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새벽 날아든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 소식에 얼마나 놀랐습니까. 항공기 사고는 대개 승객과 승무원 전체의 생존과 직결되는데, 티브이 화면에 나타난 항공기는 꼬리 부분이 떨어져나가고, 동체 윗부분이 불에 타 반파된 상태였으니 더욱 놀랐을 겁니다. 291명의 승객과 16명의 승무원은 어떻게 됐을까. 불행 중 다행으로 사고 규모에 비해 인명 피해가 크지 않아 일단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을 겁니다. 
사고 원인이야 기체가 폭발하거나 바닷속으로 사라지지 않았으니 조만간 밝혀질 겁니다. 물론 사고 원인엔 조종사의 실수 가능성도 포함될 겁니다. 하지만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인명 피해를 그 정도로 그치게 한 승무원들의 위기관리 능력은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종사는 꼬리 부분이 떨어져나간 상태에서도 침착하게 기체를 세웠고, 승무원들은 불이 난 상태에서도 승객들을 비상 슬라이드로 탈출시켰습니다. 
사고는 단 1%, 아니 수만분의 1% 가능성에서 발생합니다. 그런 가능성을 찾아 제거하고, 가능성이 현실화될 때 피해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극복해야 하는 게 조종간을 잡은 사람의 책무입니다. 설마 그런 사람이야 없겠지만 긴박한 순간에, 나는 사고 원인과 무관하다느니 간여하지 않았느니 하며 손과 발을 뺀다면 기체와 승객의 생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능보다 더 무서운 건 무책임입니다. 비행기가 아니라 한 나라를 이끄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절실한 문제입니다.
 
지난 주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사학자들이 시국성명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학문 분야보다 원칙에 충실한 분야가 역사학입니다. ‘사실, 오로지 사실’에 근거해야 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해석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건 해석일 뿐 그 바탕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가장 철저한 원칙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이고, 또 그래야 합니다. 조선의 사관들은 원칙주의의 표상입니다. 
태종은 사관이 편전에까지 들어와 말과 행동을 샅샅이 기록하는 게 끔찍하게 싫었습니다. 번번이 내쫓았지만 그때마다 신료들은 사관의 입시(入侍)를 강력히 주청했고, 결국 태종도 손을 들었습니다. 사관은 태종이 사냥하는 곳까지 쫓아갔고, 그런 사관을 두고 태종은 ‘재는 왜 따라왔느냐’고 면박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태종이 사냥 하다가 말에서 떨어집니다. 그는 사관에게 “이 사실은 기록하지 말라”고 명합니다만, 사관은 태종의 그런 사소한 명까지 기록했습니다. 세종은 태종실록이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상왕 노릇을 하며, 장인까지 죽여버린 아버지 태종의 언행이 후임자로서 당연히 궁금했을 겁니다. 그러나 사관과 신료들이 막아섰습니다. “왕이 보면 누가 바르게 사초를 기록하겠습니까.” 세종은 손을 들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사초 관리제도와 전통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것을 깬 인물이 연산군입니다. 지난달 우원식 민주당 최고위원은 “박 대통령, 연산군과 다를 게 무어냐”고 따졌습니다. 조선 최악의 폭군이자 권좌에서 쫓겨나 제 명에 죽지 못한 사람에게 님을 비교했으니 님도 어지간히 속이 상했을 겁니다. 하지만 학자들 생각은 다릅니다. 연산군이 열람한 것은 성종조 사초의 발췌본이었다고 합니다. 실록청 당상관이었던 훈구파 이극돈은 눈엣가시 같았던 사림파를 숙청하기 위해 김종직의 조의제문 관련 내용을 연산군에게 찔렀습니다. 연산군 역시 사사건건 따지는 사림파가 미웠던 터라 쾌재를 불렀죠. 즉시 성종조의 사초를 모두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신료들이 벌떼처럼 일어닙니다. 이극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문제될 만한 내용을 일부 발췌해서 열람토록 하자는 절충안으로 사관들의 반발을 막았습니다. 연산군도 사초를 훔쳐본 왕으로 남는 것이 켕겼던 터라, 절충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사실이 이러하니, 학자들은 우 의원의 비유가 못마땅합니다. 연산군보다 못하면 못했지, 어떻게 같다고 하는가. 
발췌된 사초를 토대로 사림파를 숙청한 것이 무오사화입니다. 조선에 4대 사화가 있습니다. 혁신세력이라 할 사림파가 훈구파에 의해 피의 숙청을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 모두 선비 사(士)를 써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무오사화만큼은 역사 史를 씁니다. 사림이 당한 것은 같지만, 사화의 빌미가 사관의 사초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훗날 역사가들이 임진년 말부터 계사년에 걸쳐, 집권 훈구세력들이 대통령기록물을 멋대로 꺼내들고 왜곡해 일으킨 사태에 대해 무어라 기록할 건지 궁금합니다. 단순히 계사 혹은 임진사화라고 하지는 않으리라는 건 확실합니다. 혹시 박근혜사화라는 이름을 떠올리지는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그 역사학자들이 이번 사건에 대해 결론지은 내용은 이렇습니다. ‘3.15 부정선거에 버금가는 범죄이며, 군사독재 시절의 중앙정보부 안기부가 공화당 민정당과 함께 민주주의를 유린하던 상황.’ 그리고 이 문제를 덮기 위해 단행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공개에 대해서는 ‘정상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행위이자 사실상의 반국가 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의 이런 서슬에 제 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겁니다. 그만큼 위중한 상황입니다. 
대통령후보 혹은 대통령으로서 간여했던 간여하지 않았던 최종적인 책임은 대통령님이 져야 합니다. 잘못을 덮기 위해 더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지금까지의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얼마나 더 큰 잘못으로 이제까지의 잘못을 덮으려 할지 두렵습니다. 그러나 늦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게 이 악순환을 끊어내기 바랍니다. 나는 관계 없다? 대통령으로서 있을 수 없는, 모든 국민을 불행에 빠트릴 무책임 선언입니다. 
지난 4일 발표된 ‘역사학자들이 국민께 드리는 글’ 전문을 정독하여 마음에 새기시길 부탁드립니다.
< 곽병찬 대기자 >


[1500자 칼럼] 우리가 사는 세상

● 칼럼 2013. 7. 7. 19:52 Posted by SisaHan
매달 교육청에 모여 정기적으로 하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스크린에 엉뚱한 문제들이 적혀있다. 1962년 스텐리 컵을 타는데 결정적인 골을 넣은 선수는 누구인가? 세계 1차 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모두 답을 찾으려 얼굴을 컴퓨터, 스마트폰, 아이패드 등 전자 제품에 붙이고들 있다. 나도 문제를 자판에 치기 시작하는데, 일 분도 되기 전에 이곳 저곳에서 답을 외치기 시작한다. 
오늘은 사이버 세상에 자라고 있는 학생들의 삶을 좀더 이해하면서, 그들이 테크놀러지를 최대로 학업에 이용할 수 있고 또 어떻게 그들을 이 새로운 세상에서 안전하게 자랄 수 있게 보호 할 수 있는가 생각하기 위하여 모인 자리다. 옛날에는 책이나, 수업시간에 배워서 외워야 되는 지식들이 지금은 필요한 순간에 학생들의 손 끝에서 쉽게 찾아 진다. 테크놀러지가 학생들 교육에 미치는 많은 긍정적인 현상 중에 하나이다. 이제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찾아낸 정보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어야 한다고 했다.
 
회의 순서에는 교육용 비디오를 보는 시간도 있었다. 비디오의 주인공은 귀여운 모습의 중학교 여학생 두 명이었다. 그들은 서로 너무 좋아서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도 잠시도 쉬지 않고 동영상 채팅을 한다. 한 여학생이 엄마에게 불려 나가면서 친구에게 자신의 이메일에 들어가 뭐를 찾아 보라며 아무 생각없이 비밀번호를 알려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옛날 어린 시절에 매일 보는 친구인데도 마음을 가득 담은 편지를 주고 받기도 하고, 서로의 일기까지 바꾸어 보던 기억이 난다. 그 나이에 친구를 향한 신뢰와 애정의 표현은 세대가 바뀌어도 여전하다. 헌데, 며칠 후 그 두 친구는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되고, 화가 난 여학생은 친구의 비밀번호를 다른 남학생에게 주어버리게 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곧 사태는 수습할 수 없게 되고 일년 후, 그렇게 가까웠던 친구 여학생들은 둘 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각자 다른 곳의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여리고 예쁘기만 한데, 그들은 이제 순간에 내린 결정으로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마는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회의를 끝내고 돌아서는 어른들의 마음은 아이들을 보호할 준비가 되기는커녕, 더 불안하고 난감함으로 채워졌다.
 
하루를 끝내고 온 식구가 모여서 저녁을 먹고 서둘러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한 학기를 마감하는 프로젝트도 마치고 시험 공부도 해야 한다고 했다. 늘 이어지는 일상인데, 오늘따라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식구들의 뒷모습에 눈이 머문다. 아이들은 늘 하듯이 늦은 시간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각자의 관심에 따라 인터넷을 누비고 다니기도 하고, 게임도 하고, 누군가와 채팅도 할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세상의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다. 
사람이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빠른 순간에 현명하고,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생각하게 된다. 어릴 때 학교에는 도덕 시간이 있어서 예의범절도 배우고 학생들이 지켜야 할 생활 태도도 배우던 기억이 난다. 정해진 수의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삶을 나누는 법을 자꾸 보고 들으며 배우던 시절이었으리라. 이제 어른들이 가보지 못한 세상을 먼저 혼자들 가고 있는 아이들은 무엇에 의존하여 한 발씩 짚어 갈 수 있을까 궁금하다. 정해진 바르고 안전한 삶의 형태를 듣고 배워서 쫓아 가기에는 너무나 변수가 많은 순간들이 이어지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세상을 사는 젊은이들이야 말로 가슴 깊은 곳에 무엇이 옳은 일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심지를 심어주어야 하지 않나 싶다.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은 최소한 자기의 존엄성이 침해 당하는 순간에 온 몸에퍼지는 감정으로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나 교육으로 배운 판단도 필요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임을 기억하는 자존감을 가진 학생들이, 예측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보호할 가능성이 더 클 것이라 생각된다. 오늘따라 아이들의 방 앞을 서성거리다 문을 두드리며 말한다. “우리 아들 엄마가 정말 사랑하는 거 알지?” 하며 과일을 내민다. 엉뚱한 엄마의 행동에 아이는 어리둥절해져 “엄마 무슨 일 있으세요?”한다. 아이는 컴퓨터 스크린에서 눈도 떼지 않으며 묻는다.

< 김인숙 - ‘에세이 21’로 등단,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심코 가톨릭교육청 언어치료사 >


[한마당] “특정 정보 암흑의 시대”

● 칼럼 2013. 7. 7. 19:50 Posted by SisaHan
요즘은 그야말로 광속 정보시대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사건, 아프리카 오지나 중국의 서역 신장 위구르에서 벌어지는 소요사태도 실시간 전해진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감날 수밖에 없다. 휴대전화가 폭발적으로 보급되면서 정보의 사각지대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같은 정보메신저의 발달로 다양한 정보들이 더 빨리, 더 폭넓게 전해지는 편리성의 혜택 또한 확산되고있다.
 
미디어를 능가하는 SNS(Social Net work Service)의 발달과 이용확산은 언론통제가 심한 공산권 국가에서도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가령 중국의 경우 철저한 통제와 감시 속에서도 SNS를 통한 쇼킹뉴스들이 전해질 때가 많다. 고위공직자들의 부정과 탈선, 정부기관의 과도한 행정적 강압 등도 주민들의 SNS 고발로 실상이 드러나 지탄을 받는 사례가 흔하다. 
내전의 참화로 고통당하는 시리아에서도 폭격을 당한 현장에서 생생한 피해 참상이 화상으로 전세계에 전해진다. 이집트의 민주화 성지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모습도 마찬가지다. 세계인이 현장의 시민들과 함께 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오간다. 이 때문에 독재국들이 인터넷까지 감시하고 통제하는 일이 잦아졌지만, 인터넷을 활용한 SNS의 위력은 기존 언론의 벽을 뛰어넘는 대안 매체로서의 역할도 점점 확장해가고 있다. 전통적 미디어의 영향력이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기존의 전통 미디어가 맥을 못추는가. 머잖아 완전히 퇴조하고 SNS시대에 바톤을 넘겨줄 것인가. 하지만 아닌 것 같다.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 언론학적인 특성을 떠나 정보전달과 확산 측면에서만 한정한다고 해도 기성 언론의 영역을 초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엉뚱하게도 인터넷 강국인 한국에서 입증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국정원의 불법적인 선거개입과 정치공작 문제에 대해 SNS의 반응은 뜨겁다. 트위터와 카톡, 페이스북 등에 규탄과 처벌, 재발방지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들끓는다. 국내뿐이 아니다. 캐나다와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한인들의 비난 아우성이 연일 쏟아져 나온다. 각 대학과 교수들, 종교단체, 시민단체의 시위소식과, 고교생까지 가세한 규탄대열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거기에는 정부-여당을 옹호하는 소리는 소수이고 말을 꺼내도 금방 궁지에 몰린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소식들을 모르거나, 알아도 막연히 알면서 야당이 무책임하게 공세를 펴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NLL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포기했었다’고 받아들이고 있고…. SNS 안과 밖, 국내와 해외의 온도차가 너무 판이한데 놀라게 된다.
물론 이런 괴현상은 모국 주요 신문과 방송이 보도를 외면하고 축소·왜곡 전달한 때문이다. 방송은 국정원의 ‘국’자를 들먹이기를 꺼리고, 조중동을 중심으로 보수신문들은 정권의 동지가 되어 옹호하고 덮어주기에 바쁘다. 다가오는 종편 재허가에 덜미가 잡혀 권력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독재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언론통제가 타율 혹은 자율적으로 행해지면서, 진실이 오도되고 묻히고 마는 ‘특정정보 암흑’의 시대가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는 형국이다.
 
현실적으로 SNS는 여전히 특정계층에는 생소한 채로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문이나 방송의 가시성, 접근성에 미치지 못하는 측면은, 인터넷과 휴대전화라는 유무형의 기기를 활용해야 하고 거기에는 상당한 비용과 지식, 기술적 수준이 필요하기에 신문이나 방송의 가시성과 접근성에 미치지 못한다. 즉 고연령층이나 도시 이외의 지역 주민들에게 SNS는 멀고, 방송과 신문이 오히려 가깝다. 그런데 그 가까운 TV와 다수 신문들이 엉뚱한 정보만 전달하고 있으니, 그들은 21세기 광속 정보시대에 왜곡된 정보 혹은 정보 깜깜이로 살 수 밖에. 
그래도 이 시대 언론인이라면 옳고 그름, 합법과 불법, 진실과 왜곡은 분별할 터임에도 애써 눈을 가리고 권력만 쳐다보는 무지막지한 배짱들은 정말 기상천외다. 눈부신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것과 다름없는 양심 실종이고 국민 무시의 패역이 아닌가. 
그러나 국민들을 그렇게 우매하게 본다면 오산이다. ‘아랍의 봄’은 트윗 하나로 시작됐었다. 일시적으로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를지 모르지만, 들끓는 SNS의 외침들은 얼마든지 함성으로 백일하에 터질 수 있다. 폭풍전야 처럼 짓눌려진 정보암흑이 오히려 공포요, 걱정스럽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안보 여론몰이의 한계

● 칼럼 2013. 7. 7. 19:48 Posted by SisaHan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독일 나치스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남긴 말들이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국민 여론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괴벨스는 선전 수단으로 라디오에 주목했다. 그는 국가 보조금을 풀어 노동자들의 일주일분 급여인 35마르크만 있으면 라디오를 살 수 있도록 했다. 독일인들은 라디오를 ‘괴벨스의 입’이라고 불렀다. 그는 매일 저녁 7시 라디오 뉴스에 ‘오늘의 목소리’라는 코너를 만들어 총리 관저 르포를 하도록 했다. 나치스 지지 군중대회 실황도 전국에 생중계했다.
괴벨스는 하켄크로이츠와 제복, 웅장한 행사 등을 활용해 대중이 최면상태에서 파시즘에 젖어들도록 몰아갔다. 나치스 당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괴벨스는 대중을 사로잡는 연설로 유명했다. 괴벨스가 펼친 정치 연출의 핵심은 한마디로 “이성은 필요 없다. 대중의 감정과 본능을 자극하라”는 것이었다.

10.4 정상회담 대화록 무단 공개 사건의 파장이 길어지고 있다. 대화록 공개 행위의 불법·부당성은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다. 주목할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북방한계선(NLL)을 포기했다’는 거짓 주장이, 괴벨스의 정치선전을 빼닮았다는 점이다. 그 주장은 무엇보다 사실이 무엇인지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자극하고, 영토 아닌 영토 논란을 일으켜 대중을 감정적으로 격동시키려 한 게 전부였다. 
보수 언론이 국정원과 새누리당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대변한 점도 괴벨스 시절과 비슷했다.

‘안보 여론몰이’는 한국 권위주의의 오래된 정치문법 중 하나다. 박정희 시대로부터 1980년대까지는 ‘좌경 용공’ 몰아붙이기가 성행했다. 근래 들어선 ‘종북 좌파’ 찍어내기가 주된 흐름이다. 과거에 북한의 위협과 공포를 부각시키는 데 주안점을 뒀다면, 요즘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보다는 경제난이 부각되면서 북한을 ‘찌질한 존재’로 멸시해버리는 새로운 프레임이 떠오르고 있다. 어느 경우든 공격 대상 정치세력과 북한을 한 묶음으로 만들어 고립시키려는 그릇된 선동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이번에 권위주의 세력이 볼 때 좀 뜻밖의 방향으로 여론이 흘러갔다. 한국갤럽의 지난달 28일치 여론조사를 보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에 담긴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과 관련해 ‘NLL 포기가 아니다’라는 의견이 ‘NLL 포기 의사를 밝힌 것’이라는 의견보다 갑절 이상 많았다. 국정원의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행위는 ‘잘못한 일’이라는 응답이 우세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덩달아 떨어졌다.

우리 정치에서 안보 여론몰이가 먹히지 않게 된 것은 민주주의가 성숙하고 있다는 지표다. 이런 현상이 처음도 아니다. 2010년 지방선거 국면에서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건을 갖고 여론몰이를 펼쳤지만, 바닥 민심이 정반대로 조성되고 여당이 참패한 적이 있다.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은 “국민의 일부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속일 수는 있다. 국민의 전부를 일시적으로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국민의 전부를 끝까지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여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괴벨스의 믿음이 아니라, 여론 앞에 겸허해야 한다는 링컨의 말이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 박창식 - 한겨레 신문 연구기획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