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분노사회에 답하는 정치

● 칼럼 2013. 6. 1. 18:40 Posted by SisaHan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인은 압축성장으로 경제적 기적을 이뤘다는 자부심에 가득 찬 사람들일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여러 해 이곳에 근무하면서 관찰한 모습은 달랐다. 많이 지쳐 있고,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 한 서방 외교관과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사실 그렇다. 우리는 지난 수십년 열심히 뛰어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진입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행복도는 그만큼 높아지지 않았다. 남보다 앞서야 한다며 끊임없이 경쟁으로 내모는 사회에서 전력을 다해 달려왔지만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하기만 하다. 대다수 젊은이에게 괜찮은 일자리는 그림의 떡이고, 취약한 사회안전망은 은퇴자들의 미래를 보장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자신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따뜻한 인간관계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경쟁사회에 밀리고 지친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을 패배자로 만든 사회에 대해, 절망하고 분노한다. 그 절망과 분노는 자살이나 타인에 대한 공격성의 증가로 나타난다. 실제로 지난 10년 사이 자살률은 100% 이상 늘었다. 자살 못지않게 타인에 대한 공격도 늘고 그 양태마저 극단화하고 있다. 얼마 전 온 사회에 충격을 던졌던 묻지마 살인이나 최근 논란의 초점으로 떠오른 일베현상이 단적인 예다.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란 커뮤니티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폄훼해 물의를 빚은 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일베충’이라고 비하하는 우리 사회의 패배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거나 자신보다 더 약한 자를 짓밟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사회가 비판적으로 반응하면 할수록 쾌락이 배가되기에 가학적 언어폭력의 수준을 높여온 것이 논란으로 비화했다. 따라서 이런 일베현상을 일베충의 일탈이나 표현의 자유 문제로만 보는 것은 단견이다. 오히려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을 상실할 정도로 심각해진 분노사회의 병리적 현상으로 보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쟁을 완화하고 사회안전망을 갖추는 등 제도적 측면의 노력이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고통의 뿌리를 응시하게 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회복하게 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이달 초 한국을 방문했던 평화운동가 틱낫한 스님도 지금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일은 내면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라고 했다. 내면의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비로소 그 고통이 다른 누구 탓이 아니라 무조건 경쟁지상주의를 수용하고 내달려온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되고, 같은 고통을 겪는 타인에게도 공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고통이 깊은 만큼 우리 사회의 치유에 대한 갈망도 높아지고 있다. 힐링(치유)이란 문패를 단 프로그램이나 책이 상한가를 치고 틱낫한의 강연에 수만명이 모여든 것이 좋은 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갈망에 응답한 것은 종교단체 등 민간부문이었다. 또 그런 프로그램이나 책이 제도적 측면의 대책보다 당장의 고통을 회피하는 당의정만 제공한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정치의 목표가 국민의 행복 증진이라면, 이렇게 분노와 고통이 팽배한 사회를 치유하는 일이야말로 정치의 일감이다. 상처받는 이들을 줄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동시에 상처받은 이들에게 분노의 내면을 응시할 힘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시가 6월부터 힐링 프로그램을 시작한다는 소식이 반가운 까닭이다.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는 이름의 프로그램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이끌었던 정혜신 박사가 중심이 돼 치유활동가 500명을 양성하고 그 500명이 연말까지 서울시민 1만명을 치유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이 계획이 흥미로운 점은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해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이 다시 치유활동가가 돼 다른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하는, ‘상처받은 사람들의 공감 네트워크’로 확장해 나간다는 데 있다. 단순히 자기최면적인 힐링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이 새로운 정치의 모형을 제공하게 될지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 권태선 한겨레신문 편집인 >


여러 사람이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데, 누군가 나에게 언어치료를 받아야 하는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인가 물었다. 대강 언어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한 할아버지가 빙그레 미소를 지며 “그게 바로 어릴 때 내 모습” 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분은 90이 넘으신 체스(Ches) 할아버지다. 
체스 할아버지는 우리가 70년 대 토론토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만난 사람 중에 한 분이다. 프린스 에드워드(P.E.I.) 섬 출신인 할아버지는 그 때 건장한 중년이었는데, 여름에 P.E.I.까지 찾아가 할아버지의 고향을 방문하여 많은 가족도 만나고, 빨간 섬의 농가에서 온갖 사랑을 받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아버지는 고향을 떠나서 도시에서 가정을 꾸리고, 평생 톱니바퀴(gear)를 만드는 일을 했다.
 
할아버지가 만든 톱니바퀴 중에는 일점 오센티 (1.5㎝) 의 작은 톱니바퀴에서 부터 육척이 넘는 할아버지의 키보다도 세배나 큰 톱니바퀴까지 크기가 다양하고 쓰이는 용도도 추측할 수 없이 많다고 했다. 체스 할아버지는 톱니바퀴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밀도라고 했다. 원형의 틀 주위에 박혀있는 수많은 톱니중 어느 하나라도 정확히 깍아지지 않으면 톱니바퀴가 제대로 돌지 못하여 다시 만들어야 하는 일들이 생긴다 했다. 두번째로 기계 속에서는 많은 톱니가 서로 물고 돌아가며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깍아 놓은 톱니도 용도와 환경에 따른 문제가 동반하게 되어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기계가 원활히 작동하도록 온갖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그 할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사람은 하는 일에 따라 생각과 사는 모습이 바뀌어가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는 원칙대로 정확히 사는 일이 몸에 밴 사람이다. 우선 무엇이 원칙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 곳에 도착하기까지 긴 훈련이 필요해도 일단은 그 원칙을 받아 들인다. 자신이 정성들여 만든 톱니 바퀴가 무사히 돌아가기까지 조절하고 깍기를 거듭하는 것처럼 일단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조금씩 조금씩 주변에 적응해 나간다.
 
할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토론토에 도착한 후 지난 60년 이상을 시내의 한 교회를 지켜왔다. 그 긴 세월 신앙생활에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많은 여성들이 안수를 받고 목회자 직을 맡게 되었고, 토론토에는 여러 곳에서 온 이민자들이 정착을 하여, 중상층 백인들뿐이던 교회는 온갖 얼굴의 교인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성적 소수자들도 눈에 띄게 되었다. 예배의 형태들도 변화를 보여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으로만 이어지던 경건한 찬송은 기타와 드럼 소리에 맞추어 사람들의 감정이 더 많이 표현되는 복음성가들이 섞이기도 하였다. 
최근 거론된 교회의 변화 중에는 성적 소수자들을 목회자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익숙하지 않은 일을 받아들이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종교는 삶의 모태와 같이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감정을 모두 의지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가장 변화를 어렵게 받아들이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그 문제로 교회에는 많은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긴 회의 끝에 의장이 성적 소수자에 관하여 좀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교회의 입장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며 회의를 마무리지으려는 순간이었다. 늘 회의를 지켜만 보던 체스 할아버지가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할 말을 정리하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이야기했다,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일은 우리와 함께 예배에 참가했던 이들도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고 이들을 이해하는데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 라고 했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한 톱니바퀴로 사회라는 기계 속에서 조금씩 원활한 돌림을 시작하고 있다.
 
이제 할아버지는 교회에 참석하는 최고령자가 되었지만, 평생 하던대로 교회 건물과 시설들을 수리할 일이 생기면 자신이 고쳐보려 온갖 아이디어를 내 본다. 60년이 넘은 교회의 보일러는 할아버지의 기술과 지극한 정성으로 ‘바꿀 필요 없음’이라는 합격 평가를 받았다. 요즘은 연장 통이 힘에 버거워진 할아버지 뒤에 우울증으로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청년 하나가 할아버지를 도와 연장 통을 들고 쫓고 있다. 자신의 말처럼 할아버지는 말로 남을 설득하며 살아 온 사람은 아니지만 주변의 톱니바퀴들이 다 맞아 돌아가게 하기 위해, 지금까지도 갈고 조이기를 끊이지 않는다. 

< 김인숙 - ‘에세이 21’로 등단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심코 가톨릭교육청 언어치료사


[한마당] 흐릿한 청산의 후유증

● 칼럼 2013. 5. 24. 19:22 Posted by SisaHan
특별난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상품광고는 반복이 큰 힘을 발휘한다.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다가도 반복해서 자꾸 보고 들으면 관심이 쏠려 기억하게 되고, 괜찮은 제품인가보다, 그만한 함량이 있으니 저렇게 선전하겠지, 하는 끌림과 믿음이 생겨나 슬슬 지갑을 여는 것이다. 그러니 반복 선전은 광고심리학에 있어서 기본이다.
사람의 판단력에는 이성 보다 감성이 늘 앞서게 마련이어서 어떤 판단대상이 반복 주입될 때는 옳고 그르냐, 좋으냐 나쁘냐를 이성적으로 따져보기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런가보다’ 하는 무의식적 신뢰가 생기고, 더 나아가면 잠재적 신념으로 자리를 잡기까지 한다.
 
지난주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전후해 “5.18은 북괴군 600명이 침투해 벌인 폭동이었다더라” 는 등 북한 사주에 의한 반란이라는 식의 그럴 듯한 주장을 조선·동아 계열의 종편에서 잇달아 방송해 파문이 일었다. 아무리 영향력 미미한 종편이라지만 방송에서 버젓이 그런 주장을 떠들어 대는데, 더구나 북한군 출신이라는 탈북자가 나와서 큰소리치는 것을 시청하고 있노라면, 별 생각없는 범부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다” “맞아 그럴거야”라는 반신반의가 번질 수밖에 없다. 살벌했던 5공 군사정권 때 ‘북의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고 떠드는 선전을 귀가 따갑게 들어왔고, 당시의 주역들이 여전히 위세를 부리는 모습도 한 몫 거든다. 지금도 다수 보수권세가들이 ‘민주항쟁’으로 기꺼이 존숭(尊崇)하기를 망설이는 현실이니, “맞는 말일거야”라는 수긍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정부기관이 나서서 5.18 기념식장에선 무슨 노래를 부르지마라, 주먹을 흔들며 부르면 안된다는 억지를 부려 반쪽행사로 만든 꼴불견도, 반신반의에서 확신까지를 독버섯처럼 번져나가게 만든 반복선전의 악행을 거들었다. 이 곳 토론토에서도 어느 분의 지적처럼 항쟁의 뜻을 기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는 커녕 골프대회를 열어 즐길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오죽했으면 ‘원조 반공극우’라고들 하는 조선일보 출신의 조모 씨도 나서서 “말도 안되는 허구”라고 반박했을까. 당시 계엄하에서 삼엄한 포위망을 쳤는데 어떻게 그런 경계를 뚫고 북한군이 대량 침투한다는 것이냐며 헛소리하지 말라는 식으로 통박했다. ‘이성적으로’ 랄 것도 없이 가만히 따져보면, 뚜렷한 입증이 아닌 “그랬다더라”, “들었다”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막연함을 읽을 수 있음에도 ‘카더라’는 반복효과를 노리는 어둠의 세력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있는 것이다. 
5공 청산 과정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12.12쿠데타와 5.18 학살의 주범들은 ‘북괴 사주에 의한 폭동’이라는 등 당시의 매도가 과장된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법정에서 시인했다. 대법원은 모든 자료와 정황을 판단해 1997년 4월17일 그들에게 내란죄 등을 적용, 최고 무기징역까지를 선고했다. 신군부가 권력 찬탈을 위해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사실이 법적으로도 명백하게 확정된 것이다. 그들에게 ‘내란 선동죄’로 사형당할 뻔했던 김대중 씨는 나중 다수 국민의 신임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5.18 항쟁의 사료들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 문화유산이 됐다. 그런 명명백백한 근거들을 알면서도 무슨 트집을 잡을 건더기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반성하고 트집을 잡아야 할 것은 과거청산의 흐릿함이다. 법적으로는 청산했다하나 정신적으로, 온정적으로, 또 차별적 감정으로 완벽히 청산하지 못하는 우리의 청산문화를 뜯어고쳐야 한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자들을 뒤늦게 단죄하고도 ‘정치보복을 없앤다’는 화해를 명분으로 곧 이어 사면해줬다. 피해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관용을 칭송하기에는, 지금까지도 반성없이 발호하는 그들의 뻔뻔한 모습들이 너무 심한 후회와 후유증을 낳고있다. 
사람은 흔히 자기를 합리화한다. 특히 자신의 허물이 있을 경우에는 기를 쓰고 덮고 뒤집으려 한다. 그 것은 궁지에서의 생존을 위한 호신 본능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나치면 사회악, 역사를 비트는 패역이 된다. 권력을 이용해 수천억을 뱃속에 넣고는 나랏돈 1672억원을 안내고 버티는 ‘배 째라’에, 무리를 이끌고 골프장을 활보하는 철면피는, 카리스마가 있다는 사내대장부가 아니라 그야말로 29만원 졸장부요 사회악이라고 할 밖에. 그리고 엄연한 5.18 항쟁사 마저 뒤집으려고 기를 쓴다. 과오를 철저히 처단하지 못한 탓이다.
 
어디 비단 5공의 주역들 뿐인가. 멀리는 일제에 부역한 자들을 철저히 청산하지 못한 때문에 민족정신을 흐리는 역사왜곡 시도들이 상시 고개를 든다.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려 하고, 일본천황에게 혈서를 쓴 투철한 친일과 남로당에 몸담았던 좌익행적도 문제시했다가 오히려 몰매를 맞는 모순 투성이 역사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괴이쩍은 합리화-. 역사의 고비마다 청산과 완결없이 두루뭉수리 넘어가는 우리네 ‘좋은 게 좋고’ ‘힘센 놈이 최고’라는 흐리멍텅 청산문화가 지금의 갈등과 적대의 원류라고 해서 틀리지 않다.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주권과 국격

● 칼럼 2013. 5. 24. 19:20 Posted by SisaHan
동아시아 정세가 심상치 않다. 지난 1년여 사이 한반도를 둘러싼 4대국의 리더십이 모두 바뀌었으니 변화가 있으리란 것은 모두가 짐작하던 바였다. 
북한의 김정은이 로켓 발사 및 핵실험을 감행하자 한국과 미국은 출구 없는 강 대 강 대립을 이어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첫 해외 순방지를 미국으로 정하고 국빈 의전도 포기하고 실무방문의 형식으로 오바마 정부를 찾아서 협의를 하게 된 것은 동아시아 지역 정세에 대한 새로운 대응책이 필요하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과 관련하여 그가 영어 연설을 얼마나 잘했는가, 어떤 옷을 입었으며, 의회에서 박수를 몇 번 받았는가 등의 연예인성 가십만 강조되고 정작 중요한 쟁점에 대한 대화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역점을 들여 주장한 것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현안으로 비무장지대에 평화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협의를 하자는 다소 생뚱맞은 제안이었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미국이 요구한 미사일방어체계에 대한 협력을 약속했고, 키리졸브와 독수리 훈련에 이어 니미츠 핵항공모함을 부산에 맞아들여 한·미·일 군사훈련에 역점을 기울이고 있다. 
전쟁 위기와 군비경쟁이 고조되는 시점에 우리 정부는 주변국의 종속변수가 되기보다는 과감하고 실질적인 대화의 창을 열어 우리의 주권과 국격에 걸맞은 평화체제를 위한 리더쉽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육해공군에 대한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사령관이 이끌던 유엔군에 넘겨줌으로써 한국의 생존을 보장받으려 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무려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주권의 일부인 전시작전통제권은 한국이 아니라 미군 사령관의 손에 있다. 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을 2015년까지 반환받기로 하고 이를 위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일각에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이를 미루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있다. 
최근 세간에 화제가 된 윤창중 사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도 마찬가지로 씁쓸함을 불러일으킨다.
 
윤창중씨가 미국에서 보인 행적은 상식적으로 참 납득하기 어렵거니와, 주미 한국대사관이나 한국의 방미 지도부는 그 사안으로 국격의 실추를 입은 데 더하여 주권적 권한의 행사를 스스로 포기하였다. 한 나라를 대표한 대통령의 방미단의 일원으로 대변인직을 수행하는 국가 공무원은 국제 관습법상 주권면제의 대상이다. 
민간 차원의 상행위에 개입된 것이 아니고 면책특권의 행사를 명시적으로 포기하지 않으면, 미국이 재판 관할권을 갖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인턴을 상대로 한 행위가 경찰에 신고가 되어 미국 경찰에서 수사를 착수한 불미스러운 상황을 맞았을 때, 한국 정부는 미국 경찰의 수사를 두려워하고 그를 피하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한국 정부의 수사관할 사항임을 인지하고 한국의 경찰 영사 또는 담당 수사기관을 통해 수사에 착수했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의 대변인이었던 사람이 논란에 휩싸이니 미국의 수사망을 피해 도피시키는가 하면, 이제는 뒤늦게 미국 경찰에 신속한 수사를 요청하고 그에 협조하겠다니, 과연 한국 정부의 주권이 미국 경찰의 수사를 받을 정도로 하찮은 것일까. 
한국 정부가 국제법의 기본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또 국제관계 속에서 우리의 주권의 기본을 지킬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위기 상황에 처할수록 주권과 국격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새 정부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격을 지키고 주권을 보호하기 위한 정부의 의무를 최대한 잘 이행해 주기를 바란다. 

< 박태웅 - 미국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