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와 새누리당이 12일 당정협의에서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7월10일 언론사 논설실장 오찬에서 관련 발언을 한 지 불과 한달 만이다. 정부는 내용과 형식에서 모두 심각한 문제가 있는 한국사 수능 필수화 추진을 중단하기 바란다.
 
초·중·고의 한국사 수업시간은 어느 사회과목보다 많다. 한국사는 고교 사회과목 가운데 유일하게 필수이기도 하다. 만약 교육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잘 가르치는 방안부터 찾는 게 순리다. 교육부도 애초 한국사 수능 필수화가 모든 영역이 선택인 현행 수능 체제와 맞지 않고 입시제도 간편화 방향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소극적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수능 필수화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의견수렴이라고는 지난 8일 ‘전문가 토론회’를 연 것뿐이다. 게다가 토론회는 수능 필수화를 주장하는 주제 발표와 이에 찬성하는 지정 토론자 5명의 발언 위주로 진행됐다. 결론을 먼저 내려놓은 ‘짜맞추기 토론회’인 셈이다. 정부가 중요한 교육정책을 이렇게 졸속으로 추진하는 데는 박 대통령의 발언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6월 중순부터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언급했으며, 지난 7일에도 “편협된 자기 생각을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에게 가르치면 굉장히 위험하고 잘못하면 영혼을 병들 게 하는 것”이라며 어릴 때부터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뚜렷한 근거도 밝히지 않은 채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편협하고 위험하다. 유신 체제를 옹호해온 그가 무엇을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역사’라고 하는지도 의문스럽다.
 
청소년들의 역사의식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면 불필요한 암기 내용을 줄이고 탐구 토론형 수업을 늘리는 게 옳다. 이는 교육계가 조금만 더 신경을 쓰면 지금의 수업시간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반면 한국사가 수능에서 필수로 되는 순간 역사적 사실을 단순 암기하는 과목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잖아도 학습노동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부담이 커지고 다른 사회과목들이 상대적으로 홀대받게 되는 것도 문제다. 이는 대학의 관련 학문들에까지 영향을 줄 것이다.
지금 한국사 수능 필수화에 적극 찬성하는 사람은 대체로 뉴라이트 계열이 많다. 이들과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쪽 측면만을 부각시키고 국가주의 교육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는다. 이에 대한 국민 우려를 씻기 위해서라도 한국사 수능 필수화의 졸속 추진은 중단돼야 한다.


[한마당] 2013년 8월, 도쿄와 서울

● 칼럼 2013. 8. 18. 10:19 Posted by SisaHan
나는 지금 도쿄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야스쿠니 반대 행사에 발표자로 참석했고, 10일 저녁에는 촛불시위에도 참석했다. 도쿄의 살인적인 무더위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숨을 막히게 했다. 그러나 이 무더위보다 더 숨을 막히게 한 것은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소위 우익들의 거친 맞불 시위였다. ‘애국’의 이름을 건 온갖 단체들이 고성능 확성기와 욱일승천기를 단 차를 골목과 거리마다 배치해서 고막이 찢어질 정도의 굉음을 울려댔기 때문에 300명 남짓한 시위대의 구호는 들리지도 않았다.
A급 전범 기시의 손자인 아베가 집권한 일본은 이제 거침없는 국가주의의 길로 치닫고 있다. 집권 자민당은 헌법을 개정해서 ‘천황을 받드는 국가’의 국방군을 창설하겠다고 한다. 급기야 부총리인 아소는 나치의 수법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베 내각의 일부는 오는 15일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호국의 신’이 된 영령을 왜 참배해서는 안 되는가”라고 하면서 대거 야스쿠니로 몰려갈 것이다.
 
도쿄에서 시위를 하던 바로 그 시간에 서울에서는 국정원 선거 개입을 규탄하는 5만의 시민이 모였다. 일제하 조선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던 악명 높은 정치경찰, 즉 특고의 고문, 사찰, 공작 정치의 수법을 배워서 만든 중앙정보부, 즉 오늘의 국정원이 국민주권을 농단하는 것에 대한 시민들의 정당한 항의다. 독립군 토벌하던 일본군 장교의 딸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그녀는 민주주의 암흑기 70년대 공안검사로 활약한 김기춘을 최측근으로 불러들였다.
일본이나 한국의 집권층은 모두 ‘국가’의 이름으로, 극히 초보적인 절차적 민주주의와 책임정치의 원칙을 뭉개고 있고, 주요 방송과 신문을 정부 홍보지로 변질시켰다. 정치적 반대자를 비국민으로 몰아서 무자비한 채찍을 휘두르던 제국주의 일본은 이렇게 한국과 일본에서 스멀스멀 부활했다. 그런 두 나라의 실상은 어떤가?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일본 땅의 일부는 폐허가 되었고, 한국의 강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다. 이 두 나라는 자살률 세계 1, 2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국민의 삶의 질이나 사회적 권리, 특히 노동자와 여성의 지위에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언제나 바닥 자리를 다투고 있다. 천황제와 국가보안법이 국민의 복종을 강요하는 우익 독재 60년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그래도 한때 제국의 야망을 불태웠고, 미국의 안보 우산의 보호와 한반도의 전쟁을 돈벌이 기회로 삼아 경제 기적을 이룬 일본은 별로 아쉬울 것이 없다. 식민지의 굴욕을 겪은 뒤에도 일본 대신에 전쟁과 분단을 겪은 한국은 도대체 뭔가? 아직 일제 말 징용·징병으로 개죽음을 당한 조선 청년들의 원혼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 않나?
일본이 국방군을 만들면 투입될 나라는 사실 한반도밖에 없다. 과거 일본이 청일전쟁의 명분으로 한반도에 들어와서 조선 왕조를 대신해서 동학군을 진압했듯이, 한반도에 분쟁이 발생하면 그들은 또다시 들어올 것이다. 남한의 ‘친미애국’ 세력은 곧 ‘친일애국’ 혹은 ‘친중애국’ 세력으로 변할 것이다. 국가니 애국이니 하는 구호는 사실 그들의 사적 욕망을 달리 표현한 것이었다는 것을 국민들이 알아채더라도, 이미 때는 늦었다.
국가주의 극우 정치의 종착점은 전쟁이다.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최대 희생자들은 일본과 조선의 가난한 청년들이었듯이,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분쟁과 갈등이 발생하면 또다시 그들이 먼저 죽을 것이다. 아니, 사실 그들은 경제 전쟁에서 지금 매일 죽어가고 있지 않나?
한·일의 청년들이여, 정신 차려라!
 

<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


나이가 들면서 신체 곳곳에 새로운 버섯이 생겨난다. 검버섯, 반점, 주근깨, 등등 종류도 다양하다. 식용버섯이 이렇게 번성한다면 대풍년이 될 조짐이지만 반갑지 않은 손님이 주요 부위에 나타나니 거울을 볼 때마다 마음이 심란하다. 악성 유전자는 성질이 고약하여 언제고 그 값을 한다더니 양친의 그것들을 함께 물려받은 모양이다. ‘에이, 이런 건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하며 볼멘소리를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인생의 훈장인 주름살이 아직은 스케치 단계라 차후에 하회탈이 될지 놀부의 그것이 될지 나의 역량에 달렸음이다. 오십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살아온 궤적이라고 했던가. 이번 여름 여행에서 내 작품의 모델이 될 사람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최근 하이킹 동호인들과 캐나다 동쪽 끝 섬 뉴펀들랜드를 다녀왔다. 대서양과 세인트로렌스만 사이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그 섬을 향해 차와 배를 번갈아 타며 한없이 나아갔다. 스물다섯 시간이란 긴장도 끝에 도착한 그곳은 어촌 특유의 비릿한 냄새도 관광지의 술렁임도 없었다. 지역 특산 어족인 대구를 보호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조업을 중단시킨 탓에 만선으로 넘쳐야할 항구마다 겉 자란 해초만 파도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이런 광경을 목도하며, 대대로 살아 내려온 삶의 근간을 거세당한 상실감이 주민들 심중에 자리하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섬사람들에게 고기잡이란 그들의 삶이며 낙이었으련만, 이십여 년 가까이 묶여 있었으니 당연한 추측이었는지 모른다. 주민들의 기본적 생활 유지는 정부의 몫이라고 해도 인간이 살아가는데 그것만이 능사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며칠 하이킹을 하면서 간간이 들여다본 거기엔 나의 생각이 기우였으며 오히려 그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 
한반도 면적의 1.8배에 달하는 섬을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하이킹과 드라이브를 병행하며 횡단했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광은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주민들의 생활환경 또한 쾌적하고 여유로웠다. 간간이 스쳐가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순박한 인간미는 도회지에서의 그것과 확연이 달랐다. 특히 빠듯한 일요일 아침 시간을 할애해서 열두 명의 우리 일행을 두 팀으로 나누어 낚시질을 시켜주었던 에릭은 모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어느 이른 아침, 조그만 모터보트에 일행 몇 명과 함께 승선했다. 우리가 며칠 묵었던 카티지 주변에 살았던 에릭은, 하이킹 후 짬짬이 낚싯대를 드리우는 강태공들을 가상히 여겨 그의 배로 초대해 준 것이었다. 상쾌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물살을 가르는 기분도 황홀했지만 주인장 에릭의 일거수일투족이 더 나의 시선을 끌었다. 오십대 중반인 그는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를 가진 것도 모자라 만면에 진중한 미소를 담고 있었다. 혼자서 낚싯줄을 당길 때나 일행들의 어구를 손 봐 줄때도 그 표정은 여전했다. 나는 문득 그에게서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의 산티에고 할아버지를 떠 올렸다. 그는 고기잡이 팔십 사일은 공치고 팔십오일 만에 전무후무한 큰 고기를 만나 이틀 동안 사투를 벌여 잡았지만 배에 묶어 돌아오다 상어 떼에게 모두 빼앗기고 만다. 할아버지는 실패한 원인을 자신의 과대한 욕심으로 단정하며 곤고한 어부의 일상이 큰 행복이었음을 주지시킨다. 에릭은 비록 작가가 묘사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삶의 진솔함이 배어있는 그의 행동이며 표정은 산티에고 할아버지의 승화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십년 후의 온화한 자화상을 위해 지금부터 각진 모서리 손질을 해야 할까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한마당] 수호해야 할 ‘한국혼’

● 칼럼 2013. 8. 11. 18:12 Posted by SisaHan
이민 땅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김치와 된장의 맛은 못잊는다. 장구와 꽹과리로 흥을 돋우면 절로 어깨가 들썩이고, 우아한 한복을 보면 따스한 정감이 느껴진다. 영어에 주눅이 들긴 해도 한글에 자부심이 강하고, 성군 세종대왕의 업적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광활한 만주를 호령했던 광개토대왕의 기개와 거북선으로 왜적을 격멸한 충무공 이순신의 위업도 장쾌하다. 독도 도발에 공분하고, 올림픽 시상식에 태극기가 게양될 때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왜 그런가. 바로 한국인이요 한국 혼(魂)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그러면 한국적 혼이란 무엇인가. 달리 말해 민족혼 혹은 민족정신이라고도 할 한국인만의, 한국인에게만 흐르는 혼과 정신은 무엇이던가.

민족혼, 민족정신이란 그 민족만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고유의 정신, 또는 한 민족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심리적 개성이나 문화적 특성을 말한다. ‘민족정신’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민족정신이란 개인정신이나 개인정신이 상호작용하는 총체 이상의 것으로, 이것을 초월하여 민족에 내재하는 실체로서의 정신이며, 민족의 언어 ·민요 ·민화 ·풍속 ·법 등을 창조하는 원천”이라고 풀이했다. 
한국인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투사였고 사상가이며 사학자이기도 한 박은식 선생이 ‘국혼(國魂)’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해 “국가나 민족의 흥망은 국혼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고, 이 국혼은 바로 역사에 담겨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독립정신을 함양하고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체적인 역사서술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한학자요 문인이기도 했던 정인보 선생은 ‘얼’이라는 표현을 써서 저서 「조선사연구」에 실린 ‘오천년간 조선의 얼’에서 역사의 본질을 ‘얼’ 즉 민족정신에서 찾는 ‘얼 사관’을 정립했다. 이밖에 한국 고대사 연구를 중시했던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를 비롯한 고대국가들은 독립성과 민족적 패기가 있었으나, 중세 이후로 오면서 그것이 없어지고 사대주의로 빠져들면서 쇠퇴해갔다”면서 고대사의 영광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폈다. 이들 모두 일제 식민치하에서 역사적 자존감 회복을 통해 독립정신을 고양하려는 관념적·계몽적 의도에서 역사에 기초한 민족정신을 주창한 측면이 있다. 오늘날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공화제 민주주의를 내다본 건 아니겠지만, 민족 암흑기의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우는 데는 큰 토대를 이뤘음에 틀림없다. 그 결과 3.1독립운동의 불길이 솟아올랐고, 상해 임시정부가 건립됐으며, 조국 광복운동이 번져나갔던 것이다.
 
캐나다 땅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 시민권을 가졌어도 모국을 그리워하는 까닭, 바로 ‘혈맥’(血脈) 때문일 것이다. 조상으로부터 전해 받은 몸속의 피가 한국인의 것이요, 마음과 정신세계에 흐르는 영혼의 혈액이 한국의 그 것으로, 한국 땅에서 태어나 자라고 길들여졌던 태생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흐르는 연유다. 심지어 이민 땅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은 2세들도 정도의 차는 있되 자신의 영(靈)과 육(肉)에 지워지지 않고 흐르는 한국적 혼을 깨달아 방황하고 맴돌다 회귀하는 모습들을 본다. 
얼마 전 토론토에서 ‘국혼수호’를 기치로 내건 단체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국 국내도 아니요, 캐나다 시민권자들이 한국의 국혼을 수호하겠다고 나섰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전세계 한인사회 어디에서도 민족의 혼을 수호하겠다고 외치는 단체가 없는 터에, 용기있게 선봉장이 되어 깃발을 들어 올렸으니 얼마나 장하고 칭송받을 애국의 발로인가. 더구나 한인사회 결속을 도모하고 애국적 양심과 국민적 도덕심에 따라 필요시 ‘행동’에도 나선다는 결의를 보여 든든함을 주었다
그렇다면 수호해야 할 한국과 한국인의 국혼은 무엇일까. 형이상학적 용어인 ‘국혼’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홍익인간을 바탕으로 한 백의민족의 평화사랑과 은근과 끈기, 그리고 강한 자주 독립정신, 불의에 대한 항거, 그리고 인지상정과 상부상조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한국 혼을 지키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국혼수호’ 활동에 귀추가 주목되는 것은, 최근 한국의 정치정세가 ‘국혼’을 갈수록 상실하고 외면하고, 때로는 짓밟는 양태들이 횡행하는 듯 해서다.
예를 들면 독립운동을 토벌했던 일제부역자와 친일 독재자들을 추앙하는 풍조를 국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주권재민을 망각한 정치행태 역시 그렇다. 
국혼을 더럽히는 일들은 그 외에도 너무나 많다. 3.1정신과 임시정부의 법통 및 4.19 민주이념 계승을 명시한 헌법정신을 무시하는 8.15 건국절 주장, 쿠데타와 독재를 미화하고 지역감정과 ‘북풍’을 정치에 악용하는 작태, 민주 실현에 몸 바친 희생자들을 매도하는 모리배들, 국가와 국민을 섬기고 봉사하는 정부기관과 공복이 아닌 사익과 정권의 충견이 된 공직자들과 그들의 불법 정치공작의 악습 등등이 자랑스런 한국의 국혼이 아님은 지극히 명백하다. 
한국의 유구하고 자존어린 국혼에는 정의와 도덕,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정신도 담겨있다. ‘국혼수호’란 여·야, 보수·진보를 떠나 바로 그런 것들을 바로잡고 굳건히 지켜가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앞으로 국혼수호 활동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