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발언 물타기‥ 본질 덮은 보도

● COREA 2012. 10. 7. 14:46 Posted by SisaHan
“보수언론·방송, 대통령 후보 민주관·역사인식 검증 외면”

‘인혁당 사건의 판결은 두 개 이며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발언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고 있지만 이른바 ‘조·중·동’ 등 보수신문은 물론, KBS MBC 등 공중파 방송에서는 이 발언이 왜 문제인지, 인혁당 사건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보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박근혜 후보의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은 지난 11일. 그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 기자들이 묻자 “같은 대법원에서 상반된 판결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에도 여러 증언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다 감안해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박 후보의 발언은 고문과 조작으로 사형 선고 후 24시간도 안돼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이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일 뿐 아니라 유족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로, 대선 후보로서 민주주의를 파괴한 정치체제를 미화하는 태도라는 비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날 특히 방송 뉴스는 박근혜 후보의 발언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 사건이 무슨 사건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KBS는 11일 <뉴스9>에서 “유신 독재정권에 맞선 사람들에게 사형을 집행했으나 사건 이후 33년 만에 무죄가 선고된 인혁당 사건이 대선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인혁당 사건은 대법원 판결이 두가지라고 말했던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 오늘도 이 사건은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거듭 밝혔다”고 보도했다.
 
KBS는 이후 유신미화행위를 중단하라는 야당 반응과 민생 문제가 시급한데 과거 이야기만 하고 있다, 다들 배가 불렀다는 여권(이한구 원내대표)의 반응을 나열했다. 
MBC도 이날 뉴스데스크에서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부시절 두 차례에 걸쳐 인민혁명당 조직을 적발한 사건으로 지난 74년 2차 때엔 8명이 사형 당했으며 2007년 서울중앙지법은 이들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고만 언급했을 뿐 왜 33년이 지난 뒤에야 무죄 판결이 났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2007년 법원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8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로 선고한 핵심적인 이유는 “당시 진술은 고문, 구타 협박으로 허위 자백에 의한 조작사건으로 인정되므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밝혔었다. 유신독재 정권이 조작으로 유죄를 만들어 사형집행을 한 전형적인 국가범죄라는 뜻이다. 박근혜 후보는 고문·구타·협박으로 허위자백을 받아 사형집행한 판결과 이것이 잘못된 판결이라는 재심 판결 두가지가 존재한다는 섬뜩한 주장을 편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한 인식으로 비춰질 수 있는 대선 후보의 발언에 대해 KBS와 MBC는 검증은 커녕 당시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사건의 본질에 대해 전혀 짚지 않은 채 정치권 공방으로 핵심을 비껴갔다.
다만, SBS는 이날 <8뉴스> ‘박근혜 역사인식 논란’에서 “유신시대 공안 조작 사건으로 결론 나서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법원이 상반된 판결을 내린 거라고 말한 게 정치권의 논란을 불러왔다”며 당시 사건을 영상과 함께 간략히 재구성해 KBS MBC와 차이를 보였다. SBS는 “지난 2007년 법원은 재심을 통해 사형당한 8명에게 무죄를 선고해 피해자들의 명예가 회복됐다”고 설명했다.
 
이튿날인 12일 방송3사는 홍일표 새누리당 대변인이 박근혜 후보 발언을 사과했으나 정작 박 후보는 그런 얘기한 적이 없다는 여권 내부의 혼선을 보도했다. 특히 이날 오후엔 사형당한 8명의 희생자 유족들이 새누리당 앞에서 희생자와 유가족을 욕보였다며 박근혜 후보의 사죄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유족들의 새누리당 항의방문 소식 역시 SBS만이 영상과 약 30초 동안의 리포트로 방송했을 뿐 MBC는 영상만 4~5초 잠깐 보여준 것이 전부였다. 유족들의 비판과 절규에 대해 KBS는 단 한 컷의 영상도 없었다. KBS 뉴스에선 내내 박 후보를 중심으로한 동선만이 방송됐다. 13일엔 박 후보가 “유족들에게 죄송하다는 얘기를 전부터 많이했다, 지금도 연장선상에서 같은 얘기”, “유족이 원하면 찾아뵙겠다”라고 한 말이 방송3사 주요 뉴스가 됐다.
그러나 유족들이 박 후보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입장을 먼저 밝히라는 요구는 외면했다. 
이를 두고 최경영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실위원(KBS 기자)은 “박 후보의 인혁당 발언은 대선 후보의 민주주의 가치에 관한 인식과 신념에 대한 의심을 낳은 사건인데도 민주주의 사회의 언론이 당사자에게 따져묻지 않는다”며 “대변인 멘트가 맞네 틀리네 혼선이 있다고 언급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최 기자는 “박 후보의 인혁당 발언이 문제가 됐으면, 어떻게 조작됐는지에 대해 알려야 하는데. 그저 여야 공방만을 부각시켰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월드스타 싸이의 너스레

● COREA 2012. 9. 30. 20:08 Posted by SisaHan


‘강남 스타일’열풍이 지구촌에 신드롬 수준의 기세를 떨치고 있는 가운데 일약 월드스타가 된싸이(박재상:35)가 귀국, 서울 강남 삼성동 라마다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백여 국내외 취재진과 만났다. 싸이는“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싶어요. 짐 캐리 주연의‘트루먼 쇼’를 보는 기분입니다. 매일 매일이 몰래카메라 같아요.”라고 너스레를 떨며 기자들 앞에서 말춤을 추어 박수도 받았다.


‘강남 스타일’은 28일 공개되는 10월 첫 주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톱10 안으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튜브에선 뮤직비디오 조회수가 25일 현재 2억6700만건을 넘어서 이번 주 많이 본 동영상 1위를 달리고 있다. 동영상 추천을 받은 횟수도 260만건을 넘기며 기네스북에까지 올랐다.


태풍에 내려앉은 모정

● COREA 2012. 9. 2. 16:52 Posted by SisaHan


태풍 볼라벤의 강풍이 몰아친 28일 전북 정읍지방에 41㎜의 강우량과 최대풍속 22m/sec를 기록 상평동 향지마을 회관 앞 모정이 강풍에 무너져 내렸다. 29일 오전까지 사망 10명, 부상 2명에 정
전 192만8천가구, 도로 16곳 등 피해가 난 가운데 제14호 태풍‘덴빈’이 이번15호 볼라벤을 뒤따라 북상, 또 불안을 주고 있다.


▶영원한 투사: 광복군 장교로 1945년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중국시안에서 미 정보기관(OSS) 특수 훈련 당시의 장준하 선생(오른쪽)과 김준엽 전 고대 총장(가운데), 노능서 선생.


영원한 독립군 장준하 선생…되살아 난 ‘실족사’의혹


1975년 8월 장준하 선생이 숨진 뒤 37년 동안 타살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장 선생이 60~70년대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무릅쓰며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맞섰던 숙명의 정치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장 선생은 언론인으로, 야당 정치인으로 박 전 대통령과는 팽팽한 대척점에 섰다. 일제강점기인 20대 중반 젊은 시절 장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대위로, 박 전 대통령은 일제 만주군 중위로 극명히 대조되는 길을 걸었다. 장 선생은 언젠가 박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일제가 그냥 계속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고 면박준 일도 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만주군 복무와 광복 뒤 남조선노동당 가입 같은 과거를 손금 보듯 알고 있던 장 선생이 자신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무척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장 선생이 숨진 직후부터 실족사로 처리된 사인을 두고 의문이 제기됐다.
 
■ 37년간 이어진 장준하 타살 의혹
장 선생 사망 당시 경찰은 장 선생이 1975년 8월17일 산악회원 40여명과 함께 서울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인 경기도 포천시(당시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489m)에 올랐다가 높이 14m의 낭떠러지에서 ‘실족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지방에서 올라왔다가 산행에 합류한 ‘김용환’이라는 인물이 유일한 목격자였다. 김용환은 장 선생이 출마한 총선 때 자원봉사자로 활동했으나 산행 이전 몇 년 동안 만난 적이 없었다. 그날 일행이 약사봉 샘물터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 장 선생과 김용환이 따로 산길을 올랐다가 다시 일행 쪽으로 내려오는 길의 비탈에서 실족했다는 것이 당시 경찰의 발표 내용이었다.
하지만 경사 75도의 암반에서 굴러떨어졌는데도 체중 73㎏이던 장 선생의 신체에 큰 외상이 없었고, 사인으로 지목된 ‘오른쪽 귀 뒤의 두개골 파열’이 단순 추락 때문에 생긴 상처로 보기 어려웠다는 점 때문에 당시부터 의문사 논란이 일었다. ‘추락사고 지점은 산이 너무 험해 젊은 등산가들도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하는 경사 75도, 높이 14m의 가파른 절벽인데 장 선생 혼자서 아무런 장비 없이 내려오려 했다’(<동아일보> 75년 8월19일치)는 기사가, 장 선생 사망 이틀 뒤에 지면에 실리기도 했다.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을 던진 기사를 쓴 내외신 기자들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잡혀가 곤욕을 치르거나 한국에서 추방됐다.
장 선생 타살 의혹은 1970~80년대 군사정부 시절에는 입소문으로 나돌다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뒤 민주당이 ‘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다시 공론화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의혹으로 머물러왔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한 뒤 ‘진상규명 불능’이란 판정을 내렸으나, 목격자 김용환이 장 선생 사망 뒤 갑자기 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한 사실, 그의 일관성 없는 진술, 장 선생 주검에서 추락 흔적이 거의 없는 점 등을 들어 “과거 수사 결과는 대단히 신뢰하기 어렵다”고 발표했다.
 
■ 독립투사·반독재투사 장준하
장 선생은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에서 태어났다. 1944년 일본군의 학도병으로 중국에 파병됐으나 일본군을 탈출했다. 그의 저서 <돌베개>를 보면, 고향을 떠나면서 아내 김희숙씨에게 ‘내가 형제와 골육을 위하는 일이라면 비록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하여도 이는 원하는 바이라’는 성서 구절을 남겼다. 편지에 이 구절이 적혀 있으면 일본군에서 탈출했다는 뜻으로 알라는 귀띔도 남겼다. 그는 44년 7월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한 뒤 중국군을 거쳐 그해 11월 53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까지 2400㎞ 길을 걸어 백범 김구 산하의 광복군에 합류했다. 
광복군 장교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국 정보기관(OSS) 대원을 자원해 특수 게릴라 훈련을 받았다. 일본의 항복 뒤인 1945년 11월2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로 귀국해 김구 주석의 수행비서로 일했다.
 
한국전쟁 때인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월간 <사상계>를 창간해, 50년대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며 당시 지식인들이 가장 주목하는 잡지로 이끌었다. <사상계>는 5.16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육군 소장이 대통령이 된 뒤 추진한 한-일 수교 협상이나 베트남 국군 파병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장 선생은 특히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의 연사로 전국 순회강연을 하면서 70여회의 연설을 통해 박정희, 김종필 등 한-일 협상 주도 세력을 비판했다. 베트남 국군 파병과 관련해선 1966년 방한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을 두고 “한국 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온 것”이라며 신랄하게 공격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매진된 <사상계>를 반품하거나 한 해에 두번씩이나 세무사찰을 하는 방식으로 <사상계>를 압박했다. 
장 선생은 1962년 한국인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며 나라 밖에서도 업적을 인정받았다. 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수감된 상태에서 국회의원으로 옥중당선됐다. 72년 10월 유신 이후엔 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는 등 반유신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장 선생이 숨진 뒤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영결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장준하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뿐”이라고 말했다.
< 박기용·권혁철 기자 >


법의학자들 타살의혹 제기
장준하 선생 유골 사진 공개 “추락으로 볼 수 없어”

37년 만에 장준하 선생의 유골 사진이 공개되면서 사망 원인에 대한 의혹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복수의 법의학자들이 타살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서 주목된다. 의혹의 핵심은 머리뼈에 지름 6㎝ 크기로 선명하게 나타난 원형 골절 부위다. 거의 완벽한 원형을 이루고 있는 머리뼈 골절은 언뜻 보기에 망치와 같은 둔기로 맞은 흔적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유족들은 다시 한번 타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법의학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꼽히는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법의학교실)는 “추락이 아니라 가격(에 의한 골절)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연세대생 이한열 사망 사건, 만삭 의사부인 사망 사건, 화성 연쇄살인사건 등에 법의학자로 참여했던 이정빈 명예교수는 “넘어졌을 때 하필이면 지름 6~7㎝짜리 망치 같은 것에 부딪힌 게 아니라면, (추락했다는) 산에 그런 (원형 골절을 입힐) 물체가 있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추락으로 인한 골절상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유골 사진을 살펴본 이 교수는 “(장 선생의) 머리뼈 골절 흔적은 망치처럼 모서리가 있는 물체가 아주 정통으로 수직으로 (머리에) 부딪혀 생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