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주권과 국격

● 칼럼 2013. 5. 24. 19:20 Posted by SisaHan
동아시아 정세가 심상치 않다. 지난 1년여 사이 한반도를 둘러싼 4대국의 리더십이 모두 바뀌었으니 변화가 있으리란 것은 모두가 짐작하던 바였다. 
북한의 김정은이 로켓 발사 및 핵실험을 감행하자 한국과 미국은 출구 없는 강 대 강 대립을 이어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첫 해외 순방지를 미국으로 정하고 국빈 의전도 포기하고 실무방문의 형식으로 오바마 정부를 찾아서 협의를 하게 된 것은 동아시아 지역 정세에 대한 새로운 대응책이 필요하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과 관련하여 그가 영어 연설을 얼마나 잘했는가, 어떤 옷을 입었으며, 의회에서 박수를 몇 번 받았는가 등의 연예인성 가십만 강조되고 정작 중요한 쟁점에 대한 대화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역점을 들여 주장한 것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현안으로 비무장지대에 평화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협의를 하자는 다소 생뚱맞은 제안이었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미국이 요구한 미사일방어체계에 대한 협력을 약속했고, 키리졸브와 독수리 훈련에 이어 니미츠 핵항공모함을 부산에 맞아들여 한·미·일 군사훈련에 역점을 기울이고 있다. 
전쟁 위기와 군비경쟁이 고조되는 시점에 우리 정부는 주변국의 종속변수가 되기보다는 과감하고 실질적인 대화의 창을 열어 우리의 주권과 국격에 걸맞은 평화체제를 위한 리더쉽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육해공군에 대한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사령관이 이끌던 유엔군에 넘겨줌으로써 한국의 생존을 보장받으려 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무려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주권의 일부인 전시작전통제권은 한국이 아니라 미군 사령관의 손에 있다. 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을 2015년까지 반환받기로 하고 이를 위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일각에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이를 미루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있다. 
최근 세간에 화제가 된 윤창중 사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도 마찬가지로 씁쓸함을 불러일으킨다.
 
윤창중씨가 미국에서 보인 행적은 상식적으로 참 납득하기 어렵거니와, 주미 한국대사관이나 한국의 방미 지도부는 그 사안으로 국격의 실추를 입은 데 더하여 주권적 권한의 행사를 스스로 포기하였다. 한 나라를 대표한 대통령의 방미단의 일원으로 대변인직을 수행하는 국가 공무원은 국제 관습법상 주권면제의 대상이다. 
민간 차원의 상행위에 개입된 것이 아니고 면책특권의 행사를 명시적으로 포기하지 않으면, 미국이 재판 관할권을 갖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인턴을 상대로 한 행위가 경찰에 신고가 되어 미국 경찰에서 수사를 착수한 불미스러운 상황을 맞았을 때, 한국 정부는 미국 경찰의 수사를 두려워하고 그를 피하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한국 정부의 수사관할 사항임을 인지하고 한국의 경찰 영사 또는 담당 수사기관을 통해 수사에 착수했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의 대변인이었던 사람이 논란에 휩싸이니 미국의 수사망을 피해 도피시키는가 하면, 이제는 뒤늦게 미국 경찰에 신속한 수사를 요청하고 그에 협조하겠다니, 과연 한국 정부의 주권이 미국 경찰의 수사를 받을 정도로 하찮은 것일까. 
한국 정부가 국제법의 기본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또 국제관계 속에서 우리의 주권의 기본을 지킬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위기 상황에 처할수록 주권과 국격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새 정부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격을 지키고 주권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의무를 최대한 잘 이행해 주기를 바란다. 

< 박태웅 - 미국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 >


엊그제 광주광역시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33주년 기념식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5년 만에 처음으로 5.18 기념식에 참석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하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둘러싼 논란으로 유족과 유공자, 시민사회단체 상당수가 행사에 불참하면서 기념식은 반쪽짜리 행사에 그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은 기념식에서 “5.18 정신이 국민통합과 국민행복으로 승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날의 반쪽 행사는 ‘반쪽짜리 국민통합’을 뛰어넘기 위해 박 대통령과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역설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통합과 화해는 무엇보다 피해자의 입장을 배려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날의 주인공들인 5.18 유공자와 유족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을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데도 국가가 이를 거부한 것부터 화해와 통합과는 동떨어진 처사다. 행사장의 빈자리를 향해 박 대통령이 국민통합을 강조하는 모습이 공허하게만 다가오는 이유다.
 
국가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거부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도 이날 행사 장면을 통해 잘 짐작할 수 있었다. 전국에 생중계되는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박 대통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이런 결정은 물론 박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한 결과임이 분명하다. 노래 문제 하나로 대통령의 5.18 기념식 참석의 의미를 스스로 퇴색시키고 국민 간에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한 이 정부의 짧은 생각과 좁은 안목이 안타까울 뿐이다.
화해와 통합을 위한 길은 결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보수 정권의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모습에서 화해와 통합의 단초가 열린다. 이런 단순한 이치를 놓아두고 아무리 말로만 국민통합을 외쳐봤자 영원히 반쪽짜리 통합, 불완전한 화해에 그치고 만다.
 
단지 5.18 문제만이 아니다. 박 대통령은 대선 승리 이후 줄곧 국민통합을 강조해 왔으나 실제로 진정성 있는 통합 노력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인사 문제만 해도 지난 대선에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48%를 포용하는 탕평 인사는커녕 오히려 통합에 역행해온 인사들을 많이 발탁했다. 통합의 상징적 기구인 국민대통합위 구성도 지지부진하고, 인권과 노동 등의 사안에서도 통합을 위한 노력이 미진하다. 박 대통령에게 이번 5.18 기념식이 반쪽의 통합이 아니라 온전한 통합을 위한 진지한 고민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국가정보원의 정치공작 의혹이 점점 짙어지고 있는데도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사건 연루자들이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국정원 감찰실에 근무한다는 사실까지 보도됐는데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철저히 수사하라는 형식적인 말이라도 할 법한데 아예 모르쇠로 버티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이 사건과 관련해 여권에서 나온 공식 언급은 ‘검찰의 공정하고 신속한 수사를 바란다’는 새누리당 대변인의 뒤늦은 논평뿐이다. 당 공식회의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 이상돈 전 비대위원과 이완구 의원이 개인 의견을 언론에 밝혔을 뿐 기이한 침묵이 여권 전체를 짓누르는 분위기다. 국정원의 정치공작이라는 사안의 심각성에 비춰보면 여권의 이런 태도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른바 ‘박원순 서울시장 제압’ 문건과 ‘반값 등록금 허구성 전파’ 문건은 국정원의 정치공작이 그대로 실행됐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명백한 물증이다. 여기에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시’, 심리정보국이 벌인 정치댓글 내용을 종합해보면 단순한 국정홍보 차원을 넘는 거대한 공작의 징후가 뚜렷하다. 특히 이런 공작들이 총선 전인 2011년 6월과 11월, 그리고 대선 직전에 기획·실행됐다는 점에서 총선 대선을 겨냥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검찰이 국정원법상의 정치관여죄에 무게중심을 두고 수사중인 모양이나, 지금까지 보도된 내용을 고려하면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보기 어렵다. 
선거법 공소시효가 임박했는데도 검찰이 선뜻 총력수사에 돌입하지 못하는 건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의 모호한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박 대통령은 대선 직전 정치댓글 사건에 대해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라고 규정한 뒤 이를 번복한 적이 없다. 만일 국정원의 선거법 위반 혐의가 드러날 경우 대선 결과의 정당성에 흠집이 갈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침묵을 계속하는 건 ‘중립’이 아니라 사실상 종전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고, 검찰의 적극 수사에 반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여당 지도부가 일체 언급을 피하는 것도 이런 분위기를 읽은 때문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국정원이 저지른 민주주의 파괴와 국기 문란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일 뿐 아니라 엄청난 범죄를 은폐하는 공범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당장 민정수석실 추아무개씨의 거취를 포함해 이 사안에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계속 침묵을 유지하는 것은 수사 방해나 마찬가지다.


[1500자 칼럼] 그 이름 알고부터

● 칼럼 2013. 5. 20. 18:48 Posted by SisaHan
오월의 뜰 안으로 불청객이 들었다. 흔히 봄에 내리는 눈을 서설(瑞雪)이라 한다지만 광풍과 우박을 동반한 눈은 내내 마음을 졸이게 했다. 이른 아침 화단가에 섰다. 눈 속에 파묻혔던 제라늄이며 새순들의 안위가 염려되어 잠까지 설친 밤이었다. 하지만 조바심과는 달리 파릇파릇한 새순들이 싱그럽게 한들거리고 있었다. 강인함을 키우려는 자연의 섭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뜰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산 당화와 개나리는 파란 새순 속에서 배시시 꽃잎을 열었고 옥잠화, 원추리, 나리 등 구근류는 불쑥불쑥 올라와 키 재기를 하고 있었다. 늦추위가 더 온다고 해도 이젠 걱정할 일이 아닌 듯 했다.
뜰 안으로 번져가는 봄기운을 쫒다가 화단 귀퉁이에 놓여 있던 두 개의 빈 화분에 눈길이 갔다. 주변의 파란 꼬물거림과는 달리 새초롬한 햇살만 담겨있었다. 월동을 위해 내실로 들였다가 실패한 흔적이다. 나는 빈 화분을 보며 절정기에 있던 ‘하얀 업둥이’와 ‘빨간 별이’의 싱그럽던 자태를 그 속에 담아보았다. 실체 없는 상상은 허전함만 더 할 뿐 위로가 되지 못했다. 차라리 노지에 두었더라면 소생의 계절을 기대하련만 하는 아쉬움만 남았다. 화초를 기르다 보면 번번이 있는 일이지만 이번은 좀 특별한 것 같다.
 
‘하얀 업둥이’와 ‘빨간 별이’는 꽃명이나 학명이 아닌 임의대로 붙여 본 이름이다. ‘하얀 업둥이’는 이름 그대로 업둥이로 들여와 개화까지 보게 되어 그렇게 붙였고, ‘빨간 별이’는 꽃의 생김새에 따라 붙여 본 것이다. 즉흥적인 작명이 꽤 마음에 들어서 빈 화분을 앞에 두고 번갈아 되 내어 보다가 화초 고유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물론 생각날 리 없었다. 기르는 동안 몇 번 궁금해 하기는 했어도 알아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가 떠올랐다. 사람을 만나면 첫 대면 부터 호구조사 하듯 궁금증을 풀어내면서 정작 애지중지하는 화초들의 이름은 무관심했으니, 놈들은 나에게서 오랫동안 꽃이 되어 줄 리 만무했다. 모든 식물들이 제 각각의 이름을 가지듯이 생장에 필요한 조건 또한 차이가 있으리라. 화초 기르기를 좋아하면서도 번번이 실패하는 연유는 아마도 이런 개별성을 간과한 탓 일 게다. 
늦은 감은 있지만 원예에 관한 책을 펼쳤다. 책장을 넘길 때 마다 신선함과 미안함이 함께한다. 과꽃을 접시꽃의 다른 이름으로 혼동했다거나 한련화는 친숙한 꽃임에도 이름을 몰랐었고, 안스리움, 디펜바키아, 싱고니움, 아레카야자, 마리안느 등은 키우면서도 몰랐던 이름들이다.
 
새로운 눈으로 거실의 화초들을 둘러본다. 포인센티아는 붉은 잎을 피우기 위해 가장 햇볕 좋은 곳으로 옮겨야겠고 아레카야자수는 큰 키를 위해 긴 화분으로 교체해야 겠다. 새로워진 눈은 육안으로 보이는 것 뿐 아니라 사고의 폭도 확장시킨다. 안스리움은 가늘고 긴 줄기 끝에 큰 잎을 매달고 있어 안쓰러워 보이고, 싱고니움은 색상도 모양새도 특출함이 없어 싱거워 보인다. 둘 다 영어명이지만 풍기는 이미지에서 우리의 표현법과 유사한데 놀랍다. 이름을 알고 나니 화초는 그 자리인데 마음이 그 곁을 맴돌고 있다. 
봄은 생동의 계절이다. 막힌 물꼬를 터서 흐름부터 순조롭게 잡아야겠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