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캐나다 강연을 갔을 때 들은 이야기다. 캐나다를 출발하여 유럽으로 가던 비행기 안에서 한 남자가 옆에 앉은 지적장애 소녀를 성추행했다. 이 사실을 안 스튜어디스는 기장에게 알렸고 비행기는 즉시 회항하였다. 마치 연료가 떨어졌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아무도 다른 말이 없었다. 범죄자를 공항경찰에게 넘기고 비행기는 다시 출발했다. 이 말을 전한 교포는 “그래서 캐나다는 외국 땅이지만 살 만한 곳”이라고 덧붙였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은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샜다’로 요약된다. 고위공직자들과 국회의원, 돈 많은 부자들이 일으키는 성범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대표적인 사건만 나열해도 이 지면이 넘친다. 그 사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양은냄비처럼 우르르 끓었다가 슬그머니 사그라졌다. 가해자 내지 범죄자는 일단 숨죽이고 있다가 한 김 빠지고 나면 공식적으로 오리발을 내민다. 그 오리발은 잠시 도마 위에 오르지만 결국 면죄부로 변신한다. 가해자는 기를 펴고 활보하고 세상은 조용해진다. 피해자만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죽음으로써 이 억울함을 증명하고 싶다. 그래서 성폭력 피해 생존자라는 말이 생겼다.(어제 서울에서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 으라차차 후원행사가 있었다.) 
성범죄는 남녀간의 일이 아니다. 인권의 문제이다. 인권의 기본은 신체적 자유이다. 사람의 몸을 희롱의 대상으로 삼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도구로 취급하는 것은 심각한 인권침해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그것을 인권침해로 여기기보다 ‘남자들의 본성’ 내지는 ‘술김의 실수’ 등으로 쉽게 용서해왔다. 그러니 돈과 권력이 있으면 누구나 해보고 싶고, 할 수 있는 놀이처럼 되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장자연 사건을 보라.)
 
우리 사회에 인권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윤창중 사건을 다루는 언론에서도 나타난다. 피해 여학생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다. 백인 중심의 사회에서 힘겹게 살던 이 여학생에게 모국 대통령의 순방은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쁜 일이었겠는가. 뭐라도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에 사명감과 보람으로 일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막힌 일을 당했으니 본인과 그 부모의 상처는 얼마나 깊을 것인가. 그러나 누구도 그들에게 깊은 사과와 따뜻한 위로를 보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여성운동가 후배 한 사람이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 신입생 축하 파티를 마치고 남자 유학생 선배가 학교생활 정보를 준다기에 학교 앞 술집에 갔다가 성추행을 당했다. 누가 신고했는지 경찰이 왔고, 피해 사실을 확인하는 경찰 앞에 난데없는 애국심이 발동을 걸어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 나라 학생 커플이 다가와 자신들이 신고한 이유를 밝혔다. ‘우리가 옆에서 네가 당하는 것을 보았다. 네가 피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가 피해자다. 이 남자의 못된 행동을 보면서 우리가 너무 힘들었고 이 바 전체의 분위기가 훼손당했다.’
 
윤창중 사건은 국민 모두가 피해자이며 성희롱·성폭력 문제 해결은 여성단체만의 일이 아니다. 인권위가 앞장서야 한다. 비정규직·아르바이트·밥줄에 목이 매여 당하고 있는 성희롱과 성폭력은 노동부가 나서야 한다. 교권에 의한 학교 성폭력은 교육부가, 거리에서 일상에서 행해지는 성폭력은 안전행정부가, 가족 안의 성폭력은 여성가족부가, 온 행정부처가 다 할 일이 있다. 입법부와 사법부도 분명한 몫이 있다. 
지구촌 시대, 남자들의 침묵의 카르텔이 만들어온 한국식 봐주기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여성대통령 시대에 거는 기대이다. 여자들의 한이 맺힌 나라는 잘되지 못한다. 성희롱과 성폭력의 근절은 국민행복시대의 가장 시급한 숙제이다. 

< 오한숙희 - 여성학자 방송인 >


[한마당] ‘미꾸라지 한마리’

● 칼럼 2013. 5. 17. 14:46 Posted by SisaHan
고사성어에 일추탁언(一楢濁堰 ), 또 일어탁수(一魚濁水)라는 말이 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온통 흐린다는 뜻이다. 
그 말 그대로 우리는 요사이 아주 못된 미꾸라지 한 마리가 휘저은 흙탕물이 어떻게 물을 흐리고 더럽히는지를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다. 작은 연못도 아니요 5대양 지구촌의 토픽이 되었으니 온 천하를 뒤집어 흐려놓고 있는 셈이다.
 
대통령 특별기에 동승해 해외순방 취재를 수차례 다녀 본 경험을 돌아보면, 그 부담이 보통 큰 게 아니다. 경호와 의전을 포함한 분위기와 일정도 엄중하려니와 일국을 대표하는 정상 외교단의 한명이라는, 자존감을 웃도는 중압이 늘 따라다닌다. 기자도 그럴진대, VIP동정을 체크하고 수십명의 기자들 취재를 수발해야할 대변인이 그런 분위기에서 ‘해이와 일탈’이란 제정신으로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작금의 윤 모 씨는 무슨 배짱을 가졌던 것일까. 
글에는 반드시 쓴 사람의 인성과 품격이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가 하는 언행을 보면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연장선에서 어떤 인물의 평가는 그 사람의 말과 글과 행적을 미루어 판단하는 게 일반적이다.
거족적 망신을 시키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그 인물은 이미 언론인이랍시고 그동안 써온 글들부터가 문제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편향된 시각에 자극적인 표현, 인격살인이라고 해야 할 비방 등. 그가 TV화면에 나타나 내뱉는 언사들 역시 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저급한 것들이었음을 많은 이들이 지적했다. 그래서 대통령 당선자가 그를 발탁했을 때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정확한 경고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못들은 척, ‘내 맘인데 웬 상관이냐’는 듯이 그를 재차 지근거리 중책에 앉혔다. 윤 씨 자신이 글에 썼던대로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입일 뿐만 아니라 나라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한 자리다. 그렇게 애지중지 발탁된 그가 불과 3개월도 안돼 파렴치범 반열에 오르며 ‘국격’을 땅에 떨어뜨리고 대통령의 얼굴과 업적을 분탕질 했다.
 
세상만사를 살펴보면 사실 하찮은 것이 좌우하는 일이 많다. 보잘 것 없는 한 인물이 대세를 가름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 것을 뒤집어 말하면 사소한 일도, 하찮은 단 한 명도 경시해서는 안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통령의 대변인이라는 막중한 자리의 인물을 그렇게 독선적인 아집으로 골라 앉히고, 당사자는 그런 편애에 ‘감히 나를 누가 건드냐’는 오만과 망측한 스캔들로 보은을 했으니, 책임을 다른 누구에게 물을 수 있겠는가, 애꿎게 국민과 나라만 먹물을 뒤집어 쓴 꼴이니 참 한탄스런 일이다.
한 가정만 해도, 가장은 물론이요 어린 자식 한명이 잘못 될라 치면 집안이 흔들린다. 크고 작은 단체에서 회원 한명 잘못 만나도 모임이 깨지는 사례를 본다. 작은 회사든 큰 기업이든 단 한사람의 실수로 망하는 일 또한 없지않다. 교회가 단 한명의 못된 신도 때문에 다투고 나뉘는 일도 흔하다. 차원을 넓혀 커뮤니티·나라 혹은 민족단위라고 해서 다르지 않음은 이번 성추행 파문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사례가 있다.
 
김연아가 홀로 국위를 떨칠 수 있었지만, 윤 씨는 순간의 망나니짓으로 한민족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국민의 사랑을 받던 공영방송을 정권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김 모라는 인물이 잠깐사이에 3류로 전락시킨 일이 바로 엊그제다. 전임 대통령의 ‘인사망사’ 로 인한 폐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중에도 정치개입으로 국가 최고 정보기관을 추락시킨 원 모씨의 후유증은 파장이 심각하다. 고매해야 할 종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존경받는 목회자가 성심으로 일군 한국 유수의 대형교회를 위선된 후임자 한명이 뒤흔들고 기독교까지 망신시킨 사례도 최근의 대표적인 일이다. 
‘단 한명’의 힘이 집안도 회사도 교회도 지역사회도 그리고 나라까지도, 크기나 범위에 상관없이 위력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파문으로 재확인 할진대, 적재적소에 품성을 갖춘 적임자를 골라 앉히는 인사와 선출의 중요성은 재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오기와 불통인사 논란을 외면하고 감싸 온 박 대통령이 3개월도 안돼 단 한마리 미꾸라지의 ‘배신 강펀치’에 당한 교훈을 ‘발전적으로’ 되씹고 있을지 궁금하다.

< 김종천 편집인 >


[1500자 칼럼] 표절의 추억

● 칼럼 2013. 5. 8. 18:34 Posted by SisaHan
속시원하게 얘기하자. 
양심선언하겠다. 
내 논문은 표절이었다. 
A학점을 준 지도교수와 대학당국에 사죄를 구한다. 그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 다만 내가 부끄럽게 표절했을 뿐이다. 
당시로 돌아가보자. 복학을 했던 잊지못할 1980년 봄. 교정은 벗꽃처럼 날리는 최루탄 가스로 가득했다. 난 여름에 졸업예정이었다. 무엇을 쓸 것인가 고심하다가 어느날 도서관에서 내 눈길을 끄는 한 석사 논문을 찾았다. 게임이론에 관한 것이었다. 
난 그 논문 이론을 바탕으로 다른 사건을 도입해 새로운 결론을 도출해 나갔다. 
문제는 논문을 절반 이상 썼을 때 발생했다. 내가 잡은 논문 제목이 이미 외국에서 발표돼 있는 것이었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시간도 없었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갈수록 기존 논문의 결론에 유사하게 접근하는(솔직하게 말해서 표절하는) 것이었다. 
어찌어찌 논문을 제출하고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얼마간을 보냈다. 게임이론을 가지고 논문을 쓴다고 하자 네가 뭔데 하며 말리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어느날 학장실로 호출(?)을 당했고 게임이론 전문가였던 지도교수에게 내 이론을 장황하게 설명해야 했다.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최근 모국에서 논문표절 시비로 시끄럽다. 유명 정치인들을 비롯해 주부스타강사 김미경, 연예인 김혜수 김미화 등 사회 각 분야 인사들이 총망라됐다.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까지 구설수에 휘말렸다. 진보논객인 진중권 교수는 “박사학위 논문이 아니라 복사학위 논문”이라고 비꼬았다. 
표절의 기준이 무엇인가. 그중에서 몇가지를 살펴보자. 여섯 단어 이상 연속해 표현이 같고 인용표시가 없으면 표절이다. 또 단위가 되는 명제 또는 데이터가 동일하거나 유사할 경우다. 그러므로 나의 논문은 표절이다.
배우인 김혜수는 학위반납을 선언했다. 나는 김혜수처럼 쿨(cool)하지 못하다. 반납선언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어느 정치인처럼 변명은 하지 않겠다.
표절(plagiarism)이란 말의 유래는 <유괴>라는 의미의 라틴어라고 한다(맞는 지 틀리는 지 확인하진 못했지만 어느 블로그에서 인용했다). 유괴는 엄연한 범죄이다. 
내가 표절했던, 이제는 기억도 안나는 어느 외국인 학자에게 용서를 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내가 표절을 했다고 외쳐도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명하지 않다는 것은 이렇게 좋다. 편안하다. 
짚고 넘어갈 게 있다. 
박사나 석사가 아닌 학사논문이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 김형주 - 시인, 해외문학 신인상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부이사장 >


[칼럼] ‘퍼주기’의 정치경제학

● 칼럼 2013. 5. 8. 18:29 Posted by SisaHan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4월24일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과의 점심 자리에서 “개성공단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기 바라지만 과거와 같은 ‘퍼주기’식 해결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도적 지원’은 정치 상황과 관련 없이 북한 주민들을 생각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북한에 인도적 지원은 하겠지만, 퍼주기는 하지 않겠다는 평소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큰 허점이 있다. 김대중·노무현 시대에 ‘퍼주기’라고 비난받은 일이 대부분 ‘인도적 지원’이었기 때문이다. 퍼주기란 인도적 지원이 통상 무상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제부터 ‘퍼주기’라고 말하면 ‘인도적 지원’으로 이해하면 된다. 박 대통령이 이것을 알고도 그렇게 말했는지, 아니면 보수파들의 상투어를 그냥 되뇐 것인지 궁금하다.
 
통일부의 통계를 보면, 식량 차관까지 포함한 한국 정부의 인도적 지원은 김영삼 정부 때 2,118억원으로 시작해 김대중 정부 6,153억원, 노무현 정부 1조4,226억원으로 크게 늘었다가 이명박 정부 986억원으로 뚝 떨어졌다. 김·노 정부의 인도적 지원 총액은 모두 2조379억원이었다. 여기에 첫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보낸 1억달러(1,100억원)까지 포함하면 10년 동안의 이른바 ‘퍼주기’ 총액은 2조1,479억원이다. 1년에 2,148억원꼴이다. 그런데 이것은 2012년 한국이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 다른 나라에 지원한 1조9,000억원의 9분의 1에 불과하다. 
김·노 정부 10년 동안의 ‘퍼주기’는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보수인사들은 퍼주기로 인해 핵무기를 개발한 게 아니냐고 주장하지만, 알고보면 북한이 파키스탄의 도움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선 것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기 훨씬 전이었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흠잡기 위한 말의 성찬이었던 셈이다. 
반면 김·노 정부의 ‘퍼주기’ 이후 금강산과 개성에 11년 동안 204만6,695명의 한국 사람들이 방문했다. 개성공단에는 8년 동안 80만명과 차량 50만대가 방문해 모두 19억7,599만달러(2조1,736억원)를 생산했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북한 무역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38.0%에 이르렀다. 대북 무역액 1위인 중국(41.6%)에 근접했고, 2008년에는 중국을 제치고 제1의 대북 무역국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퍼주기’는 14분의 1로 줄었다. 개성공단을 뺀 경제협력 사업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2008~2011년 경제협력 중단으로 한국의 경제적 손실은 9조973억원으로 북한 손실의 5배 이상으로 추정됐다. 심지어 남북의 적대 속에서 무고한 군인과 민간인 60명이 목숨을 잃었다. 
집권 두 달째인 박근혜 정부는 지난 26일 개성공단에서 스스로 철수함으로써 경협의 문을 닫았다. 10년 공들인 탑을 무너뜨리는 데는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퍼주기는 예산 낭비가 아니라 평화로 가는 투자라고 생각한다. 통일 전 서독은 1975~1988년 사이 14년 동안 한해에 6억달러(6,600억원)씩 동독에 퍼줬다. 김영삼~이명박 정부 20년 동안 한국이 한해 평균 퍼준 1,229억원의 5.4배에 이른다. 이명박 정부 시절보다는 33배나 많았다. 물자·노동력을 포함한 무역 규모도 한해 평균 66억달러(7조2,835억원)로 김영삼~이명박 정부 시절 한해 평균 무역액 9,885억원의 7.4배였다.
 
독일의 퍼주기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통일이었다. 1990년 8월 동독 의회는 스스로 서독으로의 연방 가입을 결정했다. 그때까지 서독이 주로 한 일은 수십년 동안 동독에 퍼주고 퍼주고 또 퍼준 일이었다. 서독의 동독에 대한 변함없는 지원과 협력은 동독인들로 하여금 서독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만들었다. 그게 통일의 내적 원동력이었다. 
퍼주기로는 단기간에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을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단기간엔 그 무엇으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퍼주기는 한반도에 평화와 신뢰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 김규원 - 한겨레 신문 통일 외교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