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기획 ‘기억을 역사로’---    끌려간 사람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가족들이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기증한 강제동원자의 모습. 연인원 780만명의 청·장년이 군인으로, 노무자로 강제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제공

 

“나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막 안 타려고 울었어. 선생님이 체면이 있다 사정하더라고 그래서 부산역인지 어딘질 모르는디 갔제. 5일 만에 일본이더라”

 

1945년 초, 전남 나주 영산포초등학교 6학년 이금덕은 졸업을 앞두고 ‘근로정신대’로 동원됐다. 행선지도 모르고 끌려간 일본, 그는 도야마현 후지코시 공장에 배정돼 일본 군용기 부품을 만들었다. 그의 나이는 불과 12세였다.

 

지난 2008년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회)가 발간한 구술기록집에 포함된 강제동원 피해자 이금덕의 증언이다. 강제동원 피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설립한 위원회는 지난 2005년부터 2013년부터 구술록 16권을 발간했다. 범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유일한 구술조사를 바탕으로 동원 배경부터 해방 이후 귀환 과정까지 강제동원 전 과정을 담았다.

 

위원회는 구술조사의 이유에 대해 “잠자고 있던 생존자들의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 만들기’ 과정”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강제동원의 기억은 역사가 되지 못했다. 향후 추가 진상조사와 연구를 염두에 두고 진행된 구술조사였지만 위원회 해체 이후 흐지부지해지며 제대로 된 후속연구도 이뤄지지 못했다.

 

일본이 강제동원의 흔적을 지우고 있는 군함도를 비롯해 국내외 곳곳으로 끌려간 피해자들의 동원경로와 과정이 담겼지만 교육용으로도 활용되지 못한 채 ‘잊힌 기록’이 됐다. 가해자인 일본의 ‘망각’을 지적하면서도 피해자가 일제의 강제동원의 증거를 스스로 지우는 내부 모순을 드러냈다.

 

                                  1941년 도항증명서.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광복 80주년, 강제동원의 경험을 증언해줄 피해자는 대부분 우리 곁을 떠났다. 기억을 계승하기 위해선 남은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경향신문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길’을 그리기 위해 강제동원 구술록 15권, 일본군 ‘위안부’ 구술록 1권, 총 219명의 이야기를 분석했다. 이는 지난 80년 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일이다.

 

구술록은 증언자가 사용한 방언, 행동묘사까지 그대로 기록해 발언 과정의 감정 변화까지 생생하게 담았다. 이로 인해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분석은 불가능했다. 또 조사원마다 질문 내용과 순서가 달랐고, 피해자는 질문과 관계없이 기억나는 대로 발언하는 경우가 많아 총 6177페이지의 구술을 전부 읽고, 정확한 내용을 확인했다. 경향신문은 이를 통해 역사가 되지 못한 ‘기억’을 잇고, 계승할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219명 평균 연령, 만 18.9세
‘만 14세 미만’ 피해자 3.2%
부양가족 있던 30대도 끌려가

 

이들의 기억을 통해 남은 것은 ‘강제성’을 입증할 증거였다. 구술기록에 참여한 강제동원자 219명의 동원 평균 연령은 현재 성년의 기준보다 낮은 만 18.9세였다. 이중 국제노동기구(ILO)의 강제노동협약에 따라 강제노동이 금지된 만18세 미만 동원피해자는 전체 구술자의 42.9%(94명)에 달했다. 아동노동 기준 위반인 만14세 미만 강제노동자도 3.2%(7명) 존재했다. 일본은 1919년 ILO의 초대 창립국으로 참여해 1932년 강제동원협약을 비준했다. 때문에 이는 당시 강제동원은 ILO협약을 무시한 명백한 불법적인 행위다.

 

 

겉으론 ‘지원’의 형태를 띄기도 했지만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노동’이었다. 이금덕처럼 초등학교를 다니거나 갓 졸업한 만12세 학생도 동원돼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부양할 가족이 있어도, 자녀가 있어도 동원을 피할 수 없었다. 만32세로 구술록 중 최고령 동원자였던 민병주는 딸의 결혼을 보기 위해 사정을 한 끝에야 동원을 연기했다. 딸을 시집 보내자마자 그는 일본으로 동원돼 가족들과 생이별을 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동원길에 올랐다고 증언했다. 길을 걷다가 징용장도 없이 순사한테 끌려가 그날로 강제동원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번 동원대상이 된 순간, 예외는 없었다.

 

동원 피해자 대부분은 일본(당시 일본령 사할린 포함, 65.3%, 143명)이나 일본 외 지역(20.1%, 44명)으로 떠났다. 피해자들은 기차를 통해 일본을 오가는 연락선이 다니는 부산항으로, 일부는 여수항으로 ‘수송’됐다. 일제가 점진적으로 구축한 장항선, 경부선, 호남선, 경전선 등 철도는 전국 곳곳에 흩어진 동원자들을 항구로 빠르게 실어나르는 역할을 했다. 철도와 항만은 조선을 근대화하기 위해 만든 기반시설이 아닌, 효율적인 인적수탈을 위한 도구였다.

 

                                               강원여관 숙박 증명서. 국가기록원

 

‘강제동원의 길’ 시작점인 집결지
47.9%가 읍사무소 등 관공서 지목
연락선 있는 부산항·여수항으로 ‘수송’

 

구술록에서 확인한 주요 경로는 다음과 같다. 강원 서부/서울/수도권/충청권/경상권→부산→일본 시모노세키(관부연락선 탑승), 서울/충청권/전라권→여수→일본(관려연락선 탑승), 전라권→제주 징용, 강원 동부→원산→부산→일본 시모노세키(관부연락선 탑승), 전라권→부산→일본 시모노세키(관부연락선 탑승)이다.

 

구술록 분석으로 ‘강제동원 길’의 시작점인 집결지도 확인했다. 집결지를 증언한 96명 중, 절반에 가까운 47.9%(46명)가 읍사무소·군청 등 관공서에서 모였고 기차역(15.6%, 15명), 학교(14.6%, 14명), 여관(13.5%, 13명)이 뒤를 이었다. 이중 여관을 제외하면 대부분 현재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곳들이다. 추가 조사가 진행된다면 보다 정확한 동선 및 조선총독부의 조직적 개입 여부까지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김경민  김찬호 기자 >

 

“도항 직전 ‘알몸 소독’ 당해”···219명 증언으로 복원한 ‘강제동원의 길’

 

광복 80주년 기획 ‘기억을 역사로’---    끌려간 사람들

 

 

 

           1952년 미군이 촬영한 부산역, 부산세관, 부산항 1부두 모습/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제공

 

9268개. 공장, 탄광, 지하시설 등 일본 제국주의(일제)가 한반도에 남긴 전쟁유적 숫자다. 문헌과 현지조사 등으로 확인된 곳 중 정부나 지자체 보고서가 발간된 곳은 321개. 일제가 36년간 남긴 상처 중, 약 3.46% 수준이다.

 

일제강점기 전쟁유적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등과 연결되지만 지금껏 채 5%도 조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가 ‘야만의 시대’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증언’ 덕분이었다.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폭로한 ‘김학순’, 일본제철(구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강제동원 책임을 물은 ‘이춘식’ 등의 증언은 광복 후 수십 년간 역사의 빈틈을 메웠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났다. 생생했던 ‘목소리’는 대부분 멈췄다. 이들이 세상을 떠나며 생긴 틈으로 “강제동원도 일본군 ‘위안부’도 없었다. 증언은 거짓이다”는 주장이 파고들었다. 이제라도 멈춰버린 증언을 사실로 확인해야만 할 필요성이 커졌다.

 

경향신문은 정부가 발간한 구술록 속 강제동원 피해자 219명의 증언을 처음으로 전수 분석했다. 그들의 기억으로 지난 80년간 한 번도 알려지지 않았던 ‘강제동원의 길’을 복원했다. 전국 역, 관공서, 학교, 여관 등에서 집결한 강제동원자들은 기차를 타고 여수역, 부산역 등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연락선으로 갈아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전국 주요역과 철도는 이들을 수송하는 핵심역할을 했다. 항구는 이들을 강제동원지로 실어나르는 기지였다.

 

219명의 기억을 쫓아 직접 따라가 본 길 위에는 참혹한 ‘폭력’의 역사가 있었다.

 

1944년 7월,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김희경의 길

 

김희경은 덕수국민학교 고등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4년 7월, 일본 후지코시강재주식회사로 강제동원됐다. 만 14세 때였다. 250명이 함께 동원됐는데 집결지는 ‘경기도청’(현 광화문 광장 남쪽)이었다. 이들은 ‘부민회관’(현 서울시의회)에서 일제를 홍보하는 영화를 한 편 봤다. 오후에는 ‘조선신궁’(현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이동해 참배한 뒤 ‘경성역’(서울역)으로 걸어서 이동했다. “남대문을 내려보니까는 요즈음 시청광장에 사람 모이잖아요. 가족들이 그렇게 모여있어요. 아침에 아무것도 없이 나갔는데 도시락들을 싸가지고, 애들을 멕여 보낼라고. 서울역 가는 그 일대가 꽉 차서, 그걸 말로 표현을 못 해요.” 김희경은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10대도 가리지 않고 무작위 차출
가축·화물용 짐칸에 빽빽이 실어
일본과 연결 지점인 부산으로 수송

 

이는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회)가 2008년 발간한 구술집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그 경험과 기억’에 나오는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위원회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총 16권의 구술기록집을 남기고, 2015년 해체됐다. 정부가 발간한 책이지만 전권 열람이 가능한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구술집은 잊혔다. 그런데 이 책들에는 어디서도 듣지 못한 이야기가 조각조각 실려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끌려간 ‘이동 경로’에 관한 것이다.

 

                             남산 조선신궁 전경/국립중앙도서관 조선신궁조영지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역(경성역) 모습/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다시 김희경의 증언이다. 경성역에 도착한 그는 그날 저녁 8시, 기차를 탔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비 내리는 새벽이었다. “아마 새벽쯤 됐어, 비가 막 부슬부슬 오는데 250명이 춥고, 앉아가지구선 있는데, 한 아이 두 아이 울기 시작하더니 250명이 다 우는 거야.” 이날 가족품을 떠나 온 아이들이 함께 울었던 곳은 ‘부산역’이었다.

 

일제강점기 부산은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관문이었다. 부산항 제1부두에는 ‘관부 연락선’이 닿았다. “연락선이 단순히 일본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연결한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면 곧바로 기차로 갈아타고 중국을 갈 수 있다는 의미의 ‘연락’ 입니다. 역이나 항구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거죠,”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은 당시 부산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1930년대 부산 제1부두 관부연락선 터미널 모습. 잔교역 구조다./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일본, 한반도, 중국을 연결하는 구조의 핵심은 ‘잔교역’이었다. 잔교역은 부두 위에 건설한 간이역을 말한다. 기차에서 내린 승객이 몇 걸음만 옮기면 곧바로 배에 오를 수 있다. 모든 환승과정이 역과 항구안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한 극도로 효율적인 구조지만 뒤집어보면 완벽히 통제된 구조다.

 

그런데 김희경은 잔교역이 아닌 부산역에서 하차했다. 경부선에서 갈라져 나온 철도가 잔교역과 이어짐에도 부산역에서 하차했다면, 그 이유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 일제는 김희경을 비롯한 250명의 아이를 역 밖으로 데리고 나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디로 갔나

 

부산으로 이동해 곧바로 ‘관부 연락선’을 탔을 것이란 추측은 시작부터 깨졌다. 증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김희경의 기억이 부산에 이르러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만 14세 아이가 처음 가 본 도시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억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219명의 증언자 가운데 비슷한 시기, 같은 장소를 거친 증언을 전부 찾았다. 그 결과, 1944년 5월 도쿄 누마즈공장으로 동원된 오일순, 1944년 10월 히로시마 조선소로 동원된 홍순의가 특정됐다. 같은 해 5월, 7월, 10월에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끌려간 이들의 기억에서 하나의 장면이 공통적으로 떠올랐다. 이들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인간 소독’이었다.

 

“자그마한 배를 타고 어느 도섬에 가니께네, 창고 같은 이런 데가 있었어요. 들어가보니까 새카만, 저 소독수라 소독수. 그 안으로 들어가라 하는 거예요”, “어딘지 들어갔는데 아 소독물 저저저, 모야 냄새 지독한 크레졸. 우유물 같이 허연 물에 넣고 소독시키는 거야, 몸을”, “약물로 소독을 했다고 사람을”.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시기 부산에 머물렀지만 마치 한 공간에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이들 증언이 맞다면 ‘강제동원의 길’에는 소독이라는 과정이 추가돼야 했다. 문제는 장소였다. 누구도 소독을 당한 위치를 정확히 특정하지는 못했다. 다만, ‘소독하러 가는 길’을 묘사한 경우가 있었다. “부산에서 그 오륙도 지나설랑 조금 더 가면 조그만 섬이 있었어요, 그 섬에 들어가서 약물로 소독을 했다고 사람을”(김민경, 1944년 히로시마 기계제작소 동원), “부산 와가지고 지금은 모르겠는데, 어디 섬인데 부산에. 섬에 가서 우리를 소독을 시키는기라”(박군자, 1944년 도쿄 누마즈 공장 동원). 이들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설명은 그곳이 ‘섬’이라는 것이었다.

 

                     1941년 일제가 발행한 부산 시가지도/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제공

 

옛 부산역 근방, 자그마한 배로도 갈 수 있는 거리, 오륙도를 볼 수 있는 방향에 있는 ‘섬’. 1941년 일제가 제작한 부산 시가지도를 구해서 펼치고, 해당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곳을 찾았다. 딱 한 곳이 나왔다. 부산 ‘영도’다.

 

일제에 조선인은 무엇이었나

 

일제강점기 영도는 배를 건조하고, 수리하는 조선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현재 ‘깡깡이 마을’로도 유명한 해안가 일대에는 일본인 조선소가 밀집해 있었다. 1934년에는 최초의 도개교(다리 상판 한쪽을 올려 배가 지나갈 수 있게 한 다리)인 영도다리가 건설됐다.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만나는 대교동·남항동 일대와 ‘영도정’이라 불린 봉래동·청학동 일대는 대표적인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다.

 

                    지난 8월 1일 부산 중구 일대에서 바라본 옛 영도 다나카 조선소/부산|권도현 기자

 

영도의 산업적 특성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영도에는 조선업을 지탱할 ‘노동력’이 필요했다. 영도에도 강제동원자가 있었고,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창고 ‘건물’이 있었다면 ‘창고가 있는 섬’이라는 소독 과정을 설명한 증언과 맞아떨어진다.

 

지난 1일, 영도에서 만난 박호석씨는 이렇게 말했다. “있었습니다. 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해방 후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기도 했습니다. 그 건물을 허물고 1969년에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박씨가 지목한 곳은 부산 영도구 봉래동2가에 있는 ‘봉래 아파트’ 자리였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근로 보국대 기숙사’라고 불렀다. 근로 보국대는 일제가 시행한 강제동원의 한 갈래였다. 위치를 확정하기 위해 마지막 교차검증을 했다. 1952년 미군이 영도를 찍은 사진을 입수해 똑같은 구도로 영도를 촬영했다. 그리고 두 사진을 천천히 겹쳤다. ‘봉래 아파트’ 위로 또 하나의 건물이 겹쳐졌다. 이른바 ‘나가야식 숙소’라고 불리는 기다란 형태의 ‘목조’ 건물. 영도 ‘근로 보국대 기숙사’였다.

 

1952년 부산 봉래산에서 내려다 본 영도 전경. 붉은색원 부분이 ‘영도 근로보국대’ 자리다./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제공

       지난 1일 영도 봉래산에서 바라본 영도 전경. 붉은색 원 부분이 과거 ‘영도 근로보국대’ 자리다./부산|권도현 기자

 

영도를 소독 장소로 특정하자 신빙성 없어 보였던 증언도 해석됐다. 홍순의는 “부산 건너 대마도라는 데가 있어, 목선 타고 건너가는데 거기가 얼마 안돼요. 인제 거기에 가서 목욕(소독)하는거요”라고 증언했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직선거리는 약 50㎞ 정도인데 이른바 ‘쓰시마 해류’라고 불리는 강하고 빠른 해류가 흐른다. 나무배를 타고 가깝다고 느끼며 왕복했다고 보긴 어렵다. 반면, 부산 중구 일대에서 영도까지 최단거리는 불과 200m정도다. 영도다리가 놓이기 전부터 나무배가 영도와 부산을 이었다. 홍순의가 영도를 대마도로 착각했다고 하면, 증언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다.

 

‘더럽고 불결한 존재’라는 인식
인근 영도로 옮겨 벌거벗겨 ‘소독’
60~70년이 지나도 선명한 치욕

 

그럼에도 반드시 설명돼야 할 의문 한 가지가 남는다. 증언자들이 강제동원 된 시점은 1944년이다. 이때는 이미 영도다리가 있었다. 증언자들은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갔다”고 일관되게 말했다. 답은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 연구위원이 내놨다. “영도다리를 걸어서 건너면 곧바로 일본인 거주지가 나옵니다. 조선인 징용자는 결코 이곳을 지나가지 못했을 겁니다. 일제는 이들을 미개하고 불결한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실제로 일제는 조선인이 ‘전염병’을 퍼뜨릴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 신문 기사 등에는 “조선인은 불결하고 전염병의 온상”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됐고, 이를 근거로 일본인 전용 목욕탕·공원 등의 출입 제한이 이뤄졌다. 결국, 1940년대 관점에서 보면 조선인 강제동원자가 배를 타야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52년 영도 제일교회 주변 모습/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제공

 

위원회 조사관으로 소독 과정에 대한 구술을 받은 허광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 소장은 피해자들의 증언 당시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증언을 듣는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일본으로 도항하기 직전, 알몸으로 벗겨진 채 소독을 당했다고 설명하는 모습입니다. 그 경험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모욕적이었는지 이미 6~70년이 지났음에도 증언자들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일본인도 소독을 받아야 연락선에 오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습니다.”

 

‘강제동원의 길’이 보여주는 것

 

영도에서 소독을 마친 이들은 다시 부산항 제1부두로 끌려 나왔다. 그제야 관부연락선을 탈 수 있었다. 덕수초 → 경기도청 → 조선신궁 → 경성역 → 부산역(현 부산 중앙동 교보생명빌딩) → 영도 근로 보국대(봉래 아파트) → 부산항 제1부두(구 부산 국제여객터미널) → 관부연락선 → 일본 시모노세키로 이어지는 강제동원 주요 경로 중 하나가 비로소 완성됐다. 이 길은 1944년 7월, 서울에서 동원된 김희경이 실제로 걸었던 길이다. 구술록에 기록된 1943~44년 서울 출신 강제동원자들도 거의 예외 없이 같은 동선을 밟았다. 답사 결과, 서울 시내 구간은 도보로 약 2시간, 부산역에서 영도 근로보국대까지는 2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직접 따라가 본 ‘강제동원의 길’은 몇 가지 분명한 의미를 드러냈다. 우선, 도주를 막으면서 목적지까지 신속히 수송하기 위한 최적 경로였다. 예를 들어 집결지로 이용된 여관, 역, 항구는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곳에 있었다.

 

수송 수단으로 사용된 ‘철도’는 조선총독부 산하 철도국에서 관할 하며 감시와 통제를 극대화할 수 있는 도구였다. 철도는 항구와 함께 ‘일제가 한반도를 근대화했다’는 증거로도 활용된다. 그러나 이 철도 위에서 당시 강제동원자들은 목숨을 건 탈출을 했다. 김명환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식으로 탈출을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1942~1945년까지 홋카이도탄광기선주식회사가 노무자 송출 현황을 기록한 ‘부산왕복’이라는 자료에 따르면 1944년 한 해, 경성역에서 부산역으로 이동하던 강제동원자의 탈출률이 42%에 달했다. 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갔다면 설명되지 않는 수치다.

 

이동 과정의 처우 역시 민족 차별적 성격을 드러낸다. 기차로 이동하면서 “객실에 앉아서 갔다”는 증언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인제 어디다가 싣느냐. 짐차여 사람타는 차에는 안 태우고, 소새끼 태우는 곳간이여. 튀지 못하게 할라고, 그거는 인간 타는 데가 아니에요.” 만 15세에 강제동원된 권석순은 기차 안 풍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화물칸으로 수송한 이들을 소독까지해서 배애 태우는 과정을 종합하면, 일제가 당시 조선인 강제동원자을 어떻게 인식했는지가 드러난다.

 

 

경향신문이 분석한 219명 중 176명은 김희경처럼 자신이 끌려갔던 이동과정을 일부라도 구술했다. 이들이 증언한 경로는 크게 평양/서울/춘천/서산/부여/전주 → 대전역 → 부산역 → 부산항 제1부두 → 관부연락선 → 일본 시모노세키, 익산/군산/장성/순천/순창/고흥 → 여수항 → 관려연락선 → 일본 시모노세키, 목포 유달 국민학교 → 목포 선창 → 소안도/추자도 → 제주도/우도 강제동원 등이다. 독특한 점은 관려연락선이 있었음에도 전라도 지역에서 부산으로 이동해 일본으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는 점이다. 조건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부산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가는 정기항로가 경제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면서도 “1944년 후반이면 이미 해안선이 봉쇄돼 이동 중 배가 격침될 가능성이 컸다는 점 역시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근대화론 허구·폭력 흔적 여전한데
후속 연구 없어 방치된 증언들
강제동원, 아직까지 미제로 남아

 

이처럼 강제동원자들의 이동 경로, 증언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많다. 그럼에도 이를 활용한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할 수 없었어요. 증언을 정리해 후속 연구가 가능하도록 해야 했지만 그럴 시간도 예산도 없이 위원회가 해체됐습니다.” 위원회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한 정 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 정부는 이들의 ‘증언’을 확인해 객관적 역사로 남기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광복 후 80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정확히 몇 명이 끌려가서 몇 명이 돌아오지 못했는지조차 모른다.        < 김찬호 김경민 기자 >

 

독립기념관. 인권위, 방통위, 감사원, KBS, 검찰…

그뿐인가...진화위, 동북아 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역사단체들...

 

                                                                             송요훈 편집위원(전 MBC 기자)

 

얼굴값을 한다는 건 결코 칭찬이 아니다. 얼굴은 잘생겼는데 못난 짓을 골라 한다는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생긴 대로 논다는 말도 있다. 그건 외모를 비하하는 게 아니다. 하는 짓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TV 화면에 김건희가 비칠 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최시중이 감히 ‘정명’ 운운하며 모욕 주던 이명박 시절

 

이름값을 하라는 말도 있다. 이름은 근사한데 하는 짓은 영 딴판이라는 거다. ‘정명(正名)’이란 이름값을 하라는 말도 되고 이름값을 못 할 거면 이름을 바꾸라는 말도 된다. MBC 기자 시절에 ‘정명’이란 말을 듣고 심한 모멸감을 느낀 적이 있다.

 

이명박 정권의 첫 방통위원장은 ‘방통대군’으로 불리던 최시중이었다. 이명박의 멘토이고 실세로 알려지며 호가호위하던 최시중은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MBC의 정명(正名)은 무엇인지 돌아보라’는 일장 훈시를 했었다. 그 말은 ‘공영방송의 주인은 국민’이니 하는 헛소리 집어치우고, 주인 찾아 민영화를 하라는 것이고, 정권 비판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는 거였다. 수신료가 아닌 광고가 주요 수입원이지만 콘텐츠에 경쟁력이 있어 광고주 눈치도 안 보고, 사주가 없으니 권력에서도 독립된 ’공영방송 MBC’를 만들려 했고,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던 우리는 최시중 방통위원장의 조롱 섞인 훈시에 심한 모멸감을 느꼈었다.

 

독립기념관장 김형석.

 

유엔묘지에서 풀이나 뽑아야 마땅한 독립기념관장

 

뜬금없이 최시중의 ‘정명’이 떠오른 건 순전히 독립기념관장 김형석의 망언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미화하는 뉴라이트 사관을 갖고 있다는 그는 독립기념관이 주관하는 8.15 광복절 기념식에서 ‘광복은 연합군의 선물’이라는 망언을 했다. 광복이 연합군의 선물이라는 건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것이고 일제 치하에서 노예로 살다가 공짜로 독립을 얻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독립을 기념해야 할 이유가 없고 독립기념관이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독립기념관이 없으니 당연히 독립기념관장이란 자리도 없을 것이다.

 

윤석열이 내리꽂은 ‘뉴라이트’ 독립기념관장 김형석은 역사를 보는 다른 시각도 있고, 그런 시각을 존중하는 것이 통합이라며 자신의 망언을 ‘두둔’했다.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 독립기념관은 일제에 맞서 나라를 찾으려는 독립 투쟁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그의 말대로 ‘광복은 연합군의 선물’이라면 김형석은 독립기념관장이 아니라 유엔묘지에서 풀을 뽑고 휴지를 줍는 자원봉사나 해야 딱 어울릴 사람이다. 그것이 ‘뉴라이트’ 김형석에겐 정명(正名)이다.

 

인권위원장 안창호.

 

미소 속 차별과 비하 숨긴 인권위원장 안창호

 

국가인권위원회는 소수자,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차별을 없애고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기구이다. 그런데 국가인권위원장 안창호는 그 반대로 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마초 기질까지 갖춘 그는 온화한 미소를 띤채 소수자 인권을 부정하고 다양성을 거부하고 차별을 인정하며 여성을 비하하는 행태를 당당하고 태연하게 한다. 그런 사람이 기관장으로 있는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름을 국가차별위원회로 바꿔야 한다. 그게 정명(正名)이다.

 

국가권익위원장  유철환.

 

국가권익위원회는 또 어떤가. 권익위의 이전 이름은 부패방지위원회였다는 것이 말해주듯 권익위의 임무는 부정부패를 예방하고 공직사회의 청렴성을 지키는 거다. 그런 권익위가 대통령 윤석열의 부인 김건희의 디올백 선물에 ‘문제 없음’이란 면죄부를 발부하였다. 그 과정에서 권익위 공직자로서 평생을 부패 방지에 헌신해온 권익위의 부패방지국장은 자괴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반면에 윤석열의 서울 법대 동기이고 친구라는 권익위원장 유철환은 껌딱지처럼 아직도 그 자리에 붙어 연명하고 있다. 유철환이 기관장으로 있는 한 권익위는 ‘부패장려위원회’로 간판을 바꿔 달아야 한다. 그게 또한 정명(正名)이다.

 

방송통신위원장 이진숙.

 

‘엠빙신’ 출신 극우 여전사가 장악한 방통위

 

방송통신위원회의 첫 번째 임무는 방송의 독립성을 지키는 거다. 그런데 방통위원장 이진숙은 어떠한가. 이른바 ‘빵진숙’으로 불리는 이진숙은 공직자로서의 자질 부족은 차치하고, ‘극우 여전사’라는 별명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이진숙은 MBC 보도를 책임진 보도본부장이었는데 ‘엠빙신’으로 불리던 그 당시의 MBC 보도는 MBC 역사에서 최악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윤석열이 방통위원장으로 내리꽂은 극우 여전사 이진숙은 방송의 독립은커녕 KBS와 MBC를 윤석열의 선전도구로 만들려 했다. 윤석열의 지령을 받은 이진숙의 폭주에 법원의 제동이 없었다면 윤석열에게 맞장 뜨던 MBC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석열 치하의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장악위원회였고, 그 산하의 방송심의위원회는 사실상 방송검열위원회였다.

 

KBS 사장 박장범.

 

윤석열·김건희에게 정성을 다했던 아첨꾼 방송 KBS

 

공영방송 KBS의 로고송은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이다. 그런데 윤석열 치하의 KBS는 ‘윤석열에게 정성을 다하는 권력의 방송’이었고 ‘김건희에게 정성을 다하는 아첨꾼 방송’이었다. 지금 KBS 사장은 기자 출신 박장범이다. 그는 앵커 시절에 대통령 윤석열과의 대담에서 김건희가 받은 디올백을 디올백이라 하지 못하고 ‘외국회사의 쬐끄만 파우치’라고 했고, 김건희에게 주었다고 하지 못하고 그 앞에 놓고 왔다 얼버무렸었다. 몸이 자동으로 꼬이고 닭살이 돋게 하는 그 아부성 표현으로 얻은 별명이 ‘파우치 박’이고, 방송가에선 그 덕에 KBS 사장이 되었다는 말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 준조세인 수신료로 운영되는 KBS는 ‘국민에게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으로 돌아가야 하고 ‘파우치 박’이 KBS를 떠나야 한다. 각자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정명(正名)이다.

 

감사원장 최재해.

 

죽은 정권에만 칼질을 해 댄 감사원의 장님 무사 최재해와 유병호

 

내가 알고 있는 감사원은 국민이 낸 세금이 쓰여야 할 곳에 제대로 쓰이는지 살피는 기관이다. 그런데 윤석열 치하에서 감사원은 이전 정부에 대한 정치 보복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임무가 바뀌었다. 공론화로 결정한 탈원전 정책이 잘못되었다며 칼을 들이댔고,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통계는 조작이라며 칼을 들이댔고, 문재인 정부 당시 임명된 기관장을 쫓아내려고 칼을 들이댔다. 그렇게 조자룡 헌 칼 쓰듯 칼을 휘둘러 ‘정치 보복 흥신소’라는 악명까지 얻었지만, 김건희가 연루된 한남동 관저 공사 비리에는 ‘안 보여~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보여~’ 하며 두 눈 뜨고 장님 행세를 하였다. 앉은뱅이 주술사가 어깨 위에 올라앉아 조종하는 장님 무사의 행태가 그러할 것이었다. 감사원을 죽은 권력에는 칼을 휘두르고 산 권력에는 아부하는 간사한 기관으로 전락시킨 최재해 감사원장과, 감사위원으로 지위가 오른 전 사무총장 유병호는 국민 세금으로 월급을 받아가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300만원 어치 아니라 수천 만원 어치 엿 먹어야 할 검찰

 

국민권익위가 ‘김건희 디올백’에 문제없다는 면죄부를 발부하자 권익위 게시판에는 "300만 원 상당의 우리 전통 엿을 선물 드려도 문제가 되지 않을지 문의드립니다" 등등의 조롱 섞인 질문이 쏟아졌다.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일해온 권익위 직원들은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다. 검찰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출장 조사’로 김건희의 비위를 맞추던 윤석열의 검찰은 김건희에게 ‘혐의 없음’ 면죄부를 발부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했지만, 권력과 먼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다수의 검사들은 몹시 부끄러웠을 것이다.

 

윤석열-김건희 부부가 기를 쓰고 거부하던 특검이 발족하고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니 300만원짜리 디올백은 새발의 피였다. 서희건설에선 매관매직 청탁용으로 의심되는 수천 만원짜리 다이아 목걸이를 받았고, 통일교에선 해외 원조 이권과 관련하여 몇천 만원짜리 다이아 목걸이를 받았다. KBS의 ‘파우치 박’ 사장에겐 그 다이아 목걸이도 외국회사의 소소한 장신구일까? 지금도 대통령이 윤석열이라면 권익위도 검찰도 수천 만원짜리 다이아 목걸이 받은 김건희에게 또 면죄부를 발부하지 않을까.

 

이름값 못하는 자들, 집이든 감옥이든 제자리로 보내라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나라는 ‘빅 브라더’가 모든 걸 감시하고 통제하는 독재국가다. 그런데 정부기구의 이름은 그 반대다. 언론을 검열하고 사상을 통제하는 부처는 진리부이고, 반정부활동을 감시하고 사상범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는 부처는 애정부이다. 책을 안 읽는다고 알려진 윤석열이지만 <1984>는 읽은 것 같다.

 

다시 한번 정명(正名)을 쉽게 풀어 말하자면 이름값을 하라는 거다. 아니면 하는 일에 맞게 이름을 바꾸거나. 감사원, 국가인권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KBS 그리고 독립기념관… 이름값을 하도록 해야 한다. 염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염치를 모르면 이름값을 못 한다. 임기제는 임명권자의 눈치나 살피지 말고 각 기관의 임무에 맞게 소신껏 일하라는 것이지 임기 동안에 네 맘대로 해도 된다는 ‘권한 오남용 자격증’이 아니다. 윤석열-김건희 부부가 감옥에 갔듯이 정명에 반하여 권력에 아부하거나 권한을 오남용하던 자들도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집이든 감옥이든.             < 송요훈 기자 >

 

 

사망률 한국 1위, 캐나다 2위, 프랑스 3위, 미국 4위 순

건산연 보고서…한국, 수치 가장 낮은 영국 대비 6.6배


                     건설 노동자가 사망 사고(CG)  [연합]

 

국내 건설업에 종사하는 근로자 1만명당 사고 사망자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제 10대국 평균의 2배인 것으로 나타났다.

 

15일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건설업 사고사망만인율(근로자 1만명당 사망자 비율)은 대한민국이 1.59퍼밀리아드(만분율·이하 단위 생략)로, OECD 경제 10대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이어 캐나다(1.08), 프랑스(0.97), 미국(0.96), 이탈리아(0.92), 스페인(0.72), 일본(0.68), 호주(0.34), 독일(0.29), 영국(0.24)의 순이었다.

 

10개국의 건설업 사고사망만인율 평균 수치는 0.78로, 한국(1.59)이 2배를 넘는 수준이었다.

수치가 가장 낮은 영국과 비교해서는 6.6배로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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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 OECD 주요국 건설근로자 사고 사망자 비율 ] 연합 김토일 기자 

 

아울러 같은 해 건설업을 포함해 한국의 전체 산업 사고사망만인율은 0.39로, OECD 경제 10대국 중 캐나다(0.50) 다음으로 높았다.

 

이어 미국(0.37), 프랑스(0.35), 이탈리아(0.20), 스페인(0.17), 호주(0.14), 일본(0.13), 독일(0.07), 영국(0.04)의 순이었다.

 

10개국의 전체 산업 사고사망만인율 평균은 0.24로, 한국이 약 1.6배로 높은 수준이었다. 한국의 수치는 안전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영국과 비교하면 약 9.8배에 달했다.

 

한국을 포함해 10개국 모두 건설업의 평균 사고사망만인율(0.78)이 전체 산업 평균치(0.24)보다 약 3.3배로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2023년 OECD 경제 10대국 전체산업 및 건설업 사망 사고 지표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보고서 발췌]
 

보고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선진국에서도 건설업은 다른 산업보다 위험한 것을 알 수 있다"며 "국내 건설업의 사고 저감을 위해서는 건설업과 전체 산업 간의 안전 수준 격차를 줄이는 산업 차원의 전략, 국내 전체 산업의 안전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국가 차원의 종합적 전략이 병행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구체적으로 산업 차원에서 건설업은 옥외 작업, 근로자 고령화, 사업 구조의 복잡성 등 다양한 변수로 위험 요인이 많고 불확실성이 높은 산업인 만큼, 산업적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안전 관리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보고서는 제언했다.

 

국가 차원에서는 일상 속 생활 습관부터 안전을 고려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고, 사회 전반에 안전이 최우선 가치로 자리 잡도록 하는 범국가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고서는 강조했다.

 

그러면서 "산업 현장을 포함한 가정·학교를 아우르는 전 생애 주기 안전 문화 혁신을 통해 안전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 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 홍국기 기자 >

 

광복 80돌 기획 ‘식민사학서 시민사학으로’ ⑤-1

독도 삭제하고, 4세기 이전 신라·백제 존재 부인
한사군 한반도설, 일제 임나일본부설 버젓이 부활
동북공정에 활용된 중국 측 역사지도 무비판 수용

"외국 사료 참고" 삼국사기·삼국유사 기록은 무시
7년 뒤 결과물도 없이 추가 예산 요청…국회 조사
서강대-연세대, 사업 좌초된 뒤 1648만원만 반환

 

광복 80돌이 됐건만 대한민국 역사는 여전히 '식민사학'의 주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뉴라이트와 극우 파시즘의 변이과정을 거치면서 21세기 한복판에도 아스팔트 위를 배회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엉킨 실타래일까? 인문연구가 이병권 씨가 멀리 에도 막부시대에 파종돼 메이지시대 인공재배된 식민사학이 어떻게 '친일'의 뇌리에 이식됐는지 돌아보았다. 

 

게재 순서는 ① 에도 막부가 준비한 '미래' ② 과학 위장한 실증주의 사관 ③ '제국주의 사생아' 조선사편수회 ④ 첫 단추부터 잘못 꿴 '해방 이후' ⑤ 되살아난 유령1, 동북아 역사지도 ⑤ 되살아난 유령2, 전라도 천년사 ⑥ '시민사학'으로 광복 백주년 준비하자

 

 

광복 80주년인 15일 광복회가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주최한 '국민과 함께하는 광복대행진'에서 참가자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하고 있다. 2025.8.15. 연합
 

강단학계 60여 명이 참여, 결과물 없이 좌초

 

 

강단 학계는 이병도(李丙燾, 1896~1989)와 신석호(申錫浩, 1904~1981) 사망 이후에도, 조선사편수회를 계승한 스승들의 유산인 식민사학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2000년대에 발생한 두 가지 사건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첫째, 2008년부터 2016년까지 동북아역사재단이 국고 47억 원을 지원해 추진한 ‘동북아 역사지도 제작 사업’, 둘째, 전라남도·전라북도·광주광역시가 24억 원을 들여 공동 추진한 ‘전라도 천년사’ 편찬 사업입니다. 두 사업은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국책사업일 뿐 아니라, 식민사학의 본색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입니다. 재야사학계, 시민단체, 지역 향토 사학자들의 강한 비판에 직면해 결국 좌초된 공통점도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 역사학이 여전히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 핵심 내용이 뉴라이트 역사관과 사실상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동북아역사지도 제작 사업은 2008년 5월 편찬 사업단의 출범과 함께 시작됩니다. 국회에서 본격적 논란이 벌어진 2015년 5월 이후 여러 번 수정본과 최종 결과물이 제출되었지만, 심사 결과 부적격 판정을 받아 최종적으로 좌초된 역사편찬 사업이었습니다. 좌초되기까지 47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습니다. 당초 이 사업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국가적 대응이라는 동북아역사재단의 명분과 목표를 가장 잘 드러내는 목적 사업으로 주목받았습니다. 하지만 무려 7년여 동안 지도 제작 작업을 늦추다가 생뚱맞게 추가 예산을 요청, 국회의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국회 특위 회의에 제출된 ‘동북아역사지도’는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고조선 멸망부터 고구려 전기 일부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북부가 중국 영토로 표기되었고, 낙랑군·한사군을 평양 지역으로 표기했으며, 임나일본부설과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근거했다는 지적도 받습니다. 결정적으로 독도를 빠뜨렸습니다. 되레 중국 역사학자 담기양(谭其骧, 1911~1992)이 1982년에 작성한 역사지도 《중국역사지도집》(中国历史地图集, 1955~1988)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했습니다. 담기양은 중원 왕조 중심의 지도를 탈피하여 전체 중국 역사 범위를 포괄하는 지도 제작 기준을 세운 인물입니다. 과거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라도 현재 중국 영토 범위 안에 있으면 중국 역사라고 인식합니다. 담기양의 역사지도집은 동북공정 역사관에 그대로 수용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47억 원의 국민 혈세가 우리의 역사적 정체성을 오히려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80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2025.8.15. 연합
 

국회서 맞붙은 강단학계 vs 재야학계

 

 

‘동북아역사지도 제작사업’에는 전국 대학에서 총 60여 명의 교수와 연구자가 참여했습니다. 주요 편찬위원은 운영위원장 윤병남 교수(서강대, 동양사), 상임위원 김유철 교수(서강대, 동양사), 배기환 교수(서울교대, 한국 고대사), 배웅성 교수(서울시립대, 역사지리) 등이었습니다. 또한 전문위원회별로 한국 고대사 분야에 노종국(전 계명대 교수) 외 12명, 고고분과 소위원회에 성장용 교수(경북대) 등 6명, 북아시아 전문위원회에 김홍동 교수(서울대) 등 5명, 동아시아 선사 전문위원회에 김병준 교수(서울대) 등 4명이 각각 참여했습니다.

 

 

별도 편찬위원회에는 한국사 분야에 하일식 교수(연세대) 등 4명, 중국사 분야에 김병준 교수(서울대) 등 9명, 일본사 분야에 김선민 교수(숙명여대) 등 9명이 담당했습니다. 이 사업은 본래 서강대-연세대 컨소시엄이 동북아역사재단으로부터 수주한 것이었지만, 참여진의 면면을 보면 한국 고대사 학계 전체가 참여한 프로젝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60여 명의 학자들이 7년여간 작성한 지도가 결국 평가 미달로 좌초된 것은 매우 심각한 과오로 지적되어 마땅합니다.

 

 

사업 시작 후 7년이 지나도록 중간 결과조차 내놓지 않은 학계 컨소시엄은 동북아역사재단을 통해 추가 예산을 요청했고 재야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긴급 점검 요구가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국회 ‘동북아역사왜곡 대책 특별위원회’는 2015년 4월 17일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사업 관련 논의’를 주제로 회의를 열었습니다. 김세연 위원장(새누리당), 임내현 의원(민주당 간사), 이상일 의원(새누리당), 도종환 의원(민주당) 등 17명이 참여했고, 증인으로 임기환 교수(서울교원대)와 이덕일 소장(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이 출석했습니다. 회의에서 제기된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조선(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왜 평양으로 표시했는가?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한사군을 왜 한반도 북부에 위치시켰는가?

4세기 이전 한반도 지도에 왜 신라와 백제가 누락되었는가?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른 것은 아닌가?

독도가 왜 지도에서 누락되었나?

담기양의 지도를 수용한 근거는 무엇인가?

 

 

김세연 위원장 주재한 회의는 이덕일 소장의 문제 제기, 임기환 교수의 답변, 그리고 여·야 의원들의 질의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국회 회의 동영상과 속기록을 기반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패수=청천강, 열수=대동강 비정

 

 

이덕일 소장이 첫 번째로 제기한 지도의 문제점은, 동북아역사지도에서 제시한 고조선·한사군·낙랑군의 위치도가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中国历史地图集, 1955~1988)의 해당 부분과 사실상 동일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 지도를 근거로 북한 지역이 과거 자국 영토였다고 주장합니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王儉城)의 위치를 가늠하는 패수(浿水)를 청천강으로, 열수(列水)를 대동강으로 각각 비정하고, 한반도 북부에 낙랑군을 배치한 것입니다. 이 소장은 여기에 덧붙여 ‘열수’의 위치에 대해 《후한서(後漢書)》에서 “열수재요동(列水在遼東)”이라 하였음을 근거로, 열수라는 강은 요동에 있었다고 전제하면서 동북아역사지도가 《후한지(後漢志)》나 《삼국지(三國志)》 등 중국 고서의 기록을 충분히 검토했는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또한 해당 지도가 반영하고 있는 서기 221년~265년의 시기는 중국에서 위·촉·오 3국이 치열하게 각축하던 때인데, 조조의 위나라가 한반도 중부, 즉 경기도까지 지배했다는 논리가 가능한지 따져 물었습니다.

 

 

 

담기양의 '중국 역사지도'(왼쪽)와 '동북아역사지도'에서 비정한 낙랑군의 위치.

 

 

<그림 1>의 담기양 지도와 <그림 2>의 동북아역사지도가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가 건설했다는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이 두 지도 모두에서 똑 같이 대동강 유역에 제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낙랑군의 속현(屬縣)이던 조선·패수·증지·점제·열구·누방·사망·둔유·대방·해명·제해 등의 위치가 두 지도 모두에서 동일하게 표기되었다는 점입니다. 담기양의 지도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낙랑의 위치를 대동강 유역으로 비정한 것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것을 동북아역사지도 제작진이 다시 빌어와 고대 한국의 지도라고 ‘역사화’한 것입니다.

 

 

임기환 교수는 “이 지도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며, 계속 검토·수정하는 과정에 있다. 지적한 부분들은 아직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고, 한국 측 입장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며, 중국 역사지도를 모방한 것은 아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무려 7년간 작업한 지도가 중국의 동북공정 지도와 흡사하다는 지적에 대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모방한 것이 아니라면 그 증거와 근거를 제시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임기환 교수는 이에 대한 추가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제80주년 광복절 전야제'에서 독립 영웅들의 초상을 하늘에 그려내는 대규모 드론쇼가 펼쳐지고 있다. 윗줄 가운데부터 시계방향으로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남자현 선생, 안중근 의사, 권기옥 선생. 2025.8.14. 연합
 

세로로 그어진 고구려 국경

 

 

이덕일 소장은 또 동북아역사지도에서 초기 고구려 국경선이 상식과 달리 세로로 그어진 것에 강한 의구심을 제기했습니다. “지도 6쪽 ‘고구려의 성장기(120~300년)’를 보면, 고구려와 한나라의 국경선이 세로로 그어져 있습니다. 고대 국경선은 항상 산이나 강을 경계로 설정됩니다. 그런데 이 국경선 바로 위에는 압록강이 있고, 그 북쪽에는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장백산맥이 있습니다. 강과 산맥을 가로지르는 국경선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임기환 교수는 “저는 장성선(만리장성)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경계선으로 그린 것입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즉, 지도에 한반도 내로 뻗어 있는 굵은 선은 담기양이 그린 만리장성이 아니라, 고구려와 한나라의 경계선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림 3>의 지도에 만주 북쪽에서부터 한반도 내로 뻗어 있는 굵은 선은 담기양이 그린 만리장성이 아니라, 고구려와 한나라의 경계선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담기양은 왜 중국 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비합리적인 지도를 그렸을까요? 그 이유는 고구려의 요동반도 장악을 인정하면 한반도 내 낙랑군과 한사군의 존재를 설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담기양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 멸망부터 서기 314년 낙랑군 멸망까지 한반도 북부가 중국의 식민지였음을 지도에 반영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기환 교수를 비롯해 동북아역사지도 제작에 참여한 한국 고대사 전공자들이 이러한 배경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이들이 담기양의 지도를 거의 그대로 옮긴 의도는, 고대 중국의 한반도 북부 점령을 ‘확정된 역사’로 지도에 박제하려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덕일 소장은 “왜 이런 지도를 그렸습니까?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다 차지했다고 보면, 한반도 내에 낙랑군과 한사군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 아닌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임기환 교수는 사료적 근거와 제작 이유 대신 “결론의 유사성만으로 식민사관과 동북공정을 추종한다고 매도하는 것은 학문적 태도가 아닙니다. 특히 이병도의 견해와 유사하다고 해서 식민사관 추종자로 표현하는 것은 한국 역사학계를 매도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학문적 양식이란 강변만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주장의 근거와 논리를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임기환 교수는 청문회 내내 ‘한국 사학계의 방대한 자료와 한국·중국의 사료’라는 추상적 표현만 반복했을 뿐, 구체적인 사료와 그 타당성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이덕일과 임기환의 1대1 토론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덕일: “고구려가 한나라와 국경선을 세로로 긋는 사료적 근거가 무엇입니까?”

임기환: “이 시기 자료를 검토했을 때, 고구려가 경략하고 있던 영역의 교통로를 중심으로 기점을 찾았습니다.”

이덕일: “아니, 그 사료가 대체 무엇이냐는 겁니다. 1차 사료!”

임기환: “《삼국사기》 《삼국지》 자료들입니다.”

이덕일: “고구려 태조왕이 요서에 10개 성을 쌓고, 모본왕이 어양·성곡·북경을 공격한 것은 《삼국사기》와 《후한서》에도 나옵니다. 그것은 인정 안 합니까? 그런데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산맥을 가르고 강을 넘어 국경선을 정했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서 바로 자료를 띄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임기환: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지》 자료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동북아 역사지도 중 '고구려의 성장 120-300'을 설명한 지도. 요동반도가 중국 영토로 돼 있다.

 

 

고조선과 관련된 ‘패수(浿水)’와 ‘열수(列水)’의 위치 문제는 고대사 연구에서 매우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고조선과 낙랑 등 한사군의 위치,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의 위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두 지명 모두 『사기(史記)』 『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 등 중국 사서에 등장하며, 주로 한(漢)나라와 위만조선, 낙랑군 관련 사건의 지리적 배경으로 언급됩니다.

 

 

먼저 패수(浿水)의 위치 문제를 살펴보면 중국 역사서인 『사기』 「조선열전」과 『한서』 「조선전」 등에 등장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08년 한무제의 고조선(위만조선) 공격 당시 수도 왕검성(王險城) 부근에 ‘패수’가 흐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나라 군대가 바로 이 패수를 건너 고조선군과 전투를 벌였다고 전합니다.

 

 

민족사학계에서는 박은식, 신채호를 시작으로 최형석, 윤내현 등은 이 중국 사서를 인용하여 고조선과 한사군, 특히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합니다. 반면, 일본 식민사학(이케우치 히로시, 이마니시 류)과 이를 계승한 이병도·신석호 등은 패수의 위치를 현재 북한 지역의 청천강 유역으로 비정합니다. 청천강 설을 받아들이면 왕검성이나 낙랑의 위치는 요동이 아닌 평양 지역이 됩니다. 식민사학에서는 이를 평양 중심설의 근거로 제시, 고조선의 남하 및 축소를 정당화합니다.

 

 

다음은 열수(列水)의 위치 문제입니다. 열수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경계 하천으로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으로 주목받는 지점입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 『수경주(水經注)』 등에 위치 기록이 있습니다. 『후한지(後漢志)』 「군국지(郡國志)」에 따르면 “열수재요동(洌水在遼東)”이라고 하여 열수가 요동에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식민사학계와 이병도 등은 평양 인근 대동강 지류를 열수로 주장합니다.

 

 

패수·열수 비정은 단순한 지리 문제가 아니라, 고조선과 한사군, 고구려 초기 활동 무대를 어디로 설정할지에 직결됩니다. 일제 식민사학은 이를 평양 일대로 국한시켜 한사군이 한반도 깊숙이 자리했다는 서술을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이병도를 비롯한 조선사편수회 출신 학자들도 이를 계승하지만, 사료적 뒷받침이 없습니다.

 

 

식민사학은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유적을 근거로 들지만 분단 이후 유적지 접근과 확인이 가능했던 북한 역사학계에서는 북한 전역의 고분과 유물·유적 발굴을 통해 열수의 대동강, 패수의 청천강 설은 근거가 없다고 수십 년 전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출토된 한나라나 낙랑 추정 유물·유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순회 중 사망한 일부 단군의 묘이거나 한나라와의 교역 증거 정도로 평가합니다.

 

 

사라진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성장 120-300년’ 지도는 또 다른 문제점을 보여줍니다. 이 지도에 따르면 서기 300년 전까지 백제는 물론 신라와 가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쓰다 소키치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 모두를 무시한 채, 고구려는 태조왕(재위 53년-146년) 또는 서천왕(재위 270년-292년), 백제는 고이왕(재위 234년-286년) 또는 근초고왕(재위 346년-375년), 신라는 눌지왕(재위 417년-458년) 또는 내물왕(재위 356년-402년) 시기에 건국했다고 주장합니다. 일본 야마토 왜가 4~6세기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제기한 쓰다 소키치 등 식민사학자들의 영향이 아닌지 의심이 가는 부분입니다. 이덕일 소장은 청문회에서 이에 대해 강한 문제 제기를 했고, 이에 대해 임기환 교수는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불신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저와 학계는 이를 따르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주변국이나 타민족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 보다 균형 있는 학문적 접근을 위해 다른 문화나 역사를 균형 있게 살펴보는 역사 연구의 흐름이 있다”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매우 모호한 태도입니다. 자신이 말하는 다른 국가나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어떻게 균형 있고 종합적으로 연구하는지, 그 객관적인 사료적 근거나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함구한 채 ‘객관성’만을 주장합니다. 주장대로 주변국의 역사적 사료를 더 중요하게 판단한다면 경우에 따라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이 우선순위에서 배제될 수도 있다는 해석의 여지가 남는 부분입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지난 28일 시민 80명이 독도 동도 선착장에서 가로 30m, 세로 20m 크기의 초대형 태극기를 펼치고 있다. 2025.6.30 [서경덕 교수 제공] 연합
 

끝내 누락한 독도

 

 

국회 청문회를 지켜보던 국민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국내 내로라하는 역사학자들이 만든 역사지도에서 독도를 삭제한 대목일 것입니다. 김세연 위원장을 비롯해 여러 의원이 이에 대해 질의했습니다. 임기환 교수는 “독도가 역사지도에서 삭제된 것은 지도 제작 중 기술적인 문제에서 빚어진 단순 실수”라고 수정·보완을 거듭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몇 차례 수정된 지도에서도 끝내 독도는 동북아역사지도에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김세연 의원(새누리당)은 2017년 6월 14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도종환 의원(민주당)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합니다. 도종환 후보자에게 질의 겸 당부 발언에서 “2015년 4월 동북아역사지도에서 독도가 누락된 이유에 대해 당시 임기환 교수는 이를 제작상의 단순 기술적 실수라고 변명했으나, 이후 조사 과정에서 기술적 실수가 아닌 의도적 누락임이 밝혀졌고, 저와 도종환 의원을 공개 비난했던 한국고고학회 회장 연세대 하일식 교수는 2015년 11월 10일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지도에서 독도 누락은 단순 실수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표시하지 않은 것’이라고 실토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지도 제작 과정에서 참고한 49종의 참고 자료 중 이병도 저작이 30종이고, 사실상 중국 문헌 등은 인용하지 않았다. 대단히 폐쇄적인 집단적 의식하에 작성한 것”이라고 지적하며, 장관으로 임명되면 이들의 압력에 굴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동북아역사지도 제작진이 독도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신라 『삼국사기』 지증왕 13년(512년)의 우산국 복속 기록은 물론, 일본 메이지 정부 시절인 1876년 3월 20일 총리실 산하 태정관 지령에서 명시한 “일본해(동해) 내 독도와 열도(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다”라고 명시한 것도 무시한 처사입니다. 민족적 문제를 넘어 역사학의 기본 기록조차 무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메이지 정부 태정관은 "독도와 울릉도는 일본땅이 아니다"라고 기록했다. 

 

 

언론의 ‘사이비 역사학자’ 비난

 

 

조선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등 주요 언론은 국회 청문회에서 동북아역사지도의 문제점을 제기한 이덕일을 비롯한 재야사학계를 ‘사이비 역사학자’로 규정하며, 청문회에서 제기된 문제점보다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망동’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강단사학계의 일방적 주장만을 지면에서 강조했습니다.

 

 

조선일보(2017.6.5)는 “유사역사학에 경도된 사람들의 문제는 … 대화나 토론이 안 된다”고 비난했고, 한국일보(2017.6.5)는 “식민사학이라는 누명 때문에 50억 들여 만들었던 역사 프로젝트가 무산됐다”고 보도했습니다. 경향신문(2017.6.5)은 “낙랑군의 위치가 한반도 서북부였다는 설은 오랜 기간 검증된 통설”이라 했지만, 그 통설의 형성 시기와 근거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한겨레21 길윤형 편집장(2017.7.6)은 “북한 지역에서 2,600여 기의 낙랑 고분이 확인되어 대부분의 한국 고대사 학자들이 평양 인근으로 비정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북한 역사학계는 이를 전면 부인하고 있습니다.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리지린은 1963년 평양과학원출판사에서 펴낸 저서 『고조선 연구』에서 한사군이 북한 지역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입증했습니다. 또 북한 고고학자 안병찬(安炳燦)은 1995년 『조선고고연구』 제4호에 게재한 논문 「평양 일대 낙랑유적의 발굴정형에 대하여」에서 “일제가 2600여 기의 고분을 발굴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이 과장됐을 뿐 아니라 이 발굴 로 해당 지역에 낙랑이 실재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기성 언론은 강단 학자들의 일방적 주장에만 의존하며 재야 학계의 주장을 확인하기는커녕 반론 기회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사이비’라는 용어로 특정 집단을 공격해 그 사회적 지위를 박탈하려던 시도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총독부가 1923년 ‘사이비 종교 단속령’에서 대종교와 천도교를 ‘사이비’로 규정, 민족정신의 중심을 해체하려던 음모였습니다. 언론이 ‘사이비’라는 용어를 역사 논쟁에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용어 자체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것입니다.

 

토론회 발언록서 드러난 '민낯'

 

2011년 7월 6일 대전 유성호텔에서 열린 동북아역사지도 7차 학술토론회에서는 참석자들의 발언이 회의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국회 청문회에서 공개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노태돈 교수(서울대)는 “기원전 8~7세기에 단군조선은 없었다”고 단언했습니다. 필자는 이 발언을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에 의해 멸망한 고조선의 존재가 별것 아니었다는 의미에서 한 발언으로 받아들입니다. 아마도 노태돈은 기원전 8세기 이전에도 고조선의 실체는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단군이나 고조선은 신화적 내용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노태돈의 스승인 이병도가 그랬고, 이병도의 스승인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병도는 말년에 평생의 학문적 입장을 바꾸어 ‘단군과 고조선은 실재한 역사였다’라고 조선일보(1986.10.9.)에 기고하며 평생 자신의 학설을 뒤집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같은 한국의 정통 사서를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삼국유사』는 기원전 2333년을 고조선의 건국으로 기록했고, 『삼국사기』 또한 이러한 내용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1915년 10월, 일제가 한일병합 5주년을 기념해 경복궁에서 연 조선물산공진회 때 근정전 앞에 내걸린 일장기.   나무위키

 

송호정 교수(교원대)는 “요서 지역은 선용(鮮虞)·동호(東胡)의 거주지역으로 보아야 한다”는 발언을 남겼습니다. 고조선의 강역을 요서와 요동으로 구분하고, 동이족을 요동에 국한하는 동시에 동이족을 선용과 동호와는 다른 민족으로 분리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고조선 강역 안에서 민족을 구분한 것은 고조선 자체를 무시하려는 의도라고 보입니다.

선용은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5~3세기)에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서부 일대에서 존재했던 소규모 제후국입니다. 또 동이(東夷)족은 중국이 자국 동쪽과 동북쪽의 여러 종족을 통칭한 명칭으로, 바로 한국인의 선조입니다. 『사기』, 『후한서』와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일부 구절에서 동호를 동이족 범주 안에 넣어 설명합니다. 선용은 동호 문화권의 한 소국, 동호는 동이의 한 갈래로 간주될 수 있는 집단이라는 구조로 연결됩니다. 송호정의 발언은 우리 민족 선조의 구조와 범위를 의도적으로 축소·왜곡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임기환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지도를 제시하여 고조선의 특별성을 약화시키자”고 제안했습니다. “동부여의 범위를 훈춘 중심으로 최대한 축소하자”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이 회의록에 기록된 임기환의 발언은 국회 동북아역사특위 토론회에서 질책을 받았습니다. 이상일 의원(새누리당)을 비롯한 여러 의원이 임기환이 말한 ‘고조선의 특별성을 약화시키자’는 발언의 의도를 물었습니다. 임기환 교수는 “자신의 발언은 고조선의 격을 낮추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변국과 보다 균형 있게 해석하자는 의도였다”고 해명했으나, 의원들의 질책을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자국의 역사적 특수성을 부각하지 못할망정, 그 특별함을 낮추자는 발언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매우 부적절한 발언입니다. 어쩌면 국회의 공청회 개최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회의록에 담긴 내용이 의원들에게 제출된 까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적 정체성을 부정하고, 한민족 범위를 축소하며, 자국을 침략한 타국 침략자를 미화하는 의식 구조를 보여준다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한 발언들입니다.

 

2021년 5월 항소심 판결에 따라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은 공식 종료되었습니다. 서강대와 연세대는 교육부와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비 환수 조처에 반발해 소송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교육부와 동북아역사재단 측이 소송전에 돌입하면서 요청한 환수액을 국고로 지원한 47억 원이 아닌 10억 원으로 정했습니다. 처음부터 환수액 전체가 아닌, 불과 1/4 수준에서 출발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1심 결정 금액을 수용한 서강대는 1,600만 원을 반환했고 연세대는 1심 결정액 4억 5000만 원을 항소심에서 48만 4000원으로 낮췄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상고를 포기함에 따라 확정된 반환 금액입니다. 47억 원 예산에 비하면 환수액이 채 1%도 되지 않았습니다. 애초 교육부와 동북아역사재단이 연구비를 회수하겠다는 의지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교육부와 동북아역사재단이 동북아역사지도 내용에 사실상 동의했으나, 국회의원들의 완강한 비판에 밀린 결과라는 인상마저 줍니다. 국회와 재야 학자의 비판이 없었다면 이 역사지도는 버젓이 교과서에 실리고 ‘국가 인증 역사 기록물’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지속되었다면, 광복 80주년을 맞은 2025년에 역사기관장들을 통해 교과서 개편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좌초된 동북아역사지도 결과물이 부활하여 “고대 한반도는 중국·일본의 식민지였다” “한국은 원래 여러 부족 국가가 분열된 약소국이었고, 고대 문명은 외부 영향으로 생겼다”는 식의 친중·친일 사관이 교과서에 실리는 불상사가 벌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해 나선 ‘빛의 시민’들의 힘으로 이러한 흐름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역사를 둘러싼 혼란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그들만의 역사 카르텔 구조를 바꾸어야 합니다. 뉴라이트 세력과 그들의 역사관에 대해 역사적 책임을 명확히 하고, 공적 검증과 평가를 거쳐야 합니다. 식민사학의 뿌리를 재점검하고 민주 시민의 정체성이 굳건한 건강한 역사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우리 모두의 공동 과제입니다.

 

오세훈 서울 시장과 독립유공자 후손, 어린이 합창단원 등 참석자들이 15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린 '제80주년 광복절 기념 타종행사'에서 만세삼창을 외치고 있다. 2025.8.15. [공동취재] 연합

 

사건 연표

2008년: 국고 47억 원 확보, 역사지도 사업 시작

2012~2014년: 지도 초안 제작 및 내부 검토

2015년: 초안 공개, 낙랑군·독도·임나일본부설 등 왜곡 지적

2016년 4월: 국회 관련 회의 개최, 제작 책임자 증인 출석

2016년 하반기: 최종 지도 ‘D등급’ 평가, 사업 종료 및 일부 비용 환수 결정

2017년 이후: 부당 집행 연구비 환수를 위한 소송 시작 (원고: 동북아역사재단, 피고: 서강대·연세대)

2019년: 1심 판결 반환액 연세대 4억 5천여만 원, 서강대 1600만 원

2021년 5월: 항소심 판결 연세대 48만 4000원. 동북아역사재단의 상고 포기로 확정

 

참고자료

국회 속기록, 『동북아역사특위 국회 청문회, 2015.4.17.

동북아역사지도+국회+토론회 유투브 방송.2015,7.17.

박성현, 『고조선 고고학과 동이족 연구』, 소명출판, 2021.

안병찬, 「평양일대 낙랑유적의 발굴정형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제4호,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1995.

이덕일, 「이덕일의 역사의 창: 계속되는 역사전쟁」,《서울신문》,2017년 7월 8일

조선일보, 「유사역사학에 경도된 사람들의 문제~」, 2017.06.05.

한국일보, 「식민사학이라는 누명~」, 2017.06.05.

경향신문, 「낙랑군의 위치가 한반도 서북부였다는 설은 역사학계의 통설」, 2017.06.05.

한겨레21, 「북한 지역에서 진행된 고고학 발굴 결과 낙랑 고분이 확인된다~」, 2017.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