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과 민주당이 2일 국회 본회의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과 녹음기록물 등 자료 일체의 열람과 공개를 요구하는 자료제출요구안을 의결했다. 국가기록원은 금명간 이들 자료의 열람과 공개 여부 등을 결정하게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엔엘엘(NLL) 발언 논란이 국회의 대화록 공개 요구로 또다른 풍파를 맞게 됐다. 국회가 비록 자료제출요구안을 통과시켰지만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는 법적·정치적으로 문제가 많다. 현행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 의결 등 제한적인 경우에만 최소한의 범위 안에서 열람, 사본 제작 및 자료 제출을 허용하고 있다. 일부에선 사본 제작 등을 들어 공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지만 법 취지는 꼭 확인이 필요한 경우 제한적으로 열람을 허용하는 쪽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국회의 공개 요구는 법이 정한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는 정치적으로 소탐대실의 우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국가정보원의 대화록 전문 공개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의 NLL포기 발언은 없었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됐다. 이제 와서 다시 대화록을 공개한다고 해서 더 명확하게 논란이 종식될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소모적인 논란만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여야의 정략적 담합에 따라 대통령기록물을 언제든 볼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남기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이런 상황에선 누가 후대를 위해 정확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겠는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국회의 요구로 실제 공개된다면 저급한 우리 정치 수준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꼴이 될 것이다. 국정원이 본분을 망각하고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것에 대한 책임을 엄중히 묻고 재발하지 않도록 대처하는 게 국회가 할 일이다. 국회가 오히려 국정원의 못된 짓을 인정하고 따라하는 형국이라면 곤란하다. 여야 지도부가 NLL 국면을 손쉽게 모면하려는 정략적 판단에 따라 담합했다면 위험천만하다. 국회 의결에 의한 대화록 공개는 앞으로 정상회담 등 남북관계를 극도로 위축시키는 것은 물론 대외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국회가 열람 및 공개를 요구했다고 국가기록원이 무턱대고 대화록을 공개해선 안 된다. 국가기록원은 현행법에 따라 열람은 허용하되 공개 여부는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우선 열람을 통해 국정원이 공개한 대화록과 차이가 있는지 살펴본 뒤 공개 여부를 추후 결정하는 것도 방법이다. 여야 지도부는 이제라도 백년대계를 내다보는 책임 있는 자세로 대화록 공개 문제를 재고하기 바란다.


미국이 우방국에 대해서도 불법적인 정보수집 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영국 <가디언>과 독일 <슈피겔> 등의 보도를 보면, 미국 국가안보국(NSA)은 우리나라 등 38개국의 미국 주재 대사관에 대해 도청과 사이버 공격 등을 해왔으며, 유럽연합 본부의 전산망에 침투하기도 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유럽 나라들이 크게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프랑스와 유럽연합 등은 미국을 비판하면서 조사 등을 요구했다. 특히 미국이 전화통화, 전자우편,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등 매달 5억건의 통신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나타난 독일의 분노는 크다. 독일 정부는 미국이 자신을 ‘냉전시대의 적인 소련처럼 다뤘다’고 비난했고, 연방검찰은 미국 정보기관을 기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추진중인 자유무역협정 협상도 영향을 받게 됐다. 유럽연합 쪽이 자신의 모든 정보가 미국에 노출될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유럽 나라들은 기술적 대비책은 물론이고 관련 규정과 법률의 점검에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대사관이 도청당했다는데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손을 놓고 있다. 주미 대사관 쪽은 “보도가 정상적인 경로가 아니라 폭로에 의해 나온 것이므로 외교당국이 뭐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잘못된 태도다. 동맹국이라고 해서 불법 행위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진상 설명과 재발 방지책을 미국에 요구해야 한다. 도청 등을 피하기 위한 자체 점검도 필요하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일본의 관방장관은 ‘미국 쪽에 확인을 요구하겠다’고 했다.
미국은 잘못된 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재발 방지책을 제시해야 한다. 미국은 중앙정보국 전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이 국가안보국의 불법 정보수집 실태를 폭로하기 시작한 지 한 달 가까이 지났으나 한 번도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 심지어 미국 정보기관들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DNI)은 30일 “미국은 다른 모든 나라가 수집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외국 정보를 수집한다”고 변명했다. ‘당신들도 능력이 있으면 우리처럼 불법 행위를 해라’라는 식이다. 지구촌 지도국을 자처하는 나라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앞서 미국은 테러범, 극단주의자, 조직범죄자 등을 가려내려고 정보 수집을 한다고 했으나 이 또한 거짓으로 드러났다.
 
외국 대사관 등에 대한 도청은 국제관계의 신뢰를 근원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진지한 반성을 전제로 세계가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나가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관련 국제기구 등이 나서는 것도 한 방법이다.


[1500자 칼럼] 우울한 당신에게

● 칼럼 2013. 7. 1. 13:15 Posted by SisaHan
현대인은 옛 사람들에 비하여 물질적으로 엄청난 혜택을 누리고 산다. 여름이 되면 오늘날 가난한 서민들도 손쉽게 냉장고에서 얼려 즐길 수 있는 얼음도 천오백년 전 신라시대에는 임금을 비롯한 최고권력층만이 석빙고에 저장하였던 그것을 맛 볼 수 있었던 특별한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요즈음 우리가 누리는 온갖 가전제품들, 기성복 등 온갖 재화들,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다채로운 음식들은 18세기 세계를 거의 다 식민지로 집어 삼킨 영국의 여왕도 누리지 못했던 호사스러운 것들 일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사회의 가장 하층계급 이었던 농노들 조차 중노동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삶의 여유를 즐기게 된 오늘날, 이러한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오히려 정신질환은 더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의료기술의 발달로 그 동안 진단치 못하였던 질병들을 이제야 제대로 진단하게 되어 그렇다고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물질적 풍요와 넘치는 시간적 여유가 오히려 우리에게 독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지 하고 생각해 보게 된다.

특히 요즈음 한국에서 매일 신문을 도배하는 자살에 관한 뉴스를 읽다보면 유행처럼 번져가는 생명경시 현상, 반복되는 자살의 뉴스에 면역이 되어 이러한 심각한 현상에조차 무관심해져 가는 사회 풍조가 느껴져 더욱 안타깝고 안스럽다. 정신과 통계에 의하면 우울증의 평생 유발율 (사람이 평생 살아가면서 한번이라도 우울증에 걸릴 확율)은 약 20% 라고 한다. 즉 다섯 사람 중 한사람이 우울증에 걸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는스트레스가 없는, 완전히 행복한 삶이란 지리하고 무기력한 삶이 되기 쉽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사람들에게 긴장과 자극을 주어 그것에 도전하고 극복하는 동기부여가 되므로 오히려 정신건강에 유익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약간의 스트레스도 못견뎌하고 고통스러워 하다가 쉽게 자살의 충동을 느끼게 된다. 그 까닭은 이런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적은 스트레스에도 뇌에서 감정을 제어하는데 관여하는 신경전달 물질들인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 -아드레날린 등의 균형이 깨져 우울증이 유발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프로작, 졸로후트, 쎌렉사 등의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 등의 약물로 치료하면 70% 이상이 2개월 이내에 완치된다. (재발 방지를 위하여 최소한 1년 이상 이들 약물들을 복용하여야 한다) . 즉 우울증은 불치의 병이 아니며 정확한 진단과 올바른 치료로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한 병이다. 나는 주위에서 캐나다로 이민 온 한인들 중에도 사회적, 경제적, 언어적인 면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적응에 어려움을 겪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 또는 가족들이 자신이 무기력하거나 의지가 약하고 성격이 괴퍅하여 이런 문제가 생겼다고 착각하여 치료 받기를 주저하는데 있다. 우울증은 당뇨병이나 다른 질환들과 마찬 가지로 환자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걸리게되는 병으로 치료시기를 놓치면 자기 자신도 통제가 불가능하고 병이 더 깊어져 자살하게 되는 무서운 병이다. 한 예로 10년전 이곳 토론토에서 젊은 정신과 여의사가 산후 우울증에 걸려 아기를 안고 달리는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우울증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이는 정신과 의사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않아 자신의 자살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죽고만 것이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가정의를 찾아가도 우울증의 진단을 받지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까닭은 이들이 호소하는 주 증상이 “슬프다, 자주 운다, 우울한 느낌이나 자살의 충동이 든다” 가 아니라 “입맛이 없다, 체중이 빠졌다, 정력이 떨어졌다, 기운이 없다, 온몸이 나른하고 아프다, 늘 피곤하다, 잠이 잘 안 온다, 만사가 귀찮고 의욕이 없다, 평상시에 즐기던 일들이 다 귀찮다,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렵다, 죄책감이 든다, 주의가 산만하고 학교성적이 떨어진다 “등의 우리들이 흔히 우울증이라고 생각하는 주증상들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청소년들의 경우 이러한 문제가 생기면 친구들의 꼬임에 넘어가 자가치료를 한다고 마리화나를 피거나 마약에 손을 댈 수도 있으므로 올바른 상담과 치료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주위에서 앞서 말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올바른 일상을 되찾아주고 소중한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빨리 가정의나 정신과 의사를 만나 상담하고 치료하도록 권고하기를 강력히 권한다.

< 김영제 - 시인, 시.6.토론토 동인 >


[한마당] 이민자의 양심은 두개?

● 칼럼 2013. 7. 1. 13:12 Posted by SisaHan
초기 이민자들이 가장 당황하는 것은 언어장벽과 함께 문화적인 이질감이다. 비싼 세금에 꼬박꼬박 팁을 더해 음식값의 4분의 1이 넘는 부담이라든가, 생활화 된 더치 페이, 어린 자식과도 분명히 선을 긋는 재산문제. 자기들이 알아서 해치우는 결혼식, 너무 편하고 쉽게 치르는 장례, 거기에 선거문화와 내각제 정치체제의 유연성 등등, 과거 살아 온 고향 나라 관행이나 습속으로는 이해되지 않고 어색하기만 한 생활문화의 차이가 한 둘이 아니다.
그래도 살아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새 적응되어 있고,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어색함이 편함으로 바뀐 것들이 많아진다. 수십년 만에 모국을 다녀 온 이들의 입에서는 이제 여기가 더 편하고 살기좋다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나오는 걸 본다. 오랜만에 가보니 어색하더라는 것부터, 모든 게 번잡하고 정신이 없더라, 너무 각박하고 치열하게 살더라, 왜 그렇게 서로 으르렁대며 사는지 모르겠다는 탄식까지… 상황판단의 기준이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아무리 세월이 가도 변치않는 고정관념이 있으니, 바로 모국 정치에 대한 감정적 판단이다.
 

최근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 사건을 ‘국기문란, 민주주의 파괴범죄’로 규정한 시민단체와 대학생, 종교인들의 시위가 번지면서 미국의 한인동포들이 강하게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본다. ‘워터게이트’의 본고장에 사는 까닭에 ‘국정원 게이트’를 보는 시각이 남다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선 먼 산의 불처럼, “또 웬 시비냐”는 비뚤어진 애국심의 발로들도 접한다. 국가기관이 위법적인 행위를 해도 괜찮다는 뜻인지, 원래 정보기관이 그런 짓을 해오지 않았느냐는 무뎌진 인식 때문인지, 아니면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무조건 듣기 싫다는 것인지, 도통 납득이 안되는 반응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비호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워터게이트 보다 한 술 더 떠 엄연히 국가기관이 해선 안되는 민의 왜곡과 선거에 영향을 줄 불법 범죄혐의를 검찰이 밝혀냈는데도 말이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쓴 유명한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에는 주인공 걸리버 보다 작거나 크고, 사람을 말이 지배하는 등 상상 이상의 괴상한 나라를 여행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거인들의 나라에 간 걸리버는 고국 영국에서 일어나는 집회라든가 변호사들, 전쟁 등에 대해 설명했다가 왕에게서 “그대의 민족은 세상 표면에 기어다니게 된 생물들 가운데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인 것으로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라는 비참한 평가를 듣는다. 하늘을 나는 섬나라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허황된 학설로 사람들을 현혹해서 그 일에 중독되게 만드는 허풍나라를 경험한다. 또 마지막엔 사람들을 마치 종처럼 부리고 사는 말들의 세계를 간다. 그 곳에서 인간은 냄새나고 거칠며 포악한 존재들이다. 그런 인간들에 증오감과 자책감을 가졌던 걸리버는 고국에 돌아와선 가족과도 식사와 대화조차 못하는 병증으로 고통을 겪는다. 이질감의 후유증일 수도 있고, 허상과 실상 사이의 동질감을 비꼬는 작가의 신랄한 감정 표현일 것이다. 물론 풍자 소설일 뿐이며 경우는 다르지만, 이민자들 처지에서 고국과 이민지에서 접하는, 다른 상황과 관습 속의 이성적인 가치평가, 더 넓게는 사회정의 판단 등의 일관성 측면에서 곱씹어 볼 대목이 없지않다.
 
오래 산 이민자들은 거의 모국과 이민 삶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다. 비단 혼례나 장례문화의 그 것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여러 문제들의 좋고 나쁨, 정의와 불의, 선함과 악함의 정도와 수준에 대한 판단들은 나름대로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실제에 있어 우리들 주변을 보면 이중적인 이질감의 세계에 살고있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걸리버와 같은 고뇌조차도 없이-. 쉽게 말하면 이민 땅에서의 정의와 모국에 대한 정의 개념, 그 잣대와 평가 기준이 너무 다름에 놀라는 것이다. 일례로 사상적인 트라우마나, 지역·혈연에 대한 유대 혹은 소원함, 독재에 대한 무딘 감정 등의 불변 혹은 고착개념이 바로 그 것이다. 
이민자는 정의가 두 종류고 양심도 둘일까? 마치 걸리버가 여행한 거인국에 우리가 살고있는 것 같기도 하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