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양적완화 축소 계획’ 발표가 단기적으로는 시장에 충격을 주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만큼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지나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경기부양을 위해 돈을 풀었던 정책을 거둬들인다는 것은 경기가 살아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기적으로 미국 경제가 살아나면 우리에게도 득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버냉키의 양적완화 축소 발언은 앞으로 세계 금융시장의 큰 흐름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돈 풀기로 경기부양을 하는 시대는 끝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정책 변화가 과연 실현될 수 있을지, 또 그럴 경우 세계 경제와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에 대해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다. 어제 열린 긴급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정부가 원론적인 대응책만 내놓은 것은 이런 불안감을 더한다. 정부는 앞으로의 상황 변화에 대비해 더욱 정교하고 현실성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명박 정부 이후 지속되고 있는 경기 부진이다. ‘747’ 공약을 내걸고 출범했던 이명박 정부 시절의 연평균 성장률은 2.9%였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그 추이는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계속된 경기 침체로 중견기업들이 잇달아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하강세가 더 가팔라지고 있다. 이런데도 ‘버냉키 충격’은 일시적이니 큰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안이한 인식을 갖고 있다면 문제다. 지금 우리 경제는 “기초체력 양호” 운운하고 있을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칼럼] 이명박보다도 못한…

● 칼럼 2013. 7. 1. 12:30 Posted by SisaHan
‘이명박근혜’란 말이 있다. 박근혜가 아무리 이명박과의 차별성을 내세워도 결국 한몸이라는 뜻일 게다.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런 기대가 이렇게 일찍, 이렇게 철저히 무너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실정은 민주주의 훼손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되는 ‘헌법 제1조’라는 노래가 이명박 정부 초기 촛불시위 때 유난히 즐겨 불렸던 건 당시의 민주주의 훼손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방증한다.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훼손은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한 국기문란 범죄다.
더 큰 문제는 이에 대처하는 박 대통령의 자세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 댓글 사건’이 불거졌을 때만 해도 그 실체가 불분명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국정원 여성 인권” 발언도 있을 법한 일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검찰은 최근 ‘국정원이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조직적으로 선거에 불법 개입한 사건’이라는 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이쯤 됐으면 박 대통령은 대선 당시 발언을 사과하고, 수사가 미진한 부분에 대한 국정조사 요구를 받아들이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태도는 어떤가.
 
그는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이 공개되자마자 국정원은 기다렸다는 듯 ‘정상회담 대화록’을 전격 공개했다. 본격적인 물타기에 나선 것이다. 국정원이 ‘법대로’ 알아서 했다는 말은 그만하자.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이 대통령 승인 없이 대화록을 공개했다면 그건 대통령이 직무를 포기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같다. 국가권력기구를 사조직처럼 운영했던 이명박 정부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자행한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국익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며 국정원 국기문란 사건을 물타기 하려 하고 있다. 민주주의 훼손이란 측면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보다 더 사악한 정권이다. 촛불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건 당연하다.
남북관계는 또 어떤가.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부터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며 남북관계를 파탄 일보 직전까지 끌고 왔다. 그래도 최소한의 관계는 유지했다. 천안함 사태가 일어난 와중에도 개성공단 가동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대북 원칙을 내세우며 북한을 압박했다. 그 내용을 어떻게 설명하든 ‘적당히 양보하고 타협하던’ 기존의 방식으로는 북한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개성공단은 사실상 폐쇄됐고, 모처럼 성사될 것처럼 보였던 남북 당국자 회담도 격이 맞느니 어쩌니 하는 곁다리를 가지고 실랑이하다 무산됐다. 앞으로 박 대통령이 북한의 변화를 얼마나 이끌어낼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지금까지는 남북관계를 파탄 낸 대통령으로 낙인찍혀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나라살림 꾸려가는 것도 별로 나을 게 없다. 친기업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는 고환율, 감세 등 기업 지원에 온 힘을 쏟았다. ‘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살고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단순 논리를 앞세웠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성장률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비아냥댔던 노무현 정부의 4.3%보다 훨씬 못한 2.9%에 그쳤다. ‘1 대 99’ 논쟁에서 보듯 사회 양극화는 극에 달했다. 경제민주화와 창조경제를 내건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는 이명박 정부보다 한 단계 진전된 것이긴 하다. 문제는 실천 여부다. 한쪽으로는 경제민주화를 외치면서 다른 쪽에서는 입법 속도를 조절하고 기업들 사기를 꺾지 말라고 을러댄다. ‘국정원 물타기’로 국회가 공전하면 경제민주화 입법 무산이라는 어부지리를 덤으로 챙길지도 모르겠다. 창조경제도 그 의미를 놓고 갑론을박하면서 배가 산으로 가는 양상을 띠고 있다. 줏대 없는 경제관료들은 그들 선배가 실패한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며 권력 눈치보기에 바쁘다.
박근혜 정부 출범 넉 달이 됐다. 겨우 넉 달 만에 ‘이명박근혜’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이명박 정부 5년의 실정을 거의 완벽하게 재연했다. 그것도 훨씬 더 악화된 모습으로.

< 정석구 -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 실장 >


[1500자 칼럼] 졸업 시즌에 갖는 회한

● 칼럼 2013. 6. 22. 17:48 Posted by SisaHan
장대 비 속에서 초여름을 맞는다. 싱그러운 계절과 달리 오가는 행인들의 품새는 다소 느슨해져 보인다.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서서히 이완되는 느낌이랄까. 때문인지 거리의 차량들도 차츰 줄어드는 듯 하고 팍팍하던 생활권이 헐렁해져 옴을 느낀다. 아이들의 찰진 웃음을 싣고 도심을 빠져 나가는 이들은 가족끼리 장거리 여행길에 오르거나, 호숫가 휴양지에서 도약을 꿈꾸다 여름 끝머리쯤 다시 모여들 것이다. 학생들의 학제에 맞춰 돌아가는 사회 구조가 신선하면서 부럽기도 하고 때론 시류에 편승 못해 안타깝기도 하다. 이제나 저제나 생업에 발이 묶여 온가족 함께 휴가를 떠나기는커녕 꼭 참가해야 할 중요한 자리마저 나서지 못해 발을 구를 때가 많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지만 늘 이맘때면 떠오르는 서글픈 기억이 하나 있다.
 
큰아이가 대학 신입생이 되어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그의 모교로 부터 졸업식 초대장을 받았다. 구월 어느 날 밤이라는 날짜를 확인하고 나서야 고등학교 졸업식을 건너뛰었다는 생각이 났다. 보통 유월 하순경에 치러지는 졸업식이 몇 달 뒤로 연기된 것도 그렇고 이미 대학생이 되었는데 새삼스레 고교 졸업식을 한다는 것도 의아했다. 어쨌건 온 가족이 참석하여 축하를 해야 했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은 게 문제였다. 며칠을 두고 고심하고 있는데, 전후 사정을 고려한 아이가 혼자 참석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섭섭함 뒤로 장부의 기상이 엿보여 다소 위로가 되었다.
그날 밤, ‘걱정하지 말라’며 당당하게 집을 나섰던 아이가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예식이 생각보다 성대했고 감명 깊게 치러졌다며 대학 졸업식 땐 꼭 함께 하기를 희망했다. 애써 담담한 척하며 경과를 보고하는 녀석을 보며 무리를 해서라도 참석하지 못했음이 후회되었다.
 
2년 후, 둘째의 졸업식 날이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함은 그때와 별 차이가 없었지만 큰 아이의 간곡한 권유와,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이의 고교 졸업식을 놓치고 싶지않아 혼자서 참석했다. 학부형석에 홀로 앉은 나는 쳐지는 어깨를 애써 세우며 식전의 실내를 돌아보았다. 요란하지 않으면서 진정성이 묻어나는 치장이며, 1, 2층 넓은 객석에 빼곡히 들어찬 축하객들의 여유로움이 눈에 들어왔다. 형식보다 졸업생의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하기 위한 분위기가 읽혀져 좋았다. 
잠시 후, 객석의 술렁거림과 함께 백파이프의 선율에 따라 하얀 가운을 걸친 교사들이 손을 흔들며 입장했고 뒤를 이어 청색 물결을 이룬 졸업생들이 자유롭게 들어섰다. 모든 축하객이 열렬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운집한 군중 속에서 용케 어미를 찾아내어 손을 흔드는 녀석, 비단 우리 모자뿐이 아니었으리라.
 
그 날은 신나는 둘째 옆에 쓸쓸한 표정의 큰아이가 내내 어른거렸다. 단상 위에서 졸업장을 받을 때, 우수 학생이 되어 상장을 받을 때, 꽃다발을 안고 폼 나게 사진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을 지켜 봐 주고, 시시때때 기쁨을 교감할 수 있는 가족의 부재가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그 자리를 경험하기 전에는 큰 아이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한 어미였다. 후회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만 유독 이 일은 미성년의 아이에게 빚 진 마음이 되어 떠나질 않는다. 
갓 피어오른 장미꽃 묶음을 기억 저편의 녀석에게 안겨주고 싶은 유월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칼럼] ‘소셜 픽션’이라는 화두

● 칼럼 2013. 6. 22. 17:42 Posted by SisaHan
이제 너무나 유명해진 세계적 공연기업 ‘태양의 서커스’는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시의 생미셸 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 이 서커스단이 오게 된 사연이 흥미롭다. 
1980년대 후반 생미셸 지역은 환경적·사회적 문제로 가득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수십년 동안 쓰레기를 매립해 북미 최대의 쓰레기매립장이 되어 있었다. 공기는 매립장에서 나오는 가스로 오염되어 있었다. 일자리는 사라지고 주민들은 하나둘 떠나고 있었다. 지역주민의 40%가 저소득층으로 분류됐다. 
그런데 당시 몬트리올시와 지역주민들은 대담한 사회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 지역을 친환경 공원과 문화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쓰레기매립지를 친환경 공원과 문화도시로 변화시키겠다니, 어쩌면 황당한 상상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상상력이 이 지역을 밀고 가는 힘이 됐다. 이 상상력 앞에 민간기업인 ‘태양의 서커스’와 캐나다 중앙정부 및 퀘벡·몬트리올 지방정부가 모두 힘을 합쳤다. 경계를 무너뜨리고 각자 가진 것을 꺼내 기여하며 협업했다.
 
지금 태양의 서커스가 입주한 단지 ‘라 토후’도 이들이 함께 기여해 만들었다. 바로 쓰레기매립장 위에 세워진 곳이다. 이 단지에는 국립서커스학교, 서커스 공연장, 예술가 숙소, 태양의 서커스 본사뿐 아니라 매립 쓰레기를 에너지 등으로 전환하는 재활용센터 등이 함께 입주해 있다. 
성과도 눈부시다. 1997년 이곳에 입주한 태양의 서커스는 날개를 달아 세계로 발돋움하며 성장했다. 몬트리올은 세계 서커스의 중심지로 이름을 떨치게 됐고, 이 지역에 관광객과 예술가가 몰려들었다. 쓰레기매립장이던 이곳에 쓰레기로부터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환경기술이 접목됐다. 매립장은 차차 거대한 공원으로 변신하고 있다. 
현실적 제약조건을 넘어선 사회적 상상은 ‘비현실적’이거나 ‘모호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화는 늘 상상에서 시작된다. 
공상과학소설(사이언스픽션)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알베르 로비다가 1800년대 말에 낸 20세기 예측서들을 보자. 다수 채널을 가진 대형 텔레비전, 24시간 실시간 뉴스 채널, 홈쇼핑, 영상 전화기, 대륙간 항공, 인공 강우, 시험관 아기, 패스트푸드, 국립공원 시스템 등이 그의 책에 등장한다. 물론 이들은 당시에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먼저 상상력을 발휘한 뒤, 과학기술이 뒤따라가서 현실로 만들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함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창립자는 지난 4월 스콜월드포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상과학소설이 결국 과학을 움직였다. 먼저 상상해야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소셜픽션(social fiction)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한국 사회는 엄청나게 많고 풀기 어려운 문제들 앞에 서 있다. 동시에 각각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 해결 방법을 논의하자는 목소리도 많다. 지역 풀뿌리 단체도 많아졌고, 지자체도 고민이 깊어졌고,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도 커졌다. 많은 이들이 사회문제 해결 노력에 적극적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가 문제 해결 방법론에만 천착하다 공전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미시적 논쟁에 얽매이면 각자 속한 작은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복잡해지며 논의가 멈추기 쉽다. 궁극적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상상을 공유하지 않으면, 부딪쳤을 때 쉬이 주저앉게 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함마드 유누스의 말처럼 소셜픽션을 쓰는 것이다. 함께 쓰면 더 좋겠다. 그 픽션이 현실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자신이 속한 집단의 벽을 허물고 토론하는 데까지 가면 더 좋겠다. 몬트리올에서처럼 말이다. 

< 이원재 - 경제 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