사뿐 아니라 매립 쓰레기를 에너지 등으로 전환하는 재활용센터 등이 함께 입주해 있다. 
성과도 눈부시다. 1997년 이곳에 입주한 태양의 서커스는 날개를 달아 세계로 발돋움하며 성장했다. 몬트리올은 세계 서커스의 중심지로 이름을 떨치게 됐고, 이 지역에 관광객과 예술가가 몰려들었다. 쓰레기매립장이던 이곳에 쓰레기로부터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환경기술이 접목됐다. 매립장은 차차 거대한 공원으로 변신하고 있다. 
현실적 제약조건을 넘어선 사회적 상상은 ‘비현실적’이거나 ‘모호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화는 늘 상상에서 시작된다. 
공상과학소설(사이언스픽션)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알베르 로비다가 1800년대 말에 낸 20세기 예측서들을 보자. 다수 채널을 가진 대형 텔레비전, 24시간 실시간 뉴스 채널, 홈쇼핑, 영상 전화기, 대륙간 항공, 인공 강우, 시험관 아기, 패스트푸드, 국립공원 시스템 등이 그의 책에 등장한다. 물론 이들은 당시에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먼저 상상력을 발휘한 뒤, 과학기술이 뒤따라가서 현실로 만들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함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창립자는 지난 4월 스콜월드포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상과학소설이 결국 과학을 움직였다. 먼저 상상해야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소셜픽션(social fiction)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한국 사회는 엄청나게 많고 풀기 어려운 문제들 앞에 서 있다. 동시에 각각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 해결 방법을 논의하자는 목소리도 많다. 지역 풀뿌리 단체도 많아졌고, 지자체도 고민이 깊어졌고,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도 커졌다. 많은 이들이 사회문제 해결 노력에 적극적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가 문제 해결 방법론에만 천착하다 공전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미시적 논쟁에 얽매이면 각자 속한 작은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복잡해지며 논의가 멈추기 쉽다. 궁극적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상상을 공유하지 않으면, 부딪쳤을 때 쉬이 주저앉게 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함마드 유누스의 말처럼 소셜픽션을 쓰는 것이다. 함께 쓰면 더 좋겠다. 그 픽션이 현실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자신이 속한 집단의 벽을 허물고 토론하는 데까지 가면 더 좋겠다. 몬트리올에서처럼 말이다. 

< 이원재 - 경제 평론가 >

 
이명박 정권의 국가정보원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무능하면서도 정치화된 정보기관’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징후 포착 실패 등 안보 문제에서의 잇따른 헛발질, 국제적 망신거리가 된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 침입 사건 등 실수와 판단착오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도 국내 정치정보 수집과 사찰, 선거 개입 등 정권의 보위대 구실에는 발벗고 나섰다. 국정원의 18대 대선 개입 사건은 이런 점에서 국정원을 ‘유능하면서도 탈정치적인 선진 정보기관’으로 바꿔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일깨워준 사건이다. 
국정원 개혁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국가 최고지도자의 강력한 의지, 둘째는 국민적 공감대에 바탕을 둔 정치권의 세밀한 제도적 개선책 마련, 셋째는 주도면밀한 실행이다. 역대 정권이 국정원 개혁에 실패한 것은 이 세 가지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못한 탓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첫째 조건인 대통령의 개혁 의지부터 불투명한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과 관련된 공약을 제시하지 않았고, 평소에도 국정원에 대한 의견을 밝힌 바가 별로 없다. 이번 사건이 난 뒤에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창조경제 등 박 대통령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들과 비교해 보면 국정원 개혁에 실린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새누리당의 태도를 보면 더욱 놀랍다. “종북 세력의 활동에 맞서기 위한 사이버 공간의 정당한 활동” 등 ‘원세훈 대변인’을 자처하는 발언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국정원 개혁의 첫 단추는 국정원의 국기문란 행위에 대한 단호한 비판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정반대로 이를 비호하기 바쁘다. 국정원 개혁을 위한 제도적 개선책 마련은 고사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청와대 관계자는 어제 “이번 사건과 관계없이 새 정부가 들어서고 새 국정원장이 임명되면서 따로 개혁 방안을 발표할 필요도 없이 이미 개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개혁은 단순한 인사 물갈이나 조직 개편 정도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 정도의 시도는 역대 정권 출범 때마다 되풀이해 왔으나 매번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무산됐다. 
무엇보다 개혁의 청사진 하나 없이 개혁을 한다는 것부터가 난센스다. 게다가 남재준 신임 국정원장은 ‘좌파 정권 10년 동안 국정원이 이상하게 변질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국정원 환골탈태를 위한 외부 조건은 전례 없이 무르익었는데도 청와대와 여권, 국정원 수뇌부가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