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 별세... 추모 이어져

● COREA 2021. 2. 22. 05:0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김구·여운형·장준하 선생과 함께 ‘통일잔치’ 여는 그날까지”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님의 영전에]

보안법 있는 한 ‘남북 합의’ 무용지물, 분단장벽 두고 떠난 마음 오죽하실까
신냉전 기류 ‘쿼드동맹’ 끌려들 우려 국익 지킬 ‘민족 자존감’ 본보기 삼아야

 

2019년 2월 ‘국정원 조사 동의’ 설득을 위해 네번째 방문했던 일본 요코하마 정경모 선생 자택에서. 왼쪽부터 이명준 전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정 선생과 부인 지요코 여사, 이부영 이사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제공

 

지난 2월 16일 일본 요코하마의 자택에서 별세하신 정경모 선생님 이름 앞에는 일제 식민지시대의 독립지사를 떠올리는 ‘망명객’이라는 호칭이 따라다녔습니다. 반세기를 넘도록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이국땅에서 사셔야 했으니 기막힌 일이었습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대에는 일본에서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을 벌인 이유로 귀국하지 못하셨다고 해도, 민주화로 들어선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나아가 촛불혁명으로 이룬 문재인 정부에서도 국가보안법의 족쇄를 풀어주지 못해 끝내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민주정부라해도, 정보기관이나 공안 검찰이 보안법으로 ‘빨갱이 딱지’를 붙여 잡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나라입니다. 보안법 앞에서는 대통령도 별 볼 일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그토록 온몸으로 넘어서고, 깨뜨리고자 했던 분단 장벽이 켜켜이 쌓인 조국을 이렇게 남겨 두고 떠나시는 정 선생님의 마음이 오죽하셨겠습니까.

지난 수년동안 문익환 목사님 자제들과 몇몇 후학들이 정 선생님 귀국을 위해 정부 당국과 타협안을 마련해 보려고 애썼지만, “내가 뭘 잘못했다는 말이냐. 갈라진 민족, 나라를 할 걸음이라도 가까이 만들려고 노력한 게 뭐가 죄가 된단 말이냐. 나를 조사하겠다고? 필요 없다. 그럴 거라면 안 간다. 전향? 자술서? 나에게 모욕을 주자는 것이냐? 안 가고 여기서 죽고 묻히겠다.” 선생님은 단호하셨습니다. 결국 선생님은 떠나셨습니다. 못난 정부와 후학들에게 ‘마지막 망명객’의 절절한 묵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동안 해마다 한번씩은 자택을 찾아뵙고 술 한잔 올리던 일도 이젠 영원한 추억이 됐습니다.

정 선생님은 유원호 선생님과 함께 문익환 목사님을 모시고 1989년 3월 25일 평양으로 떠나셨습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쪽 재야민주화운동의 통일방안을 전하고 논의하고 싶다는 문 목사님의 간절한 소망을 실현시키자는 뜻이었지요. 그해 연초에 문 목사님을 만나 먼저 대강의 계획을 전해 들었던 저는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 대한 탄압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남북 정부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문 목사님이 전민련 상임고문 자격으로 남쪽 민간인을 대표한 것이니 한국전쟁 이후 처음 이루어지는 역사적 북행이었습니다. 노태우 정권도 국가연합을 인정하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는 등 남북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에, 한편으로 유연한 반응을 기대했지만 역시 그들의 본질은 옛날 그대로였습니다.

그래도 정 선생님 일행이 김 주석에 이어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을 만나 합의하신 ‘4·2 공동성명’은 “1.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해 통일문제를 해결 2. 한반도 분열의 지속 반대 3. 정치·군사 회담 추진과 이산가족문제 등 다방면의 교류와 접촉 실현 4. 공존 원칙에 입각한 연방제 방식의 통일 지지에 합의한다”는 큰 성과를 냈습니다. 문 목사님과 유 선생님은 귀국하시자마자 구속됐고 전민련에서는 저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옥고를 치러야했습니다. 무엇보다 정 선생님은 그 뒤 남북회담이 셀 수 없이 열렸지만 끝내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남북관계의 진전과 민간 교류의 확대는 국가보안법이 온존하는한 불가능해 보입니다. 어느 정부가 들어선다해도 우리 안에 뿌리 깊은 극우세력과 외세의 충동질이 있으면, 남북 합의를 뒤집어버리는 만행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김구·여운형·장준하 선생이 하늘에서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시면서 나누는 가상의 대담을 엮은 정 선생님의 책 <찢겨진 산하>를 읽고 우리는 큰 감명을 받았었습니다.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젊은이들에게 해방 전후와 군사독재 치하에서 진정한 지도자의 초상을 바로 세우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문 목사님과 정 선생님 자신이 그 모범을 또 세워주셨습니다.

정 선생님께서 한국전쟁 때 ‘판문점 정전회담’의 미군 쪽 통역관으로 문익환·박형규 목사님과 함께 참관했던 경험이 평생토록 분단극복·민주화·남북화해-평화통일 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후학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또한 일본에서 사는 긴 세월 동안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민족적 양심을 가진 이는 어디에 서 있든지 쉬는 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난 2월16일 별세한 고 정경모 선생의 빈소. 일본의 장례 풍습에 따라 화장을 한 뒤 평생 거주했던 요코하마 히요시의 자택에 모셨다. 유족 제공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기류가 거세지는 지금, 미국의 군사주의와 북한의 핵 보유 사태는 한반도에 다시 핵전쟁 위기를 몰고 올 기세입니다. 미국이 일본·호주와 더불어 주도하고 있는 ‘인도-태평양 4자 동맹’(쿼드)의 주 무대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입니다. 한국이 한미동맹이라는 ‘인계철선’ 때문에 이른바 쿼드동맹에 끌려 들어가지 않을 지혜가 필요합니다. 한미동맹도 줄여가야 하는 처지에, 자유무역과 상호의존이 주류를 이루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이념 대결과 적대적 배제를 앞세우는 강대국 지배 논리에 다시 포로가 된다면 지난 세기처럼 그들의 제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한국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와는 달리, 그리고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이후와는 달리, 민주화와 산업화 그리고 문화예술과 스포츠의 위상으로 국제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인류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대재난에도 한국은 케이(K)방역을 통해 모범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국제적 본보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미·일·중 등 강대국들에 대해서도 중견국으로서 민족적 자존감을 가지고 국가 이익에 근거해서 발언하고 외교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입니다.

정 선생님께서 어떻게든 고국에 돌아와 ‘오래된·새로운’ 지혜를 들려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던 와중에 홀연 떠나시니 후학들은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구·여운형·장준하·문익환·유원호 선생님과 하늘에서 함께 모여 ‘한반도 통일’을 환영하는 감격의 잔치를 벌이시는 날이 어서빨리 오도록 남은 후학들이 노력하겠습니다.

정경모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


“신념 지키며 ‘조국과 민족’ 뜨겁게 사랑하며 멋지게 사셨습니다”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선생님을 추모하며]

 

1989년 4월9일 문익환 목사는 방북 일정을 마치고 도쿄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가와사키에 있는 재일동포 이인하 목사의 사쿠라모토 교회에서 예배를 올렸다. 왼쪽부터 유원호씨, 정경모 선생과 맏아들 강헌씨, 문 목사와 정 선생의 손자, 정 선생의 맏며느리와 손녀. 유족 제공

 

선친 문익환 목사와 ‘운명적인 역사의 동지’

“통역 · 주례 · 방북… 하나님 예비한 섭리”

 문 목사·유원호 선생과 남북 활보 하시길

 

저의 선친 문익환 목사님과 고 정경모 선생님은, 널리 알려진 대로 1989년 이른바 ‘방북 사건’의 주역이었습니다. 더불어 ‘운명적인 역사의 동지’였습니다.

두 분이 처음 만난 것은 1950년 한국전쟁 와중이었습니다. 미국 유학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조국의 전쟁 소식에 유엔군에 지원하여 일본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판문점을 오가며 정전회담 통역을 하고, 문서들을 번역했으며 미군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쳤습니다. 해방 직전 게이오 의대 유학 시절 인연을 맺은 하숙집의 딸이 5년이 넘도록, 기약없이 자신을 기다려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감동했지만, 일본인이란 이유로 결혼을 주저하는 정 선생님에게 문 목사는 용기를 주고 직접 결혼식 주례를 해주며 새 가정을 축복해주셨다지요. 정 선생님이 한국에 머물던 1960년대 문 목사님이 그 동생분의 결혼식도 주례를 섰으니 ‘각별한 인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70년 정 선생님이 ‘정치적 망명’을 한 이후, 문 목사님은 한국에서 신학자이자 재야의 민주인사로 살아갈 동안 정 선생님은 일본에서 문필가로 자유분방하고 날카로운 필체로 한국의 문제를 파고들었으며 <씨알의 힘> 간행물을 출간했습니다.

긴 세월 각자의 삶을 살았음에도, 두 분이 서로를 믿고 역사적인 과업을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활동과 글을 통해서 지속적인 소통을 해온 덕분이었습니다. 정 선생님은 문 목사의 ‘옥중서신집’을 번역해 일본에서 출판하고 제자들에게 한글 교재로 소개했습니다. 문 목사는 정 선생님의 <찢겨진 산하>를 읽으며 ‘민족주의자 정경모’의 참모습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문 목사님은 1988년부터 ‘방북’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정 선생님으로부터 방북 의사를 타진하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정 선생님은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여운형 선생 추모 모임’을 도쿄에서 해마다 열어왔고, 이에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낸 몽양의 둘째딸 여연구 선생이 ‘감사 편지’를 보내면서 서로 교분을 나누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 선생님은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비롯한 방북 과정의 모든 준비를 진행했고, 이듬해 3월말 평양 도착 성명, ‘4·2 공동선언’의 초안도 작성했습니다.

2014년 11월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문익환 목사 서거 20주기와 4·2남북공동성명 25돌 기념행사’에 참석한 뒤 요코하마 정경모 선생님 자택을 방문했을 때. 왼쪽부터 부인 지요코 여사와 정 선생, 문영금 관장과 동생 문성근 배우. 통일뉴스 제공

훗날 정 선생님은 문 목사님을 두고 ‘한국전쟁 중에 만나 민족의 아픔을 함께하고 가정을 꾸미게 해주었으며, 김 주석을 만나 민족통일을 논의하게 된 것은 모두 하느님이 예비하신 섭리’라고 감회를 나눈곤 했습니다.

정 선생님은 그 흔한 ‘반성문’ 한 장 때문에 그렇게도 그리던 고국 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구름 위에 계신 여운형·김구·장준하 선생님은 만나셨겠지요? 평양에서 나란히 ‘선구자’를 불렀던 문 목사님과, 재작년 먼저 세상을 뜨신 유원호 선생님과도 만나 옛 생각 추억하며 평양거리, 서울거리를 활보하고 계시겠지요?

정 선생님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며 뜨겁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며 멋있게 살다 가셨습니다. 선생님은 남기신 글들을 통해 저희 안에 살아 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모님과 자손들께 위로를 드립니다. 하늘에서 편히 쉬십시오.

< 문영금 문익환통일의집 관장·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이사 >

영 대법원, ‘우버 기사는 노동자’ 판결

● 경제 & 과학 2021. 2. 22. 05:0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만장일치로 인정… 디지털 플랫폼 노동자성 인정되나

"임금 등 노동조건 결정하는 우버에 기사가 종속" 지적

 

우버 기사들이 19일 영국 런던 대법원 밖에서 우버 기사가 노동자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는 소식을 태블릿을 통해 접하고 기뻐하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우버 운전기사는 “노동자”라는 영국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거대 디지털 플랫폼에서 자영업자 취급을 받으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전환점이 될지 주목된다.

영국 대법원은 차량 공유 서비스 사이트인 우버의 운전기사들은 자영업자가 아니라 노동자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만장일치로 지난 19일 판결했다고 영국 언론들이 20일 보도했다. 이 판결로 영국 내의 우버 기사들은 노동법에 따라 최저임금을 보장받고 휴일수당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영국 대법원은 우버가 자신의 플랫폼에서 기사들이 일할 때 임금과 계약조건을 정할 뿐만 아니라, 노동 규율도 감시한다며 우버 기사들이 고용된 노동자라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우버가 기사들의 서비스를 감시할 뿐만 아니라 업무 계약의 연장과 종결권도 가진 점을 지적했다. 이런 요인을 고려할 때 우버 기사가 자신의 수입을 증가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것뿐이라며, 기사들의 지위가 우버에 종속돼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대법원은 우버 기사들이 우버 앱에 로그인할 때부터 로그 오프 할 때까지 “노동자”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우버는 그동안 우버 기사들이 승객을 태우고 운전한 시간만 근무한 시간으로 보고, 고객을 기다리는 시간은 근무한 시간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영국 우버의 기사였던 제임스 패러 등 2명은 지난 2016년부터 자신들이 우버를 위해 일한 노동자였음을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노동법원에 제소해, 이날 대법원까지 가는 법적 투쟁 끝에 승리했다. 이들은 노동법원의 1심과 항소심에서 승소했으나, 우버는 일반 고등법원에 이어 대법원까지 항소와 상고를 했으나 모두 패소했다. 우버는 이들이 자영업자여서 최저임금 지급 대상이 아니며, 휴일수당을 지급할 의무도 없다고 주장해왔다.

영국 대법원 판결은 우버 기사에게만 적용되지만,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세계 다른 디지털 플랫폼 업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버 등 거대 디지털 플랫폼 업체를 통해 일 하는 이들이 노동자로 대우받게 된다면, 디지털 경제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해 3월 프랑스 대법원에 해당하는 파기법원도 우버 기사를 자영업자가 아니라 노동자라고 판결한 바 있다.

이날 판결로 우버 주가는 미국 증시에 크게 하락했다. 우버는 판결 뒤 “이번 판결이 처음 제소당했을 당시인 2016년 우버 앱을 사용한 소수의 기사들에게 적용됐던 것”이라며, 사업모델을 시대에 맞게 바꾸고 있다고 해명했다. 정의길 기자

 

‘인싸’들 잡아끄는 신개념 SNS, 밤새 수다 떨며 중독성 절감
 순간에 충실한 오디오 서비스 기록·저장 아닌 동시성 ‘주효’

 

오디오 기반 에스엔에스(SNS) 서비스 클럽하우스가 유명인들과 젊은층을 중심으로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은 휴대전화에 클럽하우스 앱이 깔린 모습. AFP 연합뉴스

 

유명인 소통창구 유명세 더해 ... 한정된 초대장에 돈 오가기도
자유·폐쇄, 수평·수직 묘한 조합 서비스 진화 방향 지켜볼 필요

 

잘 버리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정이 많고 다르게 말하면 미련이 많다. 버리기 열풍이 부는 요즘 시대를 역행하는 삶의 태도다. 나는 인터넷에도 언제나 무언가를 쌓기 바빴다. 2000년대를 사로잡았던 1세대 고인물 에스엔에스(SNS)인 싸이월드는 그런 의미에서 내 사적인 기록의 보고에 가깝다. 멋모르던 망아지처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던 중고교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했던 낱낱의 일상이 모두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싸이월드가 다시 문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은 반가움보단 막막함이었다. 망할 놈의 서버는 기억력도 좋지, 왜 20년 전 일기를 아직도 갖고 있는 거야? 당장 일년 전에 쓴 일기만 들추어 봐도 손발이 오글거려 무릎을 찰싹찰싹 때리게 생겼는데, 질풍노도의 시기, 그때의 일기장을 제정신으로 들여다볼 자신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그때의 내 일면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질 수밖에. 도토리 100개를 주고서라도 내 미니홈피의 정보들을 모조리 삭제해달라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흑역사, 나의 오글거리는 일기, 말실수와 말장난. 그런 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할 필요도 없는 신개념 소셜미디어가 한국에도 들어왔다. 녹화도, 녹음도 금지. 지금 당장, 여기 모인 사람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눈 다음,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오디오 서비스 클럽하우스 얘기다.

 

밤새워 떠드는 인싸들의 소셜미디어

클럽하우스 일주일차, 벌써 이틀 밤을 샜다. 이거 좀 세다. 엄청나게 중독적이다. 말하기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외향인에게는 딱 맞는 플랫폼이다. 어떤 방에서든 손만 들면 스피커가 돼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끝도 없이 대화가 굴러간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흥미가 떨어지면 ‘조용히 떠나기’(leave quietly)를 누르면 그만이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만큼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은 클럽하우스의 큰 장점 중 하나다. 그래서 인기가 높다. 가입자 수도 성큼성큼 늘고 있고, 기업가치도 1조원 이상 인정받았다. 2020년 4월 출범한 신생 플랫폼이지만, 벌써 유니콘으로 평가받는 중이다. 구글 전 직원 로언 세스와 투자자 폴 데이비슨이 만든 이 기업은 문을 연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소셜미디어의 새로운 기준을 써 내려가고 있다. 정보기술(IT) 업계를 중심으로 서서히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현재는 스타트업, 투자, 창업 등의 분야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서서히 퍼지다 일반 대중에게도 가닿고 있다.

클럽하우스의 등장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요즘 소셜미디어 흐름은 20년 전과는 좀 다르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니홈피에 정보를 쌓는 과정을 즐겼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요즘 사람들은 무엇이든 잘 쌓지 않는다. 대신 24시간 뒤 자동으로 게시물이 삭제되는 인스타그램의 ‘인스타 스토리’나 트위터의 ‘플리츠’(Fleets)를 즐겨 사용한다. 남기거나 기록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을 고스란히 공유하고 날려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요즘의 우리는 밥 먹을 때, 차 마실 때, 걷거나 달릴 때, 친구를 만날 때 그 순간을 스토리로 포착하고 공유하기를 즐긴다. 실시간성과 동시성은 어느덧 요즘 시대에, 우리 세대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됐다. 소셜미디어에도 곤도 마리에의 원칙이 배어가고 있는 것이다. ‘설레지 않으면 남기지 않는다’는 원칙 말이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면

불시에 출몰하는 연예인들과 목소리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클럽하우스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배우 공효진이나 사이먼 도미닉, 스윙스 등 힙합 뮤지션들도 클럽하우스에서 방을 만들어 팬들과 소통한다. 평소에는 팬사인회에 참여하거나 콘서트장에 가야만 목소리를 듣고 마주할 수 있었던 유명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무료로, 불시에 이루어진다. 얼마 전에는 테슬라 시이오(CEO) 일론 머스크가 게임스톱 논란의 중심이 됐던 미국 주식거래 플랫폼 로빈후드의 대표와 클럽하우스에서 만나 대담을 나눠 화제가 되기도 했다. 페이스북의 수장인 마크 저커버그, 이승건 토스 대표, 우아한형제들의 김봉진 의장 등도 ‘클럽’에 합류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서비스 장벽은 높은 편이다. 아무나 가입을 할 수 없고, 내부에 이미 소속된 멤버에게 초대장을 받아야만 클럽하우스에 입성이 가능하다. 아직 아이폰, 아이패드 등 아이오에스(iOS) 환경에서만 지원을 하고 있어 안드로이드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초대받아도 앱을 깔 수조차 없다. 클럽하우스는 곧 안드로이드 서비스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현재까지 클럽하우스는 아이폰 유저들만의 ‘클럽’으로 남아 있다. 이 같은 서비스의 폐쇄성은 사람들의 ‘소외 공포증’(FOMO)을 자극한다. 때문에 중고나라나 당근마켓 같은 중고거래 사이트에서는 가입 시 한명당 2개씩 주어지는 클럽하우스의 초대장이 2만원 선에서 거래되기도 한다. 중고 아이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다.

 

자유로운 듯 눈치 보게 되는 현실적 클럽

실시간으로 설레는 순간이 잔뜩일 것만 같은 클럽하우스에도 장점만 가득하진 않다. 일단 필연적으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자유도가 떨어지는 구조다.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들과 자동으로 연동되어 있는데다, 자신의 실제 얼굴과 실명을 사용하는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현재 직장뿐 아니라 과거 직장, 커리어까지 주르륵 써둔 사람들의 프로필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이곳이 링크트인인지 클럽하우스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아예 ‘○○회사 다니는 사람’ ‘○○회사에 대한 모든 걸 알려드립니다’ 같은 방을 열어,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좋게 말하면 커뮤니티의 성격이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끼리끼리’ 문화가 강하다. ‘○○외고 ○○기 방’ ‘○○대학 사람들만 모이는 방’도 자주 출몰하는 방 중 하나다. 강한 커뮤니티성과 더불어 현실에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는 클럽하우스의 이런 특징은 자유로운 탐색과 소통을 가로막는 요소다. 익명성이 잘 보장되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에 자칫하다 말실수를 할까 두려워 손들고 싶은 주제에 대해서 말하기가 망설여지는 것이다.

음성언어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 자체가 근본적으로 장애인 배제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시간으로 자막 등을 서비스할 수 있는 줌(Zoom)과는 달리 클럽하우스에서는 녹음이나 녹취가 허용되지 않기에, 음성언어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은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렵다. 최근엔 운영사인 알파 익스플로레이션이 사용자들의 대화를 녹음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실상 모두가 스피커가 될 수 있다는 명제도 틀렸다. 스피커가 되고 싶어 손을 들더라도, 모더레이터가 허락해주지 않으면 스피커가 될 수 없는 시스템도 클럽하우스의 제한적 자유도를 방증한다. 스피커가 되지 않는 한 어떠한 반응이나 피드백을 남길 수 없는 스피커 위주의 환경도 마찬가지다. 스피커, 스피커가 팔로하는 사람, 나머지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클럽하우스 대화방의 시스템은 꽤 수직적인 구조다. 자유로운 듯 폐쇄적이고, 수평적인 듯 수직적인, 이 오묘한 신생 플랫폼 ‘클럽하우스’가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천다민 뉴닉 에디터]

 

말많고 탈 많은 줄리아니, 이번엔 미셸 위 성희롱 발언으로 구설수

 

트럼프 전 대통령과 함께 선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왼쪽)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변호인이던 루디 줄리아니(77) 전 뉴욕 시장이 프로골퍼를 성희롱했다가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22일(현지시간) 미국 CNN방송에 따르면 골프계는 줄리아니의 발언에 맞서 거센 비판을 쏟아낸 한국계 여성 골프선수 미셸 위 웨스트(32)를 일제히 옹호하고 나섰다.

미국골프협회(USGA)는 "골프와 생활에서 성차별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며 "우리는 미셸 위 웨스트를 항상 지지한다"고 밝혔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도 "미셸 위 웨스트는 LPGA 투어에서 5차례 우승한 대형 챔피언이자 동료들로부터 선출된 LPGA 이사이며 스탠퍼드대 졸업자, 워킹맘"이라며 "우리는 미셸위를 응원한다"고 입장을 발표했다.

줄리아니의 성희롱 발언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세몰이 책사로 활동한 극우인사 스티브 배넌의 최근 팟캐스트 출연 도중 나왔다.

그는 별세한 보수정치 평론가 러시 림보와의 일화를 돌아보며 2014년 프로암(프로와 아마추어가 함께 나서는 대회)을 소개했다.

줄리아니는 당시 경기장에 파파라치가 많다는 림보의 말에 위 웨스트가 표적이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위 웨스트는 외모가 출중했고 키가 6피트(약 183㎝)였다"며 "퍼팅 자세가 이상해서 허리를 끝까지 구부려 팬티가 보였는데 언론들(파파라치)이 거기에 환장을 했다"고 말했다.

위 웨스트는 줄리아니의 발언이 매우 부적절하고 불쾌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그 사람이 기억해야 할 것은 당일 내가 64타를 쳐서 남자 골퍼들을 모두 이기고 우리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이라고 반발했다.

그러면서 "줄리아니가 나를 물건 취급하고 온종일 내 등 뒤에서 내 팬티를 언급하면서도 내 면전에서는 웃으며 경기 내용을 칭찬한 것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친다"고 비판했다.

 미셸 위 웨스트[UPI=연합뉴스]

줄리아니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최측근 가운데 한 명으로 최근 수년간 미국 정치권에서 논란의 중심이었다.

검사 출신으로 뉴욕시장을 지낸 줄리아니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러시아 내통설로 특검수사를 받던 2018년 4월부터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변호인으로 활동했다.

줄리아니는 수임료를 받지 않는 대신 비선실세로서 미국 법무부 수사를 받는 외국 임원들의 로비창구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대권 유력후보이던 시절에 차남 헌터 바이든의 비리 의혹을 캐는 데에도 관여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부통령이던 시절 헌터가 '아빠 찬스'로 우크라이나 에너지 기업의 임원에 채용돼 거액 보수를 받는 등 부적절한 행각이 있었다는 게 의혹의 골자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바이든 부자에 대한 검찰수사를 발표하라고 압박한 정황이 잡혀 탄핵 심판대에 올랐으나 당시 여당이 장악한 상원에서 무죄 평결을 받았다.

줄리아니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패배 불복을 부추겨 원활한 정권교체를 방해한 인물로도 보도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불복소송의 승소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었으나 줄리아니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꼬드겨 부정선거 음모론을 믿도록 했다고 보도했다.

줄리아니는 불복소송 변호사를 맡아 수임료로 하루에 2만 달러(약 2천200만원)씩 챙기기도 했다.

이는 미국 최고 변호사의 수임료 수준을 뛰어넘는 데다가 트럼프 대선캠프가 소송비를 모금했기 때문에 논란이 일었다. 연합뉴스

 

미셸 위, 전 뉴욕 시장 성희롱 발언에 "내가 이긴 거나 기억해"

 

미셸 위 웨스트(왼쪽) [AFP=연합뉴스]

 

교포 골프 선수인 미셸 위 웨스트(32)가 루돌프 줄리아니(77·이상 미국) 전 뉴욕 시장의 성희롱성 발언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위 웨스트는 21일 자신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내 앞에서는 미소를 지으며 경기력을 칭찬하던 사람이 뒤에서는 '팬티' 운운하며 나를 (성적인) 대상으로 삼았다니 몸서리가 쳐진다"고 밝혔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통산 5승을 거둔 위 웨스트는 이 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ESPN 등 많은 미국 언론들은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이라고 지목했다.

2001년까지 뉴욕 시장을 지냈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변호사이기도 한 줄리아니 전 시장은 최근 한 인터넷 방송에 나와 2014년 위 웨스트와 함께 프로암 행사에 참여했던 일을 소개했다.

17일 세상을 떠난 보수 정치 평론가 러시 림보와 함께했던 일화를 회고하면서였다.

줄리아니 전 시장은 "그때 림보가 '왜 이렇게 파파라치들이 많이 따라다니느냐'고 불만을 말했는데 그 파파라치들은 나나 림보가 목적이 아니라 미셸 위를 찍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키 183㎝인 미셸 위는 외모가 매우 훌륭했는데 퍼트할 때 워낙 허리를 굽혀서 팬티가 다 보였다"며 "그래서 나는 러시에게 '나나 자네를 찍으러 온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7년 전 일을 회상했다.

이 얘기를 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는지 줄리아니 전 시장은 "이런 농담 괜찮겠지"라고 물었고, 인터넷 방송 진행자인 스티브 배넌은 "이미 다 얘기했는데,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렸다.

2020년 3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TV 중계 해설자로 나선 위 웨스트(오른쪽). [AFP=연합뉴스]

이 인터넷 방송 내용에 대해 위 웨스트는 "이 사람이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그날 64타를 쳐서 남자 선수들을 다 이겼다는 사실"이라며 "여자 선수들의 경기에 관해 이야기할 때 어떤 옷을 입었고, 외모가 어떤지에 대해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 당시 허리를 잔뜩 굽히는 퍼트 자세에 대해 "내 퍼트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지, 치마 속을 보라는 초대장이 아니었다"고 분명히 했다.

위 웨스트는 이어 "(후원사인) 나이키에서 바로 이런 이유로 안에 별도의 바지가 달린 스커트를 만드는 것"이라며 "여성들은 그래서 자신감 있고 편안하게 경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부모가 모두 한국 사람인 교포 선수 위 웨스트는 2014년 US오픈 등 LPGA 투어에서 5번 우승했으며 지난해 6월 딸을 낳았다.

그의 남편은 미국프로농구(NBA) 로고의 실제 모델인 제리 웨스트의 아들인 조니 웨스트다.

위 웨스트는 올해 열리는 미국과 유럽의 여자골프 대항전 솔하임컵에서 미국 대표팀 부단장을 맡았다.

교포 선수가 솔하임컵 미국 대표팀 부단장이 된 것은 위 웨스트가 처음이다.

LPGA 투어와 미국골프협회(USGA) 등에서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이번 위 웨스트의 주장에 뜻을 같이한다는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