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소셜 픽션’이라는 화두

● 칼럼 2013. 6. 22. 17:42 Posted by SisaHan
이제 너무나 유명해진 세계적 공연기업 ‘태양의 서커스’는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시의 생미셸 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 이 서커스단이 오게 된 사연이 흥미롭다. 
1980년대 후반 생미셸 지역은 환경적·사회적 문제로 가득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수십년 동안 쓰레기를 매립해 북미 최대의 쓰레기매립장이 되어 있었다. 공기는 매립장에서 나오는 가스로 오염되어 있었다. 일자리는 사라지고 주민들은 하나둘 떠나고 있었다. 지역주민의 40%가 저소득층으로 분류됐다. 
그런데 당시 몬트리올시와 지역주민들은 대담한 사회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 지역을 친환경 공원과 문화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쓰레기매립지를 친환경 공원과 문화도시로 변화시키겠다니, 어쩌면 황당한 상상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상상력이 이 지역을 밀고 가는 힘이 됐다. 이 상상력 앞에 민간기업인 ‘태양의 서커스’와 캐나다 중앙정부 및 퀘벡·몬트리올 지방정부가 모두 힘을 합쳤다. 경계를 무너뜨리고 각자 가진 것을 꺼내 기여하며 협업했다.
 
지금 태양의 서커스가 입주한 단지 ‘라 토후’도 이들이 함께 기여해 만들었다. 바로 쓰레기매립장 위에 세워진 곳이다. 이 단지에는 국립서커스학교, 서커스 공연장, 예술가 숙소, 태양의 서커스 본사뿐 아니라 매립 쓰레기를 에너지 등으로 전환하는 재활용센터 등이 함께 입주해 있다. 
성과도 눈부시다. 1997년 이곳에 입주한 태양의 서커스는 날개를 달아 세계로 발돋움하며 성장했다. 몬트리올은 세계 서커스의 중심지로 이름을 떨치게 됐고, 이 지역에 관광객과 예술가가 몰려들었다. 쓰레기매립장이던 이곳에 쓰레기로부터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환경기술이 접목됐다. 매립장은 차차 거대한 공원으로 변신하고 있다. 
현실적 제약조건을 넘어선 사회적 상상은 ‘비현실적’이거나 ‘모호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변화는 늘 상상에서 시작된다. 
공상과학소설(사이언스픽션)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알베르 로비다가 1800년대 말에 낸 20세기 예측서들을 보자. 다수 채널을 가진 대형 텔레비전, 24시간 실시간 뉴스 채널, 홈쇼핑, 영상 전화기, 대륙간 항공, 인공 강우, 시험관 아기, 패스트푸드, 국립공원 시스템 등이 그의 책에 등장한다. 물론 이들은 당시에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먼저 상상력을 발휘한 뒤, 과학기술이 뒤따라가서 현실로 만들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함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창립자는 지난 4월 스콜월드포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상과학소설이 결국 과학을 움직였다. 먼저 상상해야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소셜픽션(social fiction)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한국 사회는 엄청나게 많고 풀기 어려운 문제들 앞에 서 있다. 동시에 각각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 해결 방법을 논의하자는 목소리도 많다. 지역 풀뿌리 단체도 많아졌고, 지자체도 고민이 깊어졌고,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도 커졌다. 많은 이들이 사회문제 해결 노력에 적극적이다. 
그런데 이런 논의가 문제 해결 방법론에만 천착하다 공전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미시적 논쟁에 얽매이면 각자 속한 작은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복잡해지며 논의가 멈추기 쉽다. 궁극적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상상을 공유하지 않으면, 부딪쳤을 때 쉬이 주저앉게 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함마드 유누스의 말처럼 소셜픽션을 쓰는 것이다. 함께 쓰면 더 좋겠다. 그 픽션이 현실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자신이 속한 집단의 벽을 허물고 토론하는 데까지 가면 더 좋겠다. 몬트리올에서처럼 말이다. 

< 이원재 - 경제 평론가 >

 
이명박 정권의 국가정보원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무능하면서도 정치화된 정보기관’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징후 포착 실패 등 안보 문제에서의 잇따른 헛발질, 국제적 망신거리가 된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 침입 사건 등 실수와 판단착오의 연속이었다. 
그러면서도 국내 정치정보 수집과 사찰, 선거 개입 등 정권의 보위대 구실에는 발벗고 나섰다. 국정원의 18대 대선 개입 사건은 이런 점에서 국정원을 ‘유능하면서도 탈정치적인 선진 정보기관’으로 바꿔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일깨워준 사건이다. 
국정원 개혁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국가 최고지도자의 강력한 의지, 둘째는 국민적 공감대에 바탕을 둔 정치권의 세밀한 제도적 개선책 마련, 셋째는 주도면밀한 실행이다. 역대 정권이 국정원 개혁에 실패한 것은 이 세 가지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못한 탓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첫째 조건인 대통령의 개혁 의지부터 불투명한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과 관련된 공약을 제시하지 않았고, 평소에도 국정원에 대한 의견을 밝힌 바가 별로 없다. 이번 사건이 난 뒤에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창조경제 등 박 대통령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들과 비교해 보면 국정원 개혁에 실린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새누리당의 태도를 보면 더욱 놀랍다. “종북 세력의 활동에 맞서기 위한 사이버 공간의 정당한 활동” 등 ‘원세훈 대변인’을 자처하는 발언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국정원 개혁의 첫 단추는 국정원의 국기문란 행위에 대한 단호한 비판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정반대로 이를 비호하기 바쁘다. 국정원 개혁을 위한 제도적 개선책 마련은 고사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청와대 관계자는 어제 “이번 사건과 관계없이 새 정부가 들어서고 새 국정원장이 임명되면서 따로 개혁 방안을 발표할 필요도 없이 이미 개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정원의 개혁은 단순한 인사 물갈이나 조직 개편 정도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 정도의 시도는 역대 정권 출범 때마다 되풀이해 왔으나 매번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무산됐다. 
무엇보다 개혁의 청사진 하나 없이 개혁을 한다는 것부터가 난센스다. 게다가 남재준 신임 국정원장은 ‘좌파 정권 10년 동안 국정원이 이상하게 변질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국정원 환골탈태를 위한 외부 조건은 전례 없이 무르익었는데도 청와대와 여권, 국정원 수뇌부가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소년의 69%가 6.25 전쟁에 대해 북침이라고 응답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들어 교육현장에서의 역사왜곡 문제를 제기한 것을 두고 뒷말이 많다. 박 대통령은 지난 17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학생들의 약 70%가 6.25를 북침이라고 하는 것은 교육이 잘못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아이들의 기본 가치와 애국심을 흔들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신 분들의 희생을 왜곡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발언은 관련 사실을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채 나온 신중하지 못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여론조사는 최근 <서울신문>이 입시업체와 함께 진행한 조사였는데, 문제의 문항은 ‘한국전쟁은 남침인가, 북침인가?’로만 돼 있었다고 한다. 교육전문가들은 주어가 빠진 채 제시된 이 문항에서 북침이란 말이 북쪽이 침략을 했다는 것인지, 북쪽을 침략했다는 것인지 청소년들이 헷갈렸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이 조사는 입시업체가 청소년 회원들을 대상으로 메일을 보내 임의로 한 것이어서 여론조사 업체가 정교하게 설계한 설문으로 보기 어렵다.
지난 2004년 국가보훈처가 청소년 4000명을 대상으로 한 ‘청소년 호국·보훈의식 여론조사’에서는 남한이 북침을 했다고 답한 학생은 0.7%뿐이었다고 한다. 이 조사의 질문 내용은 ‘6.25 전쟁을 누가 일으켰느냐’는 것이었는데 학생들의 54.5%가 ‘북한’이라고 답했다. 박 대통령이 교육현장이 문제라고 했지만 우리 학교 어디에서도 6.25가 남한에 의한 북침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있다. 중·고교 역사교과서들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북한은 6.25 전쟁을 일으켰다’는 등의 정확한 표현이 기재돼 있다.
 
박 대통령은 문제가 된 설문조사를 근거로 그간 보수진영에서 제기해온 역사왜곡의 문제를 부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거가 되는 기초사실조차 불확실하다면 곤란하다. 대통령이 아무리 자기 입맛에 맞는 소재라고 해도 확인조차 되지 않은 내용을 들어 발언하기 시작하면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 대통령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천금처럼 무겁고 신중해야 한다.
대통령이 역사 문제를 두고 앞장서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것도 문제다. 박 대통령은 의원 시절 뉴라이트 교과서 출판기념회에 참석하는 등 보수적 역사관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해도 대통령이 특정 역사관에 경도돼 역사 문제까지 좌지우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 역사와 교육은 학자와 교사들에게 맡기는 것이 순리다.


[한마당] 한국, 과연 어떤 나라인가

● 칼럼 2013. 6. 22. 17:19 Posted by SisaHan
지금 드러나고 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나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선거개입 행태는 한국 사회에서 ‘최소한의 합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제기한다. 
이들의 행동은 물론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정부조직의 근간이라 할 국정원이나 경찰의 수장들이 보인 행동은 단순히 이들에 대한 처벌을 넘어서 한국 사회가 과연 어떤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인지, 드러나지 않는 공범은 누구인지, 이들을 처벌하고 나면 앞으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인지 등 여러 가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원세훈 전 원장의 드러난 발언들을 보면 그는 40여명의 국회의원을 종북좌파로 몰았고, 선거를 통해 당선된 현직 시장이 한나라당 소속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나라의 체제를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판단에 기초해서 국가의 핵심 인재여야 할 국정원 직원들에게 댓글이나 열심히 달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의 발언에 드러난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는 정보기관이 하지 말아야 할 선거개입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당시 한나라당 혹은 현 새누리당 소속 후보만 당선되어야 한다는 강한 정파적 편향에 입각해 공직을 수행했고, 무엇보다 민주주의 그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했다.
필자가 궁금한 것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공직에, 그것도 국정원이라는 최고 권력기관의 수장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나라인가 하는 점이다. 
대선 기간 중 문제가 된 국정원 여직원의 노트북에서 유력한 증거를 신속하게 찾아내고도 김용판 전 청장의 개입으로 진짜 증거를 폐기하고 가짜 증거를 만들어준 경찰의 분석관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억지로 만들어주어야 했던 가짜 증거가 대선을 이틀 앞두고 방송을 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그들의 심정 말이다.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민중의 지팡이라는 자긍심으로 버티는 수많은 경찰 공무원들에게 이것은 또 어떤 상처를 안겼을까. 다음번에 비슷한 사건이 터지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공정하고 적극적인 수사를 하려고 할까, 아니면 해봐야 안 될 게 뻔하니 알아서 길까. 
또다시 궁금해지는 것은 자신이 평생을 몸담았던 조직을 망가뜨려서라도 정권에 충성하고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사람이 수도 서울 경찰의 수장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나라인가 하는 점이다.
 
정파와 세대와 지역과 종교 따위에 상관없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동의할 수밖에 없는 강한 도덕적 의무를 느끼는 ‘최소한의 합의’는 무엇인가. 이것이 없으면 제2, 제3의 원세훈과 김용판 같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고위 공직에 오르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민주주의가 그 최소한의 합의였으면 좋겠지만, 이번에 드러났듯 국정원장을 4년씩이나 지낸 사람의 발언이나 서울 경찰의 수장이 보인 행태를 보면 민주주의는 아직까지 확고하게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 같다. 
인권이 그 최소한의 합의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린 학생들 때리지 말자는 학생인권조례에 어른들이 정색하고 반대하는 모습이나 특정 종교의 반대 때문에 차별금지법조차 만들어지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인권조차도 아직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것 같다. 
국정원 사건과 관련하여 대통령이 분명한 입장을 내놓아야 한다는 요구가 점점 강해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들이 위반한 ‘최소한의 합의’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언급도 포함되는 것이 옳다. 
정치권은 그 최소한의 합의를 치열하게 토론하고 궁극적으로는 헌법적 가치로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권을 경시하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운명을 맡기게 될 것이다.
 
<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