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탓 사전제작 영상 온라인 중계 …다채로운 기념행사 마련

위안부 문제연, 영어 웹진 '결' 개간…각종 역사자료 영어로 번역 공개

 

소녀상과 김학순 할머니= 지난해 8월14일 시민단체들이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자회견을 연 전북 전주 풍남문 광장에 김학순 할머니 손팻말과 소녀상이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

 

여성가족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인 14일 오전 11시 정부기념식을 온라인으로 개최한다고 13일 밝혔다.

 

1991년 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날이다.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피해자를 기리기 위해 2017년 기림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매년 기념하고 있다.

 

올해 기념식은 '김학순 할머니 증언 30주년'의 의미를 살려 '함께 지켜온 30년, 세상을 변화시킬 당신과 함께'를 주제로 진행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영상메시지를 통해 "과거의 아픔에 머물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신 할머님들의 헌신에 경의를 표하며, 정부는 피해자 중심의 문제해결이 이뤄질 수 있도록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할 예정이다.

 

정영애 여가부 장관은 미리 배포한 기념사에서 "지난 30년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전쟁 중 성폭력과 같은 여성인권 침해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왔음에도 최근 국내외에서 위안부 피해의 역사를 부정·왜곡하는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며 "이러한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고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연구와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사전 제작한 기념식 영상을 송출하는 온라인 행사로 진행되며, 여가부와 KTV국민방송 유튜브 채널을 통해 중계된다.

 

기념식은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이후 현재까지 30년간 이어진 연대와 실천, 미래를 위한 희망을 표현한 기획 영상과 기념 공연 등으로 구성된다.

 

또 기림의 날을 전후로 여가부의 '청소년 작품 공모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의 교육용 콘텐츠 공개·전시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는 영어 웹진 '결'(www.kyeol.kr/en)을 선보인다.

 

'결'에서는 그동안 한국어로 제공하던 위안부 관련 자료 해설과 논평, 좌담, 에세이 등을 영어로 번역해 제공한다.

 

또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는 일본군, 정부, 유엔(UN)의 공문서 등 주요 역사자료 총 150여건을 교육용 영어 콘텐츠로 제작해 13일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공개할 계획이다.

 

아울러 피해자의 증언을 영상으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대화형 콘텐츠도 대구 중구 희움 역사관과 서울 마포구 서강대 곤자가프라자에서 오는 11월까지 만나볼 수 있다.

 

이밖에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 등도 기관별로 특색 있는 기념식과 강연회, 공연, 전시회 등 다채로운 시민 참여 행사를 연다.

 

정영애 장관은 "이번 기림의 날 행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한 피해 할머니들의 용기와 노력을 현세대와 미래 세대가 함께 기억하고 이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여가부도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고, 위안부 문제를 여성 인권과 평화의 가치로서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2020년 8월 14일 충남 천안 국립 망향의 동산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행사에 참석한 이용수 할머니.

 

"김학순의 용기가 위안부 둘러싼 세계의 침묵 깨뜨려"

   고 김학순 할머니 공개증언 30주년 기념 학술대회

   "역사 부정주의 발호…할머니 위해 기억 이어가야"

 

'김학순 공개증언 30주년 국제학술대회'=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JU동교동에서 '김학순 공개증언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온ㆍ오프라인으로 진행되고 있다.

 

"나는 부끄럽지 않다. 이 순간을 내 평생 기다려왔다."

 

1991년 8월 14일 한국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로서 처음 피해 사실을 공개한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증언 3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대회가 13일 서울 서대문구 청년문화공간 JU동교동에서 열렸다.

 

세계 각지에서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치유를 위해 활동해온 참석자들은 김 할머니가 낸 용기를 회고하면서 역사 부정에 맞서 피해자들의 기억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김학순 공개증언 30주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공개적으로 증언한 김학순(왼쪽 세번째)할머니가 1991년 12월 7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 최초의 증언집회에 참석하고 있다.[김혜원 기증,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제공]

 

◇ "김학순 증언, 세계 성폭력 여성 피해 경험 공유의 계기"

 

엘리자베스 손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는 "김학순 할머니는 전 세계 여러 세대의 여성들이 본인들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줬다"며 "살아있는 증인으로서 세상에 당신의 전쟁 경험을 전하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주어진 의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라고 말했다.

 

양현아 서울대 교수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힘없고 이름 없었던 지역의 기층민에 의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아시아, 세계의 깊은 침묵이 깨졌던 계기"라고 평가했다.

 

김 할머니가 일으킨 파장으로 한옥선(1919∼2009), 안법순(1925∼2003), 김화선(1926∼2012), 최갑순(1919∼2012) 등 다른 피해자들 역시 고통스럽게 자신의 아픔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해외에서도 네덜란드의 얀 루프 오헨 할머니(1923∼2019) 할머니 등이 이런 증언을 보고 용기를 냈다.

 

이런 피해 생존자 100여명의 목소리는 1993년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을 시작으로 2004년까지 나온 총 8권의 증언집 시리즈에 담겼다. 지역 단체들이 출간한 증언집을 더하면 기록은 모두 17권에 이른다.

 

나눔의집 위안부 피해 할머니 흉상

 

◇ 김학순과 함께해온 일 활동가들 "일본 돌아보게 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일본 사회도 술렁였다. 김 할머니는 1991년 12월 일본 도쿄와 간사이(關西) 각지에서 자신의 증언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회에 참석했고,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양징자 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전국행동 공동대표는 이런 집회가 이미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 중이던 일본 여성들에게 힘을 주고 운동의 후속세대를 만들어낸 원동력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공격도 만만치 않았다. 당장 김 할머니는 일본 집회에서 "어째서 전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야기하기로 결심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기억이 진실이 아니라거나 '일본은 책임이 없다'는 주장은 일본 총리에게서까지 나왔다.

 

양 공동대표는 "당시 일본 사회는 그녀들(피해자들)이 50년 동안 사실은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왔다는 사실에 대해 상상력을 갖지 못했다"며 "운동을 위해 일어선 여성들조차 한국의 운동으로부터의 물음이 있었기에 비로소 우리들이 놓쳐 온 일본의 과거 죄악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필요성에 눈 뜨게 된 것"이라고 했다.

 

아사히신문 기자이던 우에무라 다카시 '주간금요일' 발행인은 1991년 김 할머니의 사연을 일본에 처음 보도한 일로 일본 우익들로부터 극심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싸워왔다고 술회했다.

 

그는 "김학순 씨가 일본 변호인단에 호소한 세 가지 바람인 일본 정부의 사과, 젊은 세대로의 기억 계승, 비석 건립이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며 "기억 계승에 대한 공격을 일본 정부가 저지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램지어 사태

 

◇ "일 '역사전쟁'은 진행 중…기억 지속하는 것은 모두의 의무"

 

전문가들은 최근 '램지어 사태' 등으로 대표되는 역사부정주의에 대한 경계와 대응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야마구치 도모미 미국 몬타나주립대 교수는 현재의 '역사전쟁'을 "일본 우익이 '중국·한국이 일본을 깎아내리기 위해 싸움을 걸고 있으며 그 주전장(주된 싸움터)은 미국'이라는 인식에 근거한 일본군과 정부의 전쟁 책임을 부정하려는 움직임"이라고 정의했다.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이런 역사 부정이 왜곡된 통계 수치를 나열하면서 학문적 모양새를 취하거나 피해자들의 증언을 자의적으로 절취하는 방식, 궤변임에도 목소리를 높이고 확신에 찬 지속적인 주장을 하는 방식 등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일부 지식인까지 가세한 '램지어 사태'는 이를 요약해 보여주는 현상이라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알렉시스 더든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는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오늘 이 모든 여성이 거짓말쟁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은 일본의 현 정부"라며 "김학순은 20세기 가장 용감한 사람 중 한 명으로 남아 있고 그의 몸에 각인된 공포를 영원히 끝내기 위해 유산을 21세기에 지속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덧붙였다.

 

부재의 무게, 현재의 책임…고 김복동 할머니를 되새기다

 

고 김복동 할머니의 유품으로 되새기는 202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여성인권운동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명함. 김복동 할머니는 피해자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곳곳을 누비며 피해 사실을 용기있게 증언함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높이고, 국가를 초월한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연대를 이끌어낸 활동가의 삶을 살았다.

 

“본인이, 증거가 살아있는데 증거가 없다니 말이 됩니까?”

 

일본군 위안부 강제 연행 사실을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를 지지하는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발언이 잇따랐던 2012년 7월, ‘국가가 소신을 가지고 국가의 의지와 소신을 가지고 여성을 납치해 인신매매했다는 사실은 없다는 게 일본의 많은 역사가들의 의견’이라는 하시모토 도루 일본 오사카시 시장 집무실 앞에서 면담을 요청하며 당당히 꾸짖던 날에 김복동 할머니는 연보라색 원피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이듬해 일본 각 지역을 순회하는 증언대회에 나섰을 때에도, 서울의 수요시위에서도 할머니는 단정한 이 원피스를 즐겨 입었다.

 

김복동 할머니가 생전에 즐겨 착용한 연보라빛 원피스와 나비 스카프

연보라빛 원피스를 입은 김복동 할머니(가운데)가 2013년 5월 25일 오후 일본 오사카 동센터에서 열린 일본 순회 증언집회에서 길원옥 할머니(왼쪽)와 증언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 내리쬐는 햇볕을 막아주던 모자와 선글라스도 수요시위의 필수품이었다. 수요시위 현장에서 ‘할머니에게 명예와 인권을’이라 쓴 노란 조끼를 입고 찍은 사진과 함께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이라 스스로를 소개한 명함은 그의 온 삶을 통한 발걸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이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 참석을 위해 사용했던 유엔 출입증과 각국의 출입국 도장이 찍혀 있는 여권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피해 사실을 용기 있게 증언함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높이고, 국가를 초월한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연대를 이끌어낸 그의 발자취를 담고 있다.

 

2019년 1월28일 김복동 할머니가 영면에 든 뒤로도 피해자들의 별세는 이어져, 이제 남은 생존자는 14명.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바로잡으려던 이들이 떠나고 난 뒤 빈자리는, 치열했던 그 삶의 무게를 더해 남은 이들에게 무거운 책임이 되었다. 올해 다시 맞이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에 먼저 떠난 이의 부재를 되새겨줄 유품들을 톺아보는 까닭이다.

 

2012년 10월 3일 낮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1042차 수요시위’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안경에 참석자들이 비치고 있다.

필요할 경우에 대비해 과거에 썼던 의료보험증, 수첩 등과 함께 오래된 가방에 보관했던 할머니의 증명사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 참석을 위해 사용했던 유엔 출입증과 각국의 출입국 도장이 찍혀 있는 여권.

아흔세번째이자 마지막 생신이었던 2018년 4월 26일 오전 김복동 할머니가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 2층 자신의 방에서 축하하러 온 이들과 대화하고 있다.

 2019년 5월 4일 기록한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 2층 김복동 할머니의 빈 방. 이순덕·김복동 할머니가 별세하고 길원옥 할머니도 아들집으로 거처를 옮기며 평화의 우리집은 2020년 10월 말 문을 닫았다.  이정아 기자

 

위안부 피해 증언 첫 보도 우에무라 "용기 낸 증언에 떨렸다"

김학순 증언 30주년…"日정치 지도자 진심어린 사죄 안했다"

'날조' 비방에 맞서 싸워…위안부 문제 해결책은 "사죄 · 기억 · 비석"

 

위안부 목소리 세상에 알린 우에무라= 2015년 4월 27일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전 아사히(朝日)신문 기자가 일본 도쿄도(東京都) 지요다(千代田)구 소재 사법 기자클럽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씨의 증언을 실은 1991년 8월 11일자 아사히신문 오사카본사판 조간의 사본을 보여주고 있다.

 

"'용기를 내서 그런 증언을 했겠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떨렸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공개적으로 증언한 김학순(金學順·1924∼1997) 씨의 목소리를 처음 보도한 일본 저널리스트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는 녹음테이프로 김씨의 발언을 처음 들었던 30년 전의 느낌을 이렇게 회고했다.

 

기자회견하는 김학순=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씨가 1991년 8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을 성적으로 상대하는 일을 강요당했다고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김씨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서 기폭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1991년 8월 14일 얼굴과 이름을 공개한 상태로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일제 강점기 전쟁터에서 일본군을 성적으로 상대하는 일을 강요당했다고 증언했다.

 

성적 피해를 공개하기 쉽지 않은 시절에 이뤄진 김씨의 회견은 다른 피해자가 용기를 내 증언하는 계기가 됐다.

 

김학순 증언 첫 보도=1991년 8월 11일 발행된 아사히(朝日)신문 오사카(大阪)본사판 조간 사회면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金學順·1924∼1997) 씨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서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사진은 해당 신문의 사본. [우에무라 다카시 제공]

 

당시 아사히(朝日)신문 기자였던 우에무라는 기자회견 사흘 전인 1991년 8월 11일 "감금돼 달아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잊고 지내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화가 나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는 김씨의 발언을 지면에 실었다.

 

김씨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찾아가 말한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를 듣고 기사를 쓴 것이다.

 

전쟁 중 동원됐던 '조선인 종군 위안부' 중 한 명이 서울에 생존해 있으며 "체험을 그저 숨겨오기만 했던 그녀들의 무거운 입이 전후 반세기 가까이 지나서 어렵게 열리기 시작했다"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피해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보도였다.

 

우에무라는 피해 당사자가 지원 단체의 조사에 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뉴스라고 생각했다면서 "'피해자가 간신히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구나'하는 느낌이었다"고 덧붙였다.

 

    기자회견하는 김학순 [연합뉴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로 보도했고 피해자의 정체는 기자회견을 계기로 확인됐다.

 

30년 전 우에무라의 기사는 한국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지원 단체에 정식으로 피해 사실을 진술한 것을 처음 알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씨는 결과적으로 위안부 운동에서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물론 이보다 앞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가 보도된 사례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 오키나와(沖繩) 머물다 불법 체류자로 분류돼 추방 위기에 몰렸던 배봉기(1914∼1991) 씨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밝혀서 1975년 복수의 현지 언론에 소개됐다.

 

김씨의 기자회견 30주년을 앞두고 11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 응한 우에무라 '슈칸킨요비'(週刊金曜日) 사장 겸 발행인은 "총리 등 일본의 정치 지도자가 진심 어린 사죄를 피해자에게 제대로 전하지 않았다"라고 여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를 꼽았다.

 

 위안부 문제 공개 증언한 김학순과 소녀상= 7월 24일 일본 교토부(京都府) 교토시의 한 시설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전시된 가운데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공개 증언한 김학순(金學順·1924∼1997) 씨의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을 묻자 "김학순 씨가 30년 전에 어떻게 해결 가능한지 말해줬다"며 "나는 정말 그 말을 잊을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우에무라는 첫 기사를 쓰고 3개월여가 지난 1991년 11월 25일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김씨가 "돈을 얼마를 받아도 버려진 이 몸을 되돌릴 수 없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젊은 사람이 이 문제를 알도록 하면 좋겠다.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비석을 세워주면 좋겠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보도=1991년 12월 25일 발행된 아사히(朝日)신문 오사카(大阪)본사판 조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金學順·1924∼1997) 씨의 발언과 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은 해당 신문의 사본. [우에무라 다카시 제공]

 

일본군 위안부나 군인·군속(군무원)으로 동원된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에 앞서 일본 측 변호사로 구성된 대리인들이 서울에서 피해자 청취 조사를 했는데 당시 우에무라가 허락을 받아 동석했다.

 

우에무라 사장은 "간단히 말하면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죄, 젊은 세대로의 기억 계승, 기억하기 위한 비석의 건립, 이렇게 세 가지"가 핵심이라면서 현재 일본 상황은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특히 "위안부 할머니들이 체험한 괴로운 역사의 기억을 일본 정부와 일본 교육 당국이 젊은 세대에게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다"고 한국과 일본의 인식 차가 커지는 이유를 지적했다.

 

아울러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을 우익세력이 공격해도 일본 정부가 제지하지 않고 있으며 일본 사회가 우경화하면서 '반복해 사죄할 필요는 없다'는 목소리가 강해지고 있어 더욱 어려운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아베 사죄는 어디로=2015년 12월 28일 윤병세 당시 한국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당시 일본 외무상이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합의 결과를 발표한 후 악수하고 있다. 기시다는 당시 회견에서 "아베 (신조)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다시 한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말했으나 이후 아베가 실제 사죄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일본의 '이중 잣대'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본 정부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에 관해서는 속아서 간 사람도 납치라고 표현하면서 유독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강제 연행을 보여주는 증거가 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그렇다면 위안부도 다 납치된 셈"이라며 일본 측의 태도가 "더블 스탠더드"(이중적인 기준)라고 지적했다.

 

김씨의 목소리를 처음 소개한 우에무라의 기사는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당시에는 그리 주목받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려는 시도가 확산하면서 우에무라가 우익 세력의 표적이 됐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동원에 가담했다는 저술을 남겼던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1913∼2000)와 관련한 일련의 기사를 아사히신문이 2014년 8월 취소한 것이 이른바 '우에무라 때리기'를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위안부 문제 보도 취소한 아사히신문= 2014년 8월 5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배달된 아사히(朝日)신문 조간에 2차대전 때 제주도에서 다수 여성을 강제로 끌고 갔다고 밝힌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판단하고 이에 기반을 둔 1980∼90년대 자사 기사를 취소한다는 설명이 실려 있다. 아사히신문의 기사 취소는 '우에무라 때리기'를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아사히신문은 "요시다가 제주도에서 군 위안부를 강제 연행했다고 증언한 것은 거짓이라고 판단"했다고 기사를 취소한 이유를 밝혔다.

 

이를 계기로 김씨의 증언을 처음 보도한 우에무라가 '날조 기자'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우에무라는 요시다에 관한 기사를 한 건도 쓰지 않았고 요시다 관련 기사는 다른 기자가 쓴 것인데 우에무라를 비방하는 재료가 돼 버린 것이다.

 

기사 취소 후 더 강한 공격에 직면한 아사히는 우에무라가 김씨의 목소리를 처음 다룬 기사에서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장에 연행됐다"고 쓴 것이 잘못됐다며 2014년 12월 정정 보도했다.

 

위안부와 정신대를 혼동해 표기했으며 속아서 따라간 것에 대해 '연행'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잘못됐다는 취지였다. 이로 인해 우에무라 때리기는 더욱 심해졌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연구가 충분하지 않았던 당시에는 한국과 일본 모두 위안부를 정신대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흔했다.

 

딸 죽이겠다고 협박까지=아사히(朝日)신문 기자로 재직하던 시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씨의 증언을 보도한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씨의 딸을 죽이겠다는 내용의 협박문. 우에무라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딸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우에무라 다카시 제공]

 

우에무라는 "당시에는 다 그렇게 썼다. 정신대는 위안부라는 의미로 썼다"면서 지엽적인 부분을 빌미로 유독 자신만 공격한 것은 "위안부 문제를 뭉개기 위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공격은 도를 넘은 수준에 달했다.

 

2014년 3월 아사히신문을 조기 퇴직한 우에무라는 홋카이도(北海道)의 호쿠세이가쿠엔(北星學園)대학 비상근 강사를 맡고 있었는데 우익세력의 협박으로 인해 2년 후 대학을 떠나야 했다.

 

인터넷에서 고교생 딸에 대한 비방이 난무했고 살해 협박문까지 날아들어 등교할 때 경찰차가 출동해야 할 정도였다.

 

조선학교 보조금 중단 시위 속 '한국 비하 팻말'= 2016년 3월 6일 일본 도쿄도(東京都) 주오(中央)구 긴자(銀座) 거리에서 열린 시위 참가자가 든 팻말에 '사기, 위선, 명예훼손, 선전으로 사는 이들을 저주한다'(Curse on those who live on deception and hypocrisy, defamation and propaganda.)는 글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일본 중의원 의장, 박근혜 당시 대통령, 평화의 소녀상,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전 아사히(朝日)신문 기자 등의 얼굴 사진이 담겨 있다. 또 매국노, 사기꾼, 걸식, 매춘부 등의 단어가 함께 적혀 있다. 우에무라가 우익 세력의 표적이 됐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우에무라는 굴하지 않았다.

 

위협과 비방에 맞서 소송을 제기했고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는 책을 쓰며 반박했다.

 

딸이 제기한 소송에서는 배상 판결이 내려져 우익 세력의 공격에 브레이크를 거는 효과가 있었다.

 

다만 우에무라가 '기사 날조'라는 비방에 맞서 제기한 소송은 패소했다.

 

하지만 그는 "언론인 우에무라가 날조하지 않았다는 것은 멀쩡한 사람은 다 알게 됐다"며 소송 자체가 주목받으면서 판결만으로 전하기 어려운 진실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기자회견하는 우에무라 다카시= 2015년 8월 13일 우에무라 다카시 당시 일본 호쿠세이가쿠엔대학 비상근 강사가 서울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씨의 증언을 보도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또 "내가 굴복하지 않고 싸워서 동료가 점점 늘었다. 우에무라 때리기 덕분에 인연이 확산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우에무라는 폭력적 위협에 굴하지 않고 역사의 진실을 지키기 위한 투쟁한 노력을 인정받아 2019년 리영희 상을 받기도 했다.

 

김학순 씨의 발언을 처음 보도한 기자로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자 "(김학순 씨가 30년 전에 제시한) 세 가지를 실현하기 위해 협력할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DJ "박정희에 원한 · 복수심 갖지 않아" 육성 공개

● COREA 2021. 8. 14. 05:3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납치사건 직후 외신 인터뷰…"죽이려고 납치한 것"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제공]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향해 원한이나 복수심을 갖지 않겠다고 말한 육성 자료가 최초로 공개됐다.

 

13일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음성자료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납치사건 직후인 뉴스위크 동경지국 버나드 크리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을 포함해 어떤 개인에 대해서도 개인적 원한이나 어떤 복수심은 영원히 갖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정치에 대해서는) 찬성도 안 할 뿐 아니라 이래서는 우리나라의 장래가 위험하다, 국민이 절대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 인터뷰는 1973년 10월 30∼31일께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김 전 대통령은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도(東京都) 소재 그랜드팰리스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됐다 5일 후 마포구 동교동 자택 인근에서 발견됐다.

 

김대중도서관 관계자는 "김 전 대통령이 전두환씨에 대한 화해와 관용의 원칙을 강조한 것은 많이 알려졌지만, 박 전 대통령을 직접 거명하며 이런 원칙을 강조한 육성 자료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중앙정보부가 자신의 동선을 알게 된 것은 고(故) 양일동 당시 민주통일당 총재와 고(故) 김재권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 공사 간 대화를 통해서라고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73년) 7월 28일 양씨를 만났다"면서 "양씨가 일본에 있는 김씨 만나고 나서 나를 만났다, 또 만나기로 했다는 그런 얘기를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중앙정보부 요원)이 양씨만 따라붙으면 나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그랜드팰리스호텔에 가게 된 것은 내가 양씨한테 전화 걸어서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어 "양씨가 저 사람들한테 나를 납치시켜주기 위해서 고의로 협력했다고 보지 않는다"면서 "양씨가 말하자면 이용당했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김대중도서관 관계자는 "중앙정보부가 김 전 대통령의 동선 파악 등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양일동-김재권 간 대화라는 낮은 수준의 첩보를 믿고 납치를 감행한 것은 그만큼 윗선의 납치 의지가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은 국내·외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김 전 대통령은 "만약 나를 죽였을 때 국내에서 대단히 어려운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는 판단도 있었던 것 같다"면서 "일본보다는 미국 정부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다만 "나를 죽이기 위해서 납치했다(고 생각한다)"면서 "한국으로 데리고 가면 국제적으로 큰 마이너스가 오는데 데리고 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일본 도쿄도(東京都) 그랜드팰리스호텔

해군 "본인 신고 원치 않아"만 반복…신고와 별개 보호 조치했어야

"가해자가 자꾸 업무 배제" 생전 토로…피해자 진술받고 돌연 사망

 

추행피해 신고 해군 중사 빈소 출입 통제= 해군 여성 중사가 남성 상사에게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는 신고를 한 후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3일 중사의 빈소가 마련되는 대전 유성구 국군대전병원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국군대전병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감염병 전담 병원으로 지정돼 있다.

 

공군 이 모 중사 사건의 충격이 여전한 상황에서 해군에서도 여군 장교가 성추행 피해 신고를 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반성 없는' 군의 성범죄 대응 실태가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성추행 피해 사실을 즉각 알렸지만, 가해자와의 분리 조치가 전무했던 데다 2차 가해 의혹까지 제기되는 상황이어서 앞뒤 정황만 다를 뿐 공군 중사 사건과 '판박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 부임 사흘 만에 성추행…75일간 분리 없이 같은 부대 근무

 

13일 해군에 따르면 성추행 피해자인 A 중사는 지난 5월 24일 인천의 한 도서 지역에 있는 부대에 부임했다.

 

A 중사는 같은 달 27일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는 B 상사가 식사하자고 해 전투휴무일임에도 영외 민간 식당에 나갔다. 이전에도 같이 근무한 적이 있던 B 상사는 이 자리에서 A 중사의 '손금을 봐주겠다'고 하는 등 신체접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B 상사는 A 중사에게 술을 따르게 했고, 이를 거부하자 '술을 따라주지 않으면 3년 동안 재수가 없을 것'이라며 악담도 퍼부은 것으로 전해졌다.

 

부임 사흘 만에 성추행을 당한 것이다.

 

A 중사는 당일 주임 상사에게만 메신저로 피해 사실을 보고했지만, 8월 9일 본인 요청에 따라 사건이 정식 접수되고 전속되기 전까지 75일간 피해자와 가해자는 계속 같은 부대에서 정상 근무를 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실상 아무런 보호 조치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셈이다.

 

이에 대해 해군 관계자는 피해 초기 당시에 A 중사가 주임상사에게 '일체 외부로 노출되지 않도록 요청'했다는 설명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성추행 사건이 외부에 유출되지 않아야 하는 건 당연한 얘기며, 가해자와 분리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특히 B 상사가 피해자의 직속상관인데다 부대 자체도 규모가 작은 섬 부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지 즉시 피해자와 가해자 간 물리적 분리가 이뤄졌어야 한다.

 

해군 관계자는 "안타까운 부분"이라면서도 "법령상으론 성추행 사고가 일어나면 (인지 즉시) 보고하게 돼 있고, 훈령 상에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보고하지 않게 돼 있다"고 매뉴얼 상 허점이 있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5월 말 극단적 선택을 한 성추행 피해 공군 중사 사건의 '늑장 보고'로 군이 한 차례 질타를 받았던 점을 고려하면 '소 잃고 외양간도 못 고친' 격이란 지적이 나온다.

 

한편, 해당 부대에서는 최근에도 성희롱 비위가 확인된 한 위관 장교가 보직 해임돼 다른 육지 부대로 전출되기도 했다.

 

이 위관 장교는 지난 2월부터 6월까지 여성 부사관에게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발언을 하거나 문자 메시지를 보냈고, 여성 간부 숙소에 무단으로 들어가기도 한 것으로 파악됐다.

 

다만 이 사안의 경우에는 성희롱 비위 사실이 확인된 즉시 가해자 분리와 수사가 이뤄졌다고 해군은 덧붙였다.

 

◇ "유족에게 생전 고충 토로"…전속 · 정식수사 착수 직후 사망

 

5월 성추행 직후엔 정식 신고를 원치 않았다던 A 중사가 약 두 달 뒤 정식 신고를 결심했다는 점에서 2차 가해 의혹도 강하게 일고 있다.

 

해군은 정식 신고 전까지인 5월 27일∼8월 7일 사이 2차 가해 여부에 대해 "수사로 밝혀야 할 부분"이라며 함구하고 있다. 부대장 면담 내용조차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인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이 이날 공개한 A 중사와 유가족의 문자 메시지 내용에 따르면 A 중사는 지난 3일 부모에게 "(가해자가) 일해야 하는데 자꾸 배제하고 그래서 우선 오늘 그냥 부대에 신고하려고 전화했다"라며 "제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안 될 것 같다"라고 했다.

 

또 A 중사가 사건 이후에도 분리되지 않은 채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는 과정에서 B 상사의 업무상 따돌림, 업무 배제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파악됐다고 하 의원은 전했다.

 

뒤늦게 신고를 결심했던 A 중사가 왜 수사가 시작되자마자 돌연 사망했는 지도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A 중사는 8월 9일 사건을 정식 신고하기로 결심하고 같은 날 경기도 평택에 있는 해군 모 부대로 전속됐다. 본인이 육상 부대로의 전출을 희망했다고 해군은 전했다.

 

이튿날인 10일 부대 군사경찰에서 성고충 상담관 배석하에 첫 피해자 조사도 받았다. 이때 피해자 요청에 따라 민간 국선변호사 선임을 요청해 지정도 이뤄졌으며, 사망 전까지 8차례 성고충 상담관과 전화 상담을 했다고 해군은 설명했다.

 

그러나 조사 이튿날인 11일부터 19일까지 청원휴가를 냈던 A 중사는 돌연 12일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현재까지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군사경찰은 고인의 휴대전화 포렌식 등을 진행해 수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장관 , 해군 성추행 피해 76일만에 보고받아

사건 직후 '물리적 분리' 안 되고 2차 가해도 지속…'공군 판박이'

가해자, 내일 영장심사…문 대통령 격노·서욱 "유족·국민께 송구"

 

청해부대 장병 코로나19 집단감염 관련 답변하는 서욱 국방부 장관 [연합뉴스]

 

성추행 피해를 신고한 해군 여군이 사망한 사건 관련, 서욱 국방부 장관은 피해 발생 76일 만에 최초 보고를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피해 당사자가 '외부 유출'을 원치 않아 상부 보고가 늦게 이뤄졌다는 게 군의 설명이지만, 결과적으로 보고 매뉴얼에 구멍이 생겼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특히 공군 성추행 피해 부사관 사망 사건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 유사한 사건이 또 발생한 해 문재인 대통령은 격노했고, 정치권에서는 서 장관 경질론마저 제기되고 있다.

 

13일 해군 관계자에 따르면 서욱 국방부 장관이 성추행 사건을 최초로 보고받은 건 11일로 파악됐다.

 

사건이 정식 신고된 9일을 기준으로는 이틀 만이지만, 성추행 발생일(5월 27일)을 기준으로 하면 76일 만이다.

 

피해자가 당초 신고를 원하지 않다가 두 달여만인 8월 7일 부대 지휘관과 면담 요청을 해 피해 사실을 보고했고, 9일 본인 결심에 따라 정식으로 상부 보고가 이뤄졌다.

 

11일 해군본부 군사경찰은 부석종 참모총장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각각 보고를 했고, 조사본부가 당시 장관에게 서면보고를 한 것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이튿날인 12일 A 중사가 숨진 채 발견되자 부 총장은 서 장관에게 사망사실을 지휘보고했다.

 

상부 보고가 뒤늦게 이뤄지면서 그사이 두 달간 피해자 보호가 사실상 제대로 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해군 관계자는 "법령상으론 성추행 사고가 일어나면 (인지 즉시) 보고하게 돼 있고, 훈령상에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보고하지 않도록 돼 있다"고 매뉴얼상 허점이 있음을 시사했다.

 

실제로 5월 27일 A 중사는 주임상사에만 피해 사실을 알렸는데, 이후 정식 신고를 결심하기 전까지 두 달여 간 가해자 B 상사와 분리 조치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또 A 중사가 사건 이후에도 분리되지 않은 채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는 과정에서 B 상사의 업무상 따돌림, 업무 배제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합동수사에 착수한 국방부 조사본부와 해군 중앙수사대는 성추행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2차 가해 여부 등을 수사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전날 B 상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14일 오전 중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이 이뤄질 예정이다.

 

인천의 한 도서 지역 부대에서 복무하던 해군 A 중사는 지난 5월 27일 민간 식당에서 B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사건이 정식 보고된 지난 9일 본인 요청에 따라 육상 부대로 파견됐지만, 사흘 만인 12일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현재까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군 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군 당국은 정확한 사인을 밝혀내기 위해 부검을 하려 했지만, 유족 측이 부검 없이 장례식을 치르기를 희망해 결국 15일 발인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욱 국방부 장관은 이날 오후 국군대전병원에 마련된 A 중사의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하고 유족들과 30분간 면담하며 위로했다. 이 자리에서 유족 측은 "딸을 명예롭게 보내달라"고 했고, 서 장관은 철저한 수사를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부실급식 논란과 공군 사건, 청해부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 등으로 도마 위에 오른 서욱 장관의 책임론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해당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은 자리에서 격노하며 철저하고 엄정한 수사를 지시했고,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서 장관을 비롯한 군 지휘부의 책임을 추궁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고용진 수석대변인은 이날 서면 브리핑에서 "국방부 장관은 총책임자로서 이른 시일 안에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그 내용에 따라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도 "바뀔 기회를 줬는데도 바뀌기는커녕 똑같은 사고를 낸 무능한 국방부 장관은 즉각 경질돼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서 장관은 "있어선 안 될 일이 발생한 데 대해 유족과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작년 9월 취임 이후 일곱 번째로 대국민 사과를 했다.

북, 한미 연합훈련에 "엄청난 안보위기" 엄포

● COREA 2021. 8. 12. 02:0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단거리 미사일 발사 등 가능성…SLBM 등 고강도 도발 직행은 쉽지 않아

북, '화해무드' 조성 뒤 예고된 연합훈련에 돌변…'대내 결집' 의도도 관측

 

                  왼쪽부터 김영철 부장과 김정은 위원장, 김여정 부부장.

 

북한이 11일 '엄청난 안보 위기'를 언급하며 남측을 향해 엄포를 놓으면서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김영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은 담화에서 한미연합훈련을 비난하며 "잘못된 선택으로 해 스스로가 얼마나 엄청난 안보 위기에 다가가고 있는가를 시시각각으로 느끼게 해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전날 "거듭되는 우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강행하는 미국과 남조선 측의 위험한 전쟁 연습은 반드시 스스로를 더욱 엄중한 안보 위협에 직면하게 만들 것"이라고 담화를 낸 것과 궤를 같이한다.

 

북한은 이미 김여정 부부장 담화에 맞춰 전날 오후부터 2주 전 복원됐던 남북 연락채널에 무응답하고 있다. 지난달 27일 연락채널을 복원하며 밝혔던 '화해 도모'가 더는 유효하지 않고 '대결 구도'로 나아갈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 것이다.

 

아직 특이 동향은 포착되지 않고 있지만, 북한이 '안보 위협'과 '안보 위기'를 경고했다는 점에서 한미연합훈련의 대응 성격으로 대규모 화력 훈련 등 무력시위에 돌입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우선 북한이 최근 주력하고 있는 단거리 탄도미사일 사거리 확장을 위한 시험 발사에 나설 수 있다.

 

탄도미사일은 사거리와 무관하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에 해당하지만, '단거리'의 경우 미국 및 유엔에서도 추가 제재 등 직접적인 대응은 대체로 자제해왔다. 북한 입장에선 '부담이 덜한' 수단에 해당하는 셈이다.

 

9·19 군사합의로 중단된 해안포 사격 훈련을 재개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당장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등 '고강도' 무력 도발로 직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안 그래도 내치에 치중하는 상황에서 이른바 '레드라인'을 넘는 군사행동 시 추가 대북제재 등 북한 스스로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서다.

 

양무진 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는 "탄도 미사일 발사는 바이든 행정부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어 숙고를 할 것"이라며 "9·19 군사합의 파기 역시 남북관계를 파탄으로 다시 몰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대응수위를 고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은 현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교역 중단과 그에 따른 식량난 심화를 겪는 데다 최근 함경남도 지역의 수해 피해도 상당히 심각한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연합훈련을 구실로 긴장 수위를 높이는 데는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대내 결속 효과를 노리려는 측면도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이 연락채널 복원 사실은 주민들에게 알리지 않은 반면, 남측과 미국을 싸잡아 비난한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는 대내용 매체를 통해 보도한 것도 이런 분석에 힘을 싣고 있다.

 

한편에선 북한이 애초 2주 전 남북 연락채널 복원에 나선 게 '도발의 명분'을 쌓기 위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한미연합훈련이 예고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하려고 했는데 한미가 연합훈련을 감행해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맞대응했다는 논리를 만들려던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일시적 화해무드 조성 뒤 다시 긴장을 끌어올려 '도발'의 충격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도 숨어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연락채널을 복원한) 7월 27일이면 시점상 이미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할 수가 없는 시기였다"며 "군사훈련 중단을 안했다는 이유로 긴장 조성하는 것은 그동안 여러 번 반복된 벼랑 끝 전술"이라고 주장했다.

 

미 국무부, 김영철 연합훈련 비난에 "北에 적대의도 없다" 반복

상황 악화 차단 관측…미 국방부는 "한-미 결정" 기존 입장 반복

 

미국 국무부는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의 한미연합훈련 비난 담화에 북한에 적대적 의도가 없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미 국무부 당국자는 11일 미국의 입장이 있는지 묻는 연합뉴스의 서면질의에 "한미연합훈련은 순전히 방어적 성격이고 오랫동안 그랬던 것처럼 미국은 북한에 적대적 의도를 품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이 당국자는 이어 "우리는 철통같은 한미동맹에 따라 우리의 연합 방위태세와 한국의 안보에 계속 전념하고 있다"면서 "말했던 것처럼 미국은 남북대화와 관여를 지지하며 이를 향해 한국 파트너들과 계속 협력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는 전날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이 브리핑에서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북한의 반발과 관련해 내놓은 대답과 같은 것이다.

 

북한에 대한 적대 의도가 없음을 강조해 상황 악화를 막고 외교적 접근을 열어두려는 의도라는 관측이 나온다. 북한은 한미연합훈련과 제재 등을 대북적대시 정책이라고 비난해왔다.

 

미 국방부는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비난에 대해 "우리는 북한의 담화에 논평하지 않는다"면서 "연합훈련은 한미 양국의 결정이고 어떤 결정도 상호 합의로 이뤄질 것"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반복했다.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은 11일 한미연합훈련을 비난하며 "잘못된 선택으로 해 스스로가 얼마나 엄청난 안보 위기에 다가가고 있는가를 시시각각으로 느끼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루 전인 10일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한미연합훈련 비판 담화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