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을 18년 만에 다시 찾아보았다. 무섭게 변화하고 있었다. 어제의 베트남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 강남보다 더 좋은 신도시들이 군데군데 건설되어 있었다. 새로운 집 한 두 채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새롭게 건설하는 전면적인 창조를 시도하고 있었다. 변화와 성장이라기보다 신이 하늘에서 떨어 뜨려준 선물처럼 보였다. 같은 공산권인 중국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개방되고 있었다. 더욱 현실적이고 지혜롭고 환경에 적응하는 속도가 빠른 민족임을 다시 한번 직감할 수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종교적인 변화이다. 베트남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담하기 위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2001년에 기독교를 그들의 인민이 믿을 수 있는 종교 중의 하나로 공인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로마가 313년에 콘스탄티누스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로마가 복음화 되는 것과 같은 혁명적인 선언이 되었다. 20년 전 0.7%에 불과하던 기독교인 인구비율이 20년 후인 지금 2.5%에 이르고 있다. 무엇보다 2003년에 공산화 이전 ‘다낭’에 있었던 신학교가 ‘사이공’에서 다시 개교되게 되었다. 4년 과정의 이 신학교에서 매년 100명의 베트남 목사들을 배출하게 된 것이다. 올해 베트남은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맞았다. ‘다낭’에서 3만명의 온 세계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베트남 목회자들이 공식적으로 모여 선교대회를 웅장하게 가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이웃 공산권 국가인 중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집회이다. 베트남 정부는 교회 설립과 개척을 허용했다.
더 이상 베트남을 지난 수백 년간 정신적 지주로 떠받쳐 온 불교와 미신과 우상화된 가톨릭이 힘을 쓰지 못하고, 개신교가 그 자리를 대신 메우고 있다. 선교에 불이 붙었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반도의 선교 전진지기로 부상하고 있다. 사이공에만 한국인 10만 명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무척 놀랐다. 18년 전 한국과 베트남 국교가 재개된 후 최초의 장로교선교사로 내가 베트남에 들어가서 선교할 때에는 교회 승인을 받지 못하여 우리의 예배가 불법집회로 몰리고 목사인 나는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사이공한인교회는 천여 명의 성도로 성장했고 30여개의 한인교회를 정부가 승인해 주었다. 다양한 교파와 심지어 이단까지도 베트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언제나 성장과 부흥이 있는 곳에 어둠의 역사는 공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0년 전에는 주로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유럽 사람들에 의하여 베트남 곳곳에서 봉사활동이 전개되었었다. 그러나 이젠 미국인과 한국인과 호주사람들이 봉사와 구제활동에 주류를 이루고 있다.
메콩델타의 관문인 ‘빈롱’시를 다녀왔다. 18년 전에 베트남한인교회 교인이 경영하는 가죽공장을 심방하기 위해 ‘깐토’를 가면서 그곳을 지나친 적이 있는 곳이다. 그때는 비포장도로로 4시간이 걸리던 지역이 이제는 고속도로가 비단처럼 포장되어 2시간에 갈 수가 있었다. 차 안에서 우리는 베트남선교와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활동하는 김 선교사의 소개로 빈롱시 자선단체 위원장과 인민부위원장을 만나 보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면서 한국교회에 감사를 전했다. 김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도움으로 선교했지만 한번도 자신이 목사나 교회의 이름으로 구제를 한 적이 없다. 하지만 빈롱시 지도자들은 이 모든 것이 한국기독교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알고 감사하고 있었다. 이제 베트남에 복음의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조심스럽고 지혜롭게 접근해야 한다. 서구에서 사는 우리 자녀들이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복음의 빛을 발하는 선교현장을 보면서 얼마나 큰 비전을 가질 수 있을까를 상상한다. 그들은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동시에 한국 기독교는 그들의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초심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 사이공에서 -
< 박태겸 목사 - 캐나다 동신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