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엊그제 ‘남북관계는 전시상황에 들어간다’고 선언하고 개성공단 폐쇄 위협까지 했다. 북한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호전적 언행을 중단하고 핵·미사일 문제 등을 풀기 위한 대화에 나서기 바란다.
북쪽의 이번 위협은 지난 26일 ‘1호 전투근무태세’를 선언한 최고사령부 성명 내용을 구체화한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내부 단합을 꾀하고 상대를 불안하게 만들어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심리전 성격이 강한 것으로 분석하지만, 우발적인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키운다는 점에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지금처럼 계속 위협의 강도를 높이다 보면 최고지도부의 판단과는 별개로 현장에서 충돌이 빚어질 수도 있다. 아무리 한-미 훈련 기간 중이라고 하더라도, 그동안 최악의 상황을 막는 안전판 구실을 해온 개성공단 폐쇄까지 위협하는 행태는 큰 잘못이다.
 
북쪽은 최근의 긴장된 한반도 정세가 자신의 무모한 핵실험에서 비롯됐음을 알아야 한다. 북쪽의 핵 보유를 인정할 나라는 지구촌 어디에도 없다. 한·미를 비롯한 6자회담 참가국들은 여전히 평화적으로 핵 문제를 풀기 위한 대화의 창을 열어놓고 있다. 북쪽이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유예 등의 조처를 취한다면 한반도 관련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협상이 시작될 수 있는 상황이다. 북쪽은 한·미의 새 정부와 본격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반면 지금과 같은 군사적 대결이 계속된다면 북쪽은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중국이 명백하게 대북 압박에 나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북쪽 정권의 기반 약화와 주민의 고통은 피할 수가 없다.
 
북쪽의 이번 위협은 핵폭탄 투하가 가능한 미국의 B-2 스텔스 전략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에 출격한 사실이 28일 공개된 뒤 나타내는 예민한 반응의 하나이기도 하다. 미국의 군사 패권을 뒷받침하는 핵심 공격 무기 가운데 하나가 한반도에 등장한 데 대한 북쪽의 우려는 나름대로 근거가 없지 않다. 미국이 새로운 첨단 무기를 추가적으로 과시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이런 움직임은 북쪽을 자극해 오판을 일으킬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한반도가 신무기를 시험하는 무대가 돼서는 안 된다.
북쪽은 과거의 ‘벼랑 끝 전술’이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결국 사태를 악화시키고 자신의 고립을 더 심화시켰을 뿐이다. 남북대화가 끊긴 이후 북쪽 정권에 대한 남쪽의 여론도 더 나빠졌다. 북쪽이 대화에 나선다면 한반도 관련국들은 도울 준비가 돼 있다. 북쪽의 현명한 선택이 필요한 때다.


[한마당] 호랑이 꼬리를 밟으라

● 칼럼 2013. 4. 6. 18:47 Posted by SisaHan
“한국이 실효 지배하는 독도=다케시마에 대한 주권 주장을 일본이 단념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 결단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전망없는 주장을 계속해서 한-일 관계, 일본인과 한국인의 감정을 점점 더 악화시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다.”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인정하라는 이 주장은 한국 사람이 꺼낸 말이 아니다. 독도를 자기네 다께시마라고 억지 부리는 일본 땅에서, 일본사람이 한 말이다. 그 것도 일본 최고의 명문인 도쿄대학의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가 최근에 펴낸 ‘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라는 책에서 당당히 주장했다. 한국에 대해서도 영유권을 갖는 대신 일본 어민들의 어업권을 보장해야한다는 일부 양보가 필요함을 지적했지만, 그의 해결책은 일본인들에게는 괘씸하고 배신감을 주기에 충분할 예민한 내용이다. 일본의 지성으로 불리는 하루키 교수는 또 일본이 러시아에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북방 4섬’에 대해서도 일본이 거짓말을 하고있다며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으라고 일본정부를 꾸짖고 있다.
 
한일 양국이 첨예하게 맞선 문제에, 특히 양측의 민족적 자존심이 걸려있고 극우세력의 목청도 확산되는 상황에서 용감하게 일본의 ‘패퇴(敗退)’를 직언한 하루키 교수의 용기는 가상하기 그지없다. 가령 한국에서 그런 식의 ‘양심적일지언정’ 역발상인 주장이 나왔다면?…당장에 매국노라고 몰매를 맞고 ‘매장’을 걱정하지 않았을까. 서울대 재직교수가 정치를 훈수한다고 심한 공격을 받고, 퇴임교수는 ‘희망버스’를 탔다는 사실 하나로 명예교수 선임대상에서 제외되는 현실, 쇠고기 협상을 제대로 하라고 지적한 PD수첩이 피소된 사례 등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주장을 한다해서 적대시하고 걸핏하면 ‘좌파’가 되는 흑백논리의 살벌함에서 양심적 직언은 자칫 목숨까지 걸어야 할 판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보다는 일본이 아직은 앞선 나라고 운신의 폭이 넓은 사회라고 해야할 것 같다. 도쿄 한인타운에서 험악하게 반한·혐한 시위를 벌이는 우익을 향해 “인종차별적 행위를 중단하라, 물러가라”고 용기있게 대응하는 일본인들의 시위대가 나선 것을 봐도 그렇다. ‘한국·한국인을 비난말라’는 직설이 아닌 ‘인종차별적 행동을 말라’고 지적하는 점잖은 수준도 한 수 위다.
대중사회에서 군중심리에 휩쓸린 다중의 의사에 반한 주장과 입장은, 아무리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주장일지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사표명과 행동에는 특단의 각오가 필요하다. 높은 학식과 도덕과 인격에 정의감을 지닌 ‘지성인’ 가운데서도 보통 용감해서는 선뜻 나서지 못한다.
 
문제는 직언이 제지당하고 멈칫대는 곳은 어느 사회든 군중심리적인 다중의 편향이 거의 대부분 불행한 결말로 달려간다는 사실이다. 나치의 독일이 그랬고, 군국주의 일제가 그랬다. 잘못 가고있다는 경고의 목소리와 제동을 거는 직언이 묵살되고 침묵과 왜곡만이 강요될 때 파멸이 가까워지는 것은 수많은 역사가 보여주였다. 목숨을 걸고라도 바른 말을 하고 양심과 정의를 외치는 사람이 많아질 때 그 사회가 맑고 건강했고, 또 그것은 당연하다. 조선왕조에서도 여론을 살펴 왕의 잘못에 대해 목숨을 걸고 직언했던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이 존중받을 때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이는 언로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언로가 왜곡되거나 막혀있는 정치와 사회에는 언제나 불신이 싹트고 부정과 불의가 독버섯처럼 번진다. 언론이 중요한 이유다. 정부의 언론장악을 걱정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감시하고 고발하는 시선이 없으면 자연히 방만으로 흐르게 된다. ‘땡전’이니 ‘나팔수’라는 말을 들으며 찬양일색이던 언론환경에서 구린내 나는 부정과 비리가 횡행한 것은 산 교훈이다. 그래서 권력과 다중의 압박을 견디며 위험을 무릅쓴 양심적 언론의 탐사정신과 직설보도는 너무 당연함에도, 요사이는 눈총을 받는 위험스럽고 ‘위대한 일’이 되어버렸다.
 
직언은 고통스럽고 때론 위험한 것이다. 옛 중국의 한비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에게 미움을 받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일신을 망친다. 그 자신만이 아니라 그 아비도 위태로운 법이다.” 주역(周易)은 아예 직언을 ‘호랑이 꼬리를 밟는 일’에 비유했다. 호랑이 꼬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꼬리를 내려 항문을 가리니 구리고 냄새나는 것의 덮개이며, 다른 하나는 치켜세워 맹수의 왕임을 보여 주는 용맹과 힘을 상징한다. 직언은 상사의 잘못이나 부족한 점, 심지어 비리를 지적하고 바로잡아야 하는 과정에서 권위에 도전하게 되는 것이니 호랑이 꼬리를 밞는 것처럼 대단히 위태로운 일이라는 뜻이다. 
최근의 인사실패를 두고 직언을 싫어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독단적 행태를 꼬집는 말들이 터져나온다. 대간이 유명무실화하면서 세도정치를 낳고 결국 부정부패와 망국으로 흐른 조선왕조의 전철을 되새겨 볼 일이다.
< 김종천 편집인 >


과일 진열대 앞을 지나다 고향 석류를 만났다. 굳이 생산지가 어디냐고 묻지 않아도 주먹만 한 크기에 볼품없는 모양새가 어릴 때 자주 보던 놈들과 흡사하게 닮았다. 빛깔 좋은 수입 농산물에 치여 존재 자체도 불분명한 그 놈들이 이곳 캐나다까지 상륙했을 리 만무하고, 세상 어딘가에 고향 통영 빛, 통영 바람을 닮은 곳이 있어 이렇게 흡사하게 지어냈는지 감사할 따름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큼직한 석류가 검붉은 빛으로 유혹해도 곁눈질만 했는데 뒤늦게 잔챙이들 앞에서 마음이 멎어버렸다. 여성의 인체에 석류가 그만이라는 사실을 아는 듯, 좀 더 나은 알맹이를 고르느라 열성인 여인들 옆에 나도 슬며시 끼어들어 이것저것 들었다가 놓는다. 여느 과일들처럼 쉽게 장바구니에 담을 수 없는 석류, 해풍과 태풍을 견뎌내며 아버지의 눈길 안에서 소담하게 익어가던 열매를 찾던 나는 이미 어린 날 그 언저리를 돌고 있었다. 히말라야 그 주변이 본향이라는 석류가 오랜 세월동안 사방팔방으로 세를 뻗어 우리 집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나는 석류는 우리 집만의 전유물인줄 알았던 시절이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옛집엔 해묵은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직한 언덕을 받치고 섰던 나무는 자태도 고왔지만 주홍색 꽃눈이 열리는 봄부터 속내를 내비치는 가을까지 동네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울창한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자란 고목의 허리는 여섯 아이들의 발바닥을 받아내느라 늘 반질반질했다. 게다가 대여섯 평 되는 나무 밑은 언제나 넉넉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우리 형제들의 놀이마당으로는 그만이었다. 아버지의 완고한 성정 탓에 동네 마실 이라고는 꿈도 못 꾸시던 어머니까지 가세한 그곳은 늘 아늑했으며 놀 거리가 매일 샘솟듯이 솟아나는 곳이었다. 어쩌다 태풍이라도 다녀간 날 아침이면 마당 곳곳에 빨갛게 떨어진 석류꽃을 치마폭이 미어지도록 주워 담던 기억이 엊그제처럼 선연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오 유월 태풍은 우리들의 소꿉놀이를 풍성하게 했지만 칠 팔월 태풍은 아버지의 마음을 썰렁하게 만들었을 것 같다.
 
아버지는 통영 나전칠기 장인이셨다. 한옥을 개조하여 조그만 공장을 들여 놓고 몇 안 되는 직공들과 밤낮으로 일에 파묻혀 사셨다. 젊은 나이에 아홉 식구의 생계를 혼자 감당한 아버지는 석류나무 밑에서 뛰고 솟는 자식들을 보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지 싶다. 그 낙이 힘겨운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도 되고 때론 당신의 어깨를 더 떨어뜨리게 하는 짐도 되었을 테다. 
‘숙이야!’ 하는 아버지의 부름에 동생들과 함께 툇마루로 달려가면 당신은 가을 햇살에 한껏 벌어진 석류를 까고 계셨다. 입안에 고이는 침을 꼴깍이며 아버지의 손길을 따라가면 불그레한 알갱이가 반짝이며 튀어나왔다. 섬세한 감각이 주 무기였던 당신의 손에서는 알맹이가 터지는 법이 없었으며 한 입 가득 넣어주시는 손맛에는 고소함과 짭조름함이 섞여 있었다. 그때는 신맛, 단맛에 자동으로 가미되는 간기가 신기했는데 나중에야 바다에서 올려 진 갖가지 조개껍질을 타느라 자연히 녹아든 삶의 녹이었음을 알았다.
 
요즘 따라 작은 아이의 얼굴에서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 자주 오버 랩 된다. 자신의 일신만을 생각하며 뜬구름 쫓던 아이가 결혼을 하고 식구가 불어나니 한결 진중해진 이면에 불안함과 초조함 깃들어 있다. 늘 부모의 보호 속에 있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딸린 가족을 책임져야 하니 그 짓눌림은 상상 이상이리라. 아버지는 완고한 성정으로 가장의 힘겨움을 위장하셨지만 아이는 그 경지까지 아직 미치지 못했나보다.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심정을 이해한다더니 아이가 일가를 이루고 나니 이제야 대가족을 이끄느라 노심초사 하신 아버지의 고뇌가 가슴에 와 닿는다. 
시인 서정주님은 그의 시 ‘석류꽃’에서 ‘다홍치마 입고 영원으로 시집가는 꽃’이라 했고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시 ‘석류’에서 ‘영혼의 숨겨진 비밀을 보았노라’고 했다. 거장들의 시선에서는 아름다움의 극치, 내밀함의 극치로 비춰진 석류가 젊은 가장의 손에서는 생활고를 해결하는 고마운 소재로 자주 애용되었으며 나에게는 소박한 동심과 젊은 아버지를 만나는 산물이기도 하다. 
석류나무 사이사이로 송골송골 매달린 아이들의 모습이 어제처럼 가깝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칼럼] 감자를 고를 때와 사람을 쓸 때

● 칼럼 2013. 3. 30. 21:32 Posted by SisaHan
배우 김혜수씨가 석사학위를 반납했다. 석사논문이 표절 시비에 휘말리자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쿨하게 반납 결정을 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혜수씨가 석사학위를 가진 배우인지 몰랐다.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나 섹시함에 매력을 느꼈었다. 두말없이 사과하고 석사학위를 내던진 김혜수씨는 역시 멋있는 점이 있구나 싶었다.
표절 논문으로 학위를 주는 것과 관련해 제일 부끄러워할 사람은 김혜수씨보다는 그의 지도교수이고 그가 다녔던 대학이다. 오래된 일이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미술전인 국전에서 대상을 받은 화가의 작품이 표절로 드러나면서 제일 먼저 나온 이야기는 심사위원의 자질 문제였다. 여러 가지 변명과 불가피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들은 망신을 당했고 다시는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다. 국전의 권위도 땅에 떨어졌다. 글 쓰는 사람이나 학자, 예술가들은 표절을 도둑질보다 더 창피한 일로 여긴다. 심사를 잘못했어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대학의 박사논문이나 석사논문이 철저한 검증을 받지 않고 있다는 시비가 인 것은 오래되었다. 표절 시비가 나오면 본인의 잘못으로 돌릴 뿐 어느 대학도 어느 지도교수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제일 부끄러워해야 할 집단이면서도 학위 반납을 받고 조용히 입 닫고 있는 게 대학이다. 실제로는 논문이 중요하지 않고 그 사람의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에 논문의 내용은 아무래도 좋았는지 모른다. 논문 심사가 까다로운 교수는 학생들이 기피하니까 대학 쪽이 적당히 심사하라고 지도교수에게 종용했을 수도 있다.
대학은 이제 아카데미즘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다. 학문적 권위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대학진학률이 80%를 넘는 시대에 대학 장사는 한계에 이르렀다. 지금은 석사, 박사 장사를 한다. 유명인사를 장학금을 주어 유치하고 대학 홍보에 이용한다. 대중의 스타인 운동선수나 연예인 유치에 사활을 건다. 전문적 식견과 경험이 필요한 학문이나 대중문화 종사자들에게 학위의 급에 따라 강사료를 책정하는 것도 대학의 또 다른 학위 장사라 볼 수 있다.
 
줄줄이 낙마하는 대통령의 첫 인사를 보면서 국민들은 정신줄을 놓을 지경이다. 낙마 이유도 가지가지다. 측근에선 특별히 지금 정권에 들어서 유난히 까다롭게 검증한다는 원망의 말도 나온다.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란 생각인지 자체 인사 시스템을 바꿀 생각은 없고 검증을 강화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이 모든 낙마와 자진사퇴 사태에 대해 정작 제일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대통령이다. 수첩에 꼬박꼬박 필요한 인사를 적어놓았다는 것은 흉이 될 일은 아니다. 대통령이 될 때에 대비해 준비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수십년 동안 대통령의 꿈을 키웠으니까 적어도 섀도 캐비닛(예비내각) 정도의 구상은 그 수첩에 적혀 있을 것이고 따라서 준비된 대통령이 아닐까 하는 기대로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마저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대통령병이 있었을 뿐 대통령이 되어서 무엇을 할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 하고 한탄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시장에서 감자를 사면서 냄새를 맡는 사진이 화제에 올랐다. 생선이면 몰라도 감자를 살 때는 어느 누구도 냄새를 맡지 않는다. 싹이 나왔는지 썩었는지 햇감자인지 묵은 감자인지를 용도에 따라 살핀다. 감자를 살 때 생선을 살 때 딸기를 살 때 고기를 살 때 점검해야 할 부분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대통령으로서의 흠결은 아니다. 시장을 본 적이 없거나 음식을 해본 적이 없구나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람을 쓸 때는 다르다. 화려한 스펙 뒤에 감춰진 내용을 봐야 하는 것이다. 썩었는지 온갖 비리의 싹이 무성한지 총체적인 검증을 하게 하고 추천한 인사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주지시켰어야 한다. 낙마나 자진사퇴로 끝날 일이 아니라 사후에도 법적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대통령의 첫 인사가 온갖 잡음을 일으키고 국민들을 창피하게 만든 책임은 대통령이 져야 한다. 온갖 종류의 껄렁한 인생을 살아온 것으로 판명된 인사들을 보면서 국민들은 그들을 조롱하기에 앞서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창피하다. 국민들을 부끄럽게 만들어 놓고 그 인사권자인 대통령은 책임이 없을 뿐 아니라 부끄럽지도 않다는 게 말이 되는가. 

< 김선주 -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