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퇴임하자마자 어제 몰래 미국으로 출국하려다 결국 실패했다. 그의 출국 계획이 지난 주말 <한겨레>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고, 곧이어 검찰이 출국금지 조처를 취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고 정보기관의 수장이 이런 ‘소동’의 주인공이 됐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독재국가에서 쿠데타가 발생한 뒤 종종 봐왔던 독재정권 권력층의 해외 도피를 연상하게 한다.
원세훈 전 원장이 미국으로 ‘도피성 출국’을 시도했다는 건 그 자체로 최근 자신을 둘러싸고 제기된 각종 ‘범행’을 자백하는 셈이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국정원이 정보기관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 국내 정치공작에 깊숙이 개입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황이 이런 지경에 이른 만큼 검찰은 즉각 신속하게 수사에 착수해야 한다. 현재 ‘국정원 댓글 사건’ 등에 대해 일선 경찰이 수사를 하고 있으나 아무런 진전이 없다. 전교조 등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한 ‘(국정)원장님 지시 말씀’ 등과 관련해서는 야당 등이 원 전 원장을 형사고발해 놓은 상태다. 검찰은 국정원과 관련된 각종 사건을 직접 떠맡아 새 정부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또 이번 수사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나 방송인 김미화씨 등 그동안 제기됐던 각종 사찰 의혹도 모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스스로도 19대 국회의원 선거 전후로 “정치사찰의 같은 피해자”라고 주장한 바 있다. 대통령과 여당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국정원의 각종 정치개입 의혹을 철저히 파헤치는 게 당연하다. 한 걸음 나아가 박 대통령은 국정원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지시함으로써, 정치 정보나 이에 대한 개입 자체를 차단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일 필요가 있다. 이는 자신이 국정원을 이용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전직 국정원장의 갑작스런 외국행은 그 자체로도 대단히 부적절한 처사다. ‘걸어다니는 국가기밀창고’로 불릴 정도로, 그의 머릿속에는 국가안보와 직결된 특급 비밀들이 가득 들어 있다. 그렇기에 국정원장은 재직 중에는 국정원 청사 안 관저에서 생활해야 하며, 퇴임 뒤에도 6개월~1년가량 차량이 제공되고 경호원들의 밀착경호가 이루어진다. 이런 국정원장이 퇴임하자마자 혼자서 외국으로 나가는 건 그 자체로 국가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조금 경우는 다르지만, 과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권력투쟁에서 밀려나자 미국으로 가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드러내는 온갖 사실을 폭로한 적도 있다.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가 어제 “장준하 선생은 머리 가격에 의해 숨진 뒤 추락했다”고 단호하게 밝혔다. 이는 지난해 유족들의 의뢰로 유골을 육안 검시한 이윤성 서울대 의대 교수가 “가격인지 추락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과는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 이정빈 교수는 연세대생 이한열 사망사건, 만삭 의사부인 사망사건, 화성 연쇄살인사건 등 굵직한 사건에 참여해온 법의학계의 최고 권위자다. 특히 그는 정밀감식을 위해 컴퓨터단층(CT) 촬영을 하고 두개골을 잘라서 그 단면을 확인하는 등 모든 과학적 방법을 동원했다. 이 정도면 의학적으로 타살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단계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제는 누가 왜 어떻게 장준하를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그 진실을 밝혀야 할 단계이다. 물론 이전에도 그런 노력은 있었다. 2000~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가 장준하를 사찰했고, 유일한 목격자 김아무개씨가 정보기관 협력자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찾아냈다. 하지만 국정원 등 정보기관이 조사를 거부하고 주검을 검안할 수 없어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장준하 선생이 뻥 뚫린 자신의 두개골로 37년 만에 진실의 문을 열었으니,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다음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이를 위해선 국회의 특별법 제정이 시급하다. 그 법을 근거로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회에 검시권은 물론 그동안 조사를 거부해온 국정원·기무사 등 정보기관의 자료를 조사할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면 된다.
 
문제는 이런 절차가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다. 박 대통령만이 새누리당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는데다 무엇보다도 장준하 타살 의혹에 연루됐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장준하 선생이 숨진 다음날 내실에서, 단 한 차례도 만나지 않았던 보안사령관을 1시간가량 독대한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7년 떠밀리듯 유족을 찾아가 위로의 말을 건넨 뒤 모든 게 마무리된 것처럼 행동했다. 지난해 8월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수락 직후에는 “계속 과거 얘기만 하고 있다”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때는 선거가 눈앞이라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실규명을 통해 진정한 화해로 나아갈 길을 열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박 대통령이 100% 국민대통합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장준하 선생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한마당] 대한민국, 안전한가

● 칼럼 2013. 3. 29. 20:59 Posted by SisaHan
대한민국의 관문인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에서 며칠 전 진풍경이 벌어졌다. 4년간이나 국가안위를 책임졌던 최고 정보기관의 수장이 퇴임하자마자 출국한다는 소문에 시민들이 ‘도주’를 저지하겠다고 진을 친 것이다. 이들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사진과 ‘해외도피 하지 마세요’ ‘원세훈은 출국금지’ 등 팻말을 들고 미국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는 그 시각에 출국장 앞을 지켰다.
이에 앞서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명백히 밝히라며 경찰에 사표를 던졌던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이런 내용의 영문 경고의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전세계 공항, 이민국, 언론에 대한 경고: 한국국적의 도망자, 전 국정원장 원세훈이 귀국에 입국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원세훈은 심각한 범죄혐의로 고발되어 있으며, 검찰로부터 출국금지 명령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아무리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고소·고발되었다고는 하나, 며칠 전까지 국가의 정보를 한손에 틀어쥐고 흔들던 위세 당당한 인물이 돌연 해외로 피해간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요, 출국금지 시키라는 야당과 시민들의 노성이 들끓더니 ‘못믿겠다, 직접 막겠다’며 시민들이 공항출구를 지킨 희한한 모습에, 더욱이 인터폴 수배와도 같은 경고문까지…. 도대체가 코미디인지, 드라마인지 웃지 못 할 사건이요, 대한민국의 현 수준과 형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엽기적인’ 소극이어서, 실로 탄식을 금치 못하게 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렇게 자랑하던 ‘국격’의 실상이 바로 그 정도임을 그의 충복이었던 원세훈 씨가 전세계에 과시한 셈이다.
 
세계 어느 민주국가의 정보기관 수장이 퇴임하자마자 해외로 튀겠다고 해서 법석이 인 곳이 있을까. 미국의 CIA, 즉 중앙정보국장이 물러나자마자 외국에 도피하겠다는 일이 상상이나 가능한가? 
과거 박정희 정권하에 최장수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이 해임된 뒤 4년 만에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는 한국 정부의 대미 로비 의혹을 캐기 위해 미국 의회가 연 프레이저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등 반정부 활동을 하다 19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그는 암살설이 유력하게 나돌았다. 역시 박정희 시절 비서실장과 중정부장을 지낸 이후락도 중정부장 해임 뒤 국외로 비밀리에 도피했다가 박 대통령의 신변보장 약속을 받고 국내로 돌아온 적이 있다. 그 독재정권 치하의 사건들 이후 ‘원세훈 도피시도’가 벌어진 것이다. 역사가 거꾸로 돌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희대의 해프닝이다.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이 어떤 곳인가. ‘국가의 안전보장에 관련되는 정보·보안·범죄수사’를 담당하는 최강 기관이며 최고의 국가기밀을 다루는 곳이다. 국제적 정보전쟁, 특히 남북분단 상황에서 북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 대처할 대북 첩보전의 책임을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살벌한 글로벌 외교·무역·산업·사이버 정보전을 포함해 나라와 국민을 보전하고, 국익을 수호하는 대적(對敵)정보의 총본산이다.
그런데 그 막강한-해야 할!-정보기관이, 김정일 사망과 로켓발사나, 핵실험도, 북의 TV발표로 눈치를 채서 국제적 망신을 샀다. 국산훈련기를 상담하러 온 인도네시아 방문단 숙소를 어설프게 뒤지다 발각돼 외교문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반면에 ‘대북 심리전단’이 국내정치에 개입해 선거 때 야당후보 비난과 대통령 치적 홍보 인터넷 댓글공작이 드러나 고발됐다. 국민을 우군과 적군으로 나누고 젊은 층을 우군에 끌어들이라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밖에서 노리는 적에는 무지하고 내부의 우매한 국민을 상대로 정보전·심리전을 벌인… ‘정보 문외한 원세훈’과 그를 활용한 이명박 시절, 추락할 대로 추락한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민낯이다.
 
소국 이스라엘은 중동의 화약고에서 정보기관 ‘모사드’의 눈부신 활약에 의지해 나라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닉슨은 정보기관을 정치에 활용했다가 패가망신하고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북의 적화통일 위협을 경고하며 안보를 전가의 보도처럼 즐겨 써먹는 보수정권하의 최고 정보기관이, 대북·대적 정보에는 무능하고 국민 편가르기와 야당 죽이기에만 팔을 걷어부친 현실에서 어떻게 안심하고 살라는 것인가. 대한민국은 과연 안전한가?
< 김종천 편집인 >


얼마 전에 캐나다의 국영방송인 CBC에서 작년에 작고한 신민당(NDP)당수였던 잭 레이톤(1950~2011)에 대한 특집드라마를 보았다. 나는 어디를 막론하고 정치인에 대해 호감이 없는데, 그는 내가 호감을 가졌던 캐나다 정치인의 한 명이다. 당연한 것인지 이상한 것인지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의 정치에 대해 관심이 없다. 오히려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없는 한국 정치에 더 관심이 많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캐나다의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고작 어느 당이 이민자들을 더 우대하는지 그 점을 주로 따진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의 이민자는 캐나다의 정치발전 과정을 모르고, 당연히 정치인도 잘 모르고, 정책을 모르기 때문이리라. 어찌 보면 모르기에 관심이 없고, 관심이 없기에 모르는 악순환이 계속 되는 것 같다. 캐나다의 역사까지 공부한 적이 있지만, 역대 수상들의 이름은 기억해도, 그들이 행한 정치를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의 정치를 보더라도 자유당과 보수당이라는 양당체제로 굳혀져 서로 정권을 뺐고 빼앗기는 판에 박힌 구조 안에서, 설사 정당이 바뀌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어 보인다. 캐나다가 정치적으로 안정된 사회여서 그럴까?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변화를 원하는 이상주의자들은 늘 누군가 새로운 정치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영웅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할까? 역사적으로 볼 때 그런 영웅들은 카리스마가 강해 대부분 독재자로 변하지만….설사 눈에 보이게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정치인과 비교해 어딘가 다른 인물이 나타나기를 원한다. 작년에 암으로 작고한 잭 레이톤은 그런 정치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의 죽음이 무엇보다 안타까운 이유는 보수당과 자유당에 밀려 만년 제3당인 신민당을 지난 2011년 선거에서 제일 야당으로 끌어 올려 놓았다는 사실이다. 신민당이 그때 100석을 넘게 의석을 확보한 것은 당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정치인으로서의 승리의 기쁨도 잠깐 그런 절정기에 그는 죽은 것이었다. 정치인으로서 앞에 펼쳐진 무한한 가능성을 뒤로 두고….

그는 누구보다 이 사회의 밑바닥층, 소외된 계층의 사람(노숙자나 에이즈 환자)들을 위하여 일한 정치인이었다. 그런 까닭에 토론토 시가 막대한 돈을 들여 스카이 돔(로저스 센타)를 짓는데에 반대했다. 토론토 시가 관리 및 유지비를 감당 못해 거의 거저라고 할 수 있는 헐값에 판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예견은 들어맞은 셈이다. 전시 효과로 무엇을 짓고, 거창한 올림픽같은 국제적 행사를 열려는 대부분의 정치인과는 분명 다른 셈이다. 그는 정치 생활을 토론토 시의원으로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로 유명했다. 오죽했으면 중국계 여자인 올리비아 챠우와의 결혼식 전날 자전거를 타고 가다 신문 가판대에 부닥쳐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중국인을 위한 자선 경매에서 한 명은 경매인으로, 다른 한명은 통역으로 참여했다 만났다.

내가 그에게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영국계 백인으로서 중국계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점이다. 정치인, 그것도 지도자급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가? 말로는 평등을, 차별없는 인간관계를 외치지만, 그들은 사회 지배계층으로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자기들만의 계급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백인 중의 백인이다. 결혼은 물론이고 자녀들 교육조차, 아무나 가지 못하는 그들만의 사립학교로 보내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신민당의 당수가 그의 자녀를 명문 사립학교에 보내 말이 많았던 적도 있었다. 현실적으로 다른 인종과 결혼을 하는 지도자급 정치인은 많지 않다. 일반 사람들도 아직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편견과 관습을 버렸다는 사실에 나는 그를 더욱 좋아했다. 토론토 시에서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내가 자주 가는 호숫가의 섬(센터 아일랜드)으로 가는 터미널을 Jack Layton터미널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들 부부가 자주 자전거를 타러 섬에 가기 위해 애용하던 곳이다.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