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내 추태와 웨이터의 법칙

● 칼럼 2013. 4. 27. 19:37 Posted by SisaHan
기내식으로 제공되는 라면에 대해 불평을 하면서 항공기 승무원에게 행패를 부린 대기업 상무 이야기가 대화제다. 처음에는 방송 단신으로 임원의 실명과 구체적인 내용 없이 몇 줄만 가볍게 보도됐던 것이 트위터, 인터넷커뮤니티를 통해 실명과 항공사의 내부 대응 기록문건이 퍼지면서 일파만파가 됐다. 뜻밖에도 많은 이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그 임원의 고약한 행동에 분노의 감정을 표출했다. 아마도 평소 직장에서 그런 상사를 접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다 트위터를 통해서 ‘웨이터의 법칙’이라는 말을 접하게 되었다. 데이브 배리라는 작가의 글에서 유래한 이 법칙은 다음과 같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는 잘 대해주지만 웨이터에게는 거만하게 행동한다면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은 미국의 CEO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일종의 불문율이라고 한다. CEO가 회사의 임원을 뽑을 때 꼭 명심해야 할 말이라는 것이다.
 
CEO가 회사 내부나 바깥의 누군가와 식사할 때는 다들 그가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잘 보이려고 예의를 다해서 행동한다. CEO에게는 누구나 좋은 사람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식사 상대가 웨이터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자세히 보면 그 사람의 진짜 성품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보다 지위가 낮다고 사회적 약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직장에서도 부하들에게 비슷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자기도 모르게 권위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웨이터뿐만 아니라 호텔 종업원, 경비원, 청소원 등 서비스업 종사자들을 하인 부리듯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회사에서 많은 사람을 이끌어야 하는 CEO나 임원의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 때 화제가 됐던 ‘보수주의자’ 윤여준 전 장관이 문재인 후보를 처음 식당에서 만났을 때 아랫 사람들에게 공손히 대하는 태도를 보고 품성을 재평가해 문 후보를 돕기로 결심했었다고 털어놓은 말이 떠오른다.

2006년 웨이터의 법칙을 소개한 <USA 투데이> 기사에서는 웨이터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난 이 레스토랑을 사버리고 널 잘라버릴 수 있어”라든지, “난 이 레스토랑 주인을 잘 아는데 널 해고시킬 수도 있어”라는 식의 발언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소개했다. 곧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과시다. 불행히도 이런 발언은 그 사람의 힘을 과시하기보다는 그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를 나타낼 뿐이다.

국적항공사 비즈니스클래스에서 일하는 항공사 승무원의 경우는 우리 사회의 소위 ‘지도층 인사’들을 항상 접하기 때문에 이 ‘웨이터의 법칙’을 몸으로 느낄 것 같다. 이번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어 파문이 일고 있지만 그 임원보다도 더 잘나고 힘센 인사들의 비슷한 무례한 행동은 알려지지 않고 묻히는 일이 많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힘있는 사람에게는 깍듯이 하면서 식당의 종업원이나 골프장의 캐디는 마치 하인 부리듯 반말조로 막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년 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개인적으로 가까운 한 선배의 형수가 항공사 승무원이었다. 하루는 카운터에서 업무를 보는데 한 대기업의 최고위급 중역이 체크인을 하려고 왔다. 그런데 규정을 넘어서는 크기의 가방을 기내로 가지고 들어가겠다고 해서 원칙상 안 된다고 짐을 부치라고 정중히 말씀드렸단다. 그런데 내가 얼마나 대단한 고객인데 이렇게 대할 수 있냐며 엄청나게 화를 내면서 고객카드를 두 동강 내면서 떠났다고 한다. 또 너희 회장에게 널 자르라고 얘기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격분하던 선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누군가가 당신에게는 잘해주지만 항공기 승무원에게는 거만하게 행동한다면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 기회에 한국에서는 이런 ‘항공기 승무원의 법칙’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아무쪼록 한국의 경영자들도 이 법칙을 명심하길 바랄 뿐이다. 

< 임정욱 - 다음커뮤니케이션 이사 >


박근혜 대통령은 2월25일 취임식 특사로 방문한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에게 “한-일 간의 진정한 우호관계 구축을 위해 역사를 직시하면서 과거 상처가 더 이상 덧나지 않고 치유되도록 노력하자”고 말했다. 이어 3.1절 기념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와 동반자가 되어 21세기 동아시아 시대를 함께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역사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얼어붙은 양국관계를 회복하고 우호관계를 구축하려면 먼저 역사를 직시하는 자세를 보여달라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아니 절망이나 배신,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듯하다. 아베 신조 내각의 제2인자이며, 총리 경험자인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안겨준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의 위패를 합사해 놓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아베 총리는 참배하지 않았으나 총리 이름의 공물을 바쳤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방일을 앞두고 적어도 총리, 관방장관, 외상의 야스쿠니 참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우리 당국의 거듭된 요청을 받고서도 ‘감행’한 도발이다.
우리 정부가 예정되어 있던 윤 장관의 방일과 한-일 외무장관 회담을 즉각 취소한 것은 당연하다. 지난해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틀어진 양국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그동안 양국의 관계자들이 다각적으로 펼쳐온 노력이 일본 최고위급 지도자의 ‘자폐적 역사인식’ 때문에 하루아침에 다시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로써 두 나라 관계는 상당 기간 접점을 찾기가 어렵게 됐다.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도발로 지역 정세가 요동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 협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데 안타까운 일이다. 중국 정부도 일본에 강력한 항의를 했다. 역사 문제에 대한 반성 없이 동북아 지역에서 일본이 설 자리가 없다는 걸 이번 사건은 다시 보여준다.
 
그런데도 일본은 여전히 안하무인이다. 어제는 여야 국회의원 168명이 보란 듯이 떼거리로 신사 참배에 나섰고, 아베 총리는 무라야마 담화 수정 방침을 재차 밝혔다. 아소 부총리는 자신의 참배로 “외교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폭력을 행사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일을 상습적으로 하는 일본은 동북아의 평화를 해치는 또다른 우환이다.


북한의 제3차 핵실험을 빌미로 2015년 12월까지 미국이 행사하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시기를 다시 연기하자는 주장이 솔솔 고개를 들고 있다. 연기론이 제기되는 상황이나 논리가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와 너무 흡사하다. 당시에도 북한이 핵실험을 한 뒤 연기론이 나오고 다음해 한-미 정상회담에서 2012년 4월로 돼 있던 환수 시기를 연기했다. 이번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5월 초 미국 방문을 앞두고 이런 주장이 부쩍 잦아지고 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전작권 전환 추진 주역이었던 버웰 벨 전 한미연합사령관까지 가세해 일부 정치권과 군 주변의 연기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북한의 핵 능력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계속 전시작전권을 행사하는 게 유리하다고 말한다.
 
북한 핵위협에 맞서 억지력을 강화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북한이 함부로 도발하지 못하도록 동맹을 강화하고, 다양한 군사적 억지 수단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전작권을 행사하게 되면 대북 억지력이 약화할 것이라는 논리는 너무 조잡하다. 전작권 환수 연기로 얻는 이익만 생각하고 그로 인해 잃는 것은 생각치 않는 단견이다.
전작권은 유사시에 한 나라 군대의 작전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다. 한 나라의 주권을 상징하는 척도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온 명나라군이 조선의 군권을 쥐고 횡포를 부린 역사적 경험만 돌이켜봐도 한 나라가 군권을 스스로 행사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더구나 미국은 해외 미군의 ‘첨단 기동군화’라는 자기 필요에 따라 전작권 전환을 꾀하고 있다. 상대가 주지 않겠다고 하는 주권이라도 우리 것이니 달래야 정상인데, 주는 것도 안 받겠다고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전작권을 환수해야 우리의 대북 억지력이 더욱 강화된다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금 미군이 전작권을 행사하는 상황에서는 연평도 포격과 같은 사태 때 자체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수단이 제한되어 있다.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미군의 판단에 따라 작전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정부는 군사 주권이 걸려 있으며 대북 억지력 약화와 크게 상관없는 전작권의 환수 시기 연기론에 휘둘려선 안 된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북한 핵이 존재하는 한 우리나라는 영원히 전작권을 가질 수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 군대를 지휘통제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은 나라의 군대로는 아무리 동맹이 강고해도 상대에게 두려움을 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거리마다 활짝 핀 봄꽃들을 보며 걷다가, 집에 들어오자 테러 뉴스로 가득 찬 신문을 펼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아니, 괴롭다기보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운 혼돈에 사로잡힌다. 어느 쪽이 내가 서 있는 현실인지 확실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감각의 화면에 떠오른 두 이질적 대상을 하나의 틀로 통합하는 인식작용에 착오가 발생하고 있다고나 할까.

문득 박완서 선생의 자전적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한 대목이 떠오른다. 6.25전쟁으로 한창 피난하던 중에 주인공은 밤에는 걷고 낮에는 으슥한 데서 시간을 보내는 고난을 이어간다. 국도 연변 마을은 모조리 불타고 부서져 쑥대밭이 되어 있는데, 어느 날 그는 마을 장독대 옆에 서 있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망울이 부푸는 것을 보았다. 목련나무였다. 주인공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얘가 미쳤나 봐” 하는 비명이 새어나온다.
누가 미쳤다는 것인가. 박완서의 통찰이 빛나는 것은 비명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는 나무를 “얘”라고 의인화한 게 아니라 거꾸로 나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비명은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면서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른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계절이 바뀌고 꽃망울이 부푸는 자연의 질서에 대비될 때 인간의 폭력행위는 명분이 무엇이든 광란임이 분명했던 것이다.

보스턴 마라톤대회를 피로 물들인 테러도 변명의 여지 없는 범죄다. 그것은 모든 테러가 그렇듯 광기의 발로이고 맹목의 소산이다. 그러나 지금 전세계 주류 언론에서 하고 있듯이 범인 형제의 사생활을 들추고 그들의 행동을 극화하는 데만 골몰하는 것은 사건의 전체적 맥락을 은폐하는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 따라서 진상에 접근하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그들 자신의 발언을 들어보는 것이다. 그런데 형은 죽었으므로 말이 있을 수 없고, 아우도 중상이므로 입을 열기 전에 온갖 추측보도의 홍수에 휩쓸릴 것이다. 이미 그들 차르나예프 형제는 사법적 판단이 착수되기도 전에 어떤 일방적 관점에 의해 절반쯤 악마화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보스턴 테러 자체보다 테러 배후에 있는 구조적 불의에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
보도를 보면 차르나예프 형제는 러시아 국적의 체첸계로서 10여년 전에 미국에 건너와 영주권을 얻었다고 한다. 형은 권투선수이고 아우는 의학도로서, 형제의 기질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주위의 평판은 비교적 호의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요컨대 그들은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해가던 평범한 이주민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청년들이 이처럼 끔찍한 테러리스트로 변신하게 되었는가. 이 비밀을 푸는 것이 바로 테러를 근절하고 미국이 더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이다.

돌이켜보면 9•11 테러 이후 미국이 했어야 할 가장 요긴한 작업은 상식적인 말로 해서 자기반성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미국이 한 일은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무력침공이었다. 부시 행정부의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2011년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반대로 미국의 평화운동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며칠 전 이라크전쟁 10돌 기자회견에서 “만약 이라크에 정말 대량살상무기가 있었다면 미국 정부는 군대를 투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어찌 됐든 미국 침공 이후 이라크에서는 1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고 168만명의 난민과 500만명의 고아가 생겨났으며, 한마디로 나라 전체가 박살이 났다. 9•11 테러가 비록 엄청나다고 하지만, 어찌 이라크가 당한 국가적 참화에 비할 수 있겠는가.

강자의 폭압이 지속되는 세계에서 약자들의 저항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보스턴 테러의 근원에 있는 것은 체첸 민족주의도 아니고 이슬람 극단주의도 아니다. 범죄적 세계질서에 대한 비판의 정서야말로 그 뿌리다. 다만 정의에 대한 열망이 테러와 같은 자기부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순진한 소리지만 꽃의 마음으로, 나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 염무웅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