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왜 성공한 대통령은 없을까

● 칼럼 2013. 4. 16. 13:59 Posted by SisaHan
성급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이대로 가면 박근혜 대통령은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박 대통령이 ‘내 갈 길 내가 알아서 간다’는 불통 대통령이어서만이 아니다. 비리로 얼룩진 비(B)급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하고, 대선 공신들에게 전리품 나눠주듯 낙하산 인사를 자행해서만도 아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우리의 정치사회적 시스템 자체가 성공한 대통령이 나오기 어렵게 돼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성패는 사회 통합을 얼마나 잘 이뤄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사실상 무소불위의 ‘제왕적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우리의 정치사회적 환경은 구조적으로 사회 통합을 어렵게 하고 있다. 사회 통합을 이루려면 타협과 양보가 필수적인데 승자 독식형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정치세력 간 대화와 타협의 유인이 별로 없다. 선거 과정에서 야당을 국정 파트너로 삼겠다고 한 박 대통령도 한두번 그런 몸짓을 할지 모르지만 굳이 계속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승자 독식형 민주주의에 따라 모든 걸 잃은 야당은 다음 선거에서의 ‘대권’ 쟁취를 위해 투사형 정당이 돼 가고, 이로 인해 일상화된 정치적 갈등은 사회 통합의 장애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한 표라도 더 얻으면 승자가 되는 현행 선거제도는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이익을 대변할 다양한 소수 정당의 형성을 가로막아 결과적으로 사회 통합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영남패권주의가 굳어진 현실에서 지역 간 통합은 더욱 요원하다. 사회 통합을 이루는 성공한 대통령이 나오기 힘든 구조인 셈이다.
취약한 정당구조는 대통령의 실패를 부추긴다. 우리나라 정당은 이념정당이라기보다 대통령 지원 부대 성격이 강하다. 현재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은 특히 그렇다. 만약 새누리당이 분명한 정책 방향과 지도력을 갖고 있다면 박 대통령의 일탈을 견제하고, 성공한 대통령이 되도록 이끌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야당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이념과 정책을 명확히 하고 이를 토대로 지지 세력을 결집해가기보다는 당내 권력 싸움에다 대권 쟁취 준비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되면 설사 정권을 잡더라도 실패할 대통령을 한 명 더 늘릴 뿐이다.
 
과도하게 비대해진 관료집단도 대통령의 성공을 돕기보다는 실패 쪽으로 이끌 가능성이 크다. 관료집단은 이미 부처 이기주의와 엘리트주의로 똘똘 뭉친 공룡이 돼 버렸다. 정권 초기야 대통령과 측근들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120%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역대 정권은 이를 우려해 정권 초기에는 관료집단의 득세를 경계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초기부터 관료집단에 둘러싸여 있다. 박 대통령이야 관료집단을 자기 의도대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겠지만 그도 실패한 역대 대통령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선 박 대통령에게 이리저리하면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조언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잘못된 방향으로 갈 경우 혹독한 비판과 조언은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그를 성공의 길로 이끌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역대 대통령들에게도 집권 초기 숱한 조언과 충고와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지내놓고 보면 거의 효과가 없었다. 대통령 자신이 이런 조언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도 그랬겠지만 구조적으로 대통령이 성공할 수 없는 정치경제적 환경 탓이 더 컸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성공한 대통령을 갖기 위해서는 대통령 개인에 대한 비판과 조언을 넘어 성공한 대통령이 나올 수 있는 정치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의 출발은 승자 독식형 민주주의 제도 개혁, 정책과 이념에 따라 운영되는 정당 건설, 관료집단의 조직이기주의 타파 등이 될 것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이런 개혁 없이 ‘제왕적 대통령’만 아무리 비판한다고 크게 달라질 게 없다. 우리의 정치사회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대한민국 구조개혁위원회’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 정석구 -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 실장 >


[1500자 칼럼] 마음의 소리

● 칼럼 2013. 4. 7. 17:17 Posted by SisaHan
근래에 새로운 재밋거리에 빠졌다. 오디오가 먹통이 된 고물차 덕분이긴 하지만 운전 중 졸음을 쫓는 데는 묘책이다 싶어 시작한 놀이다. 혼자 놀음이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재미도 있고 의미도 가져 보자는 생각에 몇 가지 유형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예를 들면 꿈을 꾼 다음날은 꿈속에서 본 것들을 가지고 노는 식이다. ‘피라미. 송사리. 누치. 쏘가리. 모래무지. 각시붕어. 납지리. 가물치. 메기. 은어. 미꾸라지. 퉁가리. 뱀장어. 꺽지. 끄리. 빠가사리. 버들치. 버들붕어~’. 꿈속이긴 했지만 양지말* 개울의 한여름은 여전히 드넓고 뜨겁고 신났다. 그 곳에서 만나던 조무래기 내 동무들의 이름은 ‘종호. 정권. 승수. 은실. 연영. 영신…’. 서울서 전학을 와서 학교 근처 농장에 살던 여자애 이름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잡아서 병에 담기 무섭게 발그레 물들던 버들붕어 지느러미 같던 그 아이의 볼빛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 날은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섭게 민물고기 이름들을 챙겼고, 종일 혼자 헤엄치며 외치며 놀았다. ‘피라미야. 송살아. 꺽지야. 납질아. 은어야. 버들아~’.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엔 깜박이등 재깍거림을 따라 불러보기도 하고, 핸들을 두드리는 손톱 소리 사이로 이름들을 던져 넣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닿곤 했다.

날이 가면서 사람이 짓는 목소리의 경이로움에 빠져들고 있다. 같은 단어지만 발성 호흡의 농담을 조금 바꾸거나 이어지는 단어의 간격만 살짝 건드려도 얼마나 다르고 어찌나 새롭게 다가오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처음 스치는 단어를 붙잡고 그날의 소리 행렬을 정하는 게 시작이 되었다. 이건 뭐 못 말리는 자기도취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굳이 명분을 찾자면 살아 움직이는 하루가 그대로 시가 되길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랄까? “시의 행은 숨결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쓰는 사람의, 쓰고 있는 순간의 숨결에서부터 생산된다”는 Charles Olson의 말을 떠올려 본다. 좁은 차 안에서 이뤄지는 소리의 행렬이야 말로 시적 에너지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완벽한 구조인 셈이다. 이른 바 시를 짓는 마음과 듣는 마음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

곧 봄맞이 시낭송 행사가 꽃불처럼 번질 때가 되었다. 모국의 상황이지만 10여 년 전부터 시를 낭송하고 즐기는 모임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반가우면서도 내심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것은 토론토 우리 사는 마을에선 통 그런 소식을 접할 수가 없어서이다. 이왕에 나온 말이니 좀 덧붙이자면 시낭송(詩朗誦)이란 밝을 낭, 욀 송 즉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외운다’는 의미로 낭송문학이라는 장르에 속하는 별개의 문학예술이며 적극적인 문학 작품 감상 활동이다. 다양한 표현 매체를 활용한 개성 있고 독특한 시낭송은 새로운 예술적 성취감을 줄 수 있는 퍼모먼스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 혹 그런 시낭송의 묘미를 느끼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당신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소리 짓기를 시도해 보길 권한다. 가령 녹록하지 않은 이민 삶을 사느라 본의 아니게 목석간장의 부부가 되어간다면, 지금이라도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의 이름을 연이어 30번쯤 반복해서 불러보는 거다. 맑은 아침엔 가볍고 힘찬 숨으로, 힘들고 지친 퇴근길엔 낮고 느린 호흡으로, 그냥 그 순간 당신의 마음이 빚어내는 숨결로 불러 보라. 부르는 당신의 숨소리가 그 사람만을 위한 이 세상 하나 밖에 없는 감동 어린 시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당신이 아름답다.
(※ 양지말* =경기도 안양의 지역명칭)

< 김준태 - 시인, ‘시.6.토론토’동인 ‘시와 시론’으로 등단 >
펜클럽·한국신시학 회원 / 허균 문학상 수상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미국 경제를 추적해온 경제학자들과 애널리스트들은 나쁜 기억력 때문에 고통을 겪을 것이다. 그들은 최근 몇달치 통계에 기초해 추론하는 일을 반복한다. 과거의 성장 패턴이나 공공정책이 끼칠 수 있는 영향은 무시해 버린다. 
최근 경기가 회복중이고 이런 성장을 가속화하기 위해 연방정부가 양적 완화 정책을 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나돌고 있다. 이런 낙관적 평가는 방향을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이다. 
낙관론은 지난 2월 23만6000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졌다는 보고에 근거하고 있다. 애초 경제학자들은 약 17만개의 일자리 창출을 예측했다. 기대치보다 높은 이런 수치는 분명 좋은 뉴스지만, 그 맥락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2012년 2월엔 27만1000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2011년 1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월별 일자리 창출 평균치는 27만2000개였다. 이런 수치는 최근 3개월 동안의 월평균 일자리 증가 수 19만1000개와도 비교된다.
 
당시에도 일자리 수가 급증하는 것을 보고 많은 경제학자들은 경기 회복의 열기가 모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낙관론은 곧 비관론에 자리를 내줬다. 2012년 봄이 되자 새로 만들어진 일자리의 수는 월 10만개 정도로 떨어졌다. 
2011년 말부터 2012년 초에 나타난 일자리 증가는 비정상적으로 따뜻한 겨울 날씨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겨울에는 눈보라와 극심한 추위로 인해 미국 북동부와 중서부의 대부분 지역에서 경제활동이 며칠 동안 중단된다. 건설공사는 연기되고 식당과 가게는 문을 닫는다. 이 기간엔 일부만 고용될 뿐이다. 
그런데 당시의 겨울 날씨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이 일자리가 비교적 많이 늘어난 이유다. 또한 그해 봄에 일자리 증가가 적어 보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1월과 2월에 직원을 많이 고용한 기업들은 3월과 4월에 많은 인력을 고용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미래의 채용을 앞당겨 한 것이다. ‘겨울의 강력한 고용’은 ‘봄의 약한 고용’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올해에도 비슷한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예측치보다 높은 2월의 고용지수는 따뜻했던 겨울 날씨 때문에 나타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근본적 정책 변화의 근거가 되기에는 충분치 않다.
 
저변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미국 경제의 취약점이 드러난다. 2012년 하반기 동안, 경제는 단지 연간 1.6% 비율로 성장했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급여세 감면 중단 조처로 인해, 노동자의 주머니로부터 연간 약 1100억달러(국내총생산의 0.7%)가 (세금으로)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올해 연방 예산에서 80억달러(국내총생산의 0.5%)를 삭감시킬 ‘시퀘스터’ 조처도 성장을 둔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 반대편에서 성장을 강화하는 요소들은 주택시장의 지속적 강세와 최근 도약을 준비하는 주식시장 정도다. 주택시장의 성장은 경기부양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거품경제의 붕괴로 인해 국내총생산에서 주택 건설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6%에서 2% 이하로 떨어졌다. 현재 주택부문 주식의 가치는 거품경제가 정점에 이른 시기와 비교해 약 8조달러 낮다. 이런 수준으로는 거품경제 시기에 우리가 보았던 정도의 소비가 생겨나진 않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진지한 분석에 기초해 2013년에도 저성장이 계속될 것이라는 현실을 알아야 한다. 낙관주의자들은 오늘의 태양을 즐기겠지만, 통계자료는 그들을 곧 지구로 끌어내릴 것이다. 

< 딘 베이커 - 미국 경제정책 연구센터 공동소장 >


창조경제론은 박근혜 정부의 핵심 국정철학이다. 창조경제를 선도해 나갈 부처로 미래창조과학부도 야심 차게 신설했다. 하지만 ‘창조경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르면 청와대의 어느 누구도 똑 부러지게 설명하는 사람이 없다. ‘민간부문의 창의성과 자율적 참여를 바탕으로 과학기술과 문화, 산업을 융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꾸는 것’ 따위의 추상적이고 교과서적인 설명만 나올 뿐이다. 피부에 와닿게 개념을 설명하는 사람도, 구체적인 전략과 실천 방안을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도 없다.
 
창조경제 개념의 모호성에 대한 지적은 다른 곳도 아닌 여당인 새누리당에서부터 먼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난달 30일 열린 당정청 회의에서는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장과 정무위원장 등 창조경제와 직접 관련된 상임위원장들마저 “나도 창조경제가 뭔지 모르겠다” “내가 알아야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데 설명이 안 된다”는 등의 쓴소리를 토해냈다. 정부 정책을 뒷받침해야 할 여당이 대통령의 핵심적 국정철학의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국민은 웃어야 좋을지 울어야 좋을지 모를 형편이다. 정부조직 개편안 협상 과정에서 야당을 향해 “창조경제 실현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삿대질을 했던 새누리당이 이제 와서 창조경제 개념을 모른다고 실토한 것도 한편의 코미디다. 상가에 와서 밤새 운 뒤 아침에 누가 죽었느냐고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가 창조경제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어제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최 후보자는 창조경제에 대한 잇따른 질문을 받고 “그동안의 추격형 경제를 선도형 경제로 탈바꿈하자는 것”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이 다른 산업과 융합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새롭게 성장동력과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 등의 원론적 답변을 하는 데 그쳤다. 창조경제의 견인차 노릇을 하겠다는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가 이 정도라면 창조경제의 앞날이 참으로 걱정스럽다.
서병수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창조경제의 개념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 철학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라고 규정하고 나선 것은 더욱 실소를 자아낸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대통령을 향한 이런 아부성 발언에나 열을 올리고 있으니 여당이 계속 청와대 거수기 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정부여당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뜬구름 잡는 식의 개념 설명이나 지엽말단적인 아이디어 제시가 아니다. 이른 시일 안에 창조경제의 정확한 개념, 구체적인 실천 전략과 종합적인 실행계획을 선보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