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권의 국가정보원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무능하면서도 정치화된 정보기관’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징후 포착 실패 등 안보 문제에서의 잇따른 헛발질, 국제적 망신거리가 된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 침입 사건 등 실수와 판단착오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도 국내 정치정보 수집과 사찰, 선거 개입 등 정권의 보위대 구실에는 발벗고 나섰다. 국정원의 18대 대선 개입 사건은 이런 점에서 국정원을 ‘유능하면서도 탈정치적인 선진 정보기관’으로 바꿔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일깨워준 사건이다. 
국정원 개혁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국가 최고지도자의 강력한 의지, 둘째는 국민적 공감대에 바탕을 둔 정치권의 세밀한 제도적 개선책 마련, 셋째는 주도면밀한 실행이다. 역대 정권이 국정원 개혁에 실패한 것은 이 세 가지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못한 탓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첫째 조건인 대통령의 개혁 의지부터 불투명한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과 관련된 공약을 제시하지 않았고, 평소에도 국정원에 대한 의견을 밝힌 바가 별로 없다. 이번 사건이 난 뒤에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창조경제 등 박 대통령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들과 비교해 보면 국정원 개혁에 실린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새누리당의 태도를 보면 더욱 놀랍다. “종북 세력의 활동에 맞서기 위한 사이버 공간의 정당한 활동” 등 ‘원세훈 대변인’을 자처하는 발언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국정원 개혁의 첫 단추는 국정원의 국기문란 행위에 대한 단호한 비판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정반대로 이를 비호하기 바쁘다. 국정원 개혁을 위한 제도적 개선책 마련은 고사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청와대 관계자는 어제 “이번 사건과 관계없이 새 정부가 들어서고 새 국정원장이 임명되면서 따로 개혁 방안을 발표할 필요도 없이 이미 개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개혁은 단순한 인사 물갈이나 조직 개편 정도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 정도의 시도는 역대 정권 출범 때마다 되풀이해 왔으나 매번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무산됐다. 
무엇보다 개혁의 청사진 하나 없이 개혁을 한다는 것부터가 난센스다. 게다가 남재준 신임 국정원장은 ‘좌파 정권 10년 동안 국정원이 이상하게 변질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국정원 환골탈태를 위한 외부 조건은 전례 없이 무르익었는데도 청와대와 여권, 국정원 수뇌부가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소년의 69%가 6.25 전쟁에 대해 북침이라고 응답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들어 교육현장에서의 역사왜곡 문제를 제기한 것을 두고 뒷말이 많다. 박 대통령은 지난 17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학생들의 약 70%가 6.25를 북침이라고 하는 것은 교육이 잘못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아이들의 기본 가치와 애국심을 흔들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신 분들의 희생을 왜곡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발언은 관련 사실을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채 나온 신중하지 못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여론조사는 최근 <서울신문>이 입시업체와 함께 진행한 조사였는데, 문제의 문항은 ‘한국전쟁은 남침인가, 북침인가?’로만 돼 있었다고 한다. 교육전문가들은 주어가 빠진 채 제시된 이 문항에서 북침이란 말이 북쪽이 침략을 했다는 것인지, 북쪽을 침략했다는 것인지 청소년들이 헷갈렸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이 조사는 입시업체가 청소년 회원들을 대상으로 메일을 보내 임의로 한 것이어서 여론조사 업체가 정교하게 설계한 설문으로 보기 어렵다.
지난 2004년 국가보훈처가 청소년 4000명을 대상으로 한 ‘청소년 호국·보훈의식 여론조사’에서는 남한이 북침을 했다고 답한 학생은 0.7%뿐이었다고 한다. 이 조사의 질문 내용은 ‘6.25 전쟁을 누가 일으켰느냐’는 것이었는데 학생들의 54.5%가 ‘북한’이라고 답했다. 박 대통령이 교육현장이 문제라고 했지만 우리 학교 어디에서도 6.25가 남한에 의한 북침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있다. 중·고교 역사교과서들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북한은 6.25 전쟁을 일으켰다’는 등의 정확한 표현이 기재돼 있다.
 
박 대통령은 문제가 된 설문조사를 근거로 그간 보수진영에서 제기해온 역사왜곡의 문제를 부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거가 되는 기초사실조차 불확실하다면 곤란하다. 대통령이 아무리 자기 입맛에 맞는 소재라고 해도 확인조차 되지 않은 내용을 들어 발언하기 시작하면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 대통령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천금처럼 무겁고 신중해야 한다.
대통령이 역사 문제를 두고 앞장서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것도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의원 시절 뉴라이트 교과서 출판기념회에 참석하는 등 보수적 역사관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해도 대통령이 특정 역사관에 경도돼 역사 문제까지 좌지우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역사와 교육은 학자와 교사들에게 맡기는 것이 순리다.


[한마당] 한국, 과연 어떤 나라인가

● 칼럼 2013. 6. 22. 17:19 Posted by SisaHan
지금 드러나고 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나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선거개입 행태는 한국 사회에서 ‘최소한의 합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제기한다. 
이들의 행동은 물론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정부조직의 근간이라 할 국정원이나 경찰의 수장들이 보인 행동은 단순히 이들에 대한 처벌을 넘어서 한국 사회가 과연 어떤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인지, 드러나지 않는 공범은 누구인지, 이들을 처벌하고 나면 앞으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인지 등 여러 가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원세훈 전 원장의 드러난 발언들을 보면 그는 40여명의 국회의원을 종북좌파로 몰았고, 선거를 통해 당선된 현직 시장이 한나라당 소속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나라의 체제를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판단에 기초해서 국가의 핵심 인재여야 할 국정원 직원들에게 댓글이나 열심히 달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의 발언에 드러난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는 정보기관이 하지 말아야 할 선거개입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당시 한나라당 혹은 현 새누리당 소속 후보만 당선되어야 한다는 강한 정파적 편향에 입각해 공직을 수행했고, 무엇보다 민주주의 그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했다.
필자가 궁금한 것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공직에, 그것도 국정원이라는 최고 권력기관의 수장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나라인가 하는 점이다. 
대선 기간 중 문제가 된 국정원 여직원의 노트북에서 유력한 증거를 신속하게 찾아내고도 김용판 전 청장의 개입으로 진짜 증거를 폐기하고 가짜 증거를 만들어준 경찰의 분석관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억지로 만들어주어야 했던 가짜 증거가 대선을 이틀 앞두고 방송을 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그들의 심정 말이다.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민중의 지팡이라는 자긍심으로 버티는 수많은 경찰 공무원들에게 이것은 또 어떤 상처를 안겼을까. 다음번에 비슷한 사건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공정하고 적극적인 수사를 하려고 할까, 아니면 해봐야 안 될 게 뻔하니 알아서 길까. 
또다시 궁금해지는 것은 자신이 평생을 몸담았던 조직을 망가뜨려서라도 정권에 충성하고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사람이 수도 서울 경찰의 수장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나라인가 하는 점이다.
 
정파와 세대와 지역과 종교 따위에 상관없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동의할 수밖에 없는 강한 도덕적 의무를 느끼는 ‘최소한의 합의’는 무엇인가. 이것이 없으면 제2, 제3의 원세훈과 김용판 같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고위 공직에 오르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민주주의가 그 최소한의 합의였으면 좋겠지만, 이번에 드러났듯 국정원장을 4년씩이나 지낸 사람의 발언이나 서울 경찰의 수장이 보인 행태를 보면 민주주의는 아직까지 확고하게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 같다. 
인권이 그 최소한의 합의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린 학생들 때리지 말자는 학생인권조례에 어른들이 정색하고 반대하는 모습이나 특정 종교의 반대 때문에 차별금지법조차 만들어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인권조차도 아직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 같다. 
국정원 사건과 관련하여 대통령이 분명한 입장을 내놓아야 한다는 요구가 점점 강해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들이 위반한 ‘최소한의 합의’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언급도 포함되는 것이 옳다. 
정치권은 그 최소한의 합의를 치열하게 토론하고 궁극적으로는 헌법적 가치로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권을 경시하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운명을 맡기게 될 것이다.
 
<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 


[1500자 칼럼] 왜 (Why?)

● 칼럼 2013. 6. 16. 11:21 Posted by SisaHan
얼마 전에 한국신문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어느 전문가란 사람이 교육에 관하여 쓴 글인데,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다시 말해 공부를 잘하려면, 수업시간에 질문을 많이 해야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래야 창조적인 마인드도 생긴다 했던가? 얼핏 읽었을 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어딘가 이상한 내용의 글이었다. 모르는 것이 있어 궁금하여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질문을 위한 질문을 던진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가르치는 사람을 짜증나게 만들고, 옆에 있는 다른 학생들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서너명의 학생이 질문을 하면 모를까? 대부분의 학생이 질문을 하면.…,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서 지금은 많이 나아졌으리라 생각하지만, 한국의 교육제도가 나아가서는 사회 자체가 질문을 하고 대답하는 토론문화에 익숙해져 있냐는 점이다. 어떤 상황에서 밑에서 묻고 위에서 대답해주는...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자유스럽게 말하고 상대방은 그것을 받아들여 주는….
 
내 개인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주변에서 보고 느낀 것에 대한 질문은 학문과 예술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경제를 포함한 모든 창조적인 또는 생산적인 활동에도…, 그리고 질문이란 것이 꼭 누구에게 대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어떤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한다, 그리고 선생님이 정답을 말해주어도 이해할 수 없다거나 자신의 생각과 틀리면, ‘왜?’라고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 번 선생님이 말하면 그것이 절대적인 정답인양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면, 어떤 질문에도 정답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면…, 그런 환경에서 창조적인 생각이 자랄 수 있을까?

내가 학교 다닐 적은 이제는 옛날 옛 적의 이야기지만, 모든 일에 제대로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살았다. 그저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주는 것을 받아 적기에 바빴고, 빠르게 나가는 진도 때문에, 멍청한 질문을 하는 녀석이 있으면 곱지않은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뭐든지 물어 보면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선생님은 준비한 짧고 간단한 정답을 말했고, 그 누구도 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왜? 라고 물어보지 못했다. 사회나 역사, 문학 같은 인문과목이 한가지 정답이 있을 수 없고,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는 것인데, 우리 세대는 같은 개수의 단추가 달린 검은 교복을 입고 앉아 한 개의 정답을 외워야만 했다.
많은 세월이 지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들 이야기 한다. 한 교실에 학생 수만 해도, 70명이나 되던 우리 때보다 반도 안되는 학생들이 자유스런 복장으로 앉아 있다고 한다. 때로는 학원수업 때문에 자고 있다거나…, 이제는 대입을 위해 논술도 공부하고, 그러나 그 준비를 위해 학원도 가고….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왜 공부하는 가에 대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아무리 제도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질문은 궁금한 것을 알고싶어 던지는 것이 아니라 성적을 올리기 위해 던져야 하듯, 공부를 배우려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것을 바로 잡고 모범을 보여주어야 하는 대학 자체도 돈이 안되는 인문 학부를 폐지하기에 바쁘다면, 대학은 왜 존재하는가? 공부는 왜 하는가? 요즘 어느 곳을 막론하고 컴퓨터 시대에, 또는 새로운 시대에, 경계선을 허물고 새로 창조해내는 통섭,융합,퓨전이 유행이다. 무엇을 하든 한 분야만, 한 쟝르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은 이제 낡은 생각이 되었다. 진정한 창조적인 마인드를 가진 새 시대의 일꾼이 되려면 마음의 문을 열고, 경계선을 지우고, 질문다운 질문을 하고 그리고 그 질문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