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의 대선 여론조작 및 정치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불구속 기소하기로 한 것은 청와대와 법무부의 정치논리에 검찰의 법논리가 졌다는 뜻이다. 일부에선 황교안 법무장관의 반대를 뚫고 선거법 위반죄를 관철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양이나, 그 정도 죄질의 사안에 구속영장 청구를 포기했다는 건 어떤 이유로도 이해하기 힘들다.
형사소송법 70조는 구속 여부를 판단할 때 사안의 중대성도 고려하도록 돼 있다. 정보기관을 동원해 선거에 개입하고 수사 내용을 축소·조작하려 한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제도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국기문란의 중대범죄에 해당한다. 이런 혐의를 적용해 기소하면서 영장 청구를 포기해놓고, 과연 어떤 피의자에게 구속영장을 떳떳하게 청구할 수 있을지 검찰은 자문해보기 바란다.
 
검찰이 의욕적으로 벌인 수사가 용두사미로 마무리될 위기에 처한 가장 큰 책임은 물론 황 장관에게 있다. 검찰 수사팀이 오랜 수사를 통해 내린 결론을 왜곡함으로써 검찰 수사의 독립성을 공개적으로 훼손한 꼴이 됐다. 엊그제 국회 대정부 질문에 나와서는 이 사건과 관련해 청와대와 협의한 적이 없고,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으나 이를 그대로 믿어줄 국민은 없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정기적으로 해온 ‘지시’ 내용과 심리정보단을 통한 정치댓글 활동 등은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음에도 선거법 적용에 반대한 황 장관의 애초 주장은 법논리에 따른 것으로 보기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를 의식한 과잉충성이 결국 기괴한 수사 결론을 만들어낸 셈이다. 지휘권 발동을 둘러싸고 그가 보여온 이중적 행태는 앞으로도 검찰에 상당한 부담을 주게 될 것이다. 수사지휘권 발동은 아니라면서 실제로는 검찰에 자기주장을 강요하는 위선적인 행동이 용인된다면 법무장관이 모든 정치적 사건에 관여할 수 있는 나쁜 관행이 만들어질 수 있다.
 
법무장관의 수사지휘권을 고려하더라도 검찰이 결국 불구속 기소에 동의한 것은 앞으로 ‘채동욱 체제’ 검찰의 행보에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기소 뒤 재판 과정에서 국정원과 경찰의 공작적 행태 실상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여야가 국정조사에 이미 합의한 만큼 사건이 왜곡되는 과정에서 청와대와 법무부가 어떤 구실을 했는지도 철저히 밝혀야 한다. 국민은 대통령을 포함해 어느 누구에게도 국기문란 범죄를 자의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한 일이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화, 컴퓨터, TV, 가전제품, 자동차, 장난감, 심지어는 데이팅 서비스와 의료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첨단 기술이 적용되지 않는 곳은 없다. 그런데 이 테크놀로지 시대의 부산물로 생겨난 것 중의 하나가 ‘순간 만족’(instant gratification) 이라는 것이다. 즉, 무언가를 원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그 욕구가 충족된다는 것. 예를 들어보자. 전화를 걸어야 한다면 집이나 공중전화 박스에 갈 필요가 없다. 호주머니나 핸드백 안에 휴대전화가 있으니까. 어떤 주제에 대해 리서치를 해야 한다면 굳이 도서관까지 가야만 하는 건 아니다. 노트북 컴퓨터나 태블릿, 심지어 휴대폰으로도 인터넷에 접속해서 바로 검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납부금을 내야 한다면 굳이 은행에 가지 않아도 된다. 온라인 뱅킹으로 해결하면 되니까.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 <순간 만족>의 시대. 그런데 문제는 이 <순간 만족>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것이냐 아니면 부정적인 것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순간 만족>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주로 무절제하고 충동적인 행동을 지칭하는 데 이 말을 사용한다. 비만으로 고민하면서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으면 즉시 달려가서 몇 번이라도 사먹는다든지, 형편에 맞지도 않게 값비싼 물건을 신용카드로 구입한다든지, 할 일을 안하고 노는 것에 열중한다든지 등등. 여기에 덧붙여지는 말이 ‘지연 만족’(delayed/deferred gratification) 이다. 이는 즉각적인 보상을 얻고자 하는 충동과 유혹을 피하고 나중에 받게 될 더 큰 보상을 위해 만족을 유보하는 것을 말한다. 부모님들이 즐겨 쓰는 표현들이지만 “할 일을 해놓고 나서 놀아야 된다”라든지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해야한다”라든지 “지금 열심히 일해야 나중에 인생을 즐길 수 있다”라는 등의 말들은 모두 같은 문맥에서 <순간 만족>을 비난하고 <지연 만족>을 권장하는 말들이다. 물론 이솝 우화에 나오는 <개미와 베짱이>를 빼놓을 수는 없다. 게다가 Walter Mischel의 유명한 <Standford marshmallow experiment>는 <지연 만족>이 장기적으로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연구함으로써 과학적인 측면에서 이쪽 진영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그렇다면 <순간 만족>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어떻게 말할까? <순간 만족>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정의에서 비롯된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순간 만족>은 게으름이나 이기심 또는 근시안적인 사고와 동의어가 아니다. <순간 만족>의 올바른 정의(definition)는 ‘지금 이 순간 인생을 향유하는 것’이다. 평생 일만하다가 병들어 죽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열심히 일한다고 왜 놀 시간을 만들지 못한다는 말인가? 평생 많은 돈을 모아놓고 한 푼도 써보지 못하고 죽는 오류를 범해서야 되겠는가?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하되, 오늘 나 자신을 위해 가끔은 쓸 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정작 가족생활과 인간관계에는 실패한 유명인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목표를 향해 결연한 의지로 돌진하되, 가끔은 그 목표와 상관없이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면 왜 안된다는 말인가? “All work and no play makes Jack a dull boy”라는 유명한 격언을 여기에 추가해 놓자.
필자의 해결책은 논리학에서 ‘황소의 두 개의 뿔 사이로 피하기’(go between the horns and deny that) 라고 부르는 방법이다. 필자는 이 두 가지의 입장이 서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릇된 이분법(false dichotomy)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용어의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이지 본질적으로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순간 만족>도 필요하고 <지연 만족>도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인생을 얼마나 온전히 즐기면서 가치있게 사느냐 하는 것이다.

< 노승문 - 시인, '시.6.토론토' 동인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한마당] 장물을 유산으로?

● 칼럼 2013. 6. 9. 19:27 Posted by SisaHan
얼마 전 여행길에 만난 가이드는 뜻밖에도 ‘거물’이었다. 그는 부친이 경찰 책임자였는데, 자신은 육사를 나와 특수훈련까지 받은 지휘관으로 영관급 ‘하나회’ 출신이라고 당당히 자신을 소개했다. 더욱 힘이 들어간 것은 5공 정권의 주역으로 ‘각하’를 지근거리에서 모셨고, 청와대에서 ‘영부인’의 부속실 현역 비서관으로 권력 뒤편에서 많은 ‘거사’를 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수없이 5공 청산이다 뭐다 해서 갑자기 잡혀가 감옥살이를 하는데 어느 날 불려나와 건네주는 여권만 받고 하루아침에 외국으로 쫓겨났다고 했다. 그래서 수십년 고국에도 못가고 이렇게 살아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설마 이런 여행길에 저런 거물 가이드를 만나다니… 동승한 여행객들 가운데는 재미있어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동키호테’ 를 만난 듯, 대놓고 싸울 수도 없으니 ‘화려 찬란한’ 자화자찬을 시달갑잖은 표정들로 그냥 두고 볼 수 밖에-. 그랬다, 그는 정말 동키호테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가이드들의 공통분모처럼 여겨지는 입담 좋은 것과 고객서비스를 따지자면 평균점을 받을 만 했다고 볼지 모르나, 여러 어른들 면전에서 ‘천방지축’인 언행에다, ‘그 시절’의 무용담을 무슨 훈장처럼 쉼없이 자랑스레 떠들어대니, 시대와 개념인식이 도통 현 시류와는 거리가 먼 5공을 맴도는 것이, 정말 가관이었다.
그런 그가 “시끄럽게 하는 놈들 다잡아다 5공 때 삼청교육대처럼…” 운운하는 말은 ‘국가평안’을 바라는 군인정신의 발로에서 나온 격한 농담이라고 치부한다 치자. ‘영부인’을 모시며 했었다는 ‘새벽 2시의 만찬 초대’ 어쩌구 하는 ‘재벌들 훌치기’ 작전담은, 살벌했던 그 시절의 권력과 돈에 썩어빠진 군사독재 권부의 치사한 뒤안길을 다시금 생생히 상기시켜 주었다. 그들이 그렇게 훌치기 수법으로 긁어모은 돈을 정당성 없는 권력유지를 위해 사방에 뿌려대고, 천문학적인 액수는 자기들 뱃속에 쳐 넣어 지금껏 그 구린내가 천지를 진동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부정한 권력과 방법으로 착복한 거금 가운데,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해 대법원이 부과한 추징금 총액은 2,205억원이다. 노태우 전대통령은 2,398억원을 부과받아 지금까지 231억원의 잔액을 남겨두고 있다. 반면 전두환은 지금까지 검찰의 징수에 532억원 만을 ‘빼앗기듯이’ 납부했을 뿐, 아직도 더 토해내야 할 잔액은 정확히 1,672억 2,651만 5,564원에 이른다. 그는 그럼에도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며 수년째 버텨 ‘29만원 대통령’으로 불린다. 당시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호화 골프를 즐기는가 하면 유명 음식점을 드나들면서도 나라에 돌려줄 돈은 땡전 한푼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시대를 휘젓고 리더쉽이 탁월했다는 ‘사나이’ 답지않게, 사실은 ‘천하의 졸장부’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이상하다. 
돈을 돌려주거나 갚으면 빌려간 것 혹은 납부이므로 불법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몰래 돈을 챙긴 것도 불법인데, 돌려주지도 않는다면 그건 분명히 도둑이고 사기범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틀림없는 국민의 돈 일텐데 꼭꼭 숨겨놓고는 ‘배 째라’라고 하면 도둑도 상도둑 아닌가. 
더구나 자식들에게 넘겨주고 시치미를 뗀다면 그 자손이 두고두고 뱃속 편히 잘 살까?. 대대로 ‘도둑의 장물’, ‘도둑집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고 살 터이니, 오욕을 유산으로 떠넘기는 참으로 가련한 배짱이다.
 
둘째 아들이 증여받은 돈 때문에 징역형을 산데 이어 장남도 버진 아일랜드에 유령회사를 만든 사실이 밝혀져 떠들썩하다. 뚜렷한 사업성공을 이룬 적도 없는데 천억대 재산가이고, 해외 조세회피처 유령회사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면 그 재산에서 아버지의 ‘도둑질 유산’의 냄새를 맡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오는 10월로 임박한 추징시효 종료를 앞두고 뿔난 시민과 언론의 은닉재산 찾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검찰도 추적에 팔을 걷어부쳐 귀추가 주목된다. 이제라도 도둑의 오명만은 벗어 던짐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참 군인이요, 대장부답지 아니할까?
 
< 김종천 편집인 >


[칼럼] 아버지가 있는 마을

● 칼럼 2013. 6. 9. 19:20 Posted by SisaHan
서울 도심부에 있는 작은 마을의 진화를 다룬 다큐멘터리 <춤추는 숲>이 상영중이다. 어린 소년이 뿌리가 드러난 작은 나무를 도닥거려주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남자도 참 아름다운 존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근대 자본주의 체제 최악의 시나리오는 공적 영역이 가정영역을 압도해 측은지심의 재생산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다. 공공영역이 아버지들을 독점하고 어머니들까지 포섭해, 마침내 개인의 가장 친밀하고 원초적인 호혜공간인 가정영역이 사라지게 되면 그 사회는 망하고 만다. 현재 한국 사회는 이 최악의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
 
아버지와 절반이 넘는 어머니들이 경제 생산 활동에 참여하며 숨가쁜 일터의 속도에 몸을 맡긴 채 자녀를 시장에 ‘외주’ 주어 키우고 있다. 그나마 바깥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전업주부들도 자녀의 명문대 입학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두고 달리게 되며 직장인들 못지않게 성과와 효율성에 집착하게 되었다. 가정이 남편의 투자와 아내의 정보력으로 운영되는 ‘주식회사’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가족이란 친밀한 관계를 키워 가는 곳이기에 아버지가 아무리 투자를 많이 한들 함께 나누는 시간을 내지 못하면 설 땅을 잃게 된다. 
투자하는 금액에 비례해서 경제적 동맹자로서 예우를 받기는 하겠지만 아내가 만들어낸 친밀한 ‘자궁가족’에 끼어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아버지들의 투자 능력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지 않은가? “주말부부가 되려면 3대가 공을 들여야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남편은 귀찮은 존재가 되었고 ‘기러기 가족’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성공적인 가족인 듯 간주되는 현실이다. 이를 간파한 영리한 남자들은 독신의 삶을 선택하고, 돈 잘 버는 중년의 가장은 가정에서 겉돌다 딸 또래 젊은 여성의 뒤를 밀어주는 원조교제형 연애에 빠져들기도 한다. 아버지 표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춤추는 숲>에는 표류하지 않는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어린이집 페인트칠을 하고 대안학교를 만드는 아버지들이다. 이들은 아기가 태어날 때 아내와 함께 진통을 겪으며 지켜보았고 아기 기저귀를 채우고 목욕을 시키고 이유식을 먹이며 아이와 깊은 정을 쌓아간 남자들이다. 이들은 아기를 안고 있을 때 밀려오는 사랑의 감정을 우주의 축복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아기가 도마뱀처럼 쏜살같이 기어다닐 때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아이가 원숭이처럼 어디건 올라가려고 발버둥칠 때 기어오를 나무가 되어주고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아이보다 더 자랑스러워했을 사람들이다. 이들은 아이들과 보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시간을 줄이고 부부가 가정의 소비를 줄여가기도 했다. 아이들과 보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직장을 옮기거나 동네 안에서 해볼 일거리를 만들어낸 아버지들도 있다. 
이들은 아이들의 주요 놀이터인 동네 숲이 훼손될 위기에 처하자 서슴없이 공사 현장에 텐트를 치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포클레인과 대치해 싸운다. 어처구니없는 싸움의 와중에 지역 정치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들은 부모 중 한명을 구의원에 출마시키기도 한다. 세상일이 힘으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러주려고 아버지들은 아이들과 산에 올라 숲을 지켜달라는 정성스런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노찾사’의 노래와 비틀스의 ‘렛 잇 비’, “냅둬요”를 부르는 100인 합창공연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아이들과 노래하는 유쾌한 모습에서 나는 아름다운 남자들을 본 것이다.
 
아버지들이 사랑과 존경을 받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아버지들은 더는 사악한 공공영역에 목매지 말고 아이들 편에 서서 선한 공공영역을 만들어내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숲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자란 아이는 잉여인간이나 좀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는 ‘폭력이 구조화된 학교’를 바꾸어내기 위해 마을을 ‘발견’할 때가 온 듯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골목길을 걸어서 학교까지 데려다 줄 수 있는 그날을 위해 가정과 공공의 경계에서 아버지들이 해야 할 일이 적지 않다. 우선 주민자치회관에서 <춤추는 숲>을 모여 보면 어떨까? 

< 조한혜정 -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