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고 이희호 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1주기 추도식에 차남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왼쪽), 삼남 더불어민주당 김홍걸 의원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고 이희호 여사 유지 각자 다른 주장...해묵은 갈등이 ‘유산 문제’로
김홍업 “2017년 유언장대로 이행해야”
김홍걸 “유언장 효력 없어, 유일한 상속자는 나”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이희호 여사 부부의 유산을 두고 차남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과 삼남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의원간의 갈등의 골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습니다. 김 의원은 지난 2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7년 이희호 여사의 유언장은 무효이며, 동교동 사저의 유일한 상속자는 자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틀 뒤인 25일 김 이사장은 입장문을 내어 “김 의원의 기자회견 내용은 거짓”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고 이희호 여사의 유산을 둘러싼 각자의 주장이 어떻게 엇갈리는지, 갈등의 이면에는 어떤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지 짚어봤습니다.
2017년 유언장과 김홍걸 의원의 주장
김홍업 이사장은 25일 입장문과 함께 고 이희호 여사의 유언장과 삼형제의 확인서 원문을 공개했습니다. 이희호 여사가 별세하기 2년여 전인 2017년 2월에 작성된 유언장으로, 김홍일·김홍업·김홍걸 세 형제의 날인이 찍혀있습니다. (김홍일 전 의원은 건강상의 문제로 부인이 대신 날인했다고 합니다.)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 노벨평화상 상금 8억원을 김대중기념사업회에 전부 기부하며 김대중 대통령의 뜻을 계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한다.
나. 부동산은 김대중·이희호 기념관으로 사용한다. 만약 지자체 및 후원자가 매입하여 기념관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그 보상금(매매대금)중 1/3은 김대중기념사업회에 기부하며, 나머지 2/3는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에게 균등하게 상속토록 한다.
-6월23일 김홍업 이사장이 공개한 2017년 유언장 중
여기서 의미하는 부동산이 바로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자리한 김 전 대통령의 사저입니다. 당시 세 형제는 증인과 집행인의 배석 하에 위와 같은 사항에 합의했고, 유언장에 서명했습니다. 그러나 유산 상속 갈등이 불거진 뒤 지난 23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홍걸 의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이희호 여사님은 ①노벨평화상금은 김대중 기념사업을 위해 사용하고, ②동교동 자택은 김대중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소유권은 상속인인 김홍걸에게 귀속하도록 하되, 만약 지자체나 후원자가 있어 매각을 할 경우 그 대금의 1/3을 김대중 기념사업을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 대금을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이 1/3씩 나누라는 유지를 남기셨습니다.
-6월23일 김홍걸 의원 기자회견문 중
두 사람의 주장에서 몇 가지 다른 점이 눈에 띕니다.
첫째, 김홍걸 의원이 주장한 이희호 여사의 유지에는 2017년 유언장과 달리 ‘소유권은 상속인인 김홍걸에게 귀속하도록 하되’라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동교동 자택의 유일한 상속인으로 삼남인 김 의원을 명확히 지정했다는 주장입니다. 둘째, 2017년 유언장에서는 노벨평화상 상금과 부동산 매매대금 일부를 ‘김대중기념사업회에 기부한다’고 명시한 반면, 김 의원은 이를 ‘김대중 기념사업을 위해 사용한다’고만 밝히고 있습니다. 상금과 부동산 매매대금 일부를 ‘김대중 기념사업회’에 ‘기부한다’며 대상과 행위를 명확히 명시한 유언장과는 달리 김 의원 쪽은 ‘김대중 기념사업을 위해 사용한다’고 보다 폭넓게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25일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공개한 고 이희호 여사의 유언장. 김홍업 이사장 제공.
김 의원은 2017년 유언장은 적법한 법적 절차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합니다. 지난 23일 기자회견에서 김 의원의 대리인으로 나선 김정기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공동의장은 “구술 증서에 의한 유언의 경우 1주일 이내에 법원에서 검인 절차 밟아야하는데, (2017년 유언장은) 절차를 밟지 않아서 무효가 됐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법적 효력 유무를 떠나서, (해당 유언장에) 유지가 담겼다고 판단을 하고 김홍걸 의원은 유지를 받들고자 한다”고 부연했습니다. 또한 ‘부친이 사망할 경우 전처의 출생자와 계모 사이의 친족관계는 소멸하는 것으로 한다’는 민법을 근거로, 김 의원은 자신이 이 여사의 유일한 법정상속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고 이희호 여사의 유일한 상속인은 자신이며, 김대중 기념사업회나 김대중 평화센터가 아닌 별도의 재단을 만들어 이희호 여사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것입니다. 김 의원 쪽은 또한 “김 의원이 노벨평화상 상금을 임의로 사용했다”는 김홍업 이사장의 주장에 대해서도 “동교동 사저 상속세로 일부 지출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김홍업 이사장은 25일 입장문을 내어 김 의원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김 이사장은 “이희호 여사가 유언장에 ‘동교동 자택을 소유권 상속인인 김홍걸에게 귀속하도록 했다’는 문구는 유언장 내용에 없는 것을 조작한 거짓말”이라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또한 김 의원이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유언을 이행하겠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어머니는 동교동 사저 대금 일부와 노벨평화상 상금을 ‘김대중 기념사업회’로 특정하여 기증하도록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노벨상 상금과 사저 매매대금이 김홍걸 의원에게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김대중 기념사업회에 기부 형식으로 귀속된다는 취지입니다. 또한 김 의원이 평화상 상금 일부를 상속세로 사용했다는 설명에 대해서도 “민주주의·평화·빈곤퇴치를 위해 쓰여야 할 노벨평화상 상금을 상속세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지난 2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김홍걸 의원의 대리인 조순열 변호사(오른쪽)와 김정기 민화협 상임이사가 23일 재산상속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발언하고 있다.
유산 문제로 불거진 두 형제의 갈등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이희호 여사의 유산을 둘러싼 갈등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시점은 이희호 여사가 별세하고 두 달여 뒤인 지난해 8월입니다. 김홍업 이사장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당시 서울시에서 동교동 사저를 매입해 기념관으로 조성하기 위해 김대중 기념사업회와 논의를 거치고 있었는데, 김홍걸 의원이 ‘자기가 유일한 상속인’이라고 주장해 관련 논의가 중단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김홍업 이사장이 법원에 동교동 사저에 대한 ‘부동산처분금지가처분’ 신청을 했고, 법원은 지난 1월6일 이를 인용했습니다. 이후 김 의원은 가처분이 부당하다며 가처분이의신청서를 제출한 상태입니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사태의 이면에 김 이사장과 김 의원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선 김홍업 이사장은 지난 2016년 민주당을 탈당하고 국민의당으로 입당한 동교동계 중진 의원들과 가까운 사이입니다. 김 전 대통령의 참모이자 현재 김대중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내고 있는 권노갑 전 국회의원 역시 당시 국민의당에 합류해 상임고문 등을 지낸 바 있습니다. 반면 김홍걸 의원은 당시 민주당 탈당파를 향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름을 호남 분열과 갈등의 수단으로 삼지 말라”고 비판하며 더불어민주당으로 입당했습니다.
김홍업 전 의원이 이사장으로 있는 김대중평화센터와 김홍걸 의원 사이의 갈등은 지난해 이희호 여사의 추모식 비용 지급 문제에서도 드러난 바 있습니다. 당시 현충원 추모식에 쓰인 장례비용 일부가 미납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김홍걸 의원은 김한정·설훈 의원등과 함께 입장문을 내어 “김대중 평화센터가 사회장(추모식) 비용을 지급하지 않았다”고 비판했고, 이에 당시 김성재 김대중평화센터 상임이사는 “설훈 의원 등이 별도 후원을 받아 비용을 대겠다며 현충원 추모식을 한다고 해 그런 줄 알았다. 김대중 평화센터는 현충원 추모식에 동의한 적이 없었다”고 반박한 바 있습니다.
지난해 6월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치러진 고 이희호 여사의 사회장 추모식 모습.
“돌아가신 분들에게 도리가 아니다”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은 왜곡된 언론기사로 인해, 형제간의 재산다툼으로만 비춰져 무척 괴롭고 가슴이 아픕니다.” (23일 김홍걸 의원 보도자료 중)
“저의 부덕으로 어머니 이희호 여사의 유언장 집행을 놓고 동생 홍걸이와 재산상속 다툼을 하는 것처럼 국민들께 염려를 드린 것에 대해 깊이 사죄드리고,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 김대중 대통령과 어머니 이희호 여사께도 용서를 구합니다.” (25일 김홍업 이사장 입장문 중)
두 형제는 노벨상 상금과 동교동 사저를 둘러싼 갈등이 형제간의 재산다툼으로 비춰져 ‘괴롭고 가슴이 아프며’, ‘깊이 사죄드린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성있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없이 기자회견과 입장문을 통해 각자의 주장만을 이어간다면,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도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안을 잘 아는 민주당 관계자는 25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서로를 향한 갈등을 비치는 건 매우 문제적이다. 돌아가신 분(김대중·이희호)들에게도 도리가 아니다.”
두 형제가 빠르게 갈등을 수습하고 고 이희호 여사의 유지를 받들 지 지켜볼 일입니다. < 황금비 김원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