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2월25일 취임식 특사로 방문한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에게 “한-일 간의 진정한 우호관계 구축을 위해 역사를 직시하면서 과거 상처가 더 이상 덧나지 않고 치유되도록 노력하자”고 말했다. 이어 3.1절 기념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와 동반자가 되어 21세기 동아시아 시대를 함께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역사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얼어붙은 양국관계를 회복하고 우호관계를 구축하려면 먼저 역사를 직시하는 자세를 보여달라고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아니 절망이나 배신,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듯하다. 아베 신조 내각의 제2인자이며, 총리 경험자인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에게 많은 손해와 고통’을 안겨준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의 위패를 합사해 놓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아베 총리는 참배하지 않았으나 총리 이름의 공물을 바쳤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방일을 앞두고 적어도 총리, 관방장관, 외상의 야스쿠니 참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우리 당국의 거듭된 요청을 받고서도 ‘감행’한 도발이다.
우리 정부가 예정되어 있던 윤 장관의 방일과 한-일 외무장관 회담을 즉각 취소한 것은 당연하다. 지난해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틀어진 양국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그동안 양국의 관계자들이 다각적으로 펼쳐온 노력이 일본 최고위급 지도자의 ‘자폐적 역사인식’ 때문에 하루아침에 다시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로써 두 나라 관계는 상당 기간 접점을 찾기가 어렵게 됐다.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도발로 지역 정세가 요동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 협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데 안타까운 일이다. 중국 정부도 일본에 강력한 항의를 했다. 역사 문제에 대한 반성 없이 동북아 지역에서 일본이 설 자리가 없다는 걸 이번 사건은 다시 보여준다.
 
그런데도 일본은 여전히 안하무인이다. 어제는 여야 국회의원 168명이 보란 듯이 떼거리로 신사 참배에 나섰고, 아베 총리는 무라야마 담화 수정 방침을 재차 밝혔다. 아소 부총리는 자신의 참배로 “외교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폭력을 행사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일을 상습적으로 하는 일본은 동북아의 평화를 해치는 또다른 우환이다.


북한의 제3차 핵실험을 빌미로 2015년 12월까지 미국이 행사하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시기를 다시 연기하자는 주장이 솔솔 고개를 들고 있다. 연기론이 제기되는 상황이나 논리가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와 너무 흡사하다. 당시에도 북한이 핵실험을 한 뒤 연기론이 나오고 다음해 한-미 정상회담에서 2012년 4월로 돼 있던 환수 시기를 연기했다. 이번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5월 초 미국 방문을 앞두고 이런 주장이 부쩍 잦아지고 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전작권 전환 추진 주역이었던 버웰 벨 전 한미연합사령관까지 가세해 일부 정치권과 군 주변의 연기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북한의 핵 능력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계속 전시작전권을 행사하는 게 유리하다고 말한다.
 
북한 핵위협에 맞서 억지력을 강화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북한이 함부로 도발하지 못하도록 동맹을 강화하고, 다양한 군사적 억지 수단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전작권을 행사하게 되면 대북 억지력이 약화할 것이라는 논리는 너무 조잡하다. 전작권 환수 연기로 얻는 이익만 생각하고 그로 인해 잃는 것은 생각치 않는 단견이다.
전작권은 유사시에 한 나라 군대의 작전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다. 한 나라의 주권을 상징하는 척도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온 명나라군이 조선의 군권을 쥐고 횡포를 부린 역사적 경험만 돌이켜봐도 한 나라가 군권을 스스로 행사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더구나 미국은 해외 미군의 ‘첨단 기동군화’라는 자기 필요에 따라 전작권 전환을 꾀하고 있다. 상대가 주지 않겠다고 하는 주권이라도 우리 것이니 달래야 정상인데, 주는 것도 안 받겠다고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전작권을 환수해야 우리의 대북 억지력이 더욱 강화된다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금 미군이 전작권을 행사하는 상황에서는 연평도 포격과 같은 사태 때 자체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수단이 제한되어 있다.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미군의 판단에 따라 작전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정부는 군사 주권이 걸려 있으며 대북 억지력 약화와 크게 상관없는 전작권의 환수 시기 연기론에 휘둘려선 안 된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북한 핵이 존재하는 한 우리나라는 영원히 전작권을 가질 수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 군대를 지휘통제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은 나라의 군대로는 아무리 동맹이 강고해도 상대에게 두려움을 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거리마다 활짝 핀 봄꽃들을 보며 걷다가, 집에 들어오자 테러 뉴스로 가득 찬 신문을 펼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아니, 괴롭다기보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운 혼돈에 사로잡힌다. 어느 쪽이 내가 서 있는 현실인지 확실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감각의 화면에 떠오른 두 이질적 대상을 하나의 틀로 통합하는 인식작용에 착오가 발생하고 있다고나 할까.

문득 박완서 선생의 자전적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한 대목이 떠오른다. 6.25전쟁으로 한창 피난하던 중에 주인공은 밤에는 걷고 낮에는 으슥한 데서 시간을 보내는 고난을 이어간다. 국도 연변 마을은 모조리 불타고 부서져 쑥대밭이 되어 있는데, 어느 날 그는 마을 장독대 옆에 서 있는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서 꽃망울이 부푸는 것을 보았다. 목련나무였다. 주인공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얘가 미쳤나 봐” 하는 비명이 새어나온다.
누가 미쳤다는 것인가. 박완서의 통찰이 빛나는 것은 비명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는 나무를 “얘”라고 의인화한 게 아니라 거꾸로 나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비명은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면서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른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계절이 바뀌고 꽃망울이 부푸는 자연의 질서에 대비될 때 인간의 폭력행위는 명분이 무엇이든 광란임이 분명했던 것이다.

보스턴 마라톤대회를 피로 물들인 테러도 변명의 여지 없는 범죄다. 그것은 모든 테러가 그렇듯 광기의 발로이고 맹목의 소산이다. 그러나 지금 전세계 주류 언론에서 하고 있듯이 범인 형제의 사생활을 들추고 그들의 행동을 극화하는 데만 골몰하는 것은 사건의 전체적 맥락을 은폐하는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 따라서 진상에 접근하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그들 자신의 발언을 들어보는 것이다. 그런데 형은 죽었으므로 말이 있을 수 없고, 아우도 중상이므로 입을 열기 전에 온갖 추측보도의 홍수에 휩쓸릴 것이다. 이미 그들 차르나예프 형제는 사법적 판단이 착수되기도 전에 어떤 일방적 관점에 의해 절반쯤 악마화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보스턴 테러 자체보다 테러 배후에 있는 구조적 불의에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
보도를 보면 차르나예프 형제는 러시아 국적의 체첸계로서 10여년 전에 미국에 건너와 영주권을 얻었다고 한다. 형은 권투선수이고 아우는 의학도로서, 형제의 기질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주위의 평판은 비교적 호의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요컨대 그들은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해가던 평범한 이주민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청년들이 이처럼 끔찍한 테러리스트로 변신하게 되었는가. 이 비밀을 푸는 것이 바로 테러를 근절하고 미국이 더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이다.

돌이켜보면 9•11 테러 이후 미국이 했어야 할 가장 요긴한 작업은 상식적인 말로 해서 자기반성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미국이 한 일은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무력침공이었다. 부시 행정부의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는 2011년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반대로 미국의 평화운동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며칠 전 이라크전쟁 10돌 기자회견에서 “만약 이라크에 정말 대량살상무기가 있었다면 미국 정부는 군대를 투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어찌 됐든 미국 침공 이후 이라크에서는 1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고 168만명의 난민과 500만명의 고아가 생겨났으며, 한마디로 나라 전체가 박살이 났다. 9•11 테러가 비록 엄청나다고 하지만, 어찌 이라크가 당한 국가적 참화에 비할 수 있겠는가.

강자의 폭압이 지속되는 세계에서 약자들의 저항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보스턴 테러의 근원에 있는 것은 체첸 민족주의도 아니고 이슬람 극단주의도 아니다. 범죄적 세계질서에 대한 비판의 정서야말로 그 뿌리다. 다만 정의에 대한 열망이 테러와 같은 자기부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순진한 소리지만 꽃의 마음으로, 나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 염무웅 문학평론가 >


[1500자 칼럼] “델꼬 살아봐”

● 칼럼 2013. 4. 22. 17:45 Posted by SisaHan
우리는 “남의 밥의 콩이 더 굵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밥상 위에 올라온 밥그릇을 들여다 보면서 다른 사람의 밥그릇과 자신의 것을 비교해본다. 다른 사람의 밥이 자신의 것보다 더 많고 쌀과 함께 섞어 지은 밥의 콩이 다른 사람에게는 더 많이 간 것 같고 더 굵게 보여지는 것으로 말했다. 가난해서 그랬을까?

외국에도 그런 말이 있다. “남의 집 잔디밭이 더 푸르다.” 자신이 볼 때 자신의 집 잔디밭에는 잡초도 많고 잔디도 듬성듬성한 것 같은데 남의 집 잔디밭을 보면 그렇게 푸르고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이다. 가까이 가보면 분명히 다른데 말이다.

이렇게 보면 가난해서도 아니요 자신들이 부족하거나 잘못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꼭 판단해야 한다면 남과 비교할 때 뻗어져 나온 욕심이거나 엄살 정도라 하겠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가 언제나 남과 비교하게 되고 그렇게 비교할 때 자신의 형편이나 현재의 사정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도 있지 않겠는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할 줄 안다면 그리고 내게는 이 모든 것이 과분하다고 느낄 줄 안다면 결코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지 않겠는가?

부부 사이에도 그런 말을 많이 듣는다. 다른 집 남편은 이래저래 아내에게 잘 해주는데 우리 집 남편은 도대체 그런 것을 몰라 하기도 하고 다른 집 아내는 남편을 어떻게 섬기며 그렇게 서비스도 잘하고 부모에게도 잘하는데 도대체 우리 집 마누라는 틀렸어 하고 남의 밥그릇의 콩을 부러워하고 남의 집 잔디를 귀하게 생각하는 분들을 많이 본다.
과연 그럴까? 남의 밥이 콩이 더 굵은가 비교해 볼까? 
 
어떤 분이 다른 여자 친구에게 말했다. 당신 남편은 어떻게 그리 젠틀하시고 친절하시고 집안일도 그렇게 잘 도와주시며 당신의 기분을 맞추어 주면서 재미나게 사실까? 그때 그 친구의 답이다. 한번 델꼬(데리고) 살아봐!
어찌 입에 딱 맞는 떡이 있으랴? 남들이 볼 때는 다 좋은 것 같고 훌륭한 것 같으나 실제로 살아가는 동안에 주어지는 일들은 다른 사람이 모르기에 겉으로 보여지는 일이나 사건에 대해서만 감탄하고 좋은 줄로 안다. 그러나 함께 사는 사람은 일거수일투족을 늘 함께 보고 살기에 보이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그 모든 것이 다 정답이 아니란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셈이다.

어디 밥그릇 속의 콩이나 잔디밭만 말할까? 내 주변의 모든 것에 나는 얼마나 만족하며 감사할까도 생각해보자. 지금 나는 내가 예배하며 섬기는 교회는 어떤가? 다른 교회는 다 좋은 것 같고 모든 일이 다 척척 잘 돌아가는 것 같고 때로는 부럽기도 하겠지만 한번 들어가 보면 거기도 우리 교회나 비슷한 양태를 보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속한 현실에서 또는 가정과 교회에서 얼마나 만족하는 가운데 감사하고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결코 남의 것만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가진 것도 내가 속한 교회도 남이 지금 부러워하고 있음을 알지어다.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