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징계를 받았던 김동식 전 해군 2함대사령관이 해군지휘부 보직을 새로 받았다. 역시 천안함 사건으로 징계를 받은 김학주 전 합참 작전부장도 최근 중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천안함 함장과 해군 전대장은 징계유예 정도에 그쳤다. 장병 46명이 한꺼번에 수장된 엄청난 참변을 당하고도 제대로 책임지는 지휘부 인사가 한 사람도 없는 기막힌 일이 지금 대한민국 국군에서 벌어지고 있다.
천안함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불식되지 않았다. 하지만 외부의 위해 요인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천안함 침몰은 경계 실패에서 비롯된 참극임이 분명하다. 해상과 수중의 위협 요인을 초계하여 다른 함선의 안전을 보장해야 할 초계함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응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건 뒤 감사원은 25명의 지휘관·참모부 인사들에 대해 전투준비 부족과 허위보고 등을 이유로 징계를 요구했다. 허술한 대응 책임을 짚어 뒷날을 경계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처였다.

전투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하지 않는 법이다. 실제 전투 상황에선 역량에 따라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경계에 실패하면 전력 모두가 손쓸 틈도 없이 궤멸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간첩 경계망이 뚫렸다는 이유로 중징계를 받고 군문을 떠난 야전부대 지휘관이 한둘이 아니다. 천안함 참극에 관련된 인사들을 줄줄이 복권시키는 군의 처사는 전례에 비춰 봐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그 배경을 짐작하지 못할 바 아니다. 정부는 지난해 지방선거 무렵에 천안함 사건을 부풀려 여론몰이에 써먹으려는 속내가 들여다보였다. 이에 따라 사건 희생자들을 영웅으로 크게 부각시켜놓고 동시에 지휘 책임을 따지려다 보니 발이 엉키는 느낌을 받은 것 아니겠는가. 참으로 온당하지 못한 처사다. 군 인사에 신상필벌 원칙이 아니라 정치적 고려를 앞세우는 꼴이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안보와 방위태세를 유난히 강조한다. 그러나 정말로 엄정해야 할 징계 문제를 무원칙하게 처리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봐주기 인사를 통해 일시적으로 군 일각의 불만을 무마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 하지만 군의 기강과 전력은 이로써 밑동에서부터 좀먹어 들어갈 것이다.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흔들리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행에 필요한 법률안 14건에 서명했다. 이로써 정부는 협정 발효를 위한 국내 절차를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곧 미국에 절차 완료를 통보한 뒤 새달부터 발효 협상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이제 국내적으로는 FTA를 강행한 데 대한 국민적 심판만 남은 듯하다.
이 대통령은 법률안 서명 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 시장을 여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협정과 관련해 일부 오해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각 부처가 사실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서 오해가 없도록 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정부·여당이 협정을 강행처리하는 데 대한 국민적 반발 여론을 의식한 발언으로 들린다.
그러나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과 시민사회단체는 더 거세게 저항할 태세다. 당장 야5당은 공동성명을 내어 “주권자의 동의 없이 주권이 강탈당한 현실에 분노한다”며 “대통령 서명에도 그 모든 것은 6개월 뒤 총선 이후 바뀐 국회에서 정지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의도대로 협정이 발효되더라도 협정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갈등이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이는 정부와 여당이 충분한 국민 의견 수렴과 민주적 합의 절차 없이 협정을 밀어붙인 결과다.

정부가 협정을 졸속으로 처리하는 모습은 발효 준비 절차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협정 발효 조건을 규정한 협정문 24장에 따르면, 협정이 발표되려면 두 나라가 똑같이 법적 절차를 마무리하고 이를 증명하는 서면을 상대국에 보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미국의 현행 법령에서 협정과 충돌하는 조항이 있는지를 지금까지 제대로 조사해보지 않았다. 야5당이 민간 전문가에게 의뢰해 미국의 현행 법률에서 협정과 충돌하는 조항을 살펴본 결과, 불과 며칠 새 4건이나 파악됐다고 한다. 미국은 아직 협정 이행 준비를 다하지 않은 셈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단지 두 나라 간 상품 교역의 장벽을 해소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미국의 기업과 금융자본, 투자자에게 유리하도록 우리의 법과 제도를 일거에 바꿔버린다. 그 파장을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외부 충격이다. 국민은 이런 충격을 완화 또는 제거하기 위해 협정을 개정하거나 폐기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그것은 주권 국가의 국민으로서 당연한 권리이며 의무이기도 하다.

[칼럼] 유럽의 불, 한국을 태울 수도

● 칼럼 2011. 12. 4. 15:50 Posted by SisaHan

유럽 국가의 신용등급 강등이 계속된다. 누가 먼저 떨어지나 내기를 하는 듯하다.
최근엔 포르투갈의 신용등급이 투기등급으로 강등되었다. 헝가리의 추가 강등은 이미 뉴스거리도 아니다. 시장의 소문은 점점 흉포해진다. 그 정점에 프랑스의 신용등급 강등 소문이 있다. 지난주에 열린 독일의 국채 입찰도 사실상 실패했다. 주변국의 위기가 핵심국을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 바로 유럽 은행의 부실이다. 지난 10월 벨기에 최대 은행인 덱시아가 파산 위험에 몰렸다 간신히 구제되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유럽 거대은행의 부실은 상상을 초월한다. 유럽의 은행은 체계적 붕괴를 앞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 은행의 레버리지 비율은 25 대 1로 알려져 있다. 100의 자산 중 자기 돈은 4에 불과하단 얘기다. 미국 은행의 레버리지 비율이 13 대 1 정도이니 얼마나 심한 차입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유럽 은행의 총부채 규모는 유럽연합 국내총생산(GDP)의 148%에 달한다.
유럽 은행은 주변국 채권에 투자하면서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자기자본비율은 엉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안전할 수 있을까. 그나마 국가라도 재정이 건전하다면 구제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도 제 코가 석자인 상황이다. <인터내셔널 파이낸싱 리뷰> 최신호를 보면, 유럽 은행들이 5조유로에 달하는 자산을 팔려고 시도했으나 매수자가 없어 실패했다고 한다. 기존 자산을 판다는 것은 신규 자본조달에 실패했다는 걸 의미한다.
이제 유럽 은행은 서둘러 실물경제에 투입된 채권을 회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채권은 국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업채권, 부동산채권에 대한 전방위적 회수가 시도될 것이다. 물론 주식·상품과 같은 자산시장에서도 발을 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은행이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리 없다. 그들 역시 이 흐름에 동참할 것이 분명하다.
결국 글로벌 시장의 유동성은 줄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글로벌 경제 시스템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단순한 구조조정 수준이 아니다. 공황을 불러올 수 있다.
한국의 금융은 전통적으로 유럽 자금에 많이 의존해왔다. 대부분의 한국 금융기관들은 유럽 은행과의 거래를 통해 자금 프로세스를 맞춰왔다.

그런데 유럽 은행의 위기로 이 프로세스가 일시에 중단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외환시장을 비롯한 금융시장 전체가 요동칠 것이 뻔하다.
설상가상, 유럽 은행의 자금회수가 본격화하면 한국의 은행들도 대출 회수에 본격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이미 한국의 가계와 중소기업 대부분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채무를 짊어지고 있다. 이들이 은행의 폭력적 자금회수를 견딘다는 건 기적이나 다름없다.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한국의 부채 수준은 최악이다. 가계·기업·공공기관·정부 부채를 전부 합하면 국내총생산의 300%를 넘는다. 이탈리아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성장을 했다고 자랑하기에 바쁘다.
부채를 늘려 성장을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성장이 부채를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한가에 있다. 지속성에 있다. 하나, 부채로 이룬 대부분의 성장은 겉은 화려하나 속은 비어 있기 마련이다. 부채로 쌓은 성은 말 그대로 사상누각이다. 신기루다. 유럽의 오늘이 그것을 증언한다.
유럽이 과도한 부채로 무너지듯 한국도 마찬가지다. 가계빚 이자만 연 56조원에 달하는 나라가 마냥 성장할 수는 없다. 유럽의 오늘은 우리의 내일일 수 있다.

<윤석천 - 경제평론가>

[1500자 칼럼] 목회자의 삶

● 칼럼 2011. 12. 4. 15:48 Posted by SisaHan

오래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나는 대학 시절에는 팝송만 좋아하였고 클래식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면 모욕과 같은 표현이겠지만 클래식을 들으면 잠이 온다는 식었다.
그러다 음악을 전공한 아내를 만나 클래식에 길들여졌다. 아내가 의도적이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제일 먼저 접하게 된 것이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 5 번 ‘황제’였다. 혹자는 나폴레옹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기도 하고 아니라고 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 이후 나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다.

그렇게 클래식을 접하게 된 나는 종종 클래식을 들었는데 작곡자의 어떤 의도도 모른 채 곡을 들으면서 내 나름대로 곡에 상상력을 불어넣은 곡이 있다. 그것은 차이코프스키의 세레나데로 원제는 Serenade for Strings in C major,Op. 48 이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 내게는 한 그림이 떠오른다. 때는 추운 겨울이며 늦은 저녁이 될 것 같다. 장소는 방천 둑이나 방파제 같은 곳에 무서운 칼 바람이 무지 세차게 부는데 코트 깃을 세운 어떤 아저씨가 맞바람을 맞으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추워 코트 깃을 세웠지만 나아가는 그 모습에 많은 아픔이 있을 것 같다. 자녀들의 학비 때문에 걱정하면서 나아가는 것 같고 병든 아내 때문에 초조해하는 것 같고 부도난 사업 때문에 지친 모습의 아저씨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걸어 집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이 세레나데를 들으면서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들리는 것을 어쩌겠는가?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춥다 피곤하다 지쳤다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금년에 우리 교회는 창립 30 주년기념 예배를 드렸다. 너무나 감격적인 주일이었다. 창립일은 2 월 첫 주일이었으나 우리는 5 월에 따로 기념 예배를 드렸다. 한 목사를 모시고 함께 살아온 성도들이 너무 고마웠고 한 교회와 평생을 함께 했다는 그 사실도 큰 자부심과 함께 감사함을 느꼈다.
그러나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면 나 역시 다른 목회자들처럼 칼 바람을 맞으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왔던 그런 아저씨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렇게 분투하며 사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작년 연말 금년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 창립 30 주년이다 생각할 때 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고 생각하니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싶어 금년 표어를 그렇게 잡았었다. 그 보답의 일환으로 기념 음악회를 7 월에 계획했는데 프로그램을 준비하시는 지휘자께서 내게 이 메일을 보내주시면서 이번 음악회의 주제를 ‘감사와 결단’으로 하시겠다고 하셨다. 어찌 목사의 마음을 그렇게 잘 읽으실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만 30년을 은혜 가운데 지났을까? 그리고 내게만 그런 은혜를 주실까?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도 칼바람을 맞으면서 나아가는 모든 목회자들이 있겠고 이민자의 삶을 살면서 실패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들에게도 나에게 허락하셨던 그런 위안과 축복을 넘치게 하실 줄 확신한다.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