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왜 (Why?)

● 칼럼 2013. 6. 16. 11:21 Posted by SisaHan
얼마 전에 한국신문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어느 전문가란 사람이 교육에 관하여 쓴 글인데,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다시 말해 공부를 잘하려면, 수업시간에 질문을 많이 해야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래야 창조적인 마인드도 생긴다 했던가? 얼핏 읽었을 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어딘가 이상한 내용의 글이었다. 모르는 것이 있어 궁금하여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질문을 위한 질문을 던진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가르치는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고, 옆에 있는 다른 학생들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서너명의 학생이 질문을 하면 모를까? 대부분의 학생이 질문을 하면.…,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서 지금은 많이 나아졌으리라 생각하지만, 한국의 교육제도가 나아가서는 사회 자체가 질문을 하고 대답하는 토론문화에 익숙해져 있냐는 점이다. 어떤 상황에서 밑에서 묻고 위에서 대답해주는...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자유스럽게 말하고 상대방은 그것을 받아들여 주는….
 
내 개인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주변에서 보고 느낀 것에 대한 질문은 학문과 예술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경제를 포함한 모든 창조적인 또는 생산적인 활동에도…, 그리고 질문이란 것이 꼭 누구에게 대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어떤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한다, 그리고 선생님이 정답을 말해주어도 이해할 수 없다거나 자신의 생각과 틀리면, ‘왜?’라고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 번 선생님이 말하면 그것이 절대적인 정답인양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면, 어떤 질문에도 정답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면…, 그런 환경에서 창조적인 생각이 자랄 수 있을까?

내가 학교 다닐 적은 이제는 옛날 옛 적의 이야기지만, 모든 일에 제대로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살았다. 그저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주는 것을 받아 적기에 바빴고, 빠르게 나가는 진도 때문에, 멍청한 질문을 하는 녀석이 있으면 곱지않은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뭐든지 물어 보면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선생님은 준비한 짧고 간단한 정답을 말했고, 그 누구도 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왜? 라고 물어보지 못했다. 사회나 역사, 문학 같은 인문과목이 한가지 정답이 있을 수 없고,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는 것인데, 우리 세대는 같은 개수의 단추가 달린 검은 교복을 입고 앉아 한 개의 정답을 외워야만 했다.
많은 세월이 지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들 이야기 한다. 한 교실에 학생 수만 해도, 70명이나 되던 우리 때보다 반도 안되는 학생들이 자유스런 복장으로 앉아 있다고 한다. 때로는 학원수업 때문에 자고 있다거나…, 이제는 대입을 위해 논술도 공부하고, 그러나 그 준비를 위해 학원도 가고….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왜 공부하는 가에 대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아무리 제도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질문은 궁금한 것을 알고싶어 던지는 것이 아니라 성적을 올리기 위해 던져야 하듯, 공부를 배우려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것을 바로 잡고 모범을 보여주어야 하는 대학 자체도 돈이 안되는 인문 학부를 폐지하기에 바쁘다면, 대학은 왜 존재하는가? 공부는 왜 하는가? 요즘 어느 곳을 막론하고 컴퓨터 시대에, 또는 새로운 시대에, 경계선을 허물고 새로 창조해내는 통섭,융합,퓨전이 유행이다. 무엇을 하든 한 분야만, 한 쟝르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은 이제 낡은 생각이 되었다. 진정한 창조적인 마인드를 가진 새 시대의 일꾼이 되려면 마음의 문을 열고, 경계선을 지우고, 질문다운 질문을 하고 그리고 그 질문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조지 오웰이 1950년대에 쓴 소설 「1984년」의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나라 ‘오세아니아’가 도래한 것인가.
요즘 미국은 ‘빅 브라더’ 논란으로 뜨겁다. 전직 CIA직원이 폭로한 일급기밀 프로젝트 ‘프리즘(PRISM)’이라는 거대한 정보수집 흑막 때문이다. 프리즘은 CIA의 지원을 받은 실리콘 밸리 IT벤처기업이 만든 특수 정보 분석 프로그램으로, 국가안보국(NSA)과 연방수사국(FBI)이 이를 이용해 구글·페이스북·마이크로소프트·애플·야후·유튜브·스카이프·팔톡·에이오엘 등 9개 정보기술 회사의 서버에 직접 접속, 개개인의 파일 전송기록과 오디오, 이메일, 채팅 정보 등을 샅샅이 검색하고 분석하며 사실상 개인의 사생활을 실시간 감시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감시가 대테러 첩보수집을 명분으로 캐나다를 포함해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유럽 각국도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미국에 재발방지를 요구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는 얼마전 AP통신의 통화기록을 몰래 훑어 본 사실이 폭로돼 고역을 치른 언론자유 침해 논란에 이어 사생활 통제 확증으로 더욱 궁지에 몰렸다. 일이 확산되면서 미국의 16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 DNI가 이 사실을 시인하고 ‘폭로자’를 색출하겠다며 오히려 분노를 표하고 나왔다.
그런데 이 엄청난 일을 저지른 폭로자는 전직 CIA요원이던 단 29살의 젊은이 에드워드 스노든으로 밝혀졌다, 그는 연봉 20만 달러의 안정된 생활을 마다하고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미국 정보기관의 추악한 비밀감청 실태를 폭로했다고 밝혔다. “미국정부의 힘이 미치지 않을 것 같아” 홍콩으로 가서 ‘거사’를 벌였다는 그는 인터넷 환경이 자유롭기로 소문난 아이슬란드로 망명을 희망했다. 하지만 그의 망명이 성사될지는 불투명하다. 미국정부가 거대한 추격전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어도 “익명으로 숨을 의도가 전혀 없다. 내가 잘못한 게 없기 때문이다. 두렵지도 않다. 내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의연한 표정을 보였다고 언론들이 전한다.
 
미국에서는 요즘 이라크 전장에서 근무하던 브래들리 매닝 일병(25)이 미국의 외교-군사 비밀문서 수십만 건을 폭로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넘겨준 ‘반역과 간첩’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군 안에서 발생하는 ‘피에 굶주린’ 일부 만행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뤄진 미군의 인명 경시 풍조를 세상에 공개하고 싶었다”고 기밀 폭로가 정의감에서 비롯됐음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대통령 선거 당시 이른바 ‘댓글 공작’ 등으로 선거에 개입한 국정원의 불법 정치활동 폭로가 있었다. 국정원은 당시 특별 감찰을 통해 외부에 사실을 알린 직원 색출에 나서 징계 처벌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 뒤에는 수서경찰서 수사책임자였던 권은희 과장이 경찰수뇌의 수사방해와 부당한 압력에 대해 폭로하는 일도 벌어졌다. 문제는 이들 내부 고발자들이 정의로운 양심가들로 대접받기는 커녕 배신자 취급을 받는 정치·사회풍토와, 정의-불의 나아가 선-악을 모호하게 만드는 인간사회의 극한적 대결구조다.
 
미국의 젊은 양심들인 에드워드 스노든과 브래들리 매닝은 자칫 종신형까지도 살아야 할지 모른다. 삼성의 검은 거래를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는 여전히 영웅이 아닌 배신자처럼 인식된다. 법률을 위반한 국정원은 정치활동을 반성하기는 커녕 궤변으로 역공에 열을 올린다. 
명백한 불법과 위법을 두고 볼 수 없어 때로는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 양심과 선행의 위기-. 정의롭고 용감한 고발이 국가와 회사,조직의 의리를 배반한 것으로 매도되고 지탄의 대상까지 되는 모순과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걸까.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가 무시되고 정의가 불의처럼 오도되는 이 세상은, 아무래도 갈수록 빅 브라더 수중에 장악되어 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안철수 정치’와 이론 문제

● 칼럼 2013. 6. 16. 11:14 Posted by SisaHan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싱크탱크로 ‘정책 네트워크 내일’을 만들었다. 최장집 이사장과 장하성 연구소장을 비롯해 유력한 지식인 여럿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내일’은 안 의원이 추구하는 새 정치를 뒷받침할 정책 담론을 개발하겠다고 한다. 안 의원이 정치에 다시 뛰어들면서 정책부터 붙든 것은 좋은 일이다. 안 의원의 정치활동 무기가 될 뿐 아니라 범야권 차원에서도 자극이 될 수 있다. 
안 의원은 대선 국면에서 정책 준비가 부족해 좌충우돌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에 앞서 <안철수의 생각>이란 책을 펴내고, 정책 분야별로 기본 착상을 선보인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그 뒤 안 의원 자신이 통일외교안보를 비롯한 일부 분야에서 <안철수의 생각>과 어감이 다르게 발언함으로써, 무엇이 진정한 안철수 생각인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대표 상품이라는 정치개혁 분야에서도 고작 국회의원 수 줄이기를 실천 수단으로 제시해 밑천이 짧다는 느낌을 줬다.
 
안 의원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지난 대선에서 야권은 무엇보다 연합정치에 대한 이론적 허약성을 드러냈다. 문재인 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 진영은 과거 DJP 연합 수준의 정책협약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 공통의 정책과 우선순위, 실현 프로그램을 합의하고 시민들한테 설명하는 기본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여론조사로 단일화를 하느니 마느니 하는 수준 낮은 밀고 당기기만 벌였다. 이것이 야권의 대선 패배 원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안 의원 진영이 기왕에 이론 작업에 착수한다면 연합정치 주제를 우선적으로 연구하는 게 옳다고 본다. 
‘안철수 세력’은 사실 독특하다. 기성 야당을 통해 소화되기 어려운, 새로운 정치적 취향과 참여 욕구를 품은 시민들이 주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안 의원은 국회에서 거의 단기필마 소수세력이다. 다원화된 가치를 대변하기 좋도록 다당제를 주장하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다. 이와 동시에 창당도 하지 않은 ‘안철수 신당’이 여론조사 지지율로 민주당을 앞서고 있다. 안 의원 진영이 야권 재건의 동력이 되리라고 기대를 모으는 동시에, 야권 분열에 대한 걱정이 함께 나오는 이유다. 연합정치 이론을 연구하는 것은 안 의원이 정치 재수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할 듯하다.
 
연합정치는 보편성이 매우 큰 주제이기도 하다. 서양 정치사에서 소수 정치세력은 늘 연합정치를 통해 성장했다. 영국 노동당은 자유당과 연합 전략을 구사했다. 사회당과 여러 민주주의 정파들은 파시즘에 맞서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진보정당은 대체로 선거연립을 잘 만들 때 집권했다. 
안 의원 진영이 해결해야 할 또 한가지 이론 문제는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구호가 무엇을 뜻하는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또한 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까지 정부 정책의 진보성은 주로 외교안보, 특히 대북정책에서 나타났다. 그밖에 경제정책에서는 보수정권과 진보정권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화해협력이냐 대북 압박이냐라는 남북관계 철학이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상징언어처럼 된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진보와 보수를 고정해놓고 개별 정책을 꿰어맞춰야 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안보는 보수’를 표방한다면, 어떤 보수정책 묶음으로 남북관계와 분단의 모순을 해결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안보는 보수’ 구호가 단기 여론을 의식한 모호한 처방으로 비칠 여지가 있다. 
안 의원이 저명한 학자들을 삼고초려하고, 이론 연구에 착수한 점은 여러모로 방향을 잘 잡은 것이다. 좋은 결과를 일궈 야권과 지식계를 자극해주면 좋겠다.

< 박창식 - 한겨레신문 연구기획실장 겸 논설위원 >

 
남북이 12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에서 열기로 했던 고위급 당국회담이 일단 무산됐다. 이유는 수석대표의 격을 둘러싼 이견이다. 장소와 일정, 의제까지 다 합의해 놓고도 회담이 무산된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북쪽보다는 처음부터 무리한 요구를 한 우리 정부에 더 큰 책임이 있다.
정부는 애초 장관급 회담을 하자고 한 직후 북쪽의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해야 한다는 뜻을 비쳤다. 정부는 9일 열린 실무회담에서도 김 부장의 참석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회담이 다음날 새벽까지 늦어지고, 장관급 회담이라는 이름도 당국회담으로 바뀌었다. 김 부장이 참석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정부는 어제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하는 명단을 북쪽에 전달했다. 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수석대표로 제시한 북쪽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논의는 더 진행되지 못했다. 6년 만에 재개될 예정이던 고위급 회담이 사실상 정부 스스로 만든 장애물에 걸려 좌초된 셈이다.
 
정부 태도는 여러모로 문제가 있다. 김 부장은 정부가 아니라 당에 소속된 사람이다. 정부 당국자 사이의 회담에 김 부장의 참석을 집요하게 요구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 김 부장을 꼭 대화 상대로 하겠다면 애초부터 장관급 회담이 아니라 다른 이름의 회담을 제의했어야 한다. 과거에도 김 부장의 상대는 국정원장 등이었고, 통일부가 없는 북한은 장관급 회담에 협상 능력이 있는 ‘내각 참사’ 등을 참석시켰다. 정부가 이를 잘못된 관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전의 여러 회담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또한 하는 일과 권력으로 볼 때 김 부장은 부총리급 정도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정부는 아마도 개성공단 가동 중단을 주도한 김 부장을 참석시켜 직접 책임을 따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개성공단 문제는 누가 대표로 참석하더라도 논의할 수 있다.
 
지금 남북 관계는 수석대표 문제로 끝까지 기싸움을 벌일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개성공단 정상화가 빨리 이뤄지지 않으면 장기 폐쇄로 갈 가능성이 크다. 최근 관련국들이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는 한반도 비핵화 노력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남북 회담에서 직접 북한 핵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비핵화 대화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담이 열리지 못한다면 남북 관계가 오히려 비핵화 대화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과거 방식은 무조건 잘못이라고 해서는 남북 대화가 이뤄지기 어렵다. 정부가 말하는 신뢰와 원칙이라는 말이 이런 식으로 잘못 쓰여서는 안 된다. 이제라도 무리한 주장을 철회하고 해법을 찾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