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남북관계 널뛰기의 연원

● 칼럼 2013. 4. 20. 14:55 Posted by SisaHan
정부수립과 6.25동란 이후 극렬 대치상태이던 남북간에 대화통로가 열린 것은 1971년 8월부터다. 미국과 ‘중공’간에 핑퐁외교로 바야흐로 해빙무드가 번질 때였다. 이듬해까지 11차례 열린 남북적십자 회담에서 한적은 북한에 비밀접촉을 제의한다. 그리고 1972년 3월28일 정홍진이라는 인물이 북한을 방문했다. 거기서 합의에 따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5월2일부터 5일까지 북한을 극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이어 북의 박성철 부수상이 5월29일부터 6월1일까지 서울을 비밀리에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것이 남북 당국간 비밀교섭의 출발이다. 
당시 청산가리를 소지하고 평양을 찾은 이후락은 출발 닷새 전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에게 방북사실을 통보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측의 답방으로 서울에 온 박성철의 일정을 미국측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가 평양으로 돌아간 사흘 뒤에야 한적 최두선 총재의 귀띔으로 알게됐다고 하비브는 본국에 보고했다. 당시 남북정부 간 대화가 미국과는 상의없이 ‘자주적으로’ 추진됐다는 이야기다. 어떻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역사적인 ‘7.4 남북 공동성명’이었다.

그 후 85년부터 88년까지 남북 국회회담이 열렸고, 89년부터 92년까지는 남북 고위급 회담이 개최됐다. 설전 끝에 시간만 끌다 마무리된 국회회담과 달리 고위급 회담은 진전이 이뤄졌다. 양측의 총리를 단장으로 한 대표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회담을 열어 남북간 화해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본회담과 각 분과위에서 ‘남북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를 교환했고, ‘비핵화 공동선언’ ‘군사·경제 및 사회문화 교류합의서’ 와 함께 남북 연락사무소와 남북 화해위원회 설치 등에도 합의했다. 
남북간의 정상회담은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난 것이 최초이며,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0월2일부터 4일까지 역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나 이뤄졌다. 김대중-김정일 회담에서 나온 산물이 ‘6.15 남북공동선언’이며, 노무현-김정일 간에는 ‘남북정상 선언문’이 나왔다.
‘7.4성명’ 이후 큰 줄기의 남북간 접촉은 대략 그렇게 요약되지만, 알게 모르게 남북간에는 수많은 대화와 밀약이 있었다. 그 과정에 역사적인 합의도 여러 번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제 한낱 휴지가 돼버린 화해 문서들은, 90년대 초까지 필자가 판문점 국회회담과 남북 고위급 회담의 평양방문까지 동행 취재하며 역사적 장면들을 보고 겪고 느꼈던 남북관계의 속성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함을 실감하게 한다.
 
남북간의 대화와 합의는 정권 안팎의 사정에 따라 번번이 오용되고 파기되었다. 가령 독재정권 시절에는 정권안보를 노린 ‘북풍’의 일환으로 활용됐고, 민주화 이후에는 통일열망에서, 때로는 정권홍보를 위해 열을 올리다 반작용을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꾸준히 이어오던 맥을 완전 끊어버린 게 이명박 정권이다. 거센 반작용을 기화로 채널마저 완전 단절시킨 최악의 5년을 보낸 것이다. 
그 후유증이 최근의 북한 전쟁위협과 한반도 위기로 증폭된 것이다. 대화와 소통의 차단은 ‘북한 붕괴론’을 근거로 했다, 그러나 북한정권이 무너지기는 커녕 오히려 독 오른 호전광으로 변모시킨 셈이다. ‘퍼주기’를 욕했지만, 막상 전쟁위기에 처해 이에 대처하느라 드는 비용이 소위 ‘퍼주기’ 예산의 몇 배 규모나 된다는 비아냥도 나오고 있다. 
어차피 남북관계는 양측의 필요에 의해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평화를 원하고 통일의 길을 열기 위해 대화를 꾀하는 일방, 정권내부의 취약성을 호도하기 위해 이용하곤 한다. 특히 북한체제의 경우 늘 그래왔다.
 
그렇게 북한 문제, 나아가 한반도 위기 문제는 남북한이 통일될 때까지는 지속적으로 또 단속적으로 부침을 반복할 것이다. 그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책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든 민주적 시스템의 약점에, 정치지도자들의 대북(對北) 철학 부재를 들 수 있다. 한국도, 미국도, 바뀌는 정권마다 대북정책이 ‘냉온탕’식 널뛰기를 반복하면서 남북관계도 출렁이곤 한다. 북한의 대남전략과 통일정책은 세습정권의 특징 그대로 수십년 동안 본색이 불변인데, 상대는 오락가락인 것이다. 
이번 위기에서 다시금 강조되는 것이 바로 국민적 합의를 토대로 한 정책의 일관성이다. 정권이나 정치지도자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정책으로 북한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 대북 정보기관은 정치와 권력에 절대 휘둘리지 말고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 남북관계에서 깨달아야 할 제 1의 필수 덕목이다. 
< 김종천 편집인 >


[1500자 칼럼] 경험이 없을 때는,

● 칼럼 2013. 4. 16. 14:08 Posted by SisaHan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서 가끔 연락이 온다. 잘 키운 두 자녀 결혼을 앞두고 일어나는 일들도 큰 화제거리의 하나이다. 이제는 적령기가 훌쩍 넘은 딸이 사람을 만나 서둘러 결혼을 한다고 하고, 또 연달아 아들까지 사귀어 오던 아가씨와 결혼식을 추진 중인데, 친구 부부에게는 둘 다 자신의 아이들의 배우자로 적당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 된다고 했다. 부부는 아이들의 마음을 돌려보려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하고, 타일러 보기도 했지만 두 아이 모두 설득할 수 없을 것 같다며 크게 염려한다. 긴 통화 끝에 친구가 덧붙이는 말은 “아이들은 본인들의 의사대로 결혼을 할 것 같은데,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해서 어떻게 맘에 썩 내키지 않는 예비 사위와 며느리를 대하여야 할 지 모르겠다” 였다.
 
전화를 끊고 계속 친구의 마음을 되뇌이며, 사람의 만남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 수시로 우리 마음으로 스며드는 불확신과 두려움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맺는 인연들을 돌이켜 보면, 미리 준비하고 상대방을 선택하는 일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알지 못하는 미래를 두려워하고 상대방과의 관계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너무 베풀면 공정한 관계가 성립하지 않을 것 같고, 간혹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도 한다.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조차도 얼만큼의 보호와 사랑의 표현이 아이를 강건히 자라게 할 것인지 전전긍긍한다. 마음으로부터 솟는 자연스런 감정의 표현보다는, 정해진 법도에 따라 행동하기도 하고, 견제하고 또 조심스레 마음을 열어 보이며 관계를 성립해 간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이런 우리의 모습은 직장의 동료는 물론, 친구, 배우자 하물며 부모 자식 간에도 이어지는 인간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렇게 밀고 당기던 인연도 그것이 끝나는 순간이 오면 여태까지의 염려와 주저함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었는지 사무치게 느끼게 된다, 아버지께서 오랜 세월 치매로 고생을 하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력만 잃으시는 게 아니라 성품도 달라지셔서 갈수록 옛 아버지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남에게 의존하며 순간순간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결국 그렇게 의지하시던 어머니가 옆에 계시는데도, 불안하게 아내를 찾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그만 세상을 떠나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하지만 긴 투병 생활 끝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순간 모든 것이 절벽 밑으로 떨어져 일말의 가능성도 남아있지 않다는 절망감이 들었다. 그것은 아버지 삶이 이어지는 가능성이 아니라, 내가 그 분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막막함이었다. 그 때까지 아버지가 무엇을 얼마만큼 기억하실 수 있는가 왜 그리 걱정을 했는가 싶었다.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였는지 생각 못했다는 후회였다.
 
이제는 성인이 된 아이들, 옆에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조카들, 먼저 보낸 친구들, 모든 헤어짐 후에는 아쉬움이 더 크다. 그나마 작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그들과 만들어낸 반짝이는 따뜻한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삶 속에 거듭되는 확신없는 시작과, 후회스런 끝 마침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생각해 본다. 이제 삶의 연륜이 깊어, 우리가 맺어가는 긴 여로의 끝을 가늠하면서, 살아가는 순간들에 필요한 용기와 지혜를 얻을 때도 되었다. 끝을 보면서 시작을 준비해 보는 연역적인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된다.
며칠 후 다시 친구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로 ‘어차피 이제는 한 식구가 될 사람들이니, 어른이 두 팔 벌려 보듬어 주어야겠지’ 라고 말한다. 경험도 없고, 만족스럽지 못한 발 걸음을 내 딛으며, 그 여정의 끝을 이해하는 현명한 친구의 마음 다짐이 보인다.

< 김인숙 - ‘에세이 21’로 등단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심코 가톨릭교육청 언어치료사


북한 당국이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쪽 노동자들을 전부 철수시키고 개성공단 사업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2003년 착공해 이듬해 첫 제품을 반출한 이후 이런 일은 처음이다. 10년 만에 개성공단 사업이 북쪽의 일방적 조처에 의해 최대 위기를 맞은 것이다. 북쪽은 무모한 결정을 철회하고 즉각 공단 가동을 정상화해야 마땅하다.
 
북쪽의 이번 조처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김양건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는 “남조선 당국과 군부 호전광들이 우리의 존엄을 모독하면서 개성공업지구를 북침전쟁 도발의 열점으로 만들어보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유지·발전 방침을 분명히 해왔으며 국제화 계획까지 밝힌 바 있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언급했다는 인질구출작전을 빌미로 삼은 것도 억지다. 북쪽이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남쪽 관계자들을 장기간 억류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인질구출작전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그가 ‘개성공단은 북한의 달러박스’라는 남쪽 보수세력의 주장을 거론한 것도 상식적이지 않다. 지금은 오히려 박근혜 정부가 그렇듯이 보수세력도 대부분 개성공단의 필요성과 가치를 인정하는 상황이다.
북쪽은 전반적인 위기 수준을 높이기 위해 이번 조처를 취한 것 같다. 군사적인 대치를 중심으로 한 위기 상황에서 비군사적인 개성공단 카드를 쓴 것이다. 이는 큰 잘못이다. 위기와 무관한 민간 부문을 인질로 활용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북쪽은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될지는 전적으로 남쪽 당국의 태도 여하에 달렸다”고 했는데, 개성공단 사업과 관련해 남쪽 당국의 어떤 태도를 말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이든 위협용으로 쓸 수 있다는 식이어서는 남북 사이의 기본적인 신뢰도 흔들리게 된다.
 
개성공단은 남북 정상이 합의해 만든 곳이다. 그동안 남북 사이 무력충돌이 있을 때도 가동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남북이 함께 상품을 생산하는 곳을 넘어서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증진에 기여하는 핵심 수단이기도 하다. 이런 상생공영의 사업을 일방적으로 중단한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약속을 깨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태도로는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에 대한 존중을 말할 자격이 없다. 개성공단에는 남쪽 사람들뿐만 아니라 5만3000명의 북쪽 노동자가 함께 일하고 있다. 북쪽 당국은 이들의 일자리까지 뺏으려 하는 것이다. 우리 정부의 적절한 대응이 시급하다. 책임 있는 북쪽 당국자와 접촉해 북쪽의 진의가 뭔지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다.


7일은 제57돌 신문의 날이다. 신문방송편집인협회(옛 신문편집인협회)는 57년 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 탄생일을 신문의 날로 제정하고, 그를 통해 신문의 사회적 사명과 책임을 다지는 계기로 삼아왔다. 하지만 생일을 맞는 언론인들의 마음은 결코 즐겁지만은 않다. 한쪽에서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밀려 신문을 보는 인구가 날이 갈수록 크게 줄고, 또 다른 쪽에선 기자들이 자사이기주의와 진영논리, 광고의 힘에 눌려 스스로 신뢰를 까먹고 있는 게 신문의 현주소다. 한마디로, 지금 신문은 신뢰의 위기, 영향력의 위기, 존립의 위기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중의 위기에 허덕이고 있는 신문이 연명을 넘어 부활하기 위해선 두 가지 방안이 동시에 실행되어야 한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신문에 대한 사회의 지원이다. 또 하나는 신문 스스로 추락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피나는 자정 노력이다. 새가 두 날개로 날듯이 외부의 지원과 내부의 자성이 동시에 가동되지 않고서는 신문이 되살아나기 어렵다.
정치권이 추락하는 신문을 살리려고 발벗고 나선 것은 의미가 크다. 민주통합당의 전병헌 의원 등이 그제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신문산업 진흥에 관한 특별법안’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했다. 미디어 균형 발전과 여론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 정부가 신문의 공동 제작과 유통을 지원하고, 국고 등을 활용해 신문산업 진흥기금을 설치하자는 게 핵심이다. 굳이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토머스 제퍼슨의 말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흥미 위주이고 휘발성이 강한 온라인보다 책임성과 사색의 깊이가 있는 인쇄매체를 살려야 한다는 그들의 인식은 틀리지 않다. 프랑스와 미국 등에서도 ‘신문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우리 정부와 여당 쪽도 이 법안이 제정될 수 있도록 적극 나서기 바란다.
 
언론사 및 언론인 스스로 먼저 반성할 대목도 적지 않다. 사실에 근거하기보다 자사이기주의와 진영논리에 빠진 기사·논평의 범람, 자전거와 상품권, 심지어 현금까지 동원한 판매방식의 문란, 광고지상주의에 빠진 경영의 안일함으로는 독자의 신뢰를 회복하기 힘들다. 점차 흐려져 가는 기자들의 윤리의식도 신문으로부터 독자들을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다. 언론인들은 신문의 날을 맞아 다시금 117년 전 엄혹한 환경에서 독립신문을 만든 선배 기자의 뜻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래야 국민이 신문을 믿고 신문도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